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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24화

부서지는 마음 1

‘문’이 열렸다.
나타난 것은 높이 약 50m에 지름이 100m가 넘어갈 듯 거대한 방. 그리고 그 방 한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방의 주인이었다.
아름다운 갑옷이었다. 기묘한 문양이 새겨진 푸른 풀 플레이트 아머에, 투구로 가려진 얼굴 사이로 표정을 알 수 없는 흰 가면이 엿보였다. 오른손에는 지면에 꽂힌 거대한 마상창[Lance]이 쥐어져 있었다. 이름은 <환몽의 수호자>. 레벨 27의 정예 등급. 첫 번째 관문을 지키는 수문장이었다.
꿀꺽, 침이 넘어갔다. 앉은 상태에서의 신장만 3m에 육박할 것 같았다. 그 기가 막힌 아름다움은 위압감으로 변해 그들을 짓눌렀다.
압도적인 위압감을 떨쳐 내며 ORP가 방패를 들고 돌진했다. 그 뒷모습에 두려움은 없었다.
“태영아!”
유리의 외침에 ORP는 검을 든 오른손을 올려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보이고는 몬스터에게의 돌진을 이어 나갔다.
ORP는 <환몽의 수호자>에게서 약 5m 정도까지 거리를 좁히고, 하늘을 찌를 기세로 검을 들어 올렸다. 물빛 파동이 반경 5m의 공간으로 퍼져 나가며 <환몽의 수호자>를 덮쳤다. 정해진 범위 내의 적을 도발하는 <가디언>의 스킬, <하울링>이었다.
<환몽의 수호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육중한 랜스가 하늘로 들리더니, 곧 섬광과도 같은 속도로 ORP를 찔렀다. 중형 클래스 몬스터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위력의 일격과 <가디언>의 방패가 충돌하자 굉음과 불꽃이 튀었다.
“이야, 묵직하구만!”
ORP가 신난다는 듯이 소리쳤다. ORP는 방패를 밀어내 <환몽의 수호자>의 랜스를 옆으로 치우고 곧바로 방패를 휘둘렀다. 푸른빛으로 빛나는 방패가 <환몽의 수호자>의 몸통을 거칠게 후려쳤다. <가디언>의 공격 도발 스킬, <실드 스윙>.
“공격 시작!”
유리의 지시가 떨어졌다. 베오, 유진, 현성은 곧바로 몬스터에게로 돌진하고, 유리는 그 즉시 마도서를 펼쳐 마법 시전에 들어갔다. 시전하는 마법 스킬은 <매직 스피어>. 방어력이 높은 상대에게 통용되는, 방어력 관통 속성을 가진 우수한 공격 마법이다.
푸른색의 빛의 창이 탄환과도 같은 속도로 쏘아져 <환몽의 수호자>의 갑옷을 뚫었다. 그 일격을 신호탄 삼아 전위 공격직 팀원들의 공격이 쏟아졌다.
베오의 <광격>, 현성의 <초승달 베기>, 유진의 <스파이럴 피어싱>이 <환몽의 수호자>의 몸에 작렬했다. 그와 동시에 상대의 주의를 자신에게 고정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검을 휘두르고 공격을 막는 ORP가 분전을 펼쳤다.
“수정아! 태영이에게 힐!”
“아…… 알았어!”
ORP의 HP 총량이 50% 미만으로 떨어지자 유리가 재빨리 지시했다. 중형 몬스터까지는 가디언의 <방패 막기>가 통용되었다.
하지만 이 몬스터는 다르다. 공격 한 번, 한 번이 너무 묵직해서 <방패 막기>로는 깔끔하게 방어할 수 없다. ORP의 방어를 뚫고 소량이지만 대미지가 들어오고 있었다.
“HP가…….”
유리는 전율했다. 그만한 맹공을 퍼붓고, 지금도 공격을 멈추지 않는데 HP가 10%밖에 깎이지 않았다. 기사형 몬스터이기에 높은 방어력을 예상하고 방어력 관통을 위주로 공격을 가했는데도 그랬다.
