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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제국의 군사들이 승전보를 들고 기세등등하게 입성하기 시작했다. 황성으로 이어진 중앙 대로는 수많은 인파로 미어터졌다. 너도나도 제국의 영웅들을 맞이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제국의 군사들 사이에 짐승 모양의 투구를 쓰고 검은 갑주를 입은, 황태자의 직속 기사단인 ‘검은 늑대’들이 보였다. 시민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기사단의 중심엔 한 남자가 무시무시한 기세를 내뿜고 있었다. 그의 기세는 군중을 압도했다.

윤기가 흐르는 흑마를 탄 검은 머리의 황태자. 그의 등엔 피로 물든 짐승의 털가죽이 망토처럼 얹혀 있었다. 한 손엔 짐승의 투구를 든 그가 붉은 눈동자로 군중을 훑어보며 다른 한 손을 들어 화답했다. 사람들은 제국의 이름 셀티아를 외쳤다.

“셀티아! 셀티아!”



***



욕실에는 김이 자욱했다. 욕조에 느긋하게 들어앉은 헤르덴은 여독이 풀리는 느낌에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7년 전쟁이 끝나고 황궁으로 돌아온 황태자 헤르덴 아몬 셀티아는 오래간만에 찾아온 달콤한 휴식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는 조용히 눈을 뜨곤 유리창 사이로 고개를 숙이는 노을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저물어 가는 태양 빛에 비친 그의 눈동자가 불타는 태양처럼 보였다.

헤르덴의 검은 머리칼에서 떨어져 내린 물방울이 탄탄한 목덜미를 타고 흘렀다. 그는 단단한 근육이 자리 잡은 팔을 꿈틀거리며 손을 들어 얼굴에 흐르는 물방울을 쓸어내렸다.

그는 자신의 몸에 나 있는 온갖 상처와 칼자국들을 바라보았다. 신관 한 명 잡아다 신성력을 쏟는다면 매끈히 없어질 상처들이었으나 그는 지울 생각이 없었다.

7년. 자그마치 7년을 전쟁터에서 살았다. 스무 살 때 처음 나간 전쟁터엔 긴장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피와 살육 속에 지낸 시간 동안 죽음은 비껴갔고, 그 사실이 곧 살아 숨 쉰다는 격정적인 희열을 깨닫게 해 주었다.

헤르덴은 옆구리에 길게 나 있는 자상을 쓸어내렸다. 7년 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상처다. 상대는 강인한 성기사였다. 비슷한 나이로 보이던 강골의 건장한 사내.

매 전장에서 그의 활약은 헤르덴의 눈을 사로잡았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핏속까지 끓어오르는 희열을 느꼈다. 죽이고 싶다. 무섭게 자신의 존재를 뽐내는 저 생명력을 내 손으로 거둬들이고 싶다.

그 생각은 매일 밤 정욕으로 바뀌었다. 헤르덴은 성기사를 생각하며 한껏 쌓인 노폐물을 쏟아 내곤 온몸을 떨었다. 달콤한 배설 행위. 자신을 유혹하듯 검을 휘두르던 움직임. 그는 아직도 꿈에 빠진 듯한 얼굴로 성기사를 생각했다.

너무나도 우연히 성기사와 함께 협곡 밑으로 떨어졌다. 그는 헤르덴의 생각보다도 훨씬 매력적인 생명체였다. 열에 들뜬 그의 입술은 너무나도 달콤했고 헤르덴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그와의 키스는 정복욕을 더욱더 부채질했다.

‘갖고 싶다.’

헤르덴의 날카롭게 벼린 듯한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의 영혼에 자신의 존재를 새길 기회였다. 셀티아 황족들이 평생에 단 한 번 배우자에게만 할 수 있는 각인. 그렇게 헤르덴은 그에게 각인의 키스를 했다.

그리고 검과 창이 난무하는 전장 속에서 헤르덴은 그를 다시 만났다. 3일째 되던 날 붉은 노을이 졌다. 성기사는 헤르덴의 눈을 보고 한순간 멈칫했다. 헤르덴은 그것을 너무도 선명하게 느꼈다.

