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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품위와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커플의 일행은 아닌 것 같은데.

화준은 의심스러운 여자를 유심히 살폈다.

머리에 뒤집어 쓴 스카프의 화려한 패턴이 지켜보는 그의 눈을 아프게 했고,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는 선글라스에서는 멋과 기품을 찾아보기 힘들어 조소를 안 하려야 안할 수 없게 했다.

가관이 아닐 수 없는 광경에 표정 관리가 어려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곳, 향도는 화준이 가장 사랑하는 레스토랑이었다.

대체 저 그림은 무엇이란 말인가.

여자의 격 떨어지는 행동에 비상을 맞은 화준이 싸늘하게 굳은 얼굴을 하며 방향을 틀었다. 걸음은 차 사장이 기다리고 있는 비즈니스 룸이 아닌 정면이었다.

걸음을 옮기는 화준의 보폭이 평소보다 넓고, 빠르다.

-위험한 상황에 대비해서 911 정도 미리 대기시켜 놓는 것도 나쁘진 않겠습니다. 제가 아는 부사장님은 누구보다 용의주도하고, 주도면밀한 분이시니까요.

백제 호텔의 나쁜 평판이 고객 사이에서 만구일담으로 같아질 것을 우려한 화준이 비즈니스 외식가 입장에 제한을 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조 실장은 부지런히 말을 하고 있었다.

“그래, 뭐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하겠지. 유능한 부사장, 과로로 쓰러지기 전에 강약 조절 좀 부탁해. 조 실장.”

그가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숨을 불어 내쉬며 매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발길은 요란한 스카프와 선글라스를 거칠게 벗어 던지며 악에 받친 고함을 내지르는 여자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다가가고 있었다.

“나는 물 한 잔도 아깝냐! 어? 물 한 잔도 아깝냐고!”

안으로 들어서자 가냘픈 여자의 고성이 내부를 쩌렁쩌렁 울리며 화준의 귓전을 사정없이 긁어 댔다.

그의 표정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살의로 번뜩이는 눈빛은 모조리 다 불태워 버릴 듯 강렬했다.

난동이 일어난 실내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서둘러 움직이던 지배인이 막 등장한 그를 알아보고 묵례했지만 화준에게 인사를 받아 줄 겨를 따위 있을 리 만무했다.

난잡한 상황을 만든 저들을 당장 처리해야 했으니 뭔들 눈에 밟힐까.

화준의 표정이 한층 어두워졌다. 삽시간에 밀어닥친 분노가 그의 걸음을 서두르게 했다.

마침내 화준이 여자와 멀지 않은 곳에 당도했다.

지켜보던 뒷모습이 또렷해지자 거침없던 그의 걸음이 잠시 제자리에 우뚝 섰다.

그보다 한발 앞서 난리 통이 일어난 상황에 합류한 지배인의 제지에도 아랑곳 않는 여자의 얼굴이 언뜻언뜻 보이고, 화준의 얼굴 위에 잠시나마 놀란 빛이 스쳤다. 

감정이 불확실한 표정이 모호하게 변하는 순간, 그의 입가에 진한 웃음이 찾아와 조용히 만면으로 번졌다.

좋은 인연이 생긴다면 자연히 붙따를 희보.

그 희소식이 머지않아 생긴다면 백제 호텔의 부사장 차화준은 겹경사를 누리며 언론의 화제가 될 테지.

피식 웃음을 깨문 그가 한 발자국 움직였다.



* * *



재은은 만난 지 1년이 넘은 남자 친구의 외도 현장을 덮치기 위해 매해 업계 1위를 기록하는 백제 호텔 17층의 비즈니스 외식가에 몇 시간째 죽치고 있었다.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이 불편했지만 참아야 했다.

거짓말에 능한 박한수를 궁지로 밀어붙이기 위해서는 참을 인(忍)을 그리고, 또 그리고, 또 새기며 버텨야 했다.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자리한 재은은 콧방울 아래로 떨어지는 선글라스를 고쳐 쓰며 곧 입장할 박한수와 여자를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불쑥불쑥 떠오르는 박한수와 여자의 음란한 메시지 내용이 그녀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나은] 자기 비아그라 좀 먹어야겠어

[한수] 무슨 소리야 자기야

[한수] 자기가 불감한 거야

[나은] 설마 그럴 리가, 자기가 너무 자기 생각만 하니까 그렇지

[한수] 내가 그랬어?

