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 쌍극의 탑
25화

부서지는 마음 2

성난 파도가 닥쳐온다. 방의 가장자리로부터 빠르게 다가오는 파도는 살기 위해 다리 근력의 한계치를 넘는 속도로 달음박질하는 수정과 유리를 집어삼키기 위해 입을 벌리고 혀를 날름거렸다.
유리와 수정의 다리가 혹사의 증거로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늦는다. 밀려오는 파도의 속도를 고려할 때, 2초 이내에 두 사람을 덮칠 것이다.
하지만 원형 경계선까지는 아직 20m 넘게 남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늦다.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가 없다.
체념이 몸을 묶기 시작했다. 남은 거리는 15m가량. 이제 1초도 남지 않았다. 부서진 것처럼 다리가 아파왔다.
턱까지 차오른 죽음의 예감에 유리는 몸서리쳤다. 죽고 싶지 않다. 수정을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살아날 방도는…….
“이 누님, 또 까먹었구만!”
드물게 신경질적인 ORP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닿기도 전에 하얗게 빛나는 사슬 두 줄기가 뻗어와 유리와 수정의 몸을 묶었다.
그다음 순간, 두 사람의 몸은 허공을 날고 있었다. 그녀들의 몸을 묶은 사슬이 원의 안쪽 방향, 정확히는 ORP에게로 강하게 끌어당겨지고 있는 것이다.
최대 여섯 명까지 타깃을 포박하여 자신의 앞으로 끌고 오는 <가디언>의 도발 겸 끌격 스킬, <하푼 체인>. 순식간에 ORP의 눈앞까지 끌려온 유리와 수정은 그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꺄악!”
“악!”
넘어진 그 둘의 뒤로 사람 따위는 손쉽게 으스러뜨릴 기세로 몰려오던 파도는 경계선이던 푸른 화염의 원에 집어삼켜져 종적을 감추었다.
저마다 다른 비명 소리를 내며 넘어진 그녀들 앞에서 ORP가 하푼 체인을 풀고서 몸을 숙여 시야를 맞추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그녀들에게 씨익, 순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나한테 빚진 거유, 누님.”
“그래그래, 바나나 사 줄게.”
“육회.”
“……콜.”
검지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동그라미 모양을 만들어 보이며 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겪은 죽음의 위기가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다. 긴장으로 인해 풀려 버린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련하리만큼 연약해 보이는 다리가 후들거리며 몸을 지탱하고, 동시에 수정마저도 부축해 일어났다. 어느 정도 침착함을 되찾은 유리와 달리 수정은 여전히 패닉에 빠진 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수정아, 수정아?”
유리가 흔들어 깨웠지만, 수정은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처음으로 겪는 죽음의 그림자에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져 버린 것이다.
그런 순간에도 계속해서 강철과 강철이 부딪히는 소리는 들려오고 있었다. 수정과 유리를 죽음의 위기에 몰아넣은 파도 공격을 끝낸 뒤, 다시 접근해 온 <환몽의 수호자>의 공격을 ORP가 계속해서 가드하고 있는 소리였다.
시간을 끌수록 위험했다. 하지만 수정은 정신을 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베오가 철컹거리는 갑옷 소리를 울리면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강철로 덮인 손을 내밀어 수정의 머리에 손을 툭, 올려놓았다.
수정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초점이 맞지 않는 두 눈에 눈물까지 고여 있었다. 평소의 장난기나 활기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녀의 눈망울을 보고 베오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뭐 하냐?”
“나…… 죽을…… 뻔…….”
“와, 너 우니까 진짜 못생겼다. 어떻게 하냐, 그렇게 못생겨서.”
“……뭐?”
위기감, 긴장감, 혹은 두려움…… 그런 감정 따위는 베오의 목소리에서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이 상황을 평상시와 같이 평온한 상황이라고 착각하게 될 정도로 베오의 목소리는 평소와 똑같았다. 똑같이 짓궂고, 똑같이 장난스러웠다.
“안 못생겼거든! 넌 진짜 이런 상황에서……!”
“멀쩡하네.”
“……어?”
울컥해서 무심코 반발한 수정에게, 베오의 평상시와 똑같은 말이 꽂혔다. 깜짝 놀란 수정은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았다. 평온했다. 방금 전까지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혀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던 자신은 어디 갔나 싶었다.
베오는 킥, 웃고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ORP가 기를 쓰며 방어하고 있는 장면을 가리켰다.
“하여간 엄살 심하다니까. 멀쩡하면 저 형 힐이나 해줘. 슬슬 간당간당해 보인다.”
“아…… 응…….”
