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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황가의 핏줄은 강력한 카리스마로 사람들을 호령하고 제왕으로 군림할 힘을 갖고 있었으나, 치명적인 약점이자 강점이 있었다. 평생 단 한 명에게만 각인을 새길 수 있다는 것.

각인을 하면 영혼이 연결되듯 평생 상대방만 바라보고 찾게 된다. 그리고 아이 역시 그 둘 사이에서만 가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배우자에게 각인을 새기는 걸 당연시 여겼다.

절대 배신할 수 없기에, 외척들의 힘이 온전히 황제의 것이 되었다. 이렇듯 정치적으로도 활용되었지만, 배우자가 죽으면 남은 생을 정신적으로 고통받으며 살아야 했다. 각인으로 인해 정신을 놔 버린 이들도 있었기에, 황족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했다.

이런 위험을 알면서도 헤르덴이 젠에게 각인을 시도한 건 정말 무모하기 짝이 없는 선택이었다. 태양처럼 빛나던 그를 죽이지 않으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해도, 그를 죽이면 스스로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헤르덴은 제국의 황태자이자 셀티아의 수장. 셀티아의 존속이 걸린 일이었다. 지도자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라면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반한 이 남자를 죽여야 하는 숙명이라면, 다른 이가 아닌 자신의 손으로 죽이기로!

죽음이란 얼마나 끔찍하고 고통스러울까. 그의 고통을 나눠 갖고 싶었다. 헤르덴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었다. 정신이 미치는 한이 있더라도!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고통이 온다 해도, 성기사의 마지막은 자신의 손으로 장식하고 싶었다. 고통이 밀려올 때마다 사랑했던 그를 영원히 잊지 않으리라.

아토는 사고를 쳐도 단단히 쳐 버린 헤르덴을 향해 적잖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지막이 물었다.

“……헤르덴. 너 미쳤냐? 누구랑 한 건데?”

“남자야.”

“너…… 제정신이야?”

“그런데…… 죽였어. 내가.”

“크…… 흑…….”

아토는 황당함에 입이 절로 벌어졌다. 이게 무슨 제국이 무너지는 소리인가! 제국의 황태자가 혼인 전에 각인을 한 것도 미칠 노릇인데, 상대는 남자에다 이미 죽었단다. 대신들이 알면 거품 물고 쓰러질 대사건이었다.

“야! 너 후계자는 어쩌려고?”

“뭐…… 대충 입양하면 되지.”

아토는 충격으로 뒷목이 뻣뻣해지는 것을 느꼈다. 나이 지긋한 대신들이 종종 혈압으로 뒷목 잡고 쓰러지던데, 지금 제가 그럴 판이었다.

“그보다, 너 정신은 괜찮은 건가?”

“글쎄? 아직 괜찮은 걸 보니 그가 어딘가에 살아 있기라도 한 게 아닐까?”

헤르덴의 터무니없는 말에 아토가 황당한 듯 고개를 저었다. 그가 잘라 낸 성기사의 머리는 온 제국의 기사들이 분명히 보지 않았던가. 설마 헤르덴의 정신이 조금 이상해진 게 아닐까 의심되기 시작했다.

아토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헤르덴은 피식 웃더니 덩치 좋은 친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때 불현듯 헤르덴이 멈칫했다. 아토의 어깨를 짚은 채로 홀 한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아토는 그런 헤르덴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한순간 헤르덴의 감각에 희미한 무언가가 잡혔다 사라졌다. 그의 눈이 번쩍하고 떠졌다. 헤르덴이 입꼬리를 올려 웃기 시작했다.

전쟁터에서 그 성기사와 각인을 한 후 마지막으로 검을 나눴을 때 느꼈던 감각. 그 사슬로 묶인 듯한 감각이 지금, 헤르덴의 영혼을 울려 댔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매섭게 파티 홀을 훑었다. 희미하게 느껴지던 그 감각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영애들이 바짝 긴장하며 모여들었다. 헤르덴은 언제 웃었냐는 듯이 날카로운 얼굴을 하고는 영애들을 훑어보며 뒤돌아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분내가 지독하니 밖으로 나가지. 아토 경.”



***



“너…… 정말 그 꼴로 갈 거냐?”

