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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드보라 후작은 얼마 전부터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자신의 막내딸이 낙마 사고 후 무섭도록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 잠에서 깨어났을 때를 생각하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여기가 어디라고? 셀티아 제국? 크크크큭.’



딸은 정신이 들자마자 미친 듯이 웃었다. 신성국 텔딘이 전쟁에서 패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하염없이 울어 댔다. 그러곤 한동안 정신 나간 사람처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물건을 부수고 드레스를 찢었다.

얼마 뒤 종전 소식이 들려온 날부터는 새벽마다 조용히 일어나, 남자 옷을 꿰어 입고 무섭게 검을 휘둘러 댔다. 검술 한번 배워 보지 못한 딸인데 그녀가 휘두르는 검세에는 살기가 흘렀다.

그래 놓고선 낮이 되면 아무런 일이 없었다는 듯이 화려하게 치장을 하고 파티나 살롱으로 나들이를 나갔다.

그뿐이면 그나마 다행이지. 딸에 대해 들려오는 소문에 드보라 후작은 뒷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들과 난잡하게 놀아난단다.

고고하기 짝이 없던 딸이다. 아버지인 자신이 말을 걸 때도 냉기를 뚝뚝 흘리며 대꾸하던 딸인데 남자들을 십수 명 돌려 가며 놀아나고 있다니.

후작은 서둘러 소문을 막았으나 딸은 오늘도 힘껏 꾸미고 살롱에 나들이를 나갔다.

“후작님.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드보라 후작가의 오래된 가신이 서류를 들고 집무실로 들어오며 딸아이의 귀가를 알렸다.



아델라이드는 후작가로 돌아오자마자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훌렁훌렁 벗어 던졌다. 그녀 곁에 있던 하녀 로일렛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아…… 아가씨. 이렇게 아무 데서나 옷을 벗어 던지시면 안 되어요.”

“무슨 상관이지. 보는 사람도 없는데? 당장 가서 편한 옷을 내와라.”

아델라이드는 속옷만 걸친 채 그녀의 방에 앉아, 얼마 전에 구입해 둔 검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전생에 가지고 다니던 투 핸드 소드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가볍고 얇은 롱 소드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 정도가 적당했다.

그녀는 검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멍하니 들여다보았다.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는 얼굴이다. 황태자의 손에 죽은 후, 지금의 몸으로 다시 깨어났던 그날은 지금보다 훨씬 낯설고 어색하기만 했었다.

그때의 그 당혹스러운 기분을 생각하면 아직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날의 기억이 다시금 떠올라, 아델라이드는 자신의 이마를 붙잡았다.



***



“헉!”

젠은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 앉아 목을 쓸어내렸다. 잠시 숨 쉬는 것조차 잊었던 그는 크게 한번 숨을 몰아쉬었다. 젠은 목과 몸통이 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온몸을 떨었다. 순간 흐려졌던 눈앞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식은땀이 흘렀다.

눈앞에 침대가 보였고, 앞에는 그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낯선 소녀가 있었다. 그는 그 소녀를 힘겹게 바라보았다.

“아가씨! 정신이 드셨어요? 마님! 아가씨께서 깨어나셨어요.”

소녀는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나가 소리를 치곤 다시 돌아와 젠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아가씨?’

누구를 말하는 걸까?

젠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이보리색 캐노피가 하늘거리며 바람에 흔들렸다. 침대 앞엔 작은 테이블에 놓여 있는 찻잔이 보였다. 흰색의 우아한 화장대와 한쪽에는 고풍스러운 피아노까지.

이곳에는 하녀로 보이는 소녀와 젠, 단둘이었다.

“……여긴…….”

젠의 목소리가 무겁게 갈라져 나왔다. 목구멍이 말라비틀어진 느낌이 들어 컥컥거리며 기침을 했다.

“아가씨 기억 안 나세요? 승마하다 떨어지셨어요. 계속 정신도 못 차리고 누워만 계신 지 보름이나 되었어요. 흑흑흑, 다행이에요. 다행…….”

소녀는 눈물을 찍어 내며 젠에게 차를 권했다.

“차 한잔 하고 계세요. 제가 얼른 의사 선생님과 주인마님을 모시고 올게요.”

소녀가 부산스럽게 움직여 고급스런 찻잔에 따듯한 차를 따라 젠에게 내어 주더니, 곧 방문을 열고 나갔다. 방 안에 정적이 흘렀다. 목이 바짝 마르는 상황이라 천천히 차부터 마셨다.

