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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생각하고 고민할수록 상황이 나아지기는커녕 복잡해지기만 했다. 분명 작지만 중요한 정보인 건 확실한데 도움은 하나도 되지 않는 것 같다.

미치겠네, 진짜.

괜히 지치는 기분에 터덜터덜 침대로 걸어간 나는 크고 푹신해 보이는 이불에 다이빙하듯 몸을 던졌다. 분명 저 푹신함에 몸을 맡기면 이 꿀꿀한 기분도 치유가 될 것이다.

“억! 아, 씹. 아, 진짜……!”

라고 생각하던 때가 한때나마 있었다.

침대에 몸을 던지자 명치를 짓누르듯 찾아온 격통에 절로 신음과 욕이 튀어나왔다. 얼마나 아픈지 숨도 똑바로 쉬어지지 않았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고통에 명치께를 부여잡은 채 끅끅거리기를 한참.

어느 정도 고통이 잦아들고 나서야 난 오만상을 찌푸리며 몸을 돌렸다.

뒤늦게 명치 부근에 장식품이 눈에 들어왔다. 아무래도 몸을 던지면서 짓눌려 명치를 압박한 것 같다.

하필 달려도 위치가 무슨…….

정확히 급소를 때리다니, 눈물이 찔끔 나왔다.

욱신거리는 명치를 문지르고 있자 문득 가슴에 시선이 갔다. 낯선 빵빵함에 눈이 가늘어졌다.

새삼 느끼는 거지만 프리실라는 얼굴도 예쁘지만 몸매도 참 예뻤다. 내 원래 몸이랑 비교하는 게 죄송해질 수준이었다.

떨떠름함에 괜히 어깨를 긁적이다 통증이 점점 사라져 다음부턴 조심하자고 다짐하던 그때 고등학생 때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쉬는 시간에 친구들이랑 수다를 떨고 있을 때 근처 남자애가 장난치다 모르고 내 가슴을 쳤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깜짝 놀라며 가슴을 감싸자 내 가슴을 쳤던 남자애가 당황한 얼굴로 다가오더니 이렇게 물었다.

‘야, 갈비뼈 괜찮아? 안 아파?’

조금의 장난기도 없이 진지한 얼굴로 내뱉은 그 말에 나는 황당함과 착잡함을 동시에 느껴야 했다.

그도 모자라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나에게 퍽 소리 났다며 진짜 괜찮으냐고 묻는 그 모습은 참…….

내 주위에 있던 애들은 미친 듯이 웃고 남자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걱정스레 나를 쳐다봤다.

씨……. 갈비뼈 아니라고, 가슴을 쳤다고 개새끼야…….

성희롱으로 고소를 했어야 하는데.

상대방에게는 전해지지 않을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난 몸을 일으켰다. 뼈아픈 추억에 가슴이 시리긴 하지만 그래도 덕분에 많이 진정됐다.

냉정히 생각해 보면 내가 프리실라라는 게 썩 나쁜 일만은 아니다.

일단 확실하진 않지만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방법에 가장 가까운 건 남편의 행복을 위해 프리실라의 손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것이다.

내가 프리실라인 지금, 일이 훨씬 수월해지는 건 당연했다. 굳이 목숨 걸고 악녀에게 덤빌 필요가 사라지니 말이다.

내 목은 안녕하시고 남편의 목도 안녕하실 테니 윈윈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나쁘지 않은 걸 떠나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받아들이자.

난 심호흡을 하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이제부터는 정말 마음먹기에 달렸다.

나는 볼을 두드리며 결심했다. 요안도 꼭 구하고 프리실라에게 빅 엿을 선사하겠다고 말이다.

음, 그래도 일단 소설 속이니까 원작을 상기하고 있는 편이 좋겠지? 돈과 지식은 많을수록 좋다고 하니까.

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번쩍번쩍한 펜 님과 종이 님을 발견했다.

