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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극의 탑
23화

첫 번째 관문 4

발걸음이 멈췄다. 이제까지 그 누구의 침범도 허락하지 않은 바벨탑의 첫 번째 관문. 그것이 지금 그들의 눈앞에 있었다.
처음 왔을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처음 보았을 때에는 관문의 규모에 놀랄 뿐이었다면, 지금은 그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에 압도되고 있었다. 마치 ‘이곳에 들어올 것이라면 목숨을 걸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장 뒤에서 수정과 함께 걷고 있던 유리가 앞으로 나왔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팀원들을 바라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보여주었다.
“도착했으니까, 좀 쉬었다 들어가자. 다들 앉아서 쉬어. 대신 물약 먹지 말고, 자동 회복으로.”
유리의 말에 중갑을 걸친 베오와 ORP가 구석으로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관문으로 오는 길목에는 중형 클래스 몬스터가 다수 포진해 있어 그들을 뚫고 여기까지 오는 데에는 적지 않은 체력 소모가 요구된다.
때문에 HP와 MP는 물론, ST(스태미나)도 많이 깎여 있었다.
‘관리자’가 그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관문 앞을 안전지대처럼 몬스터가 나오지 않게 설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수정은 베오의 옆으로 다가가서 살짝 앉았다. 투구를 벗고 수통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베오의 옆에서 수정은 장난기 가득한 소녀의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어휴, 이 땀 봐. 긴장되나 보네? 걱정 마∼ 내가 뒤에서 회복 팍팍 해줄 테니까.”
“……굉장히 믿음이 안 가는데. 네 힐 기다리느니 내가 물약 먹고 말지.”
“우와, 너무하네. 진짜 힐 해주지 말까 보다.”
사실 베오가 땀을 흘리는 이유는 긴장돼서라기보다는 그저 무거운 갑옷과 무기를 착용한 채 걸어 다닌 탓이지만, 베오는 그 사실을 굳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수정도 알고 있을 사실이었다.
“힐 해준 적은 있냐? 네 힐 받아본 기억이 없는데?”
“너한테 특별히 자주 해주고 있거든? 네가 하도 앞에서 얻어터지니까 내가 힘들잖아.”
“그럼 <버서커>가 앞에서 공격하지, 뭐 할버드라도 던질까?”
베오가 할버드 던지는 시늉을 하면서 말하자 수정이 피식 웃었다. 이 둘이 만나면 항상 이랬다. 서로를 깎아내리고, 욕하고, 싸우면서도 유리나 현성을 놀릴 때는 이만한 콤비가 없다는 듯이 일심동체로 움직였다.
지금도 긴장을 풀려고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수정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조금은 다르게 행동하고 싶었다.
하고 싶은 말 대신 수정은 손가락으로 베오의 통통한 볼을 콕콕 찔렀다. 작은 눈에 통통한 얼굴이 묘하게 곰돌이를 닮은 듯싶었다. 절로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오늘은 몸 좀 사려, 곰탱아. 앞에서 공격만 하다가 얻어터지지 말고. 적당적당히 하라고.”
“……얘 갑자기 왜 이래? 너, 뭐 잘못 먹었냐?”
“……걱정해 줘도 지랄이야, 이 망할 곰탱이.”
수정은 뾰로통해져서는 투덜거렸다. 이러고 싶던 게 아니었다. 조금은 따뜻하게 격려를 해주고, 그리고 격려를 받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으로는 뭐 어떠랴 싶었다. 자신과 베오는 이게 가장 자연스럽다. 닭살 돋는 격려 한마디보다 이렇게 티격태격하는 시간이 훨씬 더 자연스럽고, 큰 힘을 주는 격려였다.
다시 티격태격하기 시작한 둘을 보며 벽에 몸을 기대앉아 쉬고 있던 현성에게 유리가 다가왔다.
“좀 앉아도 되지?”
“응? 응.”
현성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그의 허락을 받을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리는 사뿐하게 옆에 앉아 현성이 바라보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쿡 웃었다.
“쟤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싸우네.”
“뭐, 귀엽잖아.”