드보라 후작의 넷째 아들인 알랭은 몹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델라이드의 에스코트를 명령하는 바람에, 꾀어내느라 한 달간 공들였던 자작가 영애의 에스코트를 마다해야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자신 여동생의 모습을 기가 막힌 듯 위아래로 훑어보고 있었다.

검은색 예복에 금수가 아름답게 새겨진 정장 바지. 눈동자 색과 같은 에메랄드빛 허리 장식이 늘씬하게 뻗은 다리를 돋보이게 했다. 은청색의 빛나는 긴 머리칼은 깔끔하게 갈무리하고 짧은 갈색 가발을 썼다. 앞머리 한쪽 끝에 웨이브가 들어가 있어서 은근히 관능적인 느낌도 묻어났다.

뭔가 결심한 듯 꾹 다문 표정. 가슴은 꽁꽁 싸맸는지 판판하기까지 했다.

젠장! 누가 봐도 남자가 아닌가? 아주 미형인 남자! 너무나 잘 어울려 기가 막힐 지경이다.

처음 여동생의 모습을 봤을 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미쳤냐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도도하기 짝이 없던 동생이다. 사교계에서도 그녀는 절벽 위의 꽃으로 유명했다. 그런 동생이 얼마 전부터 검술을 연마하고 집에선 남자 옷을 입어 댔다. 말투나 행동도 어찌나 거칠어졌는지 두 눈 뜨고 못 볼 지경이었다.

게다가 어제만 해도 휘황찬란하게 차려입고 남자들을 만나러 다녔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이번엔 무슨 바람인지 공식적인 자리에서 남장이라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아델라이드를 바라보던 알랭은 더는 동생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준비된 마차가 보였다. 앞장서서 걷던 알랭은 마차를 타기 전 힐긋 동생을 바라보았다. 마치 군인 같은 정제된 발걸음. 그동안 동생의 몸에 배어 있던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차에 오르기 전 알랭은 매번 그랬듯 무의식적으로 아델라이드의 손을 잡아 올려 주려 했다.

탁―

젠은 아델라이드의 넷째 오라비라는 알랭을 보며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위로 오라비가 네 명이나 있다 했다. 그중 첫째는 아직 보지 못했지만, 나머지 세 명은 막내 여동생이 깨어났다는 소식에 한걸음에 달려와 손을 붙잡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젠은 그 순간 남이 받아야 할 사랑을 훔친 것만 같아 어찌나 어색하던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손발이 오그라들기 그지없어, 당연한 친절임에도 알랭이 내민 손을 저도 모르게 가볍게 옆으로 쳐 냈다.

“필요 없습니다. 오늘은 남자이니까요.”

알랭의 손을 가볍게 내친 아델라이드는 기분 나쁘다는 듯이 말하며 마차에 올라탔다. 적어도 알랭에게는 그녀의 기분이 나쁜 것처럼 보였다. 그런 동생을 바라보는 알랭의 표정은 더없이 구겨졌다.



***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

제국의 황성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젠은 황성을 바라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신성국 텔딘의 건축 양식은 아넬린 여신의 자애로움을 강조하기 위해 우아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주로 사용하였다. 은은한 상아색의 건물에 섬세하게 음각을 넣는 방식으로 경건함을 추구했다.

하지만 제국의 황성은 그야말로 돈지랄! 화려하다. 화려함의 끝이었다.

황성 입구부터 색색의 나무와 꽃들이 화려하게 손질되어 있는 거대한 정원이 펼쳐졌다. 또한 정원에는 1미터 간격으로 마법 등불이 뿌려져 있었다. 마치 별이 내려앉은 것 같아 기가 질릴 지경이었다.

건너편에 보이는 황실 마구간조차, 외벽에 금테를 두른 온갖 말들의 역동적인 조각이 새겨져 있었다. 그 화려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연회장으로 가는 복도 천장엔 전쟁의 신이 전투를 하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그려 놓았다. 눈이 부실 정도의 금테와 보석을 두른 건 기본이었다.

거대한 홀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7년 동안의 전쟁을 대승으로 이끈 영웅들. 그들을 위한 승전 파티는 종전을 기념하며 대규모로 이루어졌다.

영웅들을 축하하기 위해 제국의 모든 귀족이 모여들었다. 어린 영애들도 무척 많이 참석했다. 홀 안 여기저기서 맑은 웃음소리들이 들려왔다.

