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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갑자기 짜인 판은 글로리아와 빈센트가 어물거릴 틈을 주지 않았다. 재무 대신이 반대할 기회도 주지 않았다. 황제의 매서운 추진력 덕에 한순간에 연무장에 서게 된 둘은 뒤늦게 상황을 실감했지만, 악의로 점철된 인연은 모든 것을 합리화시켰다.

그렇게 대련이 시작되기 전, 급히 증서를 만들어 온 황태자가 둘을 불렀다.

“만약을 위한 서약서라네. 문제가 생겨도 서로의 나라에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내용이지.”

강제로 부부가 될 두 남녀는, 그의 설명 한마디에 내용도 확인하지 않고 긴 이름을 그려 넣었다. 사실 머릿속에서는 이미 전투를 시작한 지 오래였다.

어깨에 둘렀던 숄을 집어 던진 글로리아의 손에서 공기가 일렁거렸다. 허공에서 돋아난 보라색 오러가 실체를 가지는 장면은 초월자의 상징 그 자체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불로와 장생을 거머쥔 존재들은 오러를 물질화할 수 있었다.

그녀가 본인 키보다 긴 창을 완성할 즈음 마찬가지로 대검을 완성한 빈센트는 무언가 복잡해 보이는 표정으로 이를 갈았다. 곧 날카로운 시선이 맞닿고 연무장 바닥이 내려앉을 듯 진동했다.

격돌하는 순간은 누구도 눈에 담을 수 없었지만, 귀를 찢는 굉음이 둘이 맞붙었음을 알려 왔다.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늦은 시간에 소환당한 마법사 부대가 사방에서 방어벽을 치고, 티타니아가 그들을 보조했다. 그럼에도 한쪽 벽이 거한 힘을 이기지 못하고 늘어났다.

“황태자, 황궁 안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듣지 못하겠지만, 방어벽 안에서는 입에 담기도 민망할 만큼 험한 소리들이 난무하고 있었다. 현자의 힘이 담긴 귀로 그를 모두 듣게 된 티타니아는 쏟아지려는 한숨을 씹어 삼켰다. 오러를 두른 날과 날이 부딪치면서 입으로 내뱉는 소리가 눌리는 통에 아직은 가려지고 있으나, 다툼이 심화되면 언젠가는 새어 나오고 말 터. 사랑하는 동생의 그릇된 인성을 들키는 것 따위야 제 알 바가 아니지만 결혼이 성사되지 못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다.

이리저리 비틀리는 방어벽을 보며 껄껄 웃고 있던 윌리엄이 대답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은 모두 예정대로 진행될 테지요.”

그러면서 조금 전에 받아 두었던 증서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두 초월자의 눈을 속이기 위해 만연체로 쓰인 초반 내용을 잘라 내면 결론은 이러했다.

두 사람의 혼인을 인정한다.

과연. 증서의 내용을 확인한 티타니아가 작게 감탄했다. 일을 이렇게나 깔끔하게 처리할 줄 아는 황태자라면 황제가 되어서도 현명한 정치를 이어 갈 터였다. 두 제국의 앞날이 밝을 것이라 조금은 믿을 수 있었던 그녀는, 동맹국의 미래를 책임질 이와 못다 한 환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한편, 방어벽 안에서는 귀족 혹은 기사의 다툼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행동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창과 검을 들고 서로에게 맞서던 초월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무기를 놓은 것이다.

어느 후작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는 것이 평생의 소원 중 하나였던 어느 공작이 먼저 창을 놓았고, 상황에 휩쓸린 상대도 검을 놓았다. 그렇게 빈손이 된 두 초월자는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무기도 규칙도 없는 다툼은 난잡했다. 글로리아는 오러를 두른 다리로 빈센트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거친 타격음과 함께 단단한 몸이 휘청거렸지만, 그는 곧 다시 중심을 잡고 가는 다리를 잡아 집어 던졌다.

내던져진 글로리아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그녀에게 가까워진 빈센트가 헛손질을 반복했다. 용케 옆으로 빠진 글로리아는 뒤로 회피하는 대신 성난 황소처럼 그의 이마를 들이받았다.

평범한 인간과 인간이었다면 두개골이 가루가 될 만큼 강한 충돌이었다. 뇌가 흔들리는 고통과 함께 빈센트에게서 멀어진 글로리아는 박치기로 부어오른 이마를 문질렀다.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나그리제 후작. 몇 대 맞아 줄 생각은 없습니까?”

빈센트는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삭막하게 그러지 말고요. 그대의 머리에 남은 자국이 하나뿐인 것이 너무 외로워 보여서 말입니다.”

