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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이럴 줄 알고?”

어느새 승강기 앞에 도착한 재은이 힐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올라가요? 내려가요? 눈으로 묻는 말에 그가 손을 뻗어 올라가는 버튼을 누른다.

“그게 무슨…….”

“가뜩이나 컨디션 난조를 겪고 있는데, 시원하게 고량주를 때려 부우면 순진한 모재은이 나를 모르는 척하는 일은 없을 것 같아서.”

“……네?”

“예전처럼 동분서주하며 도망가는 일도 없을 테고.”

“…….”

“오히려 발목이라도 쾌히 붙잡혀 줄 것도 같아서.”

이,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지금!

“이렇게 날 꽉 안아 주는 일이 생기면 나는 못 이기는 척, 모재은한테 의지를 하게 될 텐데. 그럼 좋잖아.”

“으음…….”

“뭐, 나만 좋은 일인 것 같긴 한데, 그래도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속은 괜찮지 않았다.

과음으로 남아 있던 숙취가 사라진지 얼마나 지났다고, 도수 높은 고량주를 물 마시듯 입안에 털어놓았으니 속에서 과열 반응을 일으키는 것도 당연했다.

적어도 도수가 센 고량주를 한 입에 들이마셨으니, 아무리 술에 강한 화준이라도 찰나적인 취기에 힘들어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점을 노린 거다. 애초부터 버리면 그만이었다. 아니면 그녀가 원하는 대로 눈앞의 사내의 얼굴에 술을 끼얹어 줄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과감하게 잔을 비운 것은 이 일을 빌미로 재은을 한 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서였다.

기억 속 그녀는 여전히 순해도 너무 순해 자신 때문에 위기에 처한 그를 홀로 두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이마저 그의 계략의 일부였던 것이다.

귀여운 모재은이, 저로 인해 큰 낭패를 본 차화준을 혼자 둘 리 없잖아.

그의 교묘한 생각을 전혀 알 턱이 없는 재은이 그를 지탱하며 승강기에 올랐다. 

몇 발자국 움직였을 뿐인데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187cm나 되는 장신의 남자를 고작 163cm에 지나지 않은 가냘픈 여자가 무슨 수로 감당할까.

“28층.”

간결한 화준의 목소리에 재은이 버튼을 누르자, 승강기는 부드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빨리 할 일을 마치고 돌아서야겠다. 결연한 다짐을 세운 재은은 내비게이션 같은 그의 안내를 받아 부사장 전용 비즈니스 룸 앞에 멈춰 섰다.

재은은 느릿한 손동작으로 도어록을 여는 그를 힐끔거렸다.

전용 객실이라더니, 카드 키도 필요 없는 모양이었다.

지문 인식을 마친 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리고, 자연스레 룸 안으로 입실한 재은은 무사히 임무를 완수했다.

“저, 그럼 전 이만…….”

이제 그만 돌아서야 한다. 숨 쉬는 것도 해악처럼 느껴지게끔 하는 고고한 그의 곁에서 한시라도 빨리.

화준은 잔뜩 미안한 얼굴을 한 재은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저런 남자를 1년이나 만났어?”

그가 잽싸게 달아나려는 그녀에게 덤덤한 투로 말했다. 돌아선 그녀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네……?”

슬그머니 그를 돌아본 재은의 표정은 경직되어 있었다.

모르는 척해 주면 참 좋겠는데,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화준은 속 좋은 얼굴을 한 채 종전의 일을 되짚고 있었다.

다시 상기시켜 좋을 것 하나 없는 일들이 눈앞을 스치고, 누구보다 비참했을 제 모습이 속수무책으로 떠올라 견디기 힘들었다.

바람난 남자 친구에게 뺨 두 대를 올려도 모자랄 판에 성적 모욕을 되받았다.

수모를 떠안긴 녀석의 언사를 저만 들었으면 몰라, 분명 자리를 지키고 있던 눈앞의 그도 똑똑히 들었을 터였다.

“남자 보는 눈은 여전히 형편없고.”

그런데 이상하게 그녀를 지켜보는 그의 눈빛에서 동정, 연민, 알심과 같은 줘도 반갑지 않을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

“형세가 남다른 얼굴은 여전히 예쁘고.”

