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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혼란스러웠다.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내리누르며 폭발하는 정복자의 기운에 숨이 막혀 왔다. 자신이 그에게 배신 아닌 배신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찰나의 시간이었다.

젠이 죽음에 이르렀을 때 보았던 그의 두 눈은 희열에 차 있었다. 지금처럼.

이건 사랑 따위의 감정이 아니다. 딱 지금 같은 느낌. 붉은 눈의 짐승이 그녀를 사냥하고 즐거워하고 있었다.

자신은 정복당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었다. 젠은 신성국 텔딘의 자랑스런 성기사였다.

그는 단지 자신과 동료들을 학살한 학살자일 뿐이었다. 몸이 떨려 왔다. 목가가 서늘해진다. 방금 자신이 그의 앞에서 내지르던 야릇한 신음 소리가 부끄러워 자살을 하고 싶을 지경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곤 피를 토하듯 으르렁거리며 남자에게 말했다.

“씨발, 목 닦고 기다려. 널 죽여 버릴 테니까!”

그녀는 선전 포고 하듯 외치곤 순식간에 헤르덴과 아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하하, 하하하핫!”

헤르덴이 미친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온몸이 떨려 왔다. 다시는 못 볼 거라 생각했다. 자신을 집어 삼킬 듯 생명의 불길을 태워 올리던 그가 살아 돌아왔다. 비록 헤르덴을 품에 안고 지켜 주려 하던 건장한 몸은 아니었지만, 다른 형태로 자신에게 되돌아왔다.

영원히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레바퀴가 돌기 시작했다. 몸이 타는 듯했다. 온몸의 세포가 그가 돌아왔음을 알려 주고 있다.

곁에서 그 둘을 지켜보던 아토는 한숨 돌렸다. 폭주하는 헤르덴을 말릴 겨를이 없었다. 다행히 진정이 된 것 같긴 한데, 저 둘의 관계는 알 수 없는 의문투성이였다.

단지 그 성기사와 같은 검술을 쓰는 자일 뿐인데 저렇게 달려들 정도로 굶주린 건가 싶었다. 아토는 조금 더 자신의 주군에게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곧, 목숨을 거둬 가겠다는 청년의 말이 떠올라 얼굴을 굳혔다.

“헤르덴, 웃을 일이 아니야. 그 성기사처럼 살로를 알고 검을 휘두르는 자다. 누군지 알고 있는 건가?”

“아니. 저 모습은 나도 몰라. 누군지 알아봐. 과연 내 목을 딸 수 있을지 말이야.”

피가 끓어오르는 듯한 간질거림이 세포 하나하나에 퍼져 나갔다. 예리하게 벼려 놓은 듯한 헤르덴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가 돌아왔다.



젠은 영광의 정원을 빠르게 벗어났다.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참을 수 없이 화가 나, 거칠게 홀 안을 박차고 들어갔다.

이런 등신! 접시물에 코 박고 죽을 놈! 착각도 대차게 했구나. 어떻게 적군의 수장에게 한순간에 빠져 사랑이란 거한 착각을 했을까? 결국, 그 때문에 죽임이나 당하고 말이다. 자신의 한심함에 열불이 난다. 천하의 쳐 죽일 놈!

젠은 연회장을 빠져나와 황성 근처의 술집으로 향했다. 승전을 자축하며 너도나도 모여 술집 안은 시끌벅적 소란스러웠다.

그녀는 구석에 앉아 술을 들이켰다. 한심한 착각에 조국과 동료들을 배신했다는 생각이 밀려들어 온다. 젠은 자책하며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했다. 술을 마시는 건지 술에게 먹히는 건지 분간할 수 없이 들이마셨다. 모든 걸 잊고 싶어졌다.

머리를 테이블에 박고 술잔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뒤 테이블에서 이야기꾼들이 신이 나 여느 때와 같이 전쟁 에피소드를 늘어놓았다. 그 일행인 남자들은 술을 마시며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게 말이야! 이게 하이라이트야! 황태자 전하께서 그 텔딘의 성기사단장 있잖아! 그놈을 딱! 찍어 놨었대. 저놈의 목은 내 것이다, 하고 말이야.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내 아는 기사님이 말하길 전하께서 밤마다 성기사 놈의 초상화에 대고 사정을 해 댔다더라. 완전 능멸당한 거지.”