젠은 낯선 방 안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나가고도 젠은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여기는 어디지? 나는 죽은 게 아니었나?

목이 떨어져 나가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해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너무나 소름이 끼치는 나머지 양팔로 어깨를 감싸 안았는데, 순간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다.

팔을 내려다보았다. 전쟁터에서 검게 그을린 피부, 우락부락 튀어나온 핏줄이 있어야 할 자리에 길게 쭉 뻗은, 투명하리만큼 맑은 피부의 팔과 손이 보였다. 뭔가가 어깨에 사르륵 떨어져 흐른다. 한평생 길러 본 적 없는 머리칼이 흘러내렸다.

젠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화장대 거울 앞에 섰다. 그는 너무도 놀란 나머지 얼굴을 연거푸 쓸어내렸다. 거울 속엔 팔다리가 길게 쭉 뻗은, 찰랑거리는 은청색의 머리칼을 허리까지 늘어트린, 에메랄드빛 눈을 가진 여인이 서 있었다.

젠은 악몽을 꾸는가 싶어 볼을 꼬집어 보았다. 통증에 얼굴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혼란스러워진 그는 한참을 석상처럼 서 있었다.

극심한 두통이 밀려왔다. 곧 자신의 목을 가차 없이 날려 버린 붉은 눈의 황태자가 떠올랐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간 멈칫해 버린 자신이 함께 떠올랐다. 젠은 스스로를 한심해하며 사정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멍청한 놈! 그 중요한 순간에!”

설마 자신의 목을 날려 버린 자가 그 남자였을 줄이야. 충격이 가시질 않았다.

젠이 자기 자신에게 낮게 욕을 지껄이고 있을 때였다. 벌컥 방문이 열리고 나이 지긋한 남자가 검은 의료용 가방을 들고 들어오더니 화장대 앞에 서 있던 젠의 곁에 앉았다. 그는 의사였다. 진찰을 하는지 이리저리 젠을 훑어보았다.

의사의 뒤를 따라 부부로 보이는 중년인 두 사람이 들어왔다. 귀족인 듯했는데, 여자는 고풍스럽고 차분해 보였고, 남자는 인자해 보이는 인상에 염소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젠을 바라보았다.

“드보라 영애. 특별히 불편하신 곳이 있으십니까?”

의사가 상냥한 목소리로 젠에게 물었다. 젠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몸 이곳저곳을 움직여 보곤 고개를 저었다.

“딱히 아픈 곳은 없군요. 그보다, 여긴 어디요? 드보라…… 영애라니?”

젠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의사가 미간을 찡그렸다. 뒤에서 불안해하던 두 중년의 얼굴도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흐음……. 이곳은 셀티아 제국의 수도 서덕입니다. 그리고 지금 저와 대화를 나누고 계신 분은 드보라 후작가의 막내 따님이신 아델라이드 아노스 드보라 영애지요.”

젠은 의사의 말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은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난데없이 듣도 보도 못한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그것도 모자라 자신이 깨어난 곳은 7년간 제가 칼을 휘두르며 싸워 댔던 셀티아 제국이라니. 젠은 머리가 어질어질해졌다.

“하? 하하하하하! 내가 미친 건가? 셀티아라고? 그럼 신성국 텔딘은 어찌 되었소?”

“텔딘은 바로 얼마 전에 패망하였지요.”

“말도 안 돼! 미쳤군. 나는 분명 꿈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해! 아하하핫!”

이곳은 셀티아 제국이라 했다. 어찌나 우습던지 젠은 미친 듯이 웃어 댔다.

젠의 조국은 셀티아 제국에게 짓밟혀 이미 패전국이 되었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나라가 패망했다는 사실보다, 죽기 직전 본 붉은 눈을 가진 사내의 서늘했던 얼굴만 머릿속에 끊임없이 떠오르고 사라졌다. 그와 자신은 아무 관계도 없는 사람이었다. 잠시 스치듯 만난 인연인데 왜 이리 심장이 저려 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목이 잘리는 느낌은 소름 끼쳤지만 아픔은 없었다. 너무나도 간결하고 깔끔한 동작으로 잘렸기에……. 그 붉은 눈동자가 눈앞에 어른거린다.

“으아아아악!”