수정은 가까스로 대답했다. 수정은 전위로 복귀하는 베오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비록 짓궂은 농담이라도, 장난이라도, 그의 그런 말은 그녀의 마음이 부정적인 생각에 붙잡히지 않도록 해주었다.
수정은 ‘읏샤!’ 힘찬 기합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 광범위한 파도 공격의 영향으로 관문의 방 곳곳에 남은 물이 이쪽까지 흘러왔는지 발이 찰박거렸다. 주저앉아 있던 터라 엉덩이가 축축했지만,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석장을 들어 올린 수정은 <환몽의 수호자>의 맹공을 받아내고 있는 ORP 쪽으로 손을 뻗었다. 더는 떨리지 않는다. 평온하게 가라앉은 마음속으로 따스함이 가득 번져 갔다.
“헤∼ 눈빛이 뜨거운데?”
“까…… 깜짝아! 아, 언니!”
어느새 뒤에 다가와 능글맞은 표정을 짓는 유리에게 수정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유리는 평소에 그녀의 팀원들에게는 잘 보여주지 않는 짓궂은, 하지만 더없이 예쁜 미소를 보여주며 수정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그건가? 싸우다가 사랑이 싹텄다는?”
“저 곰탱이랑 무슨……. 그런 거 아니거든!”
수정은 과하게 투덜대며 다시 ORP의 몸에 회복 주문을 걸어주고는 슬쩍 베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할버드를 휘두르는 뒷모습을 보며 수정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런 후, 그 등을 향해서 살며시, 원호를 위한 회복 주문을 걸었다.

* * *

“우리 힐러 아가씨가 다시 일어났구만!”
“하여간 손이 많이 간다니까.”
연신 장창을 받아내며 ORP가 호쾌하게 외치는 말에 베오가 투덜거렸다. ORP는 가디언의 돌진 스킬, <실드 러시>로 <환몽의 수호자>를 약 5m 정도 튕겨냈다. 그 옆으로 베오가 다가와 할버드를 겨누었다. 거대한 덩치를 지닌 <환몽의 수호자>를 보며 베오가 낮게 중얼거렸다.
“이제 25%…… 꽤 많이 깎았네.”
“그러게. 이대로라면…….”
ORP는 방패를 들며 그 희망적인 생각에 동참했다. 상당히 불안한 상황이었다. 방금도 전선 붕괴의 기미가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가능성이 꽤나 보인다. 그 희망적인 관측을 믿으며 그는 다시 <환몽의 수호자>에게로 돌진했다.
<환몽의 수호자>가 허공에 푸른 원을 그리며 창을 휘둘렀다. 정확히 두 시 방향에서부터 날아오는 그것을 방패로 튕겨내며 ORP는 공격 재개의 신호탄을 울렸다. 유진의 <스파이럴 피어싱>이, 현성의 <일섬>이, 베오의 <광격>이 몬스터의 몸에 꽂혀갔다.
“남은 HP 20%! 이제 얼마 안 남았다!”
현성의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드디어 시야에 보이는 <환몽의 수호자>의 HP가 붉게 물들어 빈사에 가까운 상태에 도달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광분한 <환몽의 수호자>가 창을 휘둘렀다. 첫 타깃은 유진. 거대한 창이 섬광처럼 찔러졌고, 예상치 못한 공격에 유진은 재빨리 창을 세워 공격을 흘려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늦은 타이밍 탓에 굴절이 덜 된 거대한 창날은 유진의 어깻죽지를 꿰뚫었다.
그 직후, <환몽의 수호자>의 거창은 다시 허공을 가르며 베오를 향해 날아갔다. 그에 즉각 대응하지 못해 무방비였던 베오의 몸통을 창이 깊게 갈랐다. 다시 내질러진 창은 현성의 허벅다리를 꿰뚫었다.
그 후로도 연속적으로 이어진 공격에 표적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ORP를, 베오를, 현성을 무작위로 공격해 갔다. 그때마다 수정의 회복 스킬이 간신히 타이밍을 맞춰 들어갔다.
수정이든, 베오든, 현성이든, ORP든…… 어느 누구라도 한순간만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면 바로 전선이 붕괴되는,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아슬아슬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어딜 보냐, 이 자식아!”
ORP가 포효하며 방패를 휘둘러 <환몽의 수호자>를 후려쳤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방금 전, <환몽의 수호자>의 창날이 유리를 겨눈 것이다. 로브를 걸친 유리는 이 일격을 절대로 버텨낼 수 없다. 회복하기도 전에 모든 HP가 날아가 버린다.