“아. 그거 나도 들었네. 첨엔 믿지 못했는데, 아주 유명하더군. 그 사건.”

“그 성기사 엄청난 무인이었다며?”

“큭큭. 그러니까 능욕이란 말이다. 전장에 여자가 있어, 뭐가 있어? 누가 내 초상화 보면서 딸딸이 쳤다고 생각해 봐. 치욕도 그런 치욕이 없을 거네.”

“으하하! 그래서?”

“결국 황태자 전하가 그 녀석의 목을 날려 버리고 이렇게 말했다잖아. ‘다시 태어나거든 여자로 태어나서 내게 봉사하라’라고.”

“키야― 우리 전하 완전 상남자네!”

젠은 순간 자신의 귀가 잘못된 줄 알았다. 뭐?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황태자가 누구 초상화에 사정을 해 대? 이런 상 또라이 변태 자식. 속이 울렁거린다. 그리고 뭐? 다시 태어나면 여자……?

쾅!

젠은 그들의 대화에 기가 막혔다. 그러니까 그놈은 협곡에서 자신을 처음 본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자신을 알고 있었단 말이 아닌가? 그런 놈이 시침을 뚝 떼고 입술을 비벼 댔단 말인가.

놈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왜지? 넌 대체 나에게 무슨 감정을 가지고 그랬던 거냐?

젠은 어질어질한 정신에 테이블 위를 더듬으며 술잔의 손잡이를 잡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대로 그녀는 테이블을 박살 낼 듯 내려치곤, 벌떡 일어나 그들을 향해 분노를 담아 으르렁댔다.

“다시 말해 봐. 뭐라고? 미친 황태자 새끼가 뭐라 했다고?”

황태자를 향한 분노와 욕설이 난무하는 젠의 말을 들은 남자들이 벌떡 일어나 그녀를 둘러쌌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웅이자 정신적 지주인 황태자를 모욕하는 걸 참을 수 없었다. 그것도 건방지게 젊은 사내놈이 술에 절어 연신 막말을 뱉어 대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들이 시비를 걸 듯 젠의 어깨를 툭― 툭― 거칠게 쳐 대자,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며 뒤로 밀렸다.

젠은 그들의 행동에 기가 찼다. 자신이 이런 모습이 되기 전까진 있을 수도 없는 힘겨루기였다. 198센티미터의 키에 근육질로 몸이 좋던 자신에게 그 누가 감히 힘겨루기를 했었을까. 젠은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됐다는 사실이 실감이 나 피식 웃고 말았다.

“하하핫. 미친놈을 추종하는 정신병자들이 여기에 다 모였구나.”

남자들은 그녀의 말에 더욱 아우성을 쳐 대며 테이블을 뒤집어엎고는 쾅쾅 발을 굴려 댔다.

“뭐야, 이 자식은? 황태자 전하께 미친 새끼라니!”

“계집처럼 생긴 놈이 감히 우리 전쟁 영웅께 뭐라는 거야?”

순간 입술이 일그러졌다. 젠은 분노를 담아 주먹을 날렸다.

“영웅 좋아하네! 변태 자식!”

우당탕!

술을 마시던 남자들과 이야기꾼, 그리고 젠이 서로 엉켜 주먹다짐을 해 댔다. 젠은 오러를 주먹에 둘러 남자의 턱을 날려 버렸다. 덩치 좋은 남자가 날아가자 상황은 더욱 아수라장이 되었다.

퍽!

젠의 머리가 뒤흔들렸다. 술에 취한 데다 이성이 날아가기 직전까지 흥분한 그녀는 미처 뒤에서 날아오는 의자를 피하지 못했다.

머리에서 뜨끈한 피가 흘러내렸다. 가발도 저만치 날아가 버리고 그녀의 은청색 긴 머리가 어깨 위를 덮어 내렸다. 뚝뚝 흐르는 피 때문에 머리칼이 붉게 물들어 갔다.