반면, 공격은 묵직하다. 일반 공격 일타, 일타의 대미지가 ORP의 방패 막기가 막을 수 있는 대미지를 상회하고 있다.
‘강하다……!’
강하다는 말은 들었다. 어느 정도로 강할지 충분히 예상하고 이곳에 왔다. 하지만 현실로 맞닥뜨렸을 때의 위력은 차원이 달랐다. 마상창을 종횡무진 휘두르고 찌르는 저 수호자 앞에서 자신들의 공격이 과연 대미지를 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환몽의 수호자>의 마상창에 고속으로 회전하는 돌풍이 감겼다. 명백한 스킬 공격. 마치 <스피어맨>의 <스파이럴 피어싱>을 연상시키는 그 공격이 ORP의 방패에 작렬했다.
콰앙!
굉음과 함께 ORP의 몸이 약 3m 정도 뒤로 밀렸다. 방어했는데도 총 HP의 15%가 날아갔다. 다급해진 유리가 외쳤다.
“수정아! 힐!”
“하…… 하고 있어!”
황금빛이 ORP의 몸을 감싸더니, 곧 HP가 만전의 상태로 회복되었다. ORP가 큰 소리로 감사를 표하고는 다시 몬스터에게로 뛰어들었다.
유리는 그 든든한 뒷모습을 보며 마법 시전을 준비했다. 이번엔 위력만을 고려한 스킬이다. 작열하는 폭염의 광선을 발사하는 마법, <블레이즈 빔>. 시뻘겋다 못해 검은빛으로까지 보이는 작열의 광선이 몬스터의 몸에 직격했다.
“칫……!”
이 일격으로 깎인 HP는 고작 1%를 조금 넘는다. 어지간한 중형 클래스 몬스터조차 단 일격으로 총 HP의 20%는 날려 버릴 수 있는 위력의 마법이다. 그런데도 고작 이 정도. 정말 상식이 통하지 않는 수준의 방어력과 HP였다.
유리의 이가 으득, 갈렸다. 하지만 상대도 완전한 철벽은 아니다. 끊임없는 공격으로 HP는 조금씩 깎이고 있다. 현재 깎인 HP는 약 15%. 이대로 누적시켜 가면 된다.
적의 머리에 낙뢰를 내리꽂는 <라이트닝 볼트>, 직선상의 번개를 발사하여 주변 적에게 전이시키는 <체인 라이트닝>, 하늘에서 빛의 화살을 소환해 내리꽂는 <창공의 화살>…….
유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법 스킬을 죄다 쏟아부었다.
베오도, 유진도, 현성도 자신이 가진 밑천까지 전부 몬스터에게 쏟아부었다. 그렇게 약 15분이 지났다. 몬스터의 잔존 HP는 50%가 되었다.
「이곳은 지나갈 수 없다. 침입자들이여…….」
<환몽의 수호자>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울렸다. 무감정한 살의가 느껴지는,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다.
<환몽의 수호자>는 그 자리에서 도약하여 크게 뒤로 물러났다. 약 10m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환몽의 수호자>는 자신의 무기인 마상창을 뒤쪽으로 던졌다.
그리고 그 직후, 천장에서 조그마한 구멍이 열리더니, 길이만 6m에 달하는 거대한 장창이 떨어져 <환몽의 수호자> 옆에 꽂혔다. 장창을 손에 쥔 순간, <환몽의 수호자>의 몸을 지키던 중장갑의 대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남은 것은 팔과 다리 부분을 보호하는 보호갑과 견갑, 그리고 투구뿐이었다. HP 감소에 따른 패턴 변경이다.
“페이즈 2인가…….”
ORP가 중얼거렸다. 게임에서 네임드나 보스 몬스터들은 HP가 줄어들면 패턴이 변경되는 경우가 많고, 모습까지 변화되는 경우도 있다. <환몽의 수호자>는 그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몬스터인 듯했다.
이전보다야 빨라지겠지만, 중장갑들이 떨어져 나간 만큼 방어력은 낮아졌을 것이다. 까다로울 뿐,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을 거라고 그는 판단했다.