반면, 헤르덴의 검은 유려한 호선을 그리며 그의 목을 지나갔다. 아름답게 잘려 나간 그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붉디붉은 피 분수를 뿜으며 쓰러진 강인한 몸.

헤르덴은 그 순간 투구를 벗어 내리곤, 하늘에서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고 있는 성기사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성기사의 머리는 금세 바닥에 처박혔다. 망설임이 담겼던 푸른 눈동자에도 더는 생명의 불꽃이 남아 있지 않았다.

헤르덴은 더 이상 미소를 짓지 않았다. 더 이상 심장이 뛰지도 않았다. 그는 그저 차가운 얼굴로 자신의 승리를 알렸다.

“……전하, 헤르덴 황태자 전하. 이제 곧 연회가 시작됩니다. 의장을 갖추시지요.”

상념에 잠겨 있던 헤르덴은 주체 없이 올라오는 열기를 느꼈다. 굳건하게 서 있는 자신의 성기를 보곤 씁쓸한 미소를 띠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다. 강인한 성기사의 육체가 꿈틀대며 검무를 추던 모습이 수면 위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와 나눴던 각인의 키스가 몸을 달아오르게 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다.

오래 검을 쥔 탓에 굳은살이 박여 거칠해진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헤르덴은 추억이 되어 버린 자신의 열망과 욕정에 갈증을 느꼈다.

그는 곧, 곁에서 목욕 시중을 들던 젊은 시녀를 불러들였다. 시녀는 자연스레 헤르덴의 앞에 무릎을 꿇고는 그의 잔뜩 달아오른 성기를 조심스레 감싸 물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지그시 눈을 감고 욕정을 풀어 갔다.

자신의 손으로 죽인, 강인한 생명력이 넘쳤던 성기사를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



홀 중앙 벽에 거대한 문이 있었다. 태양 모양의 황금 장식이 달린 문이었다. 순간 굳게 닫혀 있던 그 거대한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 드시옵니다!”

홀에 있던 사람들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수많은 사람들의 눈길이 홀의 가운데, 태양의 자리에 몰렸다. 7년 만에 보는 황태자의 모습을 몹시 궁금해하며 모두 숨을 죽였다.

저벅저벅. 황제가 걸어 들어왔다. 그의 뒤로 야수의 눈빛을 가진 남자가 무서운 오라를 내뿜으며 걸어 들어왔다.

황태자는 보석을 흩뿌린 듯 빛나는 흰색 예복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가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에서 강인한 카리스마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잘 다듬어진 근육들이 가장 완벽하게 자리한 듯한, 마치 명장의 조각상을 보는 듯한 멋들어진 체형. 검은 머리에 붉은 눈동자를 가진, 날카롭고 차가운 인상의 미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정복자의 오라를 온몸으로 내뿜으며 드넓은 홀 안을 압도해 갔다. 귀족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카리스마가 좌중을 찍어 눌렀다.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의 적막감이 홀 안을 휩쓸었다. 무릎이,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귀족들은 황태자의 강력한 존재감에 소름이 돋았다.

7년간 전쟁터를 내달리던 황태자가 제왕의 기도를 갈무리해서 돌아왔다. 제국은 앞으로 전 대륙을 호령하는 강대한 국가가 될 것이 자명했다. 황태자는 제국의 대영웅이었다.

순간 홀 안엔 환호가 울렸다.

“헤르덴 황태자 전하 만세! 대제국 셀티아여, 영원하라! 와아아아아!”

어마어마한 함성이 황성을 뒤흔들었다. 귀족들이 환호하며 손을 추켜올렸다.

홀 안에 경쾌한 음악이 흘렀다. 여기저기 전쟁에 참여했던 기사들이 보이고, 무사 귀환한 그들을 축하하는 말소리들이 가득했다. 젊은 여식들은 여기저기서 자신의 몸값을 높이 올릴 수 있는 귀환 무사들을 찾아, 제 존재를 힘껏 뽐내며 무리를 만들었다. 귀족들은 새로운 판이 짜인 대륙의 미래에 어떻게든 줄을 대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황태자 헤르덴은 무료한 듯 턱을 괸 채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은 그에게 익숙한 전쟁터가 아니다. 하루하루 목숨을 걸며 살아남고 또 살아남아, 숨 쉬는 생명이 아름답던 자리가 아니었다. 더러운 정치판이 시작되는 꼴을 보니 입술 끝에 절로 비릿한 웃음이 걸렸다.