“어? 이게 누구야? 드보라 영애?”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젠은 흐려져 가는 정신을 붙들며 멍하니 2층을 올려다보았다. 계단을 내려오는 남자가 보였다.



그로프 백작가의 차남은 오늘도 황궁 파티에서 일찌감치 귀족 여성을 꾀어냈다. 그는 항상 그랬듯이 황궁 근처 술집에서 진탕 즐기고 있었다. 자신이 꾀어 온 영애의 두툼한 엉덩이를 부여잡고 한창 질퍽거리며 왕복 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미친 황태자 새끼!”

순간 그의 귓속에 황태자를 향한 걸쭉한 욕이 들려왔다. 헐……. 제국의 영웅에게 누가 이런 망발을 입에 담는 걸까 싶어 귀를 기울였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건이 부서지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한창 치고받으며 구르는지 요란스런 소리였다.

구경 중 제일 재미있는 게 불구경과 싸움 구경 아니던가. 게다가 은은하게 오러의 울림이 느껴졌다. 그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흥분에 한껏 달아올라 있는 자신의 파트너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는 여기저기 나뒹구는 자신의 옷가지를 주섬주섬 잽싸게 걸쳐 입었다. 영애는 한참 쾌락에 취해 즐기다가 갑자기 멈춰 버린 상황이 맘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한껏 실망한 영애의 따가운 눈총이 느껴졌다.

그는 계단을 내려오다 아래층에서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거칠어 보이는 남자들 사이에 자신이 익히 잘 아는 사람이 주먹을 날리고 있었다. 평소와는 너무도 다른 차림새였을 뿐.

그녀는 머리에서 피를 철철 흘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드보라 영애?”

그는 그녀를 부르면서도 차마 믿을 수가 없었다. 혹시 다른 이랑 착각을 한 건가 싶어 조심스레 불러 봤는데 그녀는 용케 알아듣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해맑게 웃으며 바닥으로 쓰러져 내렸다.

“빌어먹을!”

미처 옷을 여미지도 못했지만 그는 검을 빼 들고 뛰어 내려갔다. 웬 고급스러운 옷을 차려입은 남자가 다가오자 주먹을 날리던 남자들이 모두 주춤하고 뒤로 물러섰다.

남자들도 치고받던 청년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져 버리자 깜짝 놀라 서로 눈치를 보던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들도 과했단 생각이 드는지 슬금슬금 뒤로 빠지려 했다.

그로프가 차남은 계단을 뛰어넘다시피 내려와 드보라 영애의 머리를 감싸 안고 무섭게 소리쳤다.

“당장 의사를 불러와! 여기서 한 놈이라도 도망치면 그로프 백작가의 이름으로 죽는 게 낫다는 것이 뭔지 알게 해 주지!”

남자들은 ‘그로프 백작가’라는 말을 듣자마자 인상을 찡그리곤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



머리가 욱신거렸다. 게다가 숙취가 올라와서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다. 낯선 나무 천장이 보였다.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몸이 말을 안 듣는다.

끙끙대며 베개에서 머리를 들려 할 때였다. 크고 따듯한 손이 머리를 가볍게 눌러 왔다.

“드보라 영애. 누워 있어.”

젠은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로프 백작가의 차남이 곁에서 걱정스레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그의 손길은 매우 조심스러웠고 부드러웠다.

“끄응……. 여긴 어디야?”

“어디긴. 영애가 난장판 친 술집 2층이야. 아, 그리고 일어나지 마. 두피가 찢어져서 다섯 바늘 정도 꿰맸어. 다행히 머리 속이라 보이진 않을 테니 걱정 말고.”

“…….”

“그 망할 놈들은 알아서 잘 처리했으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오늘 일은 아무도 입 밖에 내지 못할 거야.”

“아……. 신세 졌네.”

“신세를 졌다는 생각이 들면 설명 좀 해 주지. 난 내 앞에 있는 사람이 ‘아델라이드 아노스 드보라’ 영애가 맞는지 진정 의심스러울 정도야.”

의심스럽다면서 얼굴은 걱정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걱정스럽긴 하겠지. 후작가 영애가 주먹다짐을 했으니……. 젠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따뜻하게 마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