전에 이런 만년필을 몇백만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한다는 정보를 인터넷에서 본 기억이 있다.

펜 주제에……!

혹시라도 들킬지 모르니 나는 한글로 줄거리를 떠오르는 대로 끼적였다. 종이도 좋고 펜도 좋은데 내 글씨가 좋지 않았다.

사실 줄거리라고 해도 별건 없다. 원작 읽은 지 몇 달이 넘어가는데 그걸 어떻게 기억해?

애초에 난 줄거리보다 프리실라가 하던 기상천외한 짓거리가 더 기억에 남았다.

그래도 정말 다행이다. 혹시라도 요안이 이미 죽은 뒤였다면 진짜 답도 없을 뻔했는데 말이다.

그리고 나는 내 죄를 들켜 처형되겠지! 엉엉.

요안을 만나기 전이나 직후였다면 더 좋았을 테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으으, 으으으!”

생각보다 오래 쓰느라 굳은 등허리에 기지개를 켰다.

줄거리를 써 보니 더 절실히 깨닫게 되는 건데, 현재 나는 이곳에 대한 지식이 전무했다. 그건 내가 아무리 짱구를 굴려도 변하지 않는 사실이자 팩트였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듣는 거나 다른 사람들을 만나 기억을 되찾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이왕이면 그전에 대략적인 계획을 세워 놓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혹시 모르지, 공작 부인이라는 게 눈 코 뜰 새 없이 바쁠지.

사람 인생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걸 난 그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계획을 세워 놓으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는 데 도움이 될 거다. 무계획으로 객기와 패기만 믿고 살 나이는 이미 지났다. 지나 버렸다고!

계획을 짜기에 앞서 나는 간단한 프리실라의 프로필을 작성했다.



[이름 : 프리실라 라비스.

작위 : 라비스 공작가 가주.

특징 : 희대의 없을 악녀. 산소가 아까울 수준.



이름 : 릴리.

작위 : 왕녀.

특징 : 여주인공. 어마무시하게 예쁘다. 착하다.



이름 : 그레이.

작위 : 황태자.

특징 : 남주인공. 굉장히 잘생겼다. 남에겐 싸가지 없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하겠지.]



“…….”

작성을 끝낸 프로필에서 느껴지는 공백의 미에 할 말을 잃었다.

놀라울 정도로 아는 게 없었다.

내가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주의 깊게 본 게 악녀인데 그 악녀에 대해 아는 것이 겨우 이따위밖에 없었다. 주인공들은 뭐 말할 것도 없었다.

내 기억력이 안타까운 건지 정말 책에서 본 인물들의 프로필이 이 정도뿐인 건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이왕이면 후자라고 믿고 싶다. 빠가사리 취급은 사양이다.

악녀를 비롯한 인물들에 대한 나의 지식이 탁구공마냥 텅텅 비었다는 걸 절실히 깨달은 난 그냥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기로 했다.

이건 그나마 쉬웠다. 나 자신이 프리실라인 만큼 남편을 구할 방법은 다양했으니까.

만약 남이었다면 남편이든 프리실라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접점을 만들고 가까워지느라 상당히 까다로웠을 것이 분명한데 지금은 그럴 걱정이 없었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생각나는 대로 써 본 뒤 찬찬히 확인했다.

[첫 번째. 이 생에 여한은 없다, 자살한다.]

“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하지만 너무 극단적이었다.

자신을 죽인 상대였음에도 미안하다고 절절히 외치던 남자였으니 프리실라가 죽으면 미쳐 버릴 게 분명했다.

그리고 나도 굳이 자살까지 택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왕이면 평화롭게 해결하고 싶다. 혹시라도 죽었다가 원래 세계로 못 돌아가면? 그야말로 개죽음이다.

“으……. 일단 이건 킵 하자.”

난 ‘자살한다.’라고 써 놓은 글자 위로 엑스 표시를 찍찍 그었다. 이건 좀 아니다. 다음으로 넘어가자.