화장대에 잔뜩 놓인 유리병을 와르르 바닥으로 쓸어 버렸다. 유리병이 어지러이 구르고 깨져 바닥을 적셨다.

그 키스는 뭐였지?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단지 약초를 먹이기 위해서 그런 것뿐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이 정상이 아니란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적국의 수장이었다. 텔딘의 수장인 젠이 죽는다면 당연히 그의 손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붉은 눈동자가, 그의 미소가, 그와 나눈 깊고 농밀했던 키스가, 그리고 그를 생각하며 들떴던 감정과 욕망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질 않았다. 7년간 무엇을 위해 싸워 왔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목이 서늘해졌다. 검이 스칠 때 느꼈던 감각이 살아나며 몸서리가 쳐졌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차가운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젠은 믿을 수가 없었다.



***



며칠이 지났는지 몰랐다. 매일매일 침실에 쓰러져 웃고, 울기를 반복했다. 이 몸의 가족들은 하나같이 걱정 어린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한숨 섞인 목소리로 달래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황태자가 돌아온다. 제국의 영웅 황태자가 승전보를 들고 수도로 돌아오고 있다.

아델라이드가 되어 버린 젠은 그 한마디에 웃고 울던 미친 짓을 멈췄다. 그를 만나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확인하기로 결심했다.

하녀들이 거추장스러운 드레스를 권할 때마다 가차 없이 찢어 버렸다. 하녀들이 놀라 뒷걸음질 치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간단한 남성용 의상을 걸치고 몸 단련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전생에 건장한 몸으로 살아왔던 그가 새로 받은 이 몸은 썩 맘에 들질 않았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그녀가 평소 승마를 즐겼기에 그나마 잔 근육이 탄탄히 자리하고 있어 아주 기초 체력부터 기르지는 않아도 된다는 점이었다.

검을 구해 새벽마다 단련을 시작했다.

‘우우웅―’

검에 빛이 서렸다 사라졌다. 신성력은 남아 있었다. 등허리가 서늘해져 왔다.

새로운 몸에 들어오긴 했지만, 젠은 여전히 텔딘의 성기사였다. 신성력이 남았다는 것은 여신의 피가 잘 안배되었다는 뜻이다. 영혼에 새겨진 권능이었다. 자신의 자식들을 죽인 짐승에게 복수하라는 슬픔과 고통의 절규.

젠은 혼란스러워졌다. 셀티아 제국에서 함부로 신성력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제국은 신을 믿지 않는다. 신성력을 쓰는 순간 의심을 살 것이다.

신성국 텔딘은 아넬린 여신의 자식들이 혈통을 이었다. 따라서 텔딘 사람이 아닌 자는 신성력을 쓸 수가 없었다. 이곳에서 정체를 숨기기 위해서는 신성력을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혹시 사용한다면 그날은 자신의 감정을 확인한 이후일 것이다.

신성력 대신 오러를 사용하려면 우선 기본부터 다시 다져야 했다. 지금은 그동안 쌓아 온 검술의 경험치로 어떻게 해본다지만, 당장 오러 마스터인 황태자 앞에 당당히 서기엔 요원했다.

정좌를 하고 앉아 가볍게 몸속에 마나를 둘러보았다. 두 손을 펴서 짝 소리가 나게 양 뺨을 쳤다. 정신이 번쩍 든다.

중단전쯤에 마나홀을 만들어 둘러 보았다. 아주 작은 땅콩만 한 사이즈부터 서서히 늘려 가기 시작했다. 아기 주먹만 한 홀이 어느 정도 만들어지자 가볍게 마나가 차올랐다.

‘어……. 어, 어?’

생각보다 너무나 쉽게 마나홀이 만들어지고 빠르게 마나가 차올라 깜짝 놀랐다. 보름 정도 걸릴 거라 각오했는데 이렇게 쉽게 만들어지다니? 게다가 마나가 미친 듯이 빨려 들어왔다.

“허헉!”

마나홀이 터질 것 같아서 꽉 차오른 껍데기를 깨고 새로운 크기의 마나홀을 만들길 수십 번은 반복했다. 온몸에 핏줄이 퍼렇게 올라왔다 내려왔다 반복했다. 두 눈 흰자위에는 시뻘겋게 실핏줄이 터져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함께 기괴하게 희번덕거렸다.

“크흐흑…….”

마나홀이 더 이상 커지길 멈추자, 순간 눈앞이 흐려지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리곤 암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