그녀는 모르겠지만 화준은 눈앞의 그녀가 허황된 꿈만 같아 좀체 눈을 떼지 못했다. 

6년 만의 만남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혼자 남은 고모님께 짧게 상황 설명을 마치고, 부축을 빌미로 재은을 데리고 비즈니스 룸을 찾은 이 순간을 오래토록 유지하고 싶었다.

“선배…….”

“보는 사람 눈 못 떼게 하는 재주도 여전히 잘 부리는 것 같은데.”

그가 고조 없는 목소리로 매끄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시선은 오래토록 재은의 얼굴에 머물렀다. 장소가 장소이니 만큼 함부로 그녀의 신체를 살필 수 없음이 애석한 그의 마음을 아마 모를 테다.

허리춤에서 찰랑이는 머리카락과 동글동글하면서도 갸름한 턱.

혈관이 도드라지도록 하얗고 깨끗한 피부와 크고 동그란 눈. 불순한 것에 물들지 않아 반짝반짝 빛이 도는 눈동자까지.

어느새 그녀는 성숙한 여인이 되어 있었다.

굵게 웨이브가 진 헤어스타일이 아니었다면 그가 기억하는 예전의 모재은이 분명했는데,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녀를 어엿한 여인으로 보이게끔 했다.

얼토당토 않는 말로 그를 뿌리치던 대학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완전한 여성의 모습으로 그를 정신 못 차리게 하는 모재은이 눈앞에 우두커니 서 있으니 화준은 알 수 없는 감정 기복에 휩싸여 그녀라는 피격을 맞은 내면을 다독이는 데 여력을 다 해야 했다.

온통 그의 흔적으로 가득한 전용 객실에 그녀의 체취가 조금씩 번져 나간다.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희소식을 안겨다 줄 제비 같은 그녀가 토끼같이 귀여운 얼굴을 여전히 간직한 채 안절부절못하고 있으니, 어떻게든 인연의 실타래를 붙잡고 싶어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시간을 모조리 훔치고 싶었다.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은 건 내일을 기약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후……. 네. 뭐 형편없는 건 여전하죠. 저도 제가 이렇게 한결같은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죄송합니다.”

관람자가 없어 조용한 비즈니스 룸에 그녀의 목소리가 고요히 울려 퍼졌다.

칭찬인지, 타박인지 모를 그의 말에 귀까지 달아오른 재은의 얼굴이 먹음직스럽게 무르익었다.

“뭐가 죄송해?”

“선배님 호텔에서…… 난동 피운 거요.”

재은이 머뭇머뭇 말했다.

“물이라도 끼얹어 주지 그랬어? 바람난 놈들은 하나같이 구제 불능이거든.”

“아녜요, 덕분에 속은 시원해졌어요.”

화준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했다.

“뭐가 내 덕이야?”

“선배가 제 남자 친구인 척해 줬잖아요. 최고의 복수예요. 향도에서 선배를 만난 건 정말 기적이고, 신의 은총이에요. 감사합니다.”

“아. 그 정도로 뭘.”

재은은 눈만 돌리면 마주치는 화준의 시선이 어색하고 불편해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슬슬 뒷목이 아려왔지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정면에는 그녀를 빤히 주시하는 그가 있었다.

하, 미치겠다.

“그런데 너.”

별안간 죄인처럼 고개를 조아리는 그녀가 답답한지, 재킷을 벗으며 다가오는 그가 그녀의 앞에 우두커니 서서 얼굴을 낮췄다.

시선을 맞추기 위해 몸을 숙인 화준의 셔츠에 주름이 졌다.

신중하고 칼 같은 성격을 반영한 슈트를 일부러 구기는 수고도 마다치 않는 그는 숨기듯 감춘 그녀의 얼굴을 빤히 내려 보며 고개를 갸웃댔다.

이만하면 얼굴값을 할 법도 한데. 왜 그런 미련한 놈을 만나서는.

“왜 내 눈을 못 봐?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얼굴 보고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어려울 건 뭔데?”

그의 깊고 섹시한 눈매와 블랙홀처럼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들이는 까만 동공을 마주할 때면 그녀도 모르게 가슴이 천지개벽을 일으켰다.

우르르 쾅쾅, 우르르 쾅쾅. 차화준 주의보를 알리는 경고령인지, 잘생긴 남자를 코앞에 둔 여자의 솔직한 감정인지, 잘은 모르겠다.

