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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시 가슴께를 주먹으로 누르며 멍하니 남자를 바라봤다. 이내 호선을 그리던 입가가 수줍은 듯 벌어졌다.
“리라도 예뻐.”
“…….”
말 한마디에 난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미, 미친……. 실로 무시무시한 파괴력이다.
저 말과 미소는 내가 아닌 프리실라를 향한 것이라는 걸 아는데도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가만히 좀 있으라는 명령도 어긴 채 나대기 시작한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시킨 뒤 난 다시 남자에게 눈을 돌렸다.
헉!
예의 천사 같은 눈웃음이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한 번은 당황했지만 두 번은 없다며 자신 있게 마주했지만 내 심장은 그렇지 않은 듯 재차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심장아, 나대지 마!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남자 연예인들을 보며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세우다니…….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외모였다.
마음 같아선 ‘임산부나 노약자, 심약자들은 마음 단단히 먹고 쳐다보세요.’라는 팻말이라도 걸어 주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 남자가 거리를 거니는 순간 지나가던 사람들이 현기증을 느끼며 픽픽 쓰러지는 초현실적인 광경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오오, 패왕색 패기.
내 심적 안녕을 위해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다 문득 그가 나를 불렀던 호칭을 떠올렸다.
분명 ‘리라’라고 나를 불렀다. 애칭인 듯해 아무래도 가까운 사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기억 안 나려나 멍뎅하니 고개를 까딱이던 그때, 번뜩하고 뇌리에 번개가 쳤다.
무심코 지나갔던 애칭을 되새겼다. 조금도 아니고 굉장히 익숙한 애칭이었다.
꼭 죽어 가는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부를 때 한 말 같은데…….
잠깐만…… 미친, 설마?
어쩐지 이상하게 낯익다 했는데 이거 외전에서 남편이 프리실라 부를 때 쓰던 애칭이잖아!
난 속으로 왁왁 비명을 지르며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내가 깨어난 이후부터의 일들을 재빨리 되돌아본 나는, 그제야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프리실라가 이미 결혼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다른 시녀들이나 요고는 나를 ‘아가씨’가 아닌 ‘마님’이라고 불렀다.
마님은 부인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잖아? 그럼 당연히 결혼을 했다는 건데, 그런 상태에서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이 아침을 먹는 사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남편이지 않은가!
외전에서 남편의 외형이 묘사되진 않았지만 상황이 모든 걸 알려 주고 있었다.
새삼 내 멍청함이 놀랍다 못해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째 날 보는 눈길에 꿀이 떨어진다 했더니……. 그냥 잘생겨서 그런 착각이 드는 건가 싶었는데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눈길이라 그런 거였다.
이제야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데, 불현듯 요고를 봤을 때와 같이 두통이 머리를 휩쓸었다.
다행히도 지금은 앉아 있는 상태라 어지러워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나는 무질서하게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들을 애써 정리하며 남편의 기본적인 정보들을 알아냈다.
그의 이름은 요안 라비스로, 라비스 공작가의 현 가주이며 황궁의 재무관을 맡고 있었다.
황태자와 친분이 있으며 기본적으로 온화한 성품인 초식계열 미남이었다.
프리실라와 결혼한 지는 7년이 됐…….
7년?!
프리실라와 요안이 결혼한 지 7년이나 됐다는 사실에 기함했다. 하다못해 1, 2년이라고 생각했는데 뭐?
7년? 7년이라고? 7개월도 아니고 7년? 뭐야, 그럼 7년이나 동고동락한 사람을 죽인 거야? 그렇게 무참하게?
생각지도 못한 정보에 눈을 부릅뜬 채 요안을 바라봤다.
근데 7년이면 아무리 적어도 이십대 후반일 텐데 저 얼굴이야?
나도 모르게 반지르르한 요안의 피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노려보는 내 시선에도 요안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맑게 웃어 줄 뿐이었다.
그 애정 가득한 시선에 난 지금 기억이나 떠올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까 무심코 내뱉은 말 때문인지 나에 대한 요안의 호감도가 현재 진행형으로 미친 듯 샘솟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이, 이거 이래도 되나? 일단은 들키지 않게 프리실라처럼 행동해야 할 텐데 말이다. 이미 몇 번 무너지긴 했지만 뒤늦게라도 조심해야 했다.