외견만큼이나 자세도 달라졌다. <환몽의 수호자>는 육중한 바람 소리를 내며 창을 이리저리 휘둘러 보더니, 자세를 잡았다.
창날을 앞으로 겨누고 몸을 비스듬하게 세운, 정석적인 창을 잡는 자세.
「신의 이름으로, 침입자를 참할지니…….」
<환몽의 수호자>는 창을 들어 올렸다. 마치 기둥과도 같은 그 거대한 창이 하늘을 떠받칠 듯이 올라가더니, 곧 중량을 이용한 내려치기가 작렬했다. ORP는 그 묵직한 일격을 방패로 받아냈다. 마상창을 들고 있을 때보다도 공격이 가볍다. ORP는 원시인 같은 얼굴에 난폭한 미소를 지었다.
“받아낼 만하네!”
ORP는 창을 튕겨내고는 <환몽의 수호자>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순간, 다시금 수호자의 창이 코앞까지 쇄도해 있었다. ORP는 재빨리 방패를 들어 공격을 가드했다. 폭풍과도 같은 찌르기 연격이 이어졌다.
“큭……!”
총 10연격에 달하는 찌르기 연격이 끝나자 <환몽의 수호자>가 창을 거둬들였다. ORP는 그 틈을 타 <실드 스윙>, <슬래시> 등의 공격을 그 몸에 꽂아 넣었다.
현성과 유진을 비롯한 다른 팀원들도 <환몽의 수호자>의 몸에 공격을 가했다. 1페이즈 때보다도 수월하게 HP가 깎여 나갔다.
“뭐야, 이거? 생각보다 쉽게 이기는 거 아냐?”
“그런 말 하지 마. 영화나 만화에서 그런 말은 패배 플래그잖아.”
까불거리는 수정의 말에 유리가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수정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뭘, 여기는 영화나 만화도 아니잖아.”
“충분히 만화나 영화 같은 상황이라고 생각하는데.”
두 소녀는 그렇게 여유롭게 만담을 나누며 전투에 집중했다. 확실히 1페이즈 때보다 수월하다. 방어력이 낮아져 대미지가 수월하게 들어가고, 공격력이 낮아져 ORP가 방어하기 더욱 용이해졌다. 이대로라면 충분히 수월하게 이길 수 있다.
‘하지만 방심하면 안 되지…….’
유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제발, 제발 이대로 아무 일 없기를…….
유리가 마음속으로 그러한 작은 소망을 기도하는 순간에도, 전장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었다.

* * *

후웅―
바람 소리를 내며 <환몽의 수호자>의 장창이 휘둘러졌다. ORP는 그것을 받아내며 다시금 날아오는 10연격 고속 찌르기를 대비하여 방패 뒤로 몸을 숨겼다. 고속 찌르기 스킬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몬스터는 오로지 ORP에게만 집중한다. 그 틈을 타서 근접과 원거리로부터 공격이 쏟아졌다.
초고속 찌르기 연격을 마친 수호자는 다시 창을 높게 들어 올렸다. 연속 찌르기 다음에는 빈틈이 생긴다. 그것을 떠올린 ORP가 공세 자세로 들어갔다. 하지만 현성에게는 그 모습이 다르게 보였다.
“자세가…….”
자세가 아까와는 다르다. 단순히 창을 거둬들이는 자세가 아니다. 현성의 직감이 날카롭게 반응했다. 머리보다도 먼저 몸이 반응했다.
검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다음 순간, 수호자의 창이 푸른색 물과 같은 물질을 머금으며 주위를 휩쓸었다. 범위는 창이 닿는 반경 4m 이내의 모든 영역. 타깃은 범위 내에 존재하는 것 전체.
“커흑……!”
현성의 입에서 신음이 토해졌다. 방어를 뚫고 총 HP의 30%에 달하는 대미지가 들어왔다. 아예 방어 자세를 취하지 못한 유진은 총 HP의 절반 이상을, 베오는 약 40%가량을 잃은 상태였다. 피해를 입은 것은 ORP도 마찬가지였다. 두꺼운 방어를 뚫고 충격이 뼛속까지 전해졌다.
