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2화] 새로운 질서 (1)



“아저씨.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응?”
“아까 쫄따구 군바리 아니··· 군인 동생분이 여기 접수하라고. 아니, 여기 대피소 맡아 달라고 했잖아요. 그거요.”
해미도 참 애쓰면서 말한다고 생각한 성현이다.
“글쎄··· 해미 너는 어떻게 하면 좋겠니?”
성현은 뭘 해도 마냥 귀여운 해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연히 여기 먹어야죠. 못된 사람들이 자기만 잘살려고 하는 것보단 아저씨가 모두가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게 좋잖아요?”
순간 해미의 머리를 쓰다듬던 성현의 손이 멈춘다.
해미의 말은 참 직관적이고 명료하다.
때가 덜 탄 동심이 보이는 것을 보이는 대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성현에게 좋은 조언자로서 작은 깨달음을 안겨준다.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어서 등 돌릴 게 아니라 그리 만들고 살면 된다.
매번 틀린 일을 바로잡기보다 처음부터 바른길로 가도록 이끄는 게 어찌 보면 덜 복잡하고, 뒤탈이 적다.
그럴만한 힘도 있고, 위치도 만들어져있다.
조금의 수고로움은 따르겠지만, 그에 상응하는 보상도 있다.
좋아하는 이들과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안심하고, 편한 보금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래··· 해미야. 어찌 될지 모르지만, 네 말도 틀린 게 없다.”
해미의 손을 잡고 성현은 일어섰다.
이미 밤이 늦었지만 당장의 할 일이 떠올랐다.
실망한 듯 돌아서 간 최 상사에게 자신의 뜻도 전해야 하고, 상의할 일도 많다.
또 일반 거주민들은 오늘 있었던 군인들 간 총격전에 모두 놀라고 지금쯤 불안에 떨고 있을 것이었다. 그 불안을 덜어 줘야 했다.

* * *

이튿날.
“박 대령. 그 사람이 책임자가 되고부터는 그나마 좀 살만한 것 같습니다.”
1일 2식 체제는 바뀌어 있었다.
단체 급식이 오전 10시와 오후 4시에 두 번 이루어지던 것이,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했고, 하루에 식권이 한 명당 3장씩 배포되었다.
급식소는 거주지 내에 모두 5개, 한 곳당 800명까지 동시 식사가 가능했다.
“그렇지. 군인들이 사령관으로 부르기도 하더구먼. 그나마 사람 구실은 하는 사람인 것 같으이. 애들 배곯아 하는 거 보고 마음이 쓰였는데 다행이야.”
단체 급식소에 모인 주민들이 식사하며, 그나마 좋아진 배식 사정을 가지고 두런두런 이야기했다.
현재 성현은 대령 계급에 의장 대행으로 알려져 있었다.
최동원 상사와 부대원들의 의견을 듣고, 내부 혼란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성현도 이를 수락해서 대령이 되었다.
“혹시 전 의장이나 그 몹쓸 놈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들으신 거 있으세요?”
“나도 직접 본건 아니지만, 작업반장이 하는 이야기를 들으니 모두 밖으로 쫓겨났다고 하더구먼. 권불십년 이랬는데, 10일을 못간 게지. 자업자득 아니겠나. 이런, 작업시간에 늦겠네. 어서 들고 가세나.”
이미 거주민들 사이에도 소문이 돌아 이전 지도부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음알음 알고 있었다.
쫓겨났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이들도 알지만, 그를 두고 누굴 탓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 * *