어떻게 대해야 하지? 황급히 몇 없는 기억들을 떠올려 보지만 어째 제대로 된 기억이 없었다.
7년이나 됐다면서 왜 하나같이 이따구야! 대화가 없어, 대화가!
에이, 모르겠다. 일단 프리실라의 성격이 마치 뒤틀린 황천과도 같다는 건 확실하니 그냥저냥 싸가지 없이 대하면 될 것 같았다.
일단 말을 돌려야 하는데…….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요안의 뒤편 벽에 사람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는 걸 알아챈 나는 손가락으로 그림을 가리켰다.
그러자 요안이 의아한 얼굴로 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난 최대한 싸늘하고 날카로운 어투로 말했다.
“……당신 말고 저 그림. 저 그림이 잘생겼다고.”
“아…….”
의기양양하게 그림을 가리키며 말하자 그림을 확인한 요안이 이도 저도 아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
굳이 말하자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모습이었다.
요안은 다시 나를 바라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그 애매한 반응에 마치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딴에는 꽤 괜찮은 탈출구라고 생각했는데 어째 반응이 묘하다.
내가 가리킨 그림을 자세히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땐 분명 인물화였던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 인물화라고 보기엔 조금 애매했다.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본 것 같은 느낌의 그림은 피카소의 작품이 떠오를 만한 입체주의 풍의 그림이었다.
그래, 뭘 숨기랴. 남자인 건 알겠는데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 요상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난 그 그림을 보고 잘생겼다고 한 것이다.
시발, 걸려 있어도 저딴 게…….
미처 그림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말부터 내뱉은 내가 미워졌다.
저딴 걸 가리키며 잘생겼다고 하고 앉았으니, 요안이 저런 반응을 하는 것도 십분 이해가 갔다.
나 같아도 친구가 이상한 돌덩어리를 가져와 ‘이것 좀 봐, 정말 아름답지 않니?’라고 묻는다면 저런 반응을 하리라.
엄습하는 쪽팔림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입구 주변에 서 있던 요고와 눈이 마주쳤다.
일련의 과정을 모두 보고 있었을 요고는 분명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어째선지 그 시선이 내게 ‘마님, 취향이 굉장히 독특하시네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은 사이로 한참 동안 서로를 쳐다보던 나와 요고 중에 끝내 먼저 고개를 돌린 쪽은 요고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고개 똑바로 쳐들고 쳐다보던 애가 먼저 시선을 피해 버렸다.
왜 피하냐. 피하지 마라.
속으로 몇 번이고 외쳤지만 요고는 자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저쪽에서 시선을 피해 버렸기에 마냥 쳐다보고 있을 수 없어 다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엔 또 요안과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얼굴에서는 빛이 났지만 ‘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 눈동자가 날 더 착잡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죽고 싶어졌다.
‘공작 부인, 격한 쪽팔림에 책상에 머리를 박고 돌연사’라는 기사가 내일 아침 신문 1면에 장식되어 있는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 요안이 내게 말을 걸려는 듯 입을 열기에 난 재빨리 그의 말을 자르며 싸늘하게 말했다.
“리라…….”
“입 닫아.”
“리라?”
“말 걸지 마.”
“……응, 알았어.”
시무룩해진 요안의 얼굴에 양심이 찔려 왔지만 모두 요안을 위한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주 약간 화풀이도 섞여 있었다.
그 뒤로 식당 안에서는 어떤 말소리도 들리지 않은 채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호화로운 식사가 나왔음에도 그게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황급히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 상황에서 참도 맛을 음미하겠다. 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도망치듯 식당을 떠나는 날 요안이 불러 세우려 했지만 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방으로 돌아왔다.
그도 그럴 게, 목소리가 어찌나 애절한지 보지 않아도 무슨 표정일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직접 보지 못한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봤다간 한참을 잡혀 있었겠지?