그렇기에 ORP는 적의 공격 궤도에 들어가는 것을 감수하며 그 품으로 파고들어 필사적으로 방패를 휘둘렀다. <실드 스윙>을 시전하느라 허용한 일격 탓에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제기랄…… 이 자식, 갑자기 왜 이렇게 미쳐 날뛰는 거야!”
ORP의 입에서 평소에는 듣기 힘든 불평이 쏟아져 나왔다. 도통 적대치가 유지되지 않는다. 이 상태에서 공격력 높은 스킬 공격이 현성이나 유진을 표적으로 삼기라도 한다면 그 둘은 버틸 수 없다.
<환몽의 수호자>에게 회전하는 기류가 모였다. 창을 뒤쪽으로 빼고, 찌를 준비를 하는 자세. <스피어맨>의 스킬, <스파이럴 피어싱>과 비슷한 자세다.
노려지는 표적이 누구인지 확인한 ORP의 이가 뿌득, 갈렸다. 명백하게 현성을 노리고 있었다. ORP는 땅을 박찼다. 몬스터의 회전하는 창이 현성에게로 닥쳐들고, ORP는 온몸을 날려 그 사이로 끼어들었다.
떠엉!
강렬한 불꽃과 굉음을 흩날리며 거창과 방패가 충돌했다. 방패로 막았음에도 그 위력을 다 죽이지 못하고 지지직, 발이 땅에 끌리며 뒤로 밀려났다.
“큭……?!”
생각보다 날카로운 일격에 ORP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모습만큼 그 특성도 <스피어맨>의 <스파이럴 피어싱>과 비슷한 것인지, 방어를 관통하고 약 40%에 해당하는 HP를 앗아갔다. 그 모습을 본 유리가 옆에 있는 수정에게 급히 말했다.
“수정아, 힐!”
“알았어!”
수정이 석장으로 ORP를 겨누었다. 아직 MP는 남아 있다. 준비하는 회복 주문은 단일 회복 주문인 <치유의 손길>. 마력을 부어넣어 스킬을 사용하려던 그 순간…….
푹―
무언가가 수정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어?”
날카로운 물이었다. 그렇게밖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신경이 쓰일 정도로 바닥에 고여 있던 물웅덩이에서 날카로운 물의 송곳이 튀어나와 수정의 가슴팍을 뚫은 것이다. 이어 주변에서도 마찬가지로 물의 송곳이 뻗어져 나와 수정의 몸을 꿰뚫었다.
“이수정!”
다들 멍하니 있는 이 상황에서 베오만이 땅을 박찼다. 잡생각 같은 것은 머리에서 지워졌다. 오로지 더 빨리 달리지 않는 두 다리에 더욱 채찍질을 하며 내달릴 뿐이었다. 다리를 혹사시키는 것에 가까울 정도로 무리한 도약을 펼친 베오는 수정의 몸을 꿰뚫은 물의 송곳들을 향해 육중한 할버드를 휘둘렀다.
거친 그 일격에 수정의 몸을 관통한 물의 송곳들은 산산이 흩어져서 다시금 수없이 많은 물방울로 돌아갔다. 베오는 급히 수정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는 방어력이 낮은, 로브를 입는 <프리스트>. 약한 공격이라도 그녀에게는 치명타가 될 수 있다.
“야, 괜찮냐?”
“난 괜찮아. 그보다!”
수정은 급히 석장을 ORP를 향해 뻗었다. 그러고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오빠! 뒤에!”
어느새 팀원들 모두의 주의가 수정에게 쏠려 있었다. 그것은 ORP도 예외는 아니었다. 몬스터를 등 뒤에 두고 방심했다는 사실을, ORP는 그녀의 외침으로 깨달았다.
“아차!”
ORP는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환몽의 수호자>의 창이 ORP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방심했……!”
ORP가 신음을 토했다. HP 감소량 자체는 적다. 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푸른색의 반투명한 사슬이 창에 찔린 ORP의 몸을 구속하고 있었다.
석장을 뻗은 그 상태로 수정이 급히 주문을 외웠다. 영창하는 회복 주문은 <치유의 손길>. 지금은 빨리 회복시키는 것이 먼저다. 즉발식, 개인 회복 주문이 가장 효율이 좋다.
“……어?”
하지만 스킬이 발동되지 않는다. 그저 푸른 마력의 찌꺼기가 빛의 가루가 되어 투두둑, 석장에서 떨어질 뿐이었다.
“수정아?”
“MP가…….”
없다. 20%가 넘게 남아 있던 그녀의 MP가 지금은 단 한 줌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럴 수는 없다. 그녀에게 총 MP의 20%씩이나 소모하는 스킬 같은 것은 없고, 있다 해도 그런 것을 사용한 기억이…….
