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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아발론 유일의 초월자 공작이 이국의 후작 나부랭이에게 패배했다는 가정은 이성적으로는 외교 문제지만, 감정적으로는 자존심 문제였다. 나그리제 후작이 그녀와 같은 초월자라고 한들 저의 편이 우열에서 밀리는 꼴은 두고 볼 수가 없다. 그가 황태자의 각진 코를 높여 줄 만큼 잘난 인간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티타니아의 이야기를 얌전하지 못하게 듣고 있던 글로리아는 흰자가 양껏 보일 정도로 눈을 크게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안 졌어! 결착을 못 냈을 뿐이라고!”

지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한 끗 차이로 이기면 이겼지 졌다는 표현은 결코 옳지 않았다. 글로리아는 손끝에 아직도 남아 있는 타격감을 문질렀다. 이 손으로 그 짜증 나는 얼굴을 힘껏 치고 발로는 배를 걷어찼다. 상체와 하체를 분리해 놓지 못한 것은 아쉽지만, 온몸의 감각점이 곤두서는 짜릿함은 환상이 아닌 현실이었다.

테이블을 뒤엎을 기세로 눈에 불을 켠 글로리아를 미심쩍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티타니아는, 결이 고운 이마를 가볍게 두드리며 성난 눈썹을 아래로 내렸다. 조금 흥분한 탓에 사고가 매끄럽지 못했던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패배한 글로리아가 한 침대에서 눈을 뜨게 된 승자를 가만둘 리 없었다.

가정이라는 분노에 현실이라는 모래를 뿌려 둔 그녀는, 다시 이성적인 황제로 돌아가기 위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래……. 진 게 아니면 됐다. 결착을 못 냈다니 그것참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네게 주어진 기회는 끝났단다. 아발론에 누가 될지도 모르는 일을 두 번이나 행할 수는 없지. 그러니 앞으로는 사이좋게 지내렴.”

바로디의 황태자와 자신의 뜻이 아무리 겹쳐도 ‘평화의 상징’이 된 것은 글로리아와 나그리제 후작이었다. 파티의 분위기를 돋운다는 명목하에 행해진 대련도 한 번이니 가능한 것. 앞으로는 모두에게 보이기 위해서라도 사이좋은 부부 행세를 하게 하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이런 티타니아의 생각을 알지 못했던 글로리아는 입을 얄밉게도 삐죽였다.

사이좋게 지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누구 마음 대…… 으악!”

속이 시원해질 정도로 얼굴을 으깨 놓지 못했으니 끝난 게 아니었다. 하지만 제대로 항변하기도 전에 멀쩡하던 찻잔이 화려하게 폭발하며 담겨 있던 붉은 찻물이 테이블 귀퉁이를 갉아먹었다. 깨진 그릇 조각이 위협적일 수는 있어도 평범한 찻물이 나무와 유리를 녹일 리 없다. 절대로. 반드시 마법적인 현상이었다.

놀라서 한쪽 구석으로 찌그러진 동생을 두고 언니가 입을 열었다. 독을 감별하는 시종이 소리를 듣고 달려왔지만, 티타니아는 개의치 않았다.

“당연히 황제인 내 마음대로란다. 파티 분위기를 망치는 일이 한 번 더 일어나면, 3일 밤낮 대련이 아니라 통구이로 만들어 줄 테니 할 수 있으면 해 보렴.”







황태자를 위해 마련된 방은 티타니아의 응접실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윌리엄은 긴 복도를 지나 우측으로 꺾었을 때 바로 보이는 그곳으로 빈센트를 데려가, 표정을 굳히고 있는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미안하게 되었네.”

윌리엄은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지만, 여러모로 심경이 복잡했던 빈센트는 괜찮다고 대답할 수 없었다. 결국, 겸연쩍게 웃어 보인 윌리엄이 이전보다 강한 힘으로 그의 등을 퍽퍽 내리쳤다.

두 초월자의 결합이라니, 참으로 호쾌한 판단이었다. 평화 협정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황태자의 몸으로 적진에 들어왔는데, 이를 강물에 떨어진 이슬 한 방울만큼이나 가치 없는 일로 만들어 버린 판단이기도 했다.

평화의 상징. 초월자의 결합. 백성들은 이제 그런 것들만 기억하게 될 터.

웃음을 멈춘 황태자가 뻐근해진 입을 닫았다. 여기서 더욱 기가 막히는 것은 그 판단을, 그 혼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아발론의 황제는 하나뿐인 혈육이자 초월자를 내세워 평화를 갈구하는데 바로디는 왜 받아들이지 않는가? 왜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존재들의 결합을 반대하는가?

윌리엄은 닫혀 있던 입에 힘을 더했다. 이쯤 되면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발론의 황제는 핏줄하나로 군림하는 이가 아니었다.

사실 더 큰 문제는…….