이곳에 온 지 대략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몸에 힘이 전혀 없었다. 잠깐의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이대로 그냥 푹신한 이불에 몸을 맡긴 채 숙면을 취하고 싶었지만 아직 내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식사 시간 전 생각난 요안과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엉킬 대로 엉킨 기억들을 퍼즐 맞추듯 짜 맞춰 가는 일은 생각보다 재밌었다.
그중엔 구멍이 나 있던 요고의 기억과 맞추자 그제야 본연의 기억이 되는 것들도 있었다. 마치 컬렉션을 모으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억을 정리한 결과 일단 프리실라와 요안은 현재 결혼 8년 차인 부부였다.
이 둘이 결혼한 지 7년이나 됐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요안과의 기억은 몇 없었지만 개중에는 이보다 더 충격적인 것들도 있었다.
역시 제일은 프리실라가 요안과 결혼한 것 또한 황후가 되기 위한 발판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힘이 들고 외로우면 곁에 있어 줄 사람이 그리워지는 법이다. 프리실라는 그런 요안의 마음의 틈을 적절하게 이용했다.
가장 나약할 시기의 그를 끌어들여 자신의 손아귀에 가둬 버린 프리실라는 그야말로 뱀 같은 여성이었다.
자신을 향한 순수한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용하며 휘두른 악랄한 모습에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심지어 아직 자세한 계획은 세워 놓지 않았지만 프리실라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를 없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프리실라가 굳이 요안과 결혼을 한 이유는 당연하게도 그의 가문 때문이었다.
요안과 돈독한 사이인 황태자가, 요안이 죽은 뒤에 타인의 손에 남겨질 그의 가문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프리실라는 그 점을 이용해 황태자를 압박하려는 생각마저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그놈의 황후가 뭐라고…….
공작 정도면 황제나 황태자까진 아니더라도 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높은 작위 아닌가?
거기다 저를 사랑해 주는 잘생기고 착한 남편까지 있는데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이러는 건지, 난 프리실라가 배가 부르다 못해 터져 나간 상또라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좋은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이런 여자한테 반한 걸까. 아무리 힘들었다고 해도 이건 좀 아닌데 말이다.
확실히 얼굴만은 어마 무시할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내 단편적인 기억들로 본 프리실라는 그녀의 본모습을 모른다 해도 그다지 가까이하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언제나 기품과 우아함이 흘러넘치는 그녀는 말 그대로 ‘귀족’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하며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차가운 여성이기도 했다.
확실히 책으로 읽었을 때도 프리실라의 예법을 중시한 어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냉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뚝뚝했다.
이런 여자가 자신의 남자한테만 상냥하게 군다면 그 모습만으로 매력이 대기권을 뚫겠지만 안타깝게도 프리실라에게 그런 반전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 증거로 요안과의 기억 속에 프리실라는 요안에게 단 한 번도 진실한 미소를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진실한 미소는 둘째 치고 애초에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대화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
7년이나 같이 살았으면서 참으로 한결같았다. 기껏해야 보이는 거라곤 대외적으로 보여 주는 거짓 웃음 정도였다. 진짜 정(情)이라는 글자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7년이면 부부가 아니더라도 서로에게 정이 들 만도 한데 어쩜 이리도 한결같게 싸늘한지,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 아닐까?
반대로 이런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은 여자한테 7년이나 애정을 쏟아부은 요안도 대단하다.
심지어 프리실라는 자기한테 관심이라곤 한 톨도 없는데 아직까지도 정이 식지 않은 걸 보면 무서울 수준이다. 이 정도면 집착 아닌가?
새삼 요안도 정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프리실라가 없어도 저 남자가 잘 살아갈지 회의감이 들었다.
책으로 읽었을 때보다 중증이네.
“리라도 예뻐.”
“…….”
말 한마디에 난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미, 미친……. 실로 무시무시한 파괴력이다.
저 말과 미소는 내가 아닌 프리실라를 향한 것이라는 걸 아는데도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가만히 좀 있으라는 명령도 어긴 채 나대기 시작한 심장을 가까스로 진정시킨 뒤 난 다시 남자에게 눈을 돌렸다.
헉!