“그, 그건…….”

이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헤아릴 정신이 없었다. 그를 앞에 둔 재은은 지금 숨 쉬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이었으니까.

그만큼 지금 그녀에게 닥친 현실은 총체적 난국이었다. 대답을 못 하는 게 당연했다.

화준은 묵묵부답인 그녀가 답답할 만도 한데 너그럽게 이해하는 듯 흔연한 얼굴을 일관했다.

예나 지금이나 순진한 모재은이 놀라 달아나진 않을까, 은근히 노심초사하는 그는 어떻게든 그녀를 붙잡고 싶을 뿐이다.

그러니 대답 따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다.

지금은 눈앞의 그녀를 오래토록 지켜보는 게 중요했고, 시선 속에 조용히 잠기는 그녀의 모습을 머리에, 가슴에 고이 간직하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피식 웃으며 돌아선 화준이 그녀에게 등을 보이며 침대 맡에 놓인 티 테이블 쪽으로 걸어간다.

재은은 멀어지는 그를 관망하다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딱히 대답을 들으려는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쯤 됐으니 그만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은데 도통 타이밍을 못 잡겠다.

“정 고마우면 비싼 모재은 시간 좀 매도해 주라.” 

“네?”

“한 맺힌 모재은 마음 위로해 주는 것까지 직접 해 줄 의향 충분하니까.”

“네?”

“옛 연인에 대한 모재은의 미련을 남김없이 털어놓는 걸로 재회의 기쁨을 대신하자고.”

“저 선배……?”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재은은 아차 싶었다. 그의 술수에 말려든 것 같은 기분이 삽시간에 몰아닥쳤다. 돌아서야 하는데, 돌아설 수 없었다.

눈빛만으로도 그녀를 압도하는 차화준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었다. 부사장이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짊어지고 있는 것만 달라졌을 뿐.

여전히 그는 모재은을 쥐락펴락했다.

“그럼 오늘 모재은의 남은 시간, 감정은 모조리 내가 사들이는 걸로 하고.”

명분을 잡은 그가 그녀를 놓아줄 리 없다.

“이 시간 이후 충분한 재회의 시간을 즐겨 보도록 합시다.”

농도가 짙고, 밀도가 빽빽한 감정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어느새 취기가 가신 화준이 팔에 걸쳐 놓은 재킷을 옷걸이에 걸어 두며 말했다. 재은은 대답 없이 눈만 감았다 떴다.

침묵은 긍정이었고, 그것은 곧 수긍이 되었다.



* * *



재은은 화준의 대학 후배였다.

과는 달랐지만 같은 동아리였기에 캠퍼스 생활을 하는 내내 가깝게 지냈다.

이제는 빛바랜 기억이 되었지만 그 시절 재은에게 몇 번 고백을 하기도 했었다.

물론 재은은 재벌 4세라는 그의 화려한 존재감에 극심한 부담을 느껴 퇴짜를 놓기 일쑤였지만.

세 차례나 그녀에게 뻥 까인 화준은 그 뒤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경영 승계를 위해 미국 지사에서 커리어를 쌓은 그는 한국으로 귀국하기 무섭게 곧장 그룹 임원으로 투입됐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들을 소화하던 중 야단법석을 떨어 대는 재은을, 그가 가장 좋아하는 향도에서 다시 만났다. 

인연이라고 생각했다.

추억을 회상하는 일이 유일한 동아줄이었던 그의 눈앞에 진짜 모재은이 자진해서 나타났으니 이 정도면 타고 난 운명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재은이 바람난 전 남자 친구에게 자신을 현 남자 친구라고 소개할 때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시니컬한 경영인답게 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그였기에 표정 관리 따위 어려움 없이 해내 왔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오늘 따라 웃음을 삼키기가 무척 힘들었다.

너무도 당당한 목소리로 그를 자신의 소유물로 만든 그녀가 전처럼 마냥 소심한 여자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부유하는 탓에 더더욱 미소를 감출 수 없는 걸지도 모르지.

흐뭇해서 죽을 것 같은 화준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감싸듯 턱을 괴었다.

본격적으로 시작된 ‘모재은 이목구비 뜯어보기’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