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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홀의 벽 한가운데, 황금 태양 장식이 달린 거대한 문이 열렸다.

젠은 붉은 눈의 그 남자를 멀리서 확인했다.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그가 좌중을 훑어 내리자 압박감이 밀려왔다. 자신과 함께 협곡에 떨어졌던 그자가 맞는지 싶을 정도로, 그의 기세는 숨을 쉴 수 없게 만들었다.

젠은 그를 만나면 당장 가서 자신의 감정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그가 눈앞에 보이자 발끝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이 밀려왔다. 서늘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올랐다.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목을 더듬었다. 죽음의 트라우마가 생각보다 큰 모양이었다.

순간.

“헤르덴 황태자 전하 만세! 대제국 셀티아여, 영원하라! 와아아아아!”

어마어마한 함성이 황성을 뒤흔들었다. 귀족들이 환호하며 손을 추켜올렸다. 홀 한쪽 구석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젠은 목구멍이 마른 듯한 갑갑함을 느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와인을 한입에 털어 넣었다.

자신의 조국을 짓밟은 잔혹한 짐승 떼들. 그들이 환호하며 기뻐한다. 속이 울렁거린다. 젠은 구역질이 날 듯해, 속을 달래려 야외 정원 쪽으로 홀로 몸을 돌렸다.



정원으로 나온 젠은 맑은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연회장 옆에 딸린 영광의 정원은 귀족들의 은밀한 연애 장소였다. 연회가 한창인 이때에도 여기저기서 은밀하고 야릇한 신음 소리들이 들려왔다.

빌어먹을! 숨이 가빠졌다. 또 시작이다. 온몸에 세포가 음심에 물들어 갔다. 황태자와 키스를 나눈 이후, 자꾸만 머릿속에 그의 모습이 떠오르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화끈한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간다.

젠은 자신의 둔부까지 미친 듯이 밀려왔다가 사라지는 열기에 저항을 해 봤지만 쉽지가 않았다. 그로프가 차남이랑 괜히 헤어졌나. 좀 더 도움이 되었을 것 같은데 잘못했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젠은 솟아오르는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정원을 한참 걸었다. 악취미일까 싶을 정도로 모든 나무들이 정교하게 각 잡혀 다듬어져 있었다. 그 모양새를 보니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갑갑했다.

젠은 손을 들어 한 치의 틈도 없이 정렬되어 있는 나무의 가지를 꺾어 냈다. 조금 흐트러진 모습을 보니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꺾은 나뭇가지는 장검 정도의 길이였다. 나뭇가지를 휙휙 휘둘러 보았다. 잔가지를 손으로 뚝뚝 꺾어 다듬으니 제법 휘두를 맛이 났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와 웃음소리만 멀리서 들려올 뿐이었다.

적당한 곳에 멈춰선 젠은 점점 뜨거워지는 몸을 가라앉히기 위해 나뭇가지를 들고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몸을 움직이니 그나마 달뜬 숨이 가라앉았다.

땀방울이 흐르고 흥이 나자 젠은 그의 특기였던 ‘살로’를 개방하고 온몸의 기감을 열었다. 어떤 적이든 그의 치명적 약점을 찾아 단숨에 죽음으로 이끌 수 있는 검의 길이 황금빛으로 선명하게 보였다.

부스럭―

무아지경으로 나뭇가지를 휘두르던 젠은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순간, 그곳을 향해 나뭇가지를 무섭게 휘둘렀다.

서걱―

날카로운 검에 의해 나뭇가지가 잘려 떨어져 나갔다.

“감히 살검을 휘두르다니!”

낯선 사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젠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날리고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 달빛이 비추며 두 인영이 뚜렷하게 보였다. 검을 든 장신의 사내와 그 뒤에 서 있는 고고한 사내.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내뿜는 듯 보였다.

붉은 눈동자를 본 젠은 목이 날아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두 눈을 크게 부릅떴다.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자신의 목을 쓸어내렸다. 잘 붙어 있구나.

젠장!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자신이 이렇게 무서워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나름 전장에서 굴러먹었다고 생각했으나 마지막의 죽음은 트라우마로 영혼에 새겨져 있었다.



헤르덴과 아토는 조용히 연회장을 빠져나와 영광의 정원을 거닐었다. 아토는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신의 친우인 황태자가 정신적으로 힘들지 않을까 걱정하며 한숨을 쉬어 댔다.

“헤르덴. 정말 누구였던 거야?”

“자네도 아는 사람.”

“누군데?”

“텔딘의 성기사단장.”

아토가 경악에 찬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익히 알고 있던 자다. 전장에서 매번 마주치던 이가 아니던가.

그의 검술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강렬했다. 신성국 텔딘의 여신의 축복을 폭포처럼 쏟아 받은 천재라 불리던 사내. 그와 한번 검을 섞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살로를 눈으로 보고 검으로 그려 낼 줄 아는 자였다.

아토는 헤르덴이 전장에서 그를 볼 때마다 흥분했다는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그를 만날 때마다 유독 취한 듯 흥에 겨워 미친 사람처럼 적군을 쓸어 담던 모습이 생생했다. 마치 누가 더 많이 죽이는지 시합을 하듯, 둘은 그렇게 어울리는 미친놈들이었다.

“그자가 쉽게 넘어오진 않았을 텐데?”

“……우연이었어.”

헤르덴이 말을 아꼈다.