예의 천사 같은 눈웃음이 여전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한 번은 당황했지만 두 번은 없다며 자신 있게 마주했지만 내 심장은 그렇지 않은 듯 재차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심장아, 나대지 마!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수많은 남자 연예인들을 보며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나를 이렇게까지 몰아세우다니…….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외모였다.
마음 같아선 ‘임산부나 노약자, 심약자들은 마음 단단히 먹고 쳐다보세요.’라는 팻말이라도 걸어 주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 남자가 거리를 거니는 순간 지나가던 사람들이 현기증을 느끼며 픽픽 쓰러지는 초현실적인 광경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오오, 패왕색 패기.
내 심적 안녕을 위해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다 문득 그가 나를 불렀던 호칭을 떠올렸다.
분명 ‘리라’라고 나를 불렀다. 애칭인 듯해 아무래도 가까운 사이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빨리 기억 안 나려나 멍뎅하니 고개를 까딱이던 그때, 번뜩하고 뇌리에 번개가 쳤다.
무심코 지나갔던 애칭을 되새겼다. 조금도 아니고 굉장히 익숙한 애칭이었다.
꼭 죽어 가는 남자가 자신의 아내를 부를 때 한 말 같은데…….
잠깐만…… 미친, 설마?
어쩐지 이상하게 낯익다 했는데 이거 외전에서 남편이 프리실라 부를 때 쓰던 애칭이잖아!
난 속으로 왁왁 비명을 지르며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내가 깨어난 이후부터의 일들을 재빨리 되돌아본 나는, 그제야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프리실라가 이미 결혼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다른 시녀들이나 요고는 나를 ‘아가씨’가 아닌 ‘마님’이라고 불렀다.
마님은 부인을 높여서 부르는 말이잖아? 그럼 당연히 결혼을 했다는 건데, 그런 상태에서 같은 집에서 살고 같이 아침을 먹는 사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남편이지 않은가!
외전에서 남편의 외형이 묘사되진 않았지만 상황이 모든 걸 알려 주고 있었다.
새삼 내 멍청함이 놀랍다 못해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째 날 보는 눈길에 꿀이 떨어진다 했더니……. 그냥 잘생겨서 그런 착각이 드는 건가 싶었는데 진짜 사랑하는 사람을 보는 눈길이라 그런 거였다.
이제야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하는데, 불현듯 요고를 봤을 때와 같이 두통이 머리를 휩쓸었다.
다행히도 지금은 앉아 있는 상태라 어지러워 쓰러지는 일은 없었다.
나는 무질서하게 떠오르는 기억의 파편들을 애써 정리하며 남편의 기본적인 정보들을 알아냈다.
그의 이름은 요안 라비스로, 라비스 공작가의 현 가주이며 황궁의 재무관을 맡고 있었다.
황태자와 친분이 있으며 기본적으로 온화한 성품인 초식계열 미남이었다.
프리실라와 결혼한 지는 7년이 됐…….
7년?!
프리실라와 요안이 결혼한 지 7년이나 됐다는 사실에 기함했다. 하다못해 1, 2년이라고 생각했는데 뭐?
7년? 7년이라고? 7개월도 아니고 7년? 뭐야, 그럼 7년이나 동고동락한 사람을 죽인 거야? 그렇게 무참하게?
생각지도 못한 정보에 눈을 부릅뜬 채 요안을 바라봤다.
근데 7년이면 아무리 적어도 이십대 후반일 텐데 저 얼굴이야?
나도 모르게 반지르르한 요안의 피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노려보는 내 시선에도 요안은 뭐가 그리도 좋은지 맑게 웃어 줄 뿐이었다.
그 애정 가득한 시선에 난 지금 기억이나 떠올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까 무심코 내뱉은 말 때문인지 나에 대한 요안의 호감도가 현재 진행형으로 미친 듯 샘솟고 있는 게 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이, 이거 이래도 되나? 일단은 들키지 않게 프리실라처럼 행동해야 할 텐데 말이다. 이미 몇 번 무너지긴 했지만 뒤늦게라도 조심해야 했다.
어떻게 대해야 하지? 황급히 몇 없는 기억들을 떠올려 보지만 어째 제대로 된 기억이 없었다.