“설마…….”
수정의 머릿속에 하나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자신의 몸을 꿰뚫은 그 물의 송곳. 대여섯 번의 공격으로도 <프리스트>인 자신의 HP조차 전부 깎지 못한, 너무나도 약했던 그 공격. 만약 그 공격의 목적이 HP가 아니라 MP였다면…….
그렇다면…… 지금 자신은 팀원들을 회복시킬 수단이 없다.
“안 돼!”
수정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환몽의 수호자>는 ORP를 꿰뚫은 그대로 창을 붕붕 휘두르다가 수정이 있는 방향으로 창을 휘둘렀다. 창날 끝에 꿰여 있던 ORP는 그 반동으로 인해 날아가고, 곧 수정의 옆을 지나쳐 반대편 벽에 굉음을 울리며 충돌했다.
그 충격으로 인해 ORP의 HP가 뚝 깎여 나갔다. 이제 남은 HP는 10%. 단 한 번이라도 더 공격을 허용한다면 ORP는 이 세계에서 영원히 소멸할 것이다.
“태영아!”
비명을 지르듯 유리가 외쳤다. 하지만 ORP는 여전히 반투명한 푸른 사슬에 묶인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런 그를 조준하며 <환몽의 수호자>가 창을 들어 올렸다. 몸을 낮추고 창을 든 손을 뒤로 뺀, 돌진 준비 자세.
“막아!”
유리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파티 회복의 핵심인 <프리스트>의 MP가 다 떨어진 지금, 즉각적인 회복 수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빈사에 빠진 ORP가 공격을 허용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제기랄!”
현성의 발이 땅을 박찼다. 준비하는 스킬은 <힘줄 가르기> 피격된 부위에 부위 손실과 출혈 상태 이상을 일으키는 스킬. 이것으로 <환몽의 수호자>의 다리를 끊어서 돌진 스킬을 취소시켜야 한다.
현성의 검이 앞으로 휘둘러졌다. 그 일격이 <환몽의 수호자>의 다리를 가르기 직전, <환몽의 수호자>의 몸이 포탄처럼 쏘아져 나갔다.
늦었다. 현성의 검은 그저 허공만을 무의미하게 갈랐다. 검을 내리그은 자세 그대로 현성의 시선만이 허무하게 <환몽의 수호자> 뒤를 쫓았다. 커다란 몬스터의 신체는 강렬한 풍압을 일으키며 수정을 스쳐 지나가고…….
푹.
ORP의 심장을, 그 거대한 창으로 꿰뚫었다.
정적이 흘렀다. 몸을 묶은 푸른 사슬이 풀리며 ORP는 고개를 움직여 자신의 심장을 관통한 장창을 내려다보았다. 바위로 만들어진 벽마저도 뚫고 들어간 그 거대한 창을 ORP는 떨리는 손으로 어루만졌다.
시야 하단, HP 바의 붉은 막대가 왼쪽으로 쭈욱 줄어드는 것을 보며 ORP는 힘겨운 신음을 토했다. HP가 0이 되자 ORP는 고개를 들어 팀원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가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미소를 지으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 아…… 이렇게 됐구만……. 곤란한데…….”
평소와 똑같은, 너무나도 태연한 목소리.
그 목소리가 되레 그를 보고 있는 모두의 현실감을 어지럽혔다. ORP는 팀원들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겁에 질린 얼굴로, 혹은 뇌가 상황을 인식하지 못해 멍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팀원들의 모습이 보였다.
ORP는 힘이 빠져 덜덜 떨리는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죽는 게 무섭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자신이 죽는 것은 이미 정해진 사실이다. 몇 초 후에는 어차피 찾아올 죽음을 두려워할 시간이, 그는 아까웠다. 지금은 그것보다도 해야 할 말이 있었다.
ORP는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손으로 모두를 향해 가라고, 손목을 까딱거리며 손짓했다.
“도망 가슈…… 죽지 말고…… 꼭 도망쳐서…… 살아…….”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ORP의 몸이 회색으로 변하며 굳어갔다.
목이 막혀온다. 몸은 굳어간다.
이 말만은 끝마치고 싶었는데…….
뭔가 유언을 남기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저……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따를 것 같아 무서울 뿐. 죽는 것은 자신만으로, 더 이상 죽는 사람이 없도록, ORP는 남은 힘을 모아 필사적으로 목을 울리고 혀와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움직이지 않는다. 의식조차 멀어져 간다. 그렇게 마지막 말을 끝마치지 못한 채 그는 이 세계에서 영원히 소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