아발론이 아닌 바로디의 사정을 떠올리려던 그는 끓어오르려는 속을 급히 정돈하며 다시 빈센트의 어깨를 두드렸다.

“다시 한번 미안하다 말하겠네. 그러나 방법은 하나뿐이야.”

“……전하.”

“그대가 나를 미래의 주군으로 생각한다면, 1년만 버텨 주게.”

우직한 기사에게 흘러든 주군이라는 단어는 버릴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글로리아에 대한 적의와 윌리엄을 향한 충성심을 저울질하던 빈센트는 결국 조용히 입을 닫았다.

그래. 기껏해야 1년이었다.







내쫓기듯 응접실 밖으로 나오게 된 글로리아는 난폭하게 걸어 움직였다. 성질머리 같아서는 벽을 부수고 도주하고 싶었으나 마지막 남은 귀족의 품격이 비바람 속에서 아른거렸다.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지르며 복도를 걷던 그녀는 텁텁해진 입을 우물거렸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스물일곱 해의 경험으로 비추어 볼 때, 티타니아의 선언이 거두어질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거두려 한다면 무력으로라도 뜻을 이루겠지.

어린 시절. 아니, 철없던 시절 강철로 만든 검을 녹이는 현자의 마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글로리아는 서늘해진 팔을 문질렀다. 초월자라도 근본은 인간이었다. 고통을 안길 지옥 불에 뛰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망할.

짤막하고 험한 소리를 머릿속에서 툭 하고 터뜨린다. 그러다 고개를 돌렸을 때,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빈센트를 발견한 글로리아는 기나긴 복도의 중앙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가까이에서 마주하게 된 둘은 서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낯빛만 보아도 예상되는 바가 있었다.

너도 일이 안 풀렸구나.

빈센트에게 동정심이 생길 정도로 착잡해진 글로리아가 입을 열었다.

“이 결혼이 정치적 결합의 상징이라는 것은, 후작, 그대도 알고 있을 겁니다.”

최전선에서 맞붙던 두 남녀의 결합은 부풀려 미화시킬 구석이 차고 넘쳤다. 졸지에 평화의 상징이자 보험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은 탐탁지 않지만 필요한 일임은 분명했다.

글로리아가 입술을 달싹였다. 말이 잘 이어지지 않았다. 저치, 아니, 후작 앞에서 말을 고르려니 삭은 풀이 말라붙은 수레바퀴처럼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입가를 살짝 비틀며 품위라는 단어를 수십 번씩 떠올렸다. 효과가 없지는 않은 모양인지 꾸물거리던 혀가 조금씩 풀어졌다.

“1년입니다. 그 기간만큼은…….”

잠시 머뭇거리던 글로리아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대를 나의 비로 인정합니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유한 표현이었다. 무려 인정을 논한 것이다.

그러나 ‘노력’이나 ‘합의’ 같은 건설적인 대사를 상상하고 있었던 빈센트의 표정은 가차 없이 구겨졌다. 지금껏 들어 본 적 없고 앞으로도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왜 튀어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휴전을 원하면 말을 골라서 해야 하지 않나?

간신히 안정되어 가던 정신이 흉물스러운 바늘에 낚여 다시 뭍으로 오르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달리 반박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법이 발전하고 신체적 차이가 의미를 잃으면서 세상도 뒤집혔다. 남자라고 다 작위를 받고, 여자라고 다 성을 바꾸는 게 아니게 된 세상에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소속되어야 한다면, 종합적인 힘의 우위를 확인하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머리 꼭대기가 빨갛게 익을 정도로 짜증이 나는 것은 눈앞의 인간이 황가의 혈통을 가진 공작이라는 사실이었다.

본인이 공작 부인이 되는 것보다 그녀가 후작 부인이 되는 것이 큰 격하며 손해라는 사실에 틀림은 없었다.

같은 내용을 떠올렸지만, 승자 된 처지에서 패자의 분노를 가늠하지 못한 글로리아는 빈센트의 어깨를 가증스럽게 두드리는 대신 잘해 보자는 뜻으로 손을 내밀었다.

마지못해 행해진 악수 이후 두 사람이 다시 얼굴을 보게 된 날은, 두 사람의 결혼식 당일이었다.







황제와의 기 싸움에서 밀린 주인 덕에 날로 고생이 늘어 가던 공작가의 어느 사용인은, 물건을 옮기는 틈을 타 절실한 고민 상태에 돌입했다.

글로리아가 주는 봉급이 젊은 수전노의 얼어붙은 마음을 녹일 정도로 따스한 이유는, 이따금 심신의 평화를 위협하는 노동력을 요하는 탓이었다. 공작가의 위신을 떨어뜨리지 않을 만한 결혼식을 닷새 만에 준비하라니. 자지도 먹지도 씻지도 말라는 소리와 뜻이 같다. 요령껏 인간의 삶을 영위하면서도 불만을 다 삭이지 못한 그는 물건을 옮기느라 더러워진 손을 털었다.