7년이나 됐다면서 왜 하나같이 이따구야! 대화가 없어, 대화가!
에이, 모르겠다. 일단 프리실라의 성격이 마치 뒤틀린 황천과도 같다는 건 확실하니 그냥저냥 싸가지 없이 대하면 될 것 같았다.
일단 말을 돌려야 하는데…….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요안의 뒤편 벽에 사람을 그린 그림이 걸려 있다는 걸 알아챈 나는 손가락으로 그림을 가리켰다.
그러자 요안이 의아한 얼굴로 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난 최대한 싸늘하고 날카로운 어투로 말했다.
“……당신 말고 저 그림. 저 그림이 잘생겼다고.”
“아…….”
의기양양하게 그림을 가리키며 말하자 그림을 확인한 요안이 이도 저도 아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
굳이 말하자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모습이었다.
요안은 다시 나를 바라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그 애매한 반응에 마치 내가 이상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딴에는 꽤 괜찮은 탈출구라고 생각했는데 어째 반응이 묘하다.
내가 가리킨 그림을 자세히 바라봤다.
처음 봤을 땐 분명 인물화였던 것 같은데 자세히 보니 인물화라고 보기엔 조금 애매했다.
어디선가 한 번쯤은 본 것 같은 느낌의 그림은 피카소의 작품이 떠오를 만한 입체주의 풍의 그림이었다.
그래, 뭘 숨기랴. 남자인 건 알겠는데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는 요상한 그림이 걸려 있었다. 난 그 그림을 보고 잘생겼다고 한 것이다.
시발, 걸려 있어도 저딴 게…….
미처 그림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말부터 내뱉은 내가 미워졌다.
저딴 걸 가리키며 잘생겼다고 하고 앉았으니, 요안이 저런 반응을 하는 것도 십분 이해가 갔다.
나 같아도 친구가 이상한 돌덩어리를 가져와 ‘이것 좀 봐, 정말 아름답지 않니?’라고 묻는다면 저런 반응을 하리라.
엄습하는 쪽팔림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자 입구 주변에 서 있던 요고와 눈이 마주쳤다.
일련의 과정을 모두 보고 있었을 요고는 분명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어째선지 그 시선이 내게 ‘마님, 취향이 굉장히 독특하시네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색한 정적이 내려앉은 사이로 한참 동안 서로를 쳐다보던 나와 요고 중에 끝내 먼저 고개를 돌린 쪽은 요고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고개 똑바로 쳐들고 쳐다보던 애가 먼저 시선을 피해 버렸다.
왜 피하냐. 피하지 마라.
속으로 몇 번이고 외쳤지만 요고는 자신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듯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저쪽에서 시선을 피해 버렸기에 마냥 쳐다보고 있을 수 없어 다시 고개를 돌리자 이번엔 또 요안과 눈이 마주쳤다.
여전히 엷은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얼굴에서는 빛이 났지만 ‘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한 눈동자가 날 더 착잡하게 만들었다. 갑자기 죽고 싶어졌다.
‘공작 부인, 격한 쪽팔림에 책상에 머리를 박고 돌연사’라는 기사가 내일 아침 신문 1면에 장식되어 있는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때 요안이 내게 말을 걸려는 듯 입을 열기에 난 재빨리 그의 말을 자르며 싸늘하게 말했다.
“리라…….”
“입 닫아.”
“리라?”
“말 걸지 마.”
“……응, 알았어.”
시무룩해진 요안의 얼굴에 양심이 찔려 왔지만 모두 요안을 위한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솔직히 말하면 아주 약간 화풀이도 섞여 있었다.
그 뒤로 식당 안에서는 어떤 말소리도 들리지 않은 채 식기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던 호화로운 식사가 나왔음에도 그게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황급히 식사를 끝내고 방으로 돌아왔다.
그 상황에서 참도 맛을 음미하겠다. 체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도망치듯 식당을 떠나는 날 요안이 불러 세우려 했지만 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방으로 돌아왔다.
그도 그럴 게, 목소리가 어찌나 애절한지 보지 않아도 무슨 표정일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직접 보지 못한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봤다간 한참을 잡혀 있었겠지?