그때, 어디선가 붕붕거리는, 무언가를 휘두르는 소리가 들렸다. 헤르덴과 아토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달빛이 비추는 그곳에 한 앳된 청년이 검무를 추고 있었다. 손에 나뭇가지를 들고 이리저리 찌르고 휘두르다 멈춰 서서 들뜬 한숨을 내쉬던 그는, 어느 순간 무아지경이 되어 아름답기 그지없는 금빛 살로를 그렸다.

헤르덴과 아토의 두 눈이 점점 커졌다. 저 살로는 전장에서 그렇게 경이로워했던 성기사의 것이 아니던가? 조금 전에도 그 남자의 이야기를 하면서 왔는데 눈앞에서 같은 검술을 보게 되니 둘 다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달빛에 비친 청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청년은 마치 달의 여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의 미모를 뽐내며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확인하고 싶은 마음에 다가서다가 인기척을 내고 말았다. 순간 청년은 기척을 느꼈는지 살검의 경로를 따라 나뭇가지를 휘둘러 헤르덴의 목을 치려 했다.

비록 나뭇가지일지라도 맞으면 치명상이란 걸 그들은 알고 있었다. 아토가 식은땀을 흘리며 재빨리 나뭇가지를 잘라 냈다. 무서운 기세에 등골이 서늘해진다. 전장에서 돌아온 후 무료하기만 했던 일상에서 오래간만에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감히 살검을 휘두르다니!”

아토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청년은 어느새 뒤로 저만큼 물러서 있다. 검의 간격을 아는 자이다. 그들 사이에 긴장감이 흘렀다.

헤르덴은 청년을 마주친 순간 척추서부터 전기가 타고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그가 죽인 성기사와 마주친 것처럼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뿜어져 폭발했다.

아토가 인상을 찡그렸다. 친우의 숨 막히는 감정 덩어리가 곁에 있는 자신에게도 밀려들어 왔다. 헤르덴이 폭주하려 한다.

헤르덴의 입가에 꽃 같은 웃음이 피어올랐다. 눈앞에 있는 청년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었다.

젠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그를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그의 생각만 하면 음욕에 몸을 비틀었는데, 정작 눈앞에서 남자를 만나고 보니 모든 감정이 식어 내리는 듯했다. 그저 목이 잘렸던 순간의 충격만이 온몸을 지배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양 손바닥을 펼쳐 얼굴을 철썩 때렸다.

“젠장. 그러니까 누가 함부로 검의 간격에 들어와. 네놈들은 눈이 장식이냐?”

순간 정적이 흘렀다. 가차 없는 막말에 아토 페레즈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헤르덴은 청년의 말투를 듣는 순간 잔잔히 진동하던 감정의 덩어리가 크게 파문을 그리며 파도치는 것을 느꼈다.

“무엄하다! 황태자 전하께 함부로 입을 놀리다니!”

움찔―

순간 젠은 큰 실수를 깨달았다. 자신이 알던 그는 단순한 기사가 아니었다. 전장에서 그와는 그저 서로 죽고 죽이던 적이 아니던가. 게다가 나이도 제법 비슷해 보였다. 공대 따위 할 일이 없으니 평소에 쓰던 말이 그대로 튀어나간 것이다.

“아……. 크음, 그대는 황태자였지…….”

그녀가 잠시 주춤하는 사이였다. 갑작스럽게 온몸이 폭발하듯 강렬한 기운이 젠을 휘감았다. 압도적인 기운이 찍어 누르듯, 그녀의 눈앞에 헤르덴이 순식간에 다가섰다. 아토가 말릴 새도 없이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하윽…….”

젠이 신음을 내질렀다. 영혼이 강하게 진동하며 뇌를 뒤 흔든다. 그녀는 경련을 하듯 온몸을 비틀었다.

그때 헤르덴이 눌러 참는 침음성을 내더니 순간 이성을 잃고 그녀의 입술에 제 입술을 거칠게 부벼 댔다. 그는 그녀의 입술을 잘근잘근 씹고, 곧 벌어진 입 속으로 자신의 혀를 밀어 넣어 치열을 핥아 댔다.

“아흡……. 으……. 그만!”

젠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동안 다른 이들과도 키스를 해 왔지만, 그저 정열적이고 과감하기만 할 뿐 이렇게 심장이 터질 듯한 원초적인 느낌은 아니었다. 그가 내뿜는 아드레날린이 세포 하나하나에 스며들며 젠의 교감 신경을 강하게 자극해 온다.

황태자의 숨결 한번, 호흡 한번에 젠의 성감이 쭈뼛하고 타고 올랐다. 그는 집요하게 젠의 연한 목덜미를 핥아 내리며 베어 물었다. 그녀가 느끼는 지점만 집착적으로 애무하니, 젠은 머릿속에서 불꽃이 터지는 것만 같아 신음을 절로 내뱉고 말았다.

“제발……. 하앗, 그만해……. 아으읏.”

헤르덴은 젠이 흐느끼듯 내뱉은 신음 소리에 온몸의 피가 끓어오르는 충격과 전율을 느꼈다. 그는 일렁이는 불길에 사로잡힌 듯 멍한 눈으로, 한동안 그녀의 입술과 말랑한 혀를 농밀하게 빨아 댔다.

잠시 후 붉은 눈동자가 제 색을 찾자, 그는 샐쭉이 제 눈을 반으로 접으며 여상하게 말했다.

“돌아왔네?”

“하아……?”

젠은 더운 숨을 몰아쉬며, 자신에게 미소를 짓는 남자의 붉은 눈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