빈센트의 이마에는 글로리아와 같은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그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동안 진심이 섞인 농담을 마친 글로리아는 몸을 낮추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새삼 전쟁터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마주칠 때마다 이를 갈았으나 저희는 사적으로 다툴 수 없는 위치였다. 각국의 병사들을 통솔하는 장군이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이런 기회 자체는 감사했다. 적이었던 남자와 결혼을 해야 하는 현실 자체는 암담하지만, 이리 격식 없이 다툴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그러니 여기서, 아주 유감스럽게, 피치 못할 사고로 그의 명줄이 끊어져 주면 더더욱 좋을 것 같다.

빈센트의 발차기를 팔로 막아 낸 글로리아는 주먹을 쥐어 그의 턱을 올려 쳤다. 방패로 사용된 팔이 고통스럽게 삐걱거렸지만, 바닥을 구르느라 흙투성이가 된 남자를 보는 쾌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소리는 밤낮없이 이어졌다. 구경에 지친 귀족들이 저택으로 돌아가고 티타니아와 윌리엄의 환담이 수차례나 이뤄졌지만, 인간을 초월한 존재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들의 공방전은 끝나지 않았다.

“저분들도 정말 대단하시다니까. 벌써 며칠째지?”

“벌써 3일이나 지났어.”

“그동안 한 번도 안 쉬셨지?”

“쉬기는커녕 식사도 안 하셨어. 나였으면 첫째 날에 바로 쓰러졌을 거야.”

“어? 저기 봐!”

방어벽을 유지하던 마법사들이 과로로 죽어 가고, 뒤늦게 소식을 접한 황궁 하인들이 곁눈질로 방어벽 안을 힐끔거릴 무렵, 무려 3일간, 한 차례의 휴식도 없이 다툼을 지속하던 두 초월자는 서로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고 쓰러졌다.

이를 방어벽 밖에서 지켜보고 있던 티타니아는 함께 차를 마시고 있던 윌리엄 황태자에게 양해를 구한 후,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명령했다.

“치워라.”







무언가의 정점에 달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게 되었을 때, 제3세계의 힘인 오러를 실체화시킬 수 있는 신체로 재구성되는 현상.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아발론에서 말하는 초월의 정의는 그러했다. 여기서 재구성된 신체는 노화하지 않으며, 평생 20대 초반에서 중반을 유지함은 물론 수명 자체도 월등했다. 확인된 초월자의 수가 극히 적어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비아토르교에 소속된 대주교 중 하나가 300년이 넘도록 살아 있는 것을 근거로, 관리만 잘하면 그 이상을 살 수 있다고 유추하기도 했다.

모처럼 긴 수면을 취하고 있던 글로리아는 잠결에 팔을 뻗었다. 매끄럽고 탄탄한 피부가 손에 감기는 것이 옆에 누가 있는 모양이었다. 눈을 감은 채 뜨겁고 단단한 감촉을 만끽하던 그녀가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몸이 좀 쑤셨지만 크게 신경 쓸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적당히 쉬기만 해도 잘린 팔다리가 새로 돋아나는 힘이 있는데 쑤시는 게 대수겠는가. 그런데 정말이지.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괜찮은 것을 고른 것 같다. 다부진 몸도 그렇지만 체취도, 허벅지에 닿는 물건의 크기도 야성적이었다. 초월자가 되고 난 이후로 체력이 폭발적으로 상승한 탓에 만족이 어려운 삶을 살아가던 글로리아는 모처럼 침을 삼켰다.

이제 얼굴만 완벽하면.

“일어났으면, 좀 떨어져 주셨으면 합니다.”

“……이런 젠장.”

눈을 뜨고 검푸른 머리카락과 호박색 눈을 확인하고 만 글로리아의 입은 여느 때보다 더러웠다. 기분이라고 맑고 깨끗한 상태는 아니었다. 황홀하던 감촉과 체취가 단번에 구질구질하게 변한다. 퉤. 멀쩡한 공기를 토해 낸 그녀는 빈센트에게서 떨어져 이미 헝클어진 머리를 뒤집었다. 때맞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공작 전하. 소피아입니다.”

“들어와.”

“……제 의사는?”

글로리아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녀의 시종이자 부관은 주인만을 따랐다. 시종이라고는 하지만 다른 사용인들처럼 검은 원피스에 하얀 앞치마를 갖춰 입은 소피아는, 웃통을 벗고 있는 남자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공작만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황제 폐하와 사신으로 오신 바로디 제국의 황태자 전하께서 두 분 내외를 찾으십니다.”

“나 지금 상황 파악이 좀 느린데……. 내외?”

