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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물 한 잔 마시는 것조차 용납 못 하겠다는 거야? 뭐야?

비싼 술은 엄두도 낼 수 없으니 물이라도 한 잔 마시고 돌아서려는데, 그것조차 안 된다는 거냐고!

울컥한 그녀의 눈시울이 빨개졌다. 흥분한 얼굴도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런 채로 악 소리를 질렀다.

“놔, 개자식아! 왜? 나는 물 한 잔도 아깝냐?!”

“야!”

“냉수 먹고 속 차리려고 그런다. 아니, 네 면상에 시원하게 뿌려 줄까?”

계속되는 그녀의 반항에 한수가 거칠게 재은의 손목을 놓았다.

그 바람에 반대편 손에 붙잡고 있던 잔이 흔들리면서 넘실거리던 물이 쏟아지고 말았다.

“악!”

그가 어찌나 힘주어 잡았는지 손목에서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고, 울혈 같은 자국이 하얀 손목 위에 선명히 떠올랐다.

“너 지금 나한테 힘 썼니?”

“그래, 썼다!”

“너 왜 이렇게 뻔뻔해? 바람난 놈이 뭐가 잘 났다고!”

“하……. 내가 바람을 왜 폈는데?”

참다못한 한수가 응전 태세를 갖추며 고함질하자 움찔한 재은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라. 1년을 넘게 만난 여자 친구랑 제대로 된 스킨십 한 번 못 해 본 남자는 나뿐일 거다!”

재은이 기세가 누그러진 틈을 타 한수가 계속해서 밀어붙였다.

“그리고 여자로서의 매력이 전혀 없는 너를 어떻게 계속 만나냐?”

“뭐……?”

“널 안을 바에 목석을 품는 게 나을 정도라고! 알아들어? 네가 그만큼 매력 없는 여자라고!”

“너, 너 말 다 했……!”

“솔직히 말할게. 우리 성인이고, 나도 남자야. 불감증에 반응도 없는 너를 내가 어떻게 만나겠냐고.”

충격에 굳은 재은이 말을 얼버무리는 그때, 나은이 등장했다.

한수는 나은의 어깨를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그 모습을 보며 실소한 재은의 눈가가 시큰해진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제 연인이었던 한수와 그의 새 연인을 나란히 마주 보고 있는 상태가 어찌나 비참하고, 애석한지.

참으려야 참을 수 없는 눈물이 눈가에 송골송골 맺힌다.

“……미친놈.”

그와 공유한 1년의 시간이 무의미하게 바스러지는 기분이고, 가시덤불 속에 빠진 심장을 누군가 지르밟는 느낌이었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통증이 전해졌다. 혈관을 타고 퍼져 나가는 독성에 중독된 전신이 서서히 굳어 갔다.

이대로 돌아서야 하는데, 뿌리박힌 걸음이 제 자리에서 꼼짝 않는다.

“너 정말 미친놈이야. 알지?”

끝까지 자존심을 부리는 그녀가 감정 섞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속이 뒤집힐 것 같아 물 한 잔이 절실했다.

반쯤 남은 물 잔을 입가에 가져다 댄 재은이 눈꼬리를 세운 채로 정면의 한수를 노려본다.

푹 한숨을 내쉬다 물컵에 채운 술을 들이켜려는 그녀를 발견한 한수가 무어라 대답하려는 찰나였다.

“맞네, 미친놈. 저런 놈을 1년이나 만났어?”

한수를 대신한 낯선 목소리가 그녀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소스라친 재은이 홱 뒤를 돌아보았다.

중심을 잡지 못한 재은이 휘청거리자 긴 팔이 쓰윽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듯 받쳐 주었다.

또 한 손은 너무도 쉽게 그녀가 들고 있는 물 잔을 빼앗았다.

“여전히 술은 젬병일 거고.”

익숙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에 재은의 눈이 벌어졌다.

확장된 동공 속에 곧 누군가의 눈부처가 섰다.

“여전히 연애 불능인 것 같아 참담하네.”

재은의 젖은 속눈썹이 깜빡이더니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통속적인 신파 좋아하는 것도 여전해.”

그런 그녀의 눈물을 손끝으로 닦아 주며 기울어진 그녀의 몸을 바로 세워 준 화준이 씨익 미소 짓는다.