7년간 전쟁을 치르느라 얼굴을 보기 힘들던 대륙 최고의 영웅 황태자는 지금, 스물일곱 살로 미혼이었다. 어려서부터 조각 미남으로 불린 것은 물론, 훗날 강한 군주가 될 것이 자명했다.

대륙을 호령하는 권력을 가질 황태자의 비 자리는 두말 할 것 없이 매력적이었다.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자신의 딸을 황태자의 눈에 들게 하려고 발 벗고 달려온 참이었다.

“알랭 경. 오늘의 에스코트를 마다하시더니 그런 아름다운 남성분과 같이 오셨군요. 제게 이분을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알랭은 자신이 한 달 동안 공들였던 자작가의 여식이 질책하듯 서운한 티를 내자 무척 아쉬워졌다. 게다가 제 동생을 몰라본 듯 곧바로 눈웃음을 치며 꼬리 치는 모습을 보니 씁쓸하기까지 했다.

“제논 켄스너 랭거라고 합니다.”

“저는 아그네스 D. 에리얼이라고 해요.”

알랭이 입을 떼기도 전에 아델라이드가 먼저 나섰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을 대며 인사를 했다. 어느새 가명도 만들어 둔 건가? 알랭은 동생이 점점 멀게 느껴졌다. 원래부터 어려웠지만, 지금은 알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제논 님. 오늘 제 첫 춤 상대를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그네스가 슬며시 동생의 팔에 손을 둘렀다. 그 모습을 본 알랭이 살풋 인상을 찡그렸다. 아무리 남장을 했다지만 상대가 남잔지 여잔지도 분간 못 하다니.

아델라이드는 못마땅해하는 알랭을 보며 피식 웃었다.

“에리얼 영애. 이쪽으로.”

그녀는 능숙하게 아그네스를 이끌고 홀 중앙으로 갔다. 두 사람은 음악에 맞춰 유려하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알랭은 혀를 찼다. 평범한 선남선녀가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그 둘은 금세 뭐가 즐거운지 몸을 맞대고 빙글빙글 돌면서 귀엣말을 속삭였다. 그리고 즐겁게 웃어 댔다. 그러더니 음악이 끝날 때쯤엔 진하게 입을 맞췄다.

그 드넓은 중앙 홀 한가운데서 입을 맞추다니. 모든 이들의 이목이 그들에게 쏠렸다. 알랭은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알랭은 동생의 터무니없는 행동에 입을 떡 하니 벌렸다.

저, 저거……. 저거…… 미친 게 틀림없다. 어제까진 남자들이더니, 이번엔 여자까지 꾈 작정인 건가?

얼굴이 빨개진 아그네스는 가쁜 숨을 내쉬며 헤어짐을 아쉬워했다.

홀 한쪽으로 물러난 아델라이드와 알랭은 가볍게 와인을 마시며 사람들을 구경했다.

“너 미친 거냐? 왜 여자랑 키스해?”

“그냥. 남자랑 하는 키스랑 여자랑 하는 키스가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었을 뿐.”

“그래, 어떻게 다른데?”

“둘 다 좋네?”

“하― 진짜 미치겠다. 사람들 눈이 잘못된 건가? 어떻게 너를 몰라볼 수 있는 거지?”

알랭이 투덜거리며 제 동생을 바라보았다. 머리 스타일이 짧아지고, 남자 옷을 입은 것밖에 없는데 몰라보다니! 제 동생이 사교계를 들락거린 게 몇 년인데…….

알랭은 뚫어지게 동생을 지켜보았다.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지긴 했다. 사람들에겐 각자 풍기는 분위기라는 게 있다. 예전부터 동생을 봐 온 사람이라면, 지금 이 모습을 보고 같은 사람이라 믿지 못할 거 같긴 했다.

아델라이드는 삐딱하게 벽에 기대서서 껄렁하게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그러면서 눈으론 나른하게 주변을 찬찬히 훑었다. 이 사람이 과연 도도하기 그지없던, 절벽의 꽃이라 불리던 제 우아한 여동생이 맞는지 알랭은 이제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 제논 켄스너 랭거 군. 내 에스코트는 필요 없지? 난 이만 영애들 사냥하러 가야겠다.”

“맘껏 다녀오시죠. 형님.”

형님이란다. 알랭은 인상을 구긴 채, 지나가는 사용인의 쟁반에 와인 잔을 올려놓으며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