현성의 말에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확실히 저 둘은 저게 자연스럽다. 그녀가 베오와 수정을 처음 만났을 때도, 2인 파티로 콤비를 맺은 주제에 얼굴만 마주쳤다 하면 싸워 대는 상태였다.
처음에는 말리기도 했지만, 언제부턴가 저게 저 아이들의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고는 그저 웃으며 구경하게 되었다.
유리는 힐끔 현성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현성은 연신 수통의 물을 마셔 대고 있었다. 아마 긴장하고 있겠지. 유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서 현성의 머리를 부드럽게 톡톡 두드렸다.
“너무 초조해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초조해하기는 무슨…….”
현성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다시 물을 한 모금 목구멍 너머로 넘겼다. 목이 타들어 가는 이유를 유리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유리는 앉은 상태에서도 자신의 머리보다 10㎝는 높은 현성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내가 네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게 도와줄게.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도록, 네가 동생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대신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줄래?”
현성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유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말을 이었다.
“조금만 여유를 가져.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지금도…… 쉴 틈 없이 달려왔잖아. 원래 세계에서도 숨 돌릴 틈도 없이 살아와 놓고, 이 세계에서조차 그렇게 필사적으로 달려가면…… 힘들잖아. 슬프잖아. 지치면 멈춰 서서 숨을 골라도 좋아. 더 이상 못 뛰겠다 싶으면 걸어도 돼. 가끔은 뒤도 돌아보고, 주변을 둘러보고, 그러면서…… 조금만 여유를 가져줘. 그게 내 부탁이야.”
이 망가져 버린 청년이 조금은 편안했으면 좋겠다. 자신의 미래를, 삶을 포기한 남자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조금은, 이기적이 되기를 원한다. 조금이라도……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유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겨우 일주일, 하지만 그 일주일 동안 그는 유리에게 다른 팀원들과 같은 가족이 되었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녀에게, 새로 생긴 가족이었다. 그렇기에 그의 소망을 자신의 것처럼 생각할 수 있었다. 그와 동시에 그의 행복을 빌 수 있었다.
현성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 스스로가 잘 알고 있었다.
여유를 가지면 자신과 동생, 둘 다 미래를 얻을 수 없다. 조금이라도 뛰는 다리를 멈춘다면, 끝도 없는 수렁에 빠질 뿐이었다.
자신의 삶은 개미지옥에 빠진 개미였다. 자신이 그 개미지옥에서 빠져나오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다만, 동생만큼은, 자신의 다리가 움직이는 한 달려서, 개미지옥에서 밀어내, 밖으로 빼내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해 왔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미소 짓는 유리를 보면, 자신도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의 발목을 잡아당기는 개미지옥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성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응. 그럴게.”
“응, 착해.”
유리는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듯 현성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쯤이면 모두들 떨어진 체력을 보충하고, 기타 수치도 최상으로 회복되었을 것이다.
유리의 기립을 신호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유리를 중심으로 모였다. <가디언>인 ORP가 가장 앞으로, <스피어맨> 유진, <글래디에이터> 현성, <버서커> 베오가 그 뒤에, 그리고 가장 후미에 <프리스트> 수정이 위치하고, 유리는 리더로서 ORP의 옆에 섰다. 문을 여는 것은 리더인 그녀의 역할이었다.
“다들 알지? 정석적으로 싸우고, 몸을 사리는 거야. 수정이는 다른 건 다 필요 없어. HP가 60% 미만으로 떨어지면 무조건 회복부터 걸어. 모든 버프는 쿨타임 돌아가는 대로 걸고. 유진이, 현성이, 베오는 몬스터가 강한 공격을 한다 싶으면 무조건 뒤로 빠지고. 알았지?”
“거, 걱정도 많소, 누님. 어련히 알아서 다 잘할 거요.”
ORP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그 강한 믿음을 에너지 삼아 유리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런 후에 가녀린 두 팔을 앞으로 뻗어 관문에 손을 갖다 대고는 밀었다.
철커엉!
거친 금속음과 함께 커다란 철문이 좌우로 움직여, 그 내부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