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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

평화의 상징





아주 먼 옛날. 위대한 승리의 신 니르케는 어느 인간에게 명령했다.



「대륙을 통일하고 평화를 가져오라.」



잦은 전쟁으로 혼란하던 시절. 그 목소리를 듣게 된 여자는 기꺼이 무기를 들었다. 무질서에서 시작된 폐해는 신만이 아는 일이 아니었다. 평화를 쟁취하기 위하여 신에게 축복을 받게 된 여자는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며 조각난 땅을 이어 붙였다.

그리고 마침내 최초의 황제가 되어 온전해진 대륙을 하늘에 진상했다.

소원해 마지않던 것들을 두 눈에 담게 된 니르케는 흡족함을 감추지 못했다. 황폐해진 대륙에 축복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뿌리부터 썩은 초목을 살려 과수가 넘치게 하고 불타고 뒤집힌 땅에 양분을 흩뿌렸다. 대륙 안팎으로 검어진 물길을 정화하고 얼어붙은 대기를 녹여 봄을 깨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차고 넘치게 된 마음을 표하기에 부족했다.

위대한 승리의 신은 고민했다.

이 기쁨을 어떻게 노래해야 좋을까? 저의 뜻을 받들어 최초의 황제가 된 여자에게 무엇을 주어야 이 마음이 전해질까? 아! 인간은 가족을 귀히 여긴다고 했다. 외로움을 두려워한다고 했다. 그러니 황제와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반려를 만들어 주자.

니르케는 세상에 있는 모든 아름다움을 끌어모아 몸을 빚고 그것의 눈과 머리에 금색으로 빛나는 생명을 불어 넣었다. 완성된 피조물이 황제와 영원히 함께할 수 있도록 축복을 더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신실하던 종은 처음으로 신의 뜻을 거역했다.



‘위대한 신 니르케여. 저에게는 이미 반려가 있습니다.’



최초의 황제가 된 여자에게는 오래전부터 곁을 지키던 사내가 있었다. 보라색 눈을 가진 그녀는 신에게 선택받을 만큼 강인한 정신을 지니고 있었고, 그 강인함은 신 앞에서도 결코 꺾이지 않았다.

황제를 사랑했던 승리의 신 니르케는 진노하는 대신 시간을 들여 생각했다. 뜻을 따라 주었다고는 하나 인간은 본디 스스로 사고하는 생물이었다. 마음을 표하는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크게 깨달은 신은 뜻을 거두고 인간이 가진 자유를 축복했다.

세상은 신의 자애에 다시 한번 탄복했고, 니르케를 자유의 신으로 섬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를 듣게 된 어린 글로리아는 둥근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위대한 신과 용맹한 황제를 찬양하기 위한 신화였으니 그 둘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음은 알고 있지만, 아이는 다른 것이 궁금했다.

신은 만족했고, 황제와 반려는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만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황제의 반려가 되기 위해 만들어졌던 아름다운 피조물은 어떻게 되었을까?







황제의 방을 지키던 시종과 호위들은 눈을 내리깐 채 마른침을 삼켰다. 일국의 황제와 공작이 한 자리에서 차를 마시는 광경은 평화롭고 고상하며 기품까지 넘쳐흘렸지만, 그럴싸한 것은 겉보기뿐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방 하나쯤은 거뜬하게 날려 버릴 거대한 폭풍의 중심에서 그들은 불안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숨을 죽였다.

오래지 않아 제국의 황제, 티타니아 헬렌 아발론이 피처럼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입을 열었다.

“공작과 단둘이 있고 싶군.”

애타게 기다리던 축객령이었다. 귀 끝을 바짝 세워 그녀의 목소리를 한 톨도 남김없이 새겨들은 이들은 단 한 마디도 더하지 않고 몸을 움직였다. 질 좋은 상아와 정련된 금으로 만들어진 문이 조용히 닫혔다.

때마침 막 찻잔을 비운 제국의 공작, 글로리아 베네딕트 레펠은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을 내리쳤다. 짧은 은발이 가늘게 흔들렸다.

“폐하.”

“전부 내보내 줬잖니? 작위는 잠깐 내려놓으렴.”

뭘 잘했다고 이렇게까지 당당한지 알 수가 없다. 글로리아는 시종들이 아침부터 정돈해 준 머리를 뒤집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조금 전과 달리 비뚜름해진 그녀는 티타니아와 같은 보라색 눈을 치켜뜨며 입을 열었다.

“인간이 양심이 있으면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렇지 않아, 언니? 응?”

“오, 사랑하는 내 동생아. 초월자인 네가 인간의 양심을 논하다니 우습기 그지없구나.”

글로리아는 배우지 못한 들짐승처럼 크게 우짖고 싶은 마음을 겨우 누르며 찻주전자를 들었다. 일단 속을 달래기 위해 미지근해진 차를 따라 한 번에 들이켰다.