그가 그렇게 무료한 표정을 하고 귀족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그의 곁으로 ‘검은 늑대’의 단장인 아토 페레즈가 느긋하게 다가왔다. 헤르덴은 아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제국 셀티아의 보물. 대륙에 다섯 명도 안 된다는 오러 마스터 중 하나다. 물론 헤르덴도 오러 마스터이지만 그와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아토는 194센티미터에 달하는 장신의 남자였다. 그는 팔 한쪽이 여자 허리만 할 정도로 엄청난 근육질을 자랑했다. 폭풍을 부르는 절륜의 검술을 갈무리한 기사이자, 헤르덴의 친우이며 가장 믿을 수 있는 부하였다.

아토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헤르덴이 피식 웃었다. 저 덩치……. 자신의 손으로 죽여 버린 그 성기사가 생각났다. 협곡에서 떨어질 때 안겼던 넓은 그의 품이 떠올랐다. 그의 품에서 나던 향기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죽기 직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목을 자를 때, 그에게 고통을 주고 싶지 않아 순식간에 깔끔하게 잘라 냈다. 헤르덴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배려였다. 아마 고통도,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도 모르고 죽었겠지…….

헤르덴은 피곤함에 눈을 감았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소리와 음악 소리가 뒤엉켜 머리를 울려 댔다.

“황태자 전하. 파티가 재미없으십니까? 전하의 얼굴이 구멍 날 거 같은데요. 전하를 뜨겁게 쳐다보는 영애 중 한 명과 춤이라도 추시지요.”

아토 페레즈는 헤르덴에게 고개를 숙이곤 나지막이 웃으면서 말했다.

“귀찮아. 그러는 자네는 오랫동안 보고 싶어 했던 약혼녀라도 만나 보지그래?”

“아아, 전하가 홀로 계시는데 제가 어찌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심히 지루하더라도 곁에 있겠습니다.”

아토의 대답에 헤르덴은 그만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툴툴거리며 돌려 말하는 그의 속내가 뻔히 보였다. 어서 배우자를 맞이하라는 뜻이겠지.

아토는 제국의 가장 유명한 기사로, 아홉 살에 이미 오러 마스터가 된 천재였다. ‘제국의 검’이란 명칭을 단 사나이이자, 헤르덴을 아주 어릴 적부터 알아 온 죽마고우 검술 친구였다.

그는 언제나 은발의 반짝이는 짧은 머리칼을 고수했다. 다부지고 각진 얼굴에 전쟁터에서 얻은 상처가 희미하게 남아 있어 인상이 사나워 보이기도 했다.

게다가 아토는 터질 듯한 근육을 사내의 상징이라 믿으며 온몸에 갑옷처럼 근육을 둘러 누가 보아도 위압감이 대단한 남자였다.

하물며 헤르덴마저 그의 사나운 인상에 웃음을 참지 못했다. 춤을 추라고 권하는 그조차 단 한 명의 영애와도 춤추지 못했다. 무려 공작 지위와 제국의 검이라는 엄청난 명예까지 가지고서도 제 곁에만 붙어 있으니 어찌 불쌍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측은하기까지 했다.

여기저기 자신의 몸값을 올려 보려는 영애들이 단상 밑에서 그 둘을 올려다봤지만, 감히 다가서지는 못했다. 우선 그들이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위치이기도 했지만, 전장에서 7년간 살아오다 보니 절로 살기가 뿜어지는 통에 여자들이 쉽게 다가서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두 사람만 알지 못했다.

“섹스하고 싶은 여자가 없어.”

“크흑……. 무슨 소리십니까? 춤추라고 했지 거기까지 가시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욕구가 솟아야 같이 춤도 추는 거야.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 나 벌써 각인했어.”

순간 아토 페레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미친 황태자가 자신이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고는 있는 건가. 어려서부터 막역하게 지내 왔지만 지금처럼 황당하긴 오래간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