어떻게든 구색은 갖추었지만, 만족스러운 수준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뜯어고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앞으로 네 시간밖에 안 남았네.”

낡은 은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사용인은 외워 둔 손님 명단을 혀 안에서 굴려 보았다. 다른 파티에 참석할 때는 지각을 빵 먹듯 하는 귀족이라도 황제가 직접 오는 공작의 결혼식에서까지 정신을 빼놓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도착해 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니 회장 정리에는 큰 시간이 들지 않을 터. 과연 그때까지 모든 준비를 끝마칠 수 있을 것인가.

새삼 참담해진 사용인은 빠른 걸음으로 저택 안을 누비기 시작했다. 쏜살같이 돌아다니는 통에 짤막한 인사조차 제대로 귀에 걸 수 없었지만, 예의를 차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본인이 직접 손질해 둔 장소를 하나씩 둘러본 그는 쉬지 않고 움직여 지하로 내려왔다. 결혼식에 쓰일 술의 양을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고풍스러운 저택에서 가장 추운 땅을 밟게 된 그가 지하를 누비다 문득 촉각을 곤두세웠다. 잿빛 모퉁이에서 낯선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꼬리처럼 빠져나와 있던 부분이 내빼듯 줄어들었다. 두꺼운 정장 바지를 툭툭 턴 사용인은 바로 그것의 뒤를 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길쭉한 다리가 기민하게 움직였다. 굵은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단걸음에 모퉁이를 점령한 그는 벽을 짚으며 그림자가 사라진 방향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그러나 길게 이어진 복도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근처에 있는 창고를 침착하게 뒤집어도 마찬가지였다. 아까운 시간을 쪼개어 다시 한번 살폈으나 이전과 같은 그림자는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의문에 휩싸인 사용인이 뺨을 두드렸다.

피곤해서 환각이라도 본건가?

하기야 지나치게 소모적인 나날이었다. 배포가 큰 주인님께서 상여를 약속한들 당장의 피로가 물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아. 괜히 시간만 버렸군. 본인의 시력을 크게 믿지 않았던 사용인은 고개를 흔들며 와인 창고 쪽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그가 사라진 자리로 검은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결혼식은 수도에 있는 레펠 공작의 저택에서 진행되었다. 하인 다섯의 손을 거쳐 새하얀 드레스를 차려입은 글로리아는 얼굴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참으며 꾸역꾸역 시간을 낭비했다.

혼인 서약서는 이미 작성되었고 초야라 말하기도 우습지만 한 침대에서 깨어난 적도 있다. 손끝이 떨리고, 심장은 쿵쾅거리고, 다리는 가만둘 수 없어서 동동 굴리게 된다는 결혼식이지만 큼지막한 일을 모두 겪어 버린 그녀에게 남은 것은 지루함뿐이었다.

정신이 반쯤 잠긴 상태로 본식을 마친 글로리아는 코가 익을 정도로 독한 술이 없는 것을 아쉬워하며 샴페인 잔을 집어 들었다. 조금 전까지 그녀와 억지로 붙어 있던 빈센트는 황태자와 함께 돌아다니고 있었다.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 술을 한입에 털어 넣은 글로리아가 입을 열었다.

“소피아.”

“네. 전하.”

“너는 이 상황이 이해가 돼?”

주황색 눈을 천천히 깜빡이던 소피아는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정치적으로는 그렇습니다.”

“정치를 빼면?”

“불가능한 일은 구태여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머리 만지시면 안 됩니다.”

저도 모르게 머리를 건드리려고 했던 글로리아가 무안해진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하기야 그랬다. 정치를 제할 수 없는 인생인데 그리 꿈을 꾸어 무엇에 쓰겠는가.

글로리아는 빈 잔을 손에서 놓았다. 그리고 다른 술을 부탁하기 위해 본인의 시종을 쳐다보았으나 그녀의 시선은 먼 곳에 있었다. 호기심이 돋은 글로리아는 소피아가 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을 눈에 담았다.

갈색 머리카락이 너저분하게 잘린 사용인이었다. 입은 것은 다른 사용인들과 다르지 않으나 걸음이 어수룩하다. 생긴 건 어떻지? 남자의 키와 체격을 단번에 파악한 글로리아가 방정맞은 소리를 잇기 직전, 소피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제 기억력을 얼마나 믿으십니까?”

뜬금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글로리아는 그녀의 의중을 파악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펠 공작과 그녀의 부관은 하루 이틀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었다.

늘씬하게 뻗은 다리에 힘을 주어 땅을 밟았다. 뛰쳐 나갈 준비를 끝낸 가는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 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믿지.”

“저 하나뿐이지만, 가문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뭐가 문제야?”

소피아가 대답했다.

“저 사용인. 처음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