I-5 중앙지휘본부 대회의실.
“현재 38,721명 배식 기준으로 약 6개월 동안은 식단 수준의 변동 없이 급식이 가능합니다. 단 지하 재배지를 넓히고 있어 추가적으로 기간 연장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상당히 유동적이긴 하지만, 식물 생장을 고려한다면 1개월 정도의 여유는 될 것으로 판단됩니다.”
최소 7개월은 버틸 식량은 있지만, 그 후가 문제였다.
“대안은 있습니까?”
“당장은··· 없습니다. 지상에서 방법을 찾지 않는 이상 지하에서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근린복지본부장의 보고가 끝이 났다.
공석이던 모든 부서의 장은 관련 부서 일을 가장 잘 아는 차 상위 직급자에게 임시로 맡게 했고, 차후 내부 감사를 통해 정식으로 발령을 내던 새로운 이를 임명하기로 했다.
성현은 회의가 거듭될수록 머리가 지끈거렸다. 괜한 일을 자신이 벌인 건 아닌지 후회가 되기도 했다.
“전력 공급에 차질은 없습니까?”
성현의 질문에 시설관리본부장이 작은 태블릿을 들고 일어났다.
“일별 대피소 전체 전력사용량은 31,000kw정도 이고, 이는 발전시설 총량의 45% 정도입니다. 현재까지 문제는 없습니다. 다만······.”
시설관리본부장이 보고 중에 말끝을 흐렸다.
“다만? 무슨 문제가 있습니까?”
“현재 발전기 일별 중유 소모량이 대략 1,900L이고, 1년 기준으로 70만 리터 정도 됩니다. 하지만 지금 저희가 가진 중유는 59만 리터밖에는 없습니다. 이 상태론 1년을 버티지 못합니다.”
사람이 먹고 싸고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건 소모적이다. 당연히 추가 보급이나 생산이 없다면 끝이 있기 마련이다.
“흠··· 당장 급하진 않더라고 전력 소모를 줄이는 방안을 마련하시고 차주 회의 때까지 보고하세요.”
시설관리본부장은 보고를 끝내고 자리에 앉았다.
“저··· 박 대령님.”
김원길 박사가 성현을 불렀다.
거주지 내 종합병원에 공석이던 원장 자리를 김 박사가 맡게 되었다.
성현의 입김이 일부 작용한 것도 있지만, 그만한 인물이 없기도 했다.
“네. 원장님, 말씀하십시오.”
“당장 혈액이 부족합니다. 현재 입원 중인 환자들은 추가로 수혈이 필요하지는 않지만, 향후 환자가 발생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필요한 혈액형별 수량을 파악해두십시오. 사람을 보내서 확인하고 조치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성현은 김원일 원장을 마지막으로 의자에 기대어서 탁한 숨을 낮게 내뱉었다.
“휴우-. 보고를 마친 분들은 나가서 일들 보도록 하세요.”
보고를 끝낸 각 부서장들이 모두 일어서 인사를 하고 회의장을 떠나갔다.
자리에 남은 이들은 군복을 입은 군인들과 사복을 입은 해미만이 남아있었다.
해미는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는지 꼭 아머위에 일상복을 겹쳐 입고 다녔다.
이제 자신의 전문 분야인 군에 대한 보고와 향후 계획을 논의할 시간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내부의 일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해. 난 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되는 게 맞다.’
스스로를 부족하다 느꼈다.
전문적인 지식도 없고, 그에 적절한 대안과 해결책을 내기에는 부족하다.
전체적인 관리능력이 있는 이가 절실했다.
“아저씨?”
성현이 혼자만의 사색에 잠겨 있자 해미가 조용히 불렀다.
“······음. 계속해라.”
“넵. 보고 드리겠습니다. 특전부사관 124명에 대한 승진 인사 보고입니다. 최동원 상사 중령으로 승진. 이외 상사 3명, 중사 31명, 하사 90명 전원 위관급으로 승진 발령했습니다. 그리고 대령님 보좌관으로 천두식 대위와 강용칠 중위를 인사발령 했습니다. 여기 있습니다.”
보고를 끝낸 최동원 중령이 보고서를 성현에게 내민다.
성현의 지시로 모든 부사관들의 계급을 위관급으로 승진 발령하고, 최동원 상사만 대대 지휘관으로 중령으로 승진 발령시켰다.
상사는 대위로, 중사는 중위로, 하사는 소위 계급으로 변경했다.
경비대 인력을 소화해서 관리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인사 개편이 필요했다.
정상적인 추인을 받은 계급은 아니지만, 어차피 대피소에서 통용하는 만큼 필요한 절차나 승인이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두식과 용칠은 군 지휘관보다 성현의 비서 역을 자처했고, 운전병이나 당번병도 좋으니 그냥 곁에 있게 해 달라 했다. 성현은 이를 들어줬고, 곁에 두기로 한 것이다.
“네. 마지막으로 치안 유지를 대신할 경비대 인력 백 명을 제외한 나머지 잉여 자원은 전투 부대 산하 부대원으로 모두 재편입을 완료했습니다. 제보고는 여기까지입니다.”
“이제부터 조만호 대위는 치안본부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치안 유지에 힘써주시기 바란다.”
“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성현은 미리 언질 해두었던 인사이동을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말하고, 확정 시켰다.
“부대 편재 개편은 끝났고?”
“경비대에서 인계된 병사 357명과 함께 대대 재편 중입니다. 우선 직할 전투 부대 5개 팀 60명은 기존 특전부사관들로 완편 했고, 남은 특전부사관들과 경비대 인원은 통합 재편 중입니다. 내일까지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래, 너라도 좀 알아서 하자. 그리고 이 자리에서 말해둬야 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내정이라기엔 그렇지만, 대피소 내에 일어나는 일을 총괄해줄 이가 필요해. 누구 추천할만한 사람이 있나?”
모두 어느 정도는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알 듯 모를 듯한 회의가 벌써 네 시간째였다. 자신들도 그러할진대 직접 보고를 받고 대안까지 제시해 최종 결정까지 해야 하는 성현에게는 지루함을 넘어 큰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하물며 행정관료 출신도 아닌 성현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챙긴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란 걸 알게 되었다.
“저······.”
성현이 코맹맹이라고 놀렸던, 이제 중위 계급장을 단 김영기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래, 영기야. 그런 사람이 있어?”
“네, 대령님. 근데 저도 긴가민가합니다. 그··· 최연소 부총리 되셨던 분 기억하십니까?”
성현은 김 중위의 말을 듣고 기억을 더듬어 봤다.
“그 최연소 부총리 되시고 1년 만에 경질되셨던 분이 지금 여기 거주지에서 본 거 같지 말입니다.”
성현은 습관처럼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답은 단순했다.
‘능력만 있으면 된다.’
문제가 있는 사람이고, 일 처리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하지 않는다면 끌어 내리는 건 일도 아니다.
“찾아와 봐.”
성현의 명령을 받은 김영기 중위는 나가고 30분도 되지 않아 그를 찾아 데려왔다.