그래도 폭발은 막을 수 없었다.

“사랑하는 동생 좋아하시네! 얼마나 사랑하면 동생을 적국의 수괴랑 결혼시킬 수 있는 건데? 백 번 천 번 양보해서 귀족으로 살고 있으니 정략결혼은 할 수 있다 이거야. 그런데 나도 정말 못 해 먹겠다 싶은 게 있거든. 언니 같으면 전장에서 만날 때마다 모가지를 따겠다고 덤벼들던 놈이랑 한 침대에서 잘 수 있어? 그게 가능해? 가능하냐고!”

티타니아는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당연히 불가능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국경이 붙어 있는 두 제국, 아발론과 바로디는 3년간의 전쟁 끝에 평화 협정을 맺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바로디의 황태자가 사신으로 본국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입으로는 평화를 논하고 있다지만, 한 달 전까지만 해도 격하게 치고받던 적국의 수도로 계승 서열 1위를 보낸다는 사실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바로디는 사자의 입에 황태자의 머리를 집어넣어 백성들 앞에서 평화를 절실히 바라고 있음을 증명했다. 이에 아발론도 그만한 반응을 보여야 했다. 일이 틀어졌을 때 전쟁의 명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증명해 보여야 했다.

“최전선에서 검과 창을 휘두르던 둘이 부부로 맺어진다니, 평화의 상징으로 이만한 게 또 있겠니? 그리고 이제는 적국이 아니고, 나그리제 후작도 수괴가 아니란다.”

파하. 술을 거하게 마신 것처럼 입으로 바람 소리를 낸 글로리아가 그녀를 비꼬았다.

“와, 진짜, 폐하도 미혼이신데 신하 된 제가 어떻게 먼저 결혼을 합니까?”

티타니아는 픽하니 웃으며 받아쳤다.

“이럴 때만 군신의 예를 강조하는구나. 황제의 이름으로 허한다고 칙서라도 내려 주련? 그리고 공작을 선택한 건 너란다. 내 명령을 듣기 싫으면 네가 황제를 하지 그랬니.”

글로리아와 티타니아는 레펠 공작가에서 태어난 쌍둥이 자매였다. 자식이 없었던 전대 황제는 황실의 피를 가장 진하게 이어받은 둘을 후계로 점찍었고, 이에 장녀였던 티타니아가 황제, 차녀였던 글로리아가 공작이 된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레펠가의 차녀가 금관의 무게를 온몸으로 거부하던 어린 날을 살짝 후회하기 무섭게 티타니아가 입을 열었다.

“내가 너희를 영원히 붙여 두려는 건 아니란다. 평화의 상징이라고는 하지만 그런 건 잠깐만 보여 주면 되니 말이야. 그쪽 증인으로 서게 될 황태자도 1년이면 충분하다고 하더구나.”

이혼이 죄악이 아닌 세상에서 두 원수를 길게 붙여 두어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말 그대로 소문이 무성할 때 잠깐만 버텨 주면 될 일이었다. 평화 협정 후, 관심이 사그라지면 따로 살다가 도장을 찍고 각자의 길을 걸으면 된다.

그 잠깐이 좀 많이 괴로울 수도 있지만, 내 일은 아니니까.

“그러니 그냥 네 애인 군단에 너와 같은 초월자를 한 명 들이는 거라고 생각하렴. 전쟁터에서 질리도록 봤으니 알겠지만, 외견은 괜찮지 않니? 인간을 넘어섰으니 체력도 나쁘지 않을 테고. 네 마음에 들 만한 남자라고 생각한다만.”

얌전히 들어 주고 있던 글로리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 표정을 찡그렸다. 그래 얼굴, 아주 중요하다. 체력도 매우 중요했다. 아직 까 보지 못한 물건까지 훌륭하다면 잠자리 상대로 그만한 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저를 죽이겠다고 덤벼들던 상대였다. 정신적 만족과 안정을 얻어야 할 잠자리에서 목숨의 위협을 받느니 안 하고 말겠다.

“차라리 언니 하렘에 있는 놈을 하나 들고 도주하지 그놈이랑은 싫어.”

“내 깜찍한 동생이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다고 믿고 싶구나. 잠자리는 선택 사항이니 둘이 알아서 합의 보도록 하고 1년만 버티렴. 황제보다는 공작이 이혼하는 게 낫지 않겠니?”

구구절절 맞는 소리를 늘어놓은 티타니아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국의 귀족 된 자, 권리를 누린 만큼 의무를 행하라.”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기사로 산 세월 탓인지 글로리아는 약자의 부탁에 한없이 취약했다. 숨 쉬듯 하던 거절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의지가 가장 쓸모없어지는 순간은 티타니아를 상대할 때였다.