단순히 대미지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적대치가 최대인 ORP를 제외한 다른 인원에게도 가해진 공격이라는 점이었다.
“수정아! 전체 회복!”
“하…… 하고 있어!”
다급히 소리친 유리의 말에 수정이 반사적으로 행동했다. 하지만 역시 느리다. 수정의 반응속도가 너무 느리기에 옆에 유리가 붙어서 일일이 지시해 주고는 있지만, 확실히 느리다. 무엇보다 유리는 힐러가 아니다. 공격에 집중하면서 파티원 전원의 HP를 체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의 연계가 붕괴할 수도 있다. 팀원들의 HP가 빠르게 차오르는 것을 확인하면서 유리는 <환몽의 수호자>를 주시했다. 놈은 방금 전의 공격으로도 모자라다는 듯 창을 높이 들어 올려 마치 헬리콥터의 프로펠러처럼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태영아! 막아!”
“말 안 해도 아우, 누님!”
ORP는 쾌활하게 외치며 방패를 들어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장창을 방어했다. 이번 일격은 무거웠다. 방패를 뚫고 들어오는 충격이 몸을 저릿저릿하게 울렸다. 하지만 받아낼 만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환몽의 수호자>가 창을 거둬들이고는 곧바로 몸을 오른쪽으로 돌렸다.
“뭣……!”
그곳에 있는 것은 유진과 현성. <환몽의 수호자>는 그와 동시에 푸른 액체를 머금은 창을 크게 휘둘렀다. 마치 해일이 몰려오듯 푸른 파도가 현성과 유진이 있는 방향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이번엔 방어조차 할 수 없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적대치가 가장 높은 ORP를 놔두고 바로 옆에 있는 상대에게 광범위 공격을 하리라고는.
공격의 여파는 컸다. 유진과 현성은 회복 중인 데도 불구하고 총 HP의 60%가량을 잃으며 바닥에 나동그라졌고, 공격 범위에 포함되어 있던 ORP 역시 이를 악물었다. 방어가 불가능하다. 방패를 세웠는데도 대미지가 그대로 들어왔다. 총 HP의 40% 가까이가 증발했다.
“큭……!”
ORP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유리가 다급히 소리쳤다.
“수정아! 전체 회복!”
“쿨타임 돌아가는 중이야, 언니!”
수정은 다급히 말하며 ORP에게 먼저 회복 주문을 걸었다. 그는 파티의 벽, 결코 무너져서는 안 되는 존재다. 위기 상황 속에서 수정의 판단도 이제까지 한 번도 도달한 적이 없는 수준까지 날카로워져 있었다.
<환몽의 수호자>가 다음 공격을 준비하는 듯 창을 높이 들었다. 푸른 불꽃이 <환몽의 수호자>를 중심으로 반경 7m 정도 크기의 원을 그렸다.
공격의 전조 동작. 유진과 베오, ORP는 반사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현성은 달랐다. 현성의 시선은 수정과 유리에게 닿아 있었다.
근거는 없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공격. 그리고 저들에게 공격이 향할 이유도 사실상 부족하다. 설령 이번 공격이 범위 공격이라도 가장 적대치가 높은 ORP를 중심으로 발해질 것이다. 하지만 현성의 직감이 외치고 있었다. 위험한 것은 자신이 아니라…….
“원 안으로 들어와, 누나!”
현성이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질렀다. 직감이, 경험이 머릿속에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공격의 대상은 원의 안쪽이 아니라고, 끊임없이 자신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유리의 시선이 돌아갔다. 절박한 눈. 그 눈빛을 본 그녀는 그의 직감을 믿고 수정의 손목을 잡아 원 안쪽을 향해 달렸다.
그 순간, <환몽의 수호자>가 창을 땅으로 내려찍었다. 원을 기준으로 그 바깥쪽을 거친 파도가 몰려와 범위 내의 모든 것을 휩쓸며 짓이겨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