이곳에 온 지 대략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몸에 힘이 전혀 없었다. 잠깐의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들이 지나갔다.
이대로 그냥 푹신한 이불에 몸을 맡긴 채 숙면을 취하고 싶었지만 아직 내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식사 시간 전 생각난 요안과의 기억들을 떠올렸다.
엉킬 대로 엉킨 기억들을 퍼즐 맞추듯 짜 맞춰 가는 일은 생각보다 재밌었다.
그중엔 구멍이 나 있던 요고의 기억과 맞추자 그제야 본연의 기억이 되는 것들도 있었다. 마치 컬렉션을 모으는 듯한 느낌이었다.
기억을 정리한 결과 일단 프리실라와 요안은 현재 결혼 8년 차인 부부였다.
이 둘이 결혼한 지 7년이나 됐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요안과의 기억은 몇 없었지만 개중에는 이보다 더 충격적인 것들도 있었다.
역시 제일은 프리실라가 요안과 결혼한 것 또한 황후가 되기 위한 발판 중 하나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힘이 들고 외로우면 곁에 있어 줄 사람이 그리워지는 법이다. 프리실라는 그런 요안의 마음의 틈을 적절하게 이용했다.
가장 나약할 시기의 그를 끌어들여 자신의 손아귀에 가둬 버린 프리실라는 그야말로 뱀 같은 여성이었다.
자신을 향한 순수한 마음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용하며 휘두른 악랄한 모습에 나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심지어 아직 자세한 계획은 세워 놓지 않았지만 프리실라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를 없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프리실라가 굳이 요안과 결혼을 한 이유는 당연하게도 그의 가문 때문이었다.
요안과 돈독한 사이인 황태자가, 요안이 죽은 뒤에 타인의 손에 남겨질 그의 가문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프리실라는 그 점을 이용해 황태자를 압박하려는 생각마저 가지고 있었다.
도대체 그놈의 황후가 뭐라고…….
공작 정도면 황제나 황태자까진 아니더라도 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높은 작위 아닌가?
거기다 저를 사랑해 주는 잘생기고 착한 남편까지 있는데 도대체 뭐가 부족해서 이러는 건지, 난 프리실라가 배가 부르다 못해 터져 나간 상또라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 좋은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이런 여자한테 반한 걸까. 아무리 힘들었다고 해도 이건 좀 아닌데 말이다.
확실히 얼굴만은 어마 무시할 정도로 아름다웠지만 내 단편적인 기억들로 본 프리실라는 그녀의 본모습을 모른다 해도 그다지 가까이하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언제나 기품과 우아함이 흘러넘치는 그녀는 말 그대로 ‘귀족’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에도 당황하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하며 함부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차가운 여성이기도 했다.
확실히 책으로 읽었을 때도 프리실라의 예법을 중시한 어투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냉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뚝뚝했다.
이런 여자가 자신의 남자한테만 상냥하게 군다면 그 모습만으로 매력이 대기권을 뚫겠지만 안타깝게도 프리실라에게 그런 반전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 증거로 요안과의 기억 속에 프리실라는 요안에게 단 한 번도 진실한 미소를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진실한 미소는 둘째 치고 애초에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대화조차 거의 하지 않았다.
7년이나 같이 살았으면서 참으로 한결같았다. 기껏해야 보이는 거라곤 대외적으로 보여 주는 거짓 웃음 정도였다. 진짜 정(情)이라는 글자와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7년이면 부부가 아니더라도 서로에게 정이 들 만도 한데 어쩜 이리도 한결같게 싸늘한지, 사람이 아니라 인형이 아닐까?
반대로 이런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것 같은 여자한테 7년이나 애정을 쏟아부은 요안도 대단하다.
심지어 프리실라는 자기한테 관심이라곤 한 톨도 없는데 아직까지도 정이 식지 않은 걸 보면 무서울 수준이다. 이 정도면 집착 아닌가?
새삼 요안도 정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프리실라가 없어도 저 남자가 잘 살아갈지 회의감이 들었다.
책으로 읽었을 때보다 중증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