서로에게 작위가 없던 시절부터 글로리아는 티타니아의 뜻을 꺾지 못했다. 말다툼이라도 하게 되는 날이면 논리 앞에서 산산이 조각나고는 했다. 머리가 제법 굵은 지금이라면 또 모를 일이지만, 이미 군신 관계가 되었으니 하극상을 벌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얌전히 따르고 있지.

남들이 알면 기함할 만한 생각을 한 글로리아가 시종을 대동하고 파티장에 들어섰다. 종전과 평화 협정을 축하하는 자리였다. 치렁치렁한 드레스를 능숙하게 끌며 인사를 받던 그녀는 머지않아 벽에 붙어 자리를 장식했다.

창을 들고 전장을 누볐다고 드레스와 보석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좋아했다. 제국 유일의 공작가는 재력이 넘쳤고 자매는 그 영향을 고스란히 받아 파티에서의 화려함을 미덕으로 여겼다.

은실로 문양을 새겨 넣은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던 글로리아는 상체를 가린 숄을 슬그머니 그러쥐었다. 등과 다리가 훤히 보이는 드레스와 목과 쇄골에 자리한 다이아 목걸이. 하인들의 정성으로 만들어진 머리 모양까지 더해 대부분의 것들이 마음에 들었지만, 단 한 가지가 모든 즐거움을 짓밟았다.

“……레펠 공작 전하 아니십니까.”

글로리아는 자신이 그 어느 순간보다 인내하고 있다고 비아토르교의 위대한 신 니르케를 걸고 말할 수 있었다.

오러로 창을 구성해 저치의 입을 찢어 놓지 않은 것을 보라. 이 얼마나 자비로운가!

“오랜만입니다. 나그리제 후작.”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그가 은근슬쩍 시비를 걸어온들 오늘은 밟아 누를 권력이 있었다. 어느 한쪽이 패전한 전쟁이 아니므로 두 제국의 작위는 동일한 가치를 지녔다.

즉, 저는 공작이고 저치는 후작이라. 달린 머리가 볼품없는 장식이 아니라면 입을 털어도 정도껏 할 것이다.

검푸른 머리에 맞춰 정복을 차려입은 남자, 빈센트 테오도르 나그리제는 모시는 황태자의 명령 때문에 억지로 결혼하게 생긴 여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전쟁터에서부터 알고 있었지만, 가는 몸은 근육으로 다부졌고, 뒷목을 간신히 가리는 짧은 은발은 매끄러웠으며, 그에 감싸인 얼굴은 수려했다. 성격만 떼 놓고 보면 순수하게 감탄할 수 있을 만큼.

문제는 그 성격이 떼 놓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에 있었다.

“인연이 닿다 못해 섞여서 부부가 될 위기에 놓였군요. 통탄할 일입니다.”

“통탄이라는 말로 이 참담함을 다 표할 수 있을까요? 인고의 한 해가 되겠군요.”

글로리아가 한 수 접어 주는 상대는 티타니아뿐이었고, 빈센트가 따르는 상대는 황태자뿐이었다. 하하. 호호. 작위적인 웃음을 연출하던 둘 주위로 냉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눈치 빠르고, 유능하며, 경험까지 많은 글로리아의 시종이자 부관이 참석해 있었으나, 두 초월자의 기세를 그녀 혼자 잠재울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제국에서 가장 튼튼하고 안전해야 할 건물의 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와인 잔에 물결이 일고 천장에 박혀 있던 샹들리에의 불빛이 꺼질 듯 아른거렸다. 심상치 않은 낌새를 알아챈 사람들이 머리를 쥐어 싸며 대피를 고민할 즈음 보다 못한 아발론 제국의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이 경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것을 잊었군.”

현자의 마법이 실린 목소리는 벼락처럼 떨어져 두 초월자의 귀를 강타했다. 놀라서 어안이 벙벙해진 남녀를 상대로 티타니아는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글로리아는 그 얼굴에서 공포를 느꼈다.

“전쟁터의 영웅들이 회포를 풀기 바라는 바. 황궁 연무장에서의 대련을 허가하지.”

티타니아 근처에 있던 재무 대신의 얼굴이 흙빛으로 질렸다. 초월자 하나가 난리를 쳐도 손해가 막심한 판국에 둘에게 그런 기회를 주다니! 귀빈들에게는 유례없는 볼거리가 되겠지만, 황실 재정에는 그리 이득 될 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거 나쁘지 않군요. 쌓인 앙금을 털어 낼 기회가 아닙니까?”

그러나 사신단의 대표였던 제국의 황태자, 윌리엄 오브 바로디는 박수까지 치며 티타니아의 뜻에 동조했다. 표현에 어폐가 조금 있을지는 몰라도 합리적인 판단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냥 두어도 치고받을 테니 이렇게라도 다른 이들의 안전을 우선하는 게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