[나은] 그래! 나은이두 오르가슴 느끼구 싶단 말이야!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충격적 메시지 내용은 몇 번을 생각해도 그녀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오르가슴, 비아그라…….

용서 못 해, 절대 용서 못 해.

쌍심지를 켠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며 부득부득 이를 갈던 재은이 별안간 주문한 짜장면 면발을 후루룩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와중에 허기를 느끼는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우씨.”

짜증나, 여기 짜장면은 왜 이렇게 맛있는 거야.

1년을 만나면서 흔한 호텔 레스토랑 외식 한 번 한 적 없던 두 사람이었다.

그런데 네가 감히 다른 누구도 아닌 바람난 여자와 6성급 호텔 외식가에서 우아한 데이트를 즐겨?

“절대, 절대 안 돼.”

파국이 뭔지, 내가 오늘 아주 똑똑히 가르쳐 주마.

먹잇감을 쫓는 맹수의 시선으로 뚫어져라, 입구를 응시하던 그녀의 눈가에 별안간 기다리고 기다리던 남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란 듯이 손을 꼭 맞잡은 채 등장한 두 사람은 지배인의 안내에 따라 그녀와 가까운 곳에 자리했다. 당황한 그녀가 푹 고개를 떨어뜨렸다.

아직, 아직 들통이 나선 안 됐다. 벽 쪽으로 고개를 외면한 재은이 귀를 쫑긋 세웠다.

“어머, 자기야. 오늘 데이트 코스 너무 멋있는 거 아니야?”

“그럼, 다 자기를 위해 준비한 거야.”

“아흥, 자기 너무 멋져.”

듣고도 못 믿을 애칭과 한수의 토악질 나는 목소리에 재은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자기, 그럼 주문 좀 부탁해.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저 미친 새끼가!

부들부들.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면서 전신이 흔들렸다.

이것이 분노에 의한 진동인지,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자랑하는 실연의 아픔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대로 박한수를 살려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존심이 있지. 죽어도 같이 죽는다. 박한수.

재은이 힐끔 한수를 돌아보았다.

나은인지, 뭔지 알 것 없는 여자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온갖 멋있는 척을 다 하며 주문하는 그를 보았다.

잠시 후 그들의 빈 테이블에 주문한 메뉴와 고급 차 두 잔, 그리고 재은은 살며 구경 한 번 못 해 본 중국 황실 전통 술, 시선태백이 놓인다.

아주 작정을 했네. 기름값도 없다며, 죽는 소리 하던 게 누군데!

재은은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나은과의 데이트 장소가 백제 호텔 비즈니스 외식가라는 것부터가 충격적이었기 때문에 더 놀랄 일은 없을 거라고 믿었는데.

150ml에 50만 원이나 하는 시선태백을 통 크게 주문하는 그의 씀씀이를 보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마음과 돈, 시간은 비례한다.

재은은 비참했다.

기념일마다 그에게 받은 선물이라곤 화장품이 고작이었던 그녀였고, 일에 치여 사는 한수는 늘 바빴다.

1년에 한 번뿐인 그녀의 생일날에도 시간을 내어 주지 못할 만큼 바쁜 그가…….

긴 숨을 불어 내쉰 재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앞에 보이는 한수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걸음을 서두르는 그녀가 마침내 사태 파악이 불가능한 멍청한 박한수의 등 뒤에 바로 섰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우아한 분위기를 즐기는 한수는 눈치가 없어도 너무 없었다. 범상한 오라를 풍기고 있는 그녀의 존재를 혼자만 모르고 있다.

“오늘 진탕 먹고 취하자. 그리고 가 보자, 홍콩!”

그의 말을 끝으로 선글라스를 슥 끄른 재은이 서슬처럼 날 선 손매를 치켜 올렸다.