글로리아는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외? 소피아는 황제인 티타니아가 눈독을 들일 정도로 유능한 부관이었다. 머지않아 그렇게 될지도 모르지만 아직은 아닐 텐데. 그녀가 지금 말실수를 하고 있는 것인가.

글로리아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눈을 깜빡인 소피아가 대답했다.

“바로디 제국의 황태자 전하께서 서명을 요구하신 종이, 그게 혼인 서약서였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내용은 읽어 보셨어야죠.”

황태자를 익히 알고 있던 빈센트는 두꺼운 손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소리 없이 절규했고, 난데없는 봉변을 당한 글로리아는 황망한 표정으로 빈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나 둘은 제국의 귀족으로 산 세월이 아깝지 않을 만큼 신경 줄이 굵은 초월자들이었다. 급히 정신을 차린 둘은 옷을 걸치고 황궁 복도를 걸으며 단추를 채워 나갔다.

순식간에 말끔한 공작과 후작이 되어 응접실에 도착한 부부는 환한 얼굴로 다과를 즐기고 있는 주군들을 보며 우선 입을 닫았다.

흔해 빠진 시처럼 표현하자면 봄날의 정원처럼 꽃향기가 나는 광경이었다. 젊은 남녀가 장인들을 닦달하여 만든 찻잔을 들고 부드럽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표정을 갈무리하기가 어려웠던 글로리아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냥 둘이 결혼하지 그랬나.

동생의 불순한 생각을 바로 눈치챈 제국의 황제가 입을 열었다.

“결혼식 준비 문제로 급히 불렀네. 양국의 사정이 얽힌 일이니 양해해 주게나.”

너희는 양해해야 하지만, 나는 양해할 생각이 없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글로리아와 빈센트의 의사를 송두리째 무시한 티타니아의 옆에서, 사람 좋은 미소를 흩뿌리고 있던 윌리엄이 말했다.

“식은 수도에 있는 공작 사저에서, 피로연은 양국 황성에서 평화 협정 축하연을 겸하여 치르기로 했습니다. 급한 건 닷새 후에 있을 본식이니 노고가 크시겠지만 서둘러 주시지요. 아! 두 분께서 의논하셔야 할 일이 많을 테니 저와 후작은 물러가겠습니다.”

통보밖에 안 할 거면서 정말 왜 같이 불렀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자리는 비워졌고 티타니아는 맞은편에 앉으라 손짓했다.

무어라 토를 달기도 힘든 상황에 진이 빠져 버린 글로리아는 죄 없는 서류들을 구기며 물었다.

“그 혼인 서약서는 대체 뭐야?”

“황태자 혼자 추진한 일이란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으니 나쁠 건 없지 않니?”

믿어 주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진실로 황태자가 혼자 해치운 일이었다. 티타니아는 짙은 보라색 눈을 가늘게 뜨고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적갈색 속눈썹이 가볍게 흔들렸다.

바로디의 늙은 황제를 대신하여 젊은 황태자가 나설 때부터 알아보았지만, 추진력과 발언권을 가진 이는 황태자 쪽이었다. 상황은 웃기게 되었지만, 정권 교체가 머지않아 보이니 그와 이런 식으로라도 접점을 만들어 두는 것은 나쁘지 않다.

티타니아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물었다.

“피가 터지도록 싸우고 나니 속은 좀 시원해졌니?”

“제대로 못 싸웠어.”

동생의 퉁명스러운 대답을 들은 어느 언니의 눈썹이 불현듯 사납게 치솟았다. 이전의 온화함을 말끔히 지워 낸 아발론의 황제는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동시에 널브러져 있어 아무 말 없이 치우기는 했다만,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설마 졌니?”

빈센트 테오도르 나그리제 후작. 바로디에 있는 3명의 후작 중 가장 젊은 그는 글로리아처럼 전쟁 영웅이라 불리는 초월자였다. 기사의 표본이라 불릴 만큼 강직한 성품을 지닌 그는 외형적으로도 사교계에서 유명했다. 책상에 앉아서 정무나 볼 것 같은 백색 미남이 주류인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희소했던 그의 훤칠함이 돋보인 것이다.

아발론을 제외한 타국과의 전쟁에서 무패를 자랑하고, 후작이라는 작위에 누가 되지 않을 만한 예법을 갖춘 남자. 나쁘지 않다. 내장을 털어 고하자면 나쁘지 않다가 아니라 아주 훌륭했다. 그의 이름값은 글로리아와 비등할 것이다. 어쩌면 탕아 소리를 듣고 있는 그녀보다 긍정적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승리하기를 바란 적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