재은은 얼떨떨했다. 평소보다 더디게 움직이는 사고 회로 덕분에 그가 누구인지 기억하는 데 제법 긴 시간이 소요됐다.

“못났네, 모재은.”

그녀에게서 뺏은 컵을 내려 보다 피식 웃으며 잔을 들이킨 그가 젖은 입술을 혀끝으로 쓸며, 눈앞의 재은과 눈을 맞췄다.

예쁘게 휘어지는 눈매와 입매가 어찌나 매혹적인지 재은은 말똥히 뜬 눈만 감았다 떴다.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나를 알고 있다는 게 놀라워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찰나적으로 고민했다.

“냉수는 이따 나랑 마시고.”

그러니까 눈에 익은 사람.

웃을 때마다 깊이 패는 입매가 유독 시선을 강탈하는 사람.

안면에 모든 매력을 죄다 몰수 시켜 놓은 이 사람은.

“이건 내가 대신 처리하는 거로.”

아무래도 그녀가 잘 알고 있는 남자인 것 같았다.

“이의는 없는 걸로 하자.”

헐…….

마침내 그를 떠올린 재은이 까무러친다.

“차화준…… 선배?”

그는 재은과 같은 대학교 동문 화준이었다.



* * *



“이렇게 만날 줄 몰랐지?”

목울대가 꽉 막힌 재은이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거렸다.

화준이 백제 호텔의 부사장이라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으나 향도에서 그를 보게 될 줄이야, 정말 꿈에도 몰랐다.

“나도.”

그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재은이 끅, 어깨를 들썩이며 또 한 번 딸꾹질을 했다.

“그렇게 놀랐어?”

딸꾹질하는 그녀가 내심 걱정이 됐는지, 그가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등을 다독였다.

재은은 아주 잠시 한수와 나은을 잊었다. 존재 자체가 휘황찬란한 그의 잘생긴 얼굴에 혼이 빠져 현실 감각도 떨어졌다.

너무 놀란 탓에 다리도 후들거렸고, 심박동도 위험할 정도로 빨라졌다.

손을 끌어 잡은 재은이 살며시 손목의 맥을 짚어 보았다. 맥박이 괴이할 정도로 팔딱거린다.

말도 안 되는 사람을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마주친 탓이 분명하다.

이 사람을 이렇게 다시 만날 줄이야. 추잡한 치정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호텔 레스토랑에서 어처구니없는 재회를 맞이할 줄이야.

“왜 그래?”

“아니, 아, 아니…….”

“반가워서? 아니면 뭐. 내 얼굴에 뭐 묻었나?”

네, 잘생김이요.

재은의 시선이 빠르게 화준을 스캔했다.

60회의 다림질, 22시간의 바느질로 섬세하게 제작된 이태리 최고 브랜드 슈트와 잔잔한 핀턱 장식의 클래식한 셔츠, 글랜 체크 패턴의 딥 그린 행커치프, 댄디한 팬츠 핏과 날카로운 실루엣의 스트레이트 팁 슈즈.

그녀보다 네 살이나 많은 그에게서는 짙은 남자의 냄새가 났다.

지독한 페로몬을 유혹적으로 풍기며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퇴폐적이었다.

그 눈빛을 동공 속으로 깊이 흡수시키는 순간 가슴이 튀어 오를 듯 세차게 뛰어 댔다.

두근, 두근.

9년 전, 어느 날에 느꼈던 그 감정이 되살아나 그녀를 감회에 젖게 한다.

그래, 정확히 6년 만에 만나는 사람이었다.

그는 특유의 다정함과 친절함으로 중무장을 한 채 재은을 대하던 잘난 선배였다.

“뭐야, 모재은…….”

모로 잊고 있던 한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준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한 엑스트라가 두 사람을 관전하다 조심스레 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은 이 잘난 백제 호텔의 부사장을 대체 네가 어떻게 알아.

대체 어떻게!

존재감 충만한 화준의 등장에 기세가 꺾인 한수가 불안하게 떨리는 시선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본다.

그때 재은이 도발을 감행했다.

보란 듯이 화준에게 팔짱을 꼈다. 그리고 세상 도도한 여자처럼 턱 끝을 추켜들었다.