토끼 주제에 달나라라면 모를까, 감히 겁도 없이 홍콩을 운운하다니.

분개심이 극에 다른 재은이 뜨거운 콧김을 흥 내쉬며 한수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윽!”

뒤에서 밀려온 완력에 한수의 몸이 테이블 앞으로 쏠렸다가 반동으로 다시 일어났다. 놀란 그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한 채 뒤를 돌아보곤 헉 소리와 함께 경직된다.

“재, 재은아.”

전혀 생각도 못 한 인물의 등장에 놀란 듯 그는 이곳이 호텔 외식가라는 사실도 잊은 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쓰러지면서 쾅! 하는 굉음이 레스토랑을 가득 메웠다.

온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을 향했다.

“내가 너 이럴 줄 알았어.”

“아, 아니. 재은아, 너, 너 여기 어떻게…….”

“표정이 왜 그래? 귀신이라도 봤니? 못 볼 거라도 본 것 같아?”

“아, 아니. 재, 재은아……! 그,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긴 뭘 그게 아니야! 이 미친 새끼야!”

그녀가 빽 소리치자 향도를 찾은 고객들의 어깨가 일동 들썩거렸다.

어이쿠, 깜짝이야.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줄 알았다.

“이 더러운 자식! 계집의 곡한 마음 오뉴월에 서리 친다고. 지금이 오뉴월이 아닌 거에 감사해. 알겠어?”

말끝에 그녀의 날랜 손이 한수의 뺨을 화끈하게 후려쳤다.

남자가 바람났구나, 여자가 그래서 잠복 중이었나 봐. 불쌍하다, 예쁘장하게 생겨서.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었으나 재은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놀란 지배인이 한걸음에 달려왔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아니, 아니 재은아. 그게 아니라…….”

후끈거리는 뺨을 손으로 감싼 한수가 서둘러 해명하자 재은이 조소한다.

“우린 여기서 끝이야.”

터벅터벅 테이블 앞으로 걸어온 재은이 보란 듯이 물 잔을 손에 들었다.

까맣게 타는 속이 말이 아니다.

냉수라도 비우고 가야겠다. 이 물이라도 한 잔 들이붓고 멋지게 돌아서자.

“고맙다, 박한수? 사람이 이렇게까지 밑바닥일 수도 있구나, 라는 걸 네 덕에 알았어.”

피처럼 뜨겁게 끓어오르는 빨간 분노를 온몸에 휘감은 그녀는 잔을 든 손을 높게 치올렸다.

“아니, 너 그거……!”

경악한 한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거 물 아니야, 술이야!

방금 전 그는 나은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물 잔에 가득 술을 따라 부었다.

후딱 마시고, 후딱 취할 요량이었는데, 하필 그 잔을 지금 재은이 들고 있었다.

그것도 그게 물인 줄 아는 건지 바보처럼 입 안에 때려 부울 기세였다.  

말려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저기, 재은아…….”

“내 이름 부르지 마! 나쁜 새끼야!”

무슨 말만 하면 버럭버럭 화부터 내는 그녀를 무슨 수로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돌격하는 전차 같은 그녀는 지금 눈에 봬는 게 없는 상태였다.

막을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모재은. 진정하고 일단 그 잔 내려놔!”

“뭐? 진정?”

울컥한 재은이 다시금 손을 추켜들었다.

이번에는 순순히 뺨을 내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한수가 불쾌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며 그녀의 손목을 탁 붙잡았다.

“그만해. 이 이상 소란 피우지 마, 쪽팔리니까. 그리고 좋게 말할 때 그 잔 내려 놔.”

그거 비싼 술이란 말이야.

“뭐? 쪽팔려? 네가 더 쪽팔려! 누가 누구더러 쪽팔리대?”

“하, 이게 진짜……. 너 미쳤어? 그만하라니까?!”

“그만할 거야! 너 같은 새끼, 다시 만날 생각 추호도 없어!”

냉수 마시고 속 차릴 생각이었던 재은은 자신을 억압하는 한수의 힘에 굴복해 이도저도 못 하는 상태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