* * *

성현은 안영식 전 부총리와 독대를 하고 있다.
“지내시는 데 불편함은 없습니까?”
“세상이 이 지경인데 뭔들 편하겠습니까? 살아남은 데 감사하며 살아야죠.”
이야기 중에도 그의 표정은 크게 변화가 없었다. 어찌 보면 편한 듯하고 달리 보면 초탈한 듯 보였다.
다만, 눈빛은 아직 살아있었다.
“실례되지 않는다면 왜 부총리직을 그만두게 되신 건지 알고 싶습니다만,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이제 와 숨길 것도 가릴 이유도 없겠죠. 세상이 이리될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부의 방침에 반대했기 때문에 그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태 발생 석 달 전에 경질되었다. 시기가 딱 맞다.’
안영식 전 부총리는 정부가 대피소를 만들고 일부의 국민만 살리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했다.
혼란이 오더라도 최대한의 국민들을 살릴 방법을 찾고자 했지만 이는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예견된 일이기도 했습니다. 혹여 제가 발설할까 봐 정부에서는 저를 가택연금 했고, 외부와 어떤 접촉도 차단했습니다.”
부총리에서 경질이 되고 당일부로 가택연금을 당했다. 사태 전날 이곳 대피소로 이동되었다고 한다.
자신도 여기로 보내진 내막까지는 모르고 대형버스에 그와 가족을 태우고 다른 이들과 함께 보내졌다고 했다.
“근데 왜 절 찾으신 겁니까? 낙향한 사람과 이런 이야기나 나누실 만큼 한가한 분이 아닌 거로 압니다만.”
성현은 생각을 굳혔다.
이 정도면 괜찮다 싶었고, 정 아니다 싶으면 끌어 내리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만일, 자신과 반목하거나 어떤 정치적인 세력을 형성하는 기미가 보이면, 해고하면 되는 그런 바지 의장을 두려한 거다.
성현은 일면식도 없는 이를 그것도 과거 최상위의 위정자나 마찬가지였던 전 총리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는 없었다.
“일을 좀 맡아 주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맡기신다는 건지요?”
안영식 전 부총리의 얼굴에 처음으로 변화가 생겼다.
“여기 대피소 내정 총괄직이고, 새로이 발족할 위원회 의장입니다. 기존 의장과는 달리 많이 축소된 권한과 실권과도 떨어진 자리이지만, 대피소 거주민들을 위해 하실 수 있는 일은 많을 겁니다. 도와주시겠습니까?”
성현의 말에 안영식 전 총리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린다. 작은 대피소의 직책에 마음이 동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피소에 일반 거주민으로 지내면서 느낀바가 많았다. 지금이라면 모두를 위해 좀 더 헌신적으로 일할 수 있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 기회가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그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하시는 건지요?”
“물론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권한 일부를 이양해드린다는 말입니다. 다만, 현재 군정아래 내정위원회를 두는 만큼 제약은 있을 겁니다.”
성현이 구체적인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모자란 이가 아닌 만큼 이해 할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귀찮은 일을 맡기면서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아웃임을 미리 알려 기를 죽일 필요는 없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많이는 못 드리지만, 하루의 말미는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