한심스러운 두 남녀를 깔보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실연의 아픔에 무감한 여자의 흉내를 냈다.

“미안, 소개가 늦었네. 다들 잘 알 만한 사람이지만 정식으로 소개할게.”

얼토당토 않는 발언은 옵션이었고.

“내 남자 친구야.”

그녀의 폭탄선언에 모두들 충격에 얼어붙었다.

그에게서 빈 물 잔을 건네받은 지배인도, 안절부절못하던 직원들도, 재은의 눈을 피해 긴 시간 밀애를 나누던 두 남녀도, 향도에 방문한 모든 비즈니스맨들도 어느 하나 멀쩡한 사람이 없었다.

그 속에서 유일하게 재은만 태연했다.

“그렇죠? 화준 씨?”

콧소리를 내며 그의 이름을 부른 재은이 자연스레 화준을 돌아보았다.

“물론.”

태연자약한 한 사람, 여기 추가요.

“아. 반갑습니다. 정식으로 인사드리죠.”

그녀보다 더 자연스러운 그가 목석처럼 딱딱해진 재은의 어깨를 제 것인 양 부드럽게 끌며 말했다.

시선은 마주 보고 선 한수와 나은을 가볍게 흘기다가 도로 재은을 찾아와 고정되었다.

“모재은 씨의 남자, 차화준입니다.”

그의 뇌쇄적인 눈빛에 푹 빠질 것만 같은 재은이 먼저 그의 시선을 피했지만, 화준은 변함없었다.

그녀의 정갈하고 아름다운 옆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 * *



창피해, 창피해 죽을 것만 같아. 이게 무슨 망신이야.

“그게 뭔 줄 알고 겁도 없이 들이 키려고 했어?”

“네에……?”

“술 냄새가 그렇게나 지독한데 그게 물이라고 생각했던 거라면 모재은은 눈치도 젬병인 건데.”

재은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죄, 죄송합니다.”

사과의 말이 아니고서야 달리 할 말이 없었다.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외식가를 걸어 나온 재은은 한수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비틀대는 그를 부축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니까 그의 말에 따르면 조금 전 그녀가 물이라고 생각하고 들이켜려 했던 물 잔 속에 도수가 높은 고량주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고.

기껏해야 맥주나 마시는 게 고작인 재은이 뭣도 모르고 그 잔을 들이켰다면 엄청난 불상사가 발생했을 것이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살려 주셔서, 여러모로 감사합니다. 재은은 거듭 인사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온갖 수모를 다 겪었을 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더구나 그녀를 대신해 지독한 고량주를 한 입에 들이 부운 그는 한 순간 그녀의 은인이 되어 주었다.

재은은 몸이 멀쩡할 리 없는 그를 부축하며 스스로의 어수룩함을 질책했다.

한심한 모재은. 정신 나간 모재은. 그러게 냉수 따위는 왜 마시려고 해서. 아이고, 이게 무슨 꼴이야. 

나 때문에 이 사람은 이게 무슨 꼴인 건데. 으흑.

기억 속 그는 그다지 술을 즐겨 마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주량이 약한 편도 아니었는데.

“감사하면 룸까지 모셔다 주는 서비스에 냉수 한 잔 같이 마실 시간 정도는 내주시죠. 모재은 씨.”

대체 그 고량주는 도수가 얼마나 높은 거야. 아니, 이럴 거였으면 그녀를 대신해 한수의 면전에 술이라도 시원하게 뿌려 주지.

화준은 제 허리를 한 팔로 그러안은 채 낑낑거리는 재은을 내려 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게 그걸 왜 마셨어요…….”

혜성처럼 나타나 구세주가 되어 준 건 고맙지만, 잔에 가득 채워진 그것이 술인 줄 알았으면 애초부터 버렸으면 됐잖아!

괜한 수고를 하는 것 같은 재은이 죽을상을 하며 웅얼거렸다.

사실 이 정도 고생쯤이야 백번을 해도 좋았다.

단지 6년 만에 재회한 화준의 몸을 끌어안다시피 하며 엘리베이터를 찾아가는 이 상황이 못 견디게 어색할 뿐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를 부축할 만큼 그와의 사이가 퍽 완만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다지 좋은 기억으로 남은 사람도 아니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