[두 번째. 이곳에서는 너도 나도 평등! 감옥에 간다.]

“오…….”

이건 좀 신빙성이 있다. 감옥에 가면 먹여 줘, 재워 줘, 옷도 주나? 아무튼 감옥에 간다면 자연스럽게 남편과 멀어질 수 있다.

또한 감옥에 가면 아마 가문에서도 가문의 수치라는 둥 가문 위세가 떨어진다는 둥 하며 쫓아낼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훗날 돌아올 프리실라도 뭘 어떻게 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프리즌 브레이크라도 찍지 않는 이상 말이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도대체 무슨 사고를 쳐야 하지?”

그렇다, 프리실라는 위세 높은 공작가의 안주인이다. 본래 프리실라의 가문 또한 꽤나 높은 위치에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런 프리실라가 감옥에 갇히려면 도대체 무슨 짓을 해야 하는 걸까? 황태자 살인 미수쯤 되면 괜찮나?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이나마 했었지만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냥 살인 미수도 아니고 황태자 살인 미수라니…….

닥치고 처형 각이다 이건.

그럼 남편 살인 미수? 근데 이게 또 남편이라면 그냥 넘어가 줄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본가에서 가만히 있질 않을 게 분명했다.

기껏 공작가의 안주인이 되었는데 과연 곱게 감옥에 가게 내버려둘까?

지금 내 상황으로는 처형당하지 않되 감옥에만 갇힐 만한 사고를 친다는 건 상당히 까다로웠다.

‘자살한다.’에 비하면 훨씬 괜찮은 방법이긴 하지만 일단은 보류하자.

‘두 번째’라는 글자 위에 나는 작게 별표와 함께 ‘보류’라고 써 놓았다.

[세 번째. 난 여기를 빠져나가야겠어, 야반도주.]

“흠?”

묘하게 꽂히는 그 느낌에 나는 진지하게 야반도주 계획을 세워 보기로 했다.

해 보지는 않았지만 영화로 자주 봤기에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다. 일단 가장 기본적인 야반도주의 법칙은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안 된다는 거다.

또 야반도주를 하고 나서 그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된다. 근데…… 야반도주에 성공한다면? 그 뒤는?

바로 내가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란 보장이 없으니 당분간 지낼 만한 현금을 챙겨 가든가 금품을 들고 가야 한다.

그리고 그 돈으로 지역 사람 집에서 며칠 묵으면 되겠지.

일반인과 귀족의 금전 감각은 하늘과 땅 차이니까 내가 적당히 뭐든 들고 가면 아마 몇 달은 먹고 놀 수 있을 것이다.

“꽤 괜찮은…… 아아.”

이 방법이면 충분할 것 같긴 하지만 딱 한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혹시 프리실라가 돌아오면 다시 공작가로 찾아가지 않을까?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바뀌어 갔다. 그 여자라면 분명히 공작가로 돌아올 게 분명했다.

다른 나라로 튀어도 다시 돌아올 거다. 그 정도의 집착이 있으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그리고 꼭 프리실라가 아니더라도 남편과 본가에서 나를 찾겠다고 사람을 풀어 제국을 이 잡듯 뒤질 것이 분명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가며 숨어 있을 방법 따위 이제 막 이 세계에 떨어진 소시민인 내게는 없었다.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구멍이 있었다.

이 방법을 채용한다 해도 훗날 프리실라가 돌아와도 공작가로 다시 가지 못하게 할 방비책과 저쪽에서 나를 찾지 않을 만한 이유가 필요했다.

난 아쉬운 마음에 별표를 두 개 그려 주고 ‘보류’라고 써 놓았다.

[네 번째. 법대로 하자고! 이혼한다.]

“…….”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었다.

왜 이런 멀쩡한 방법을 놔두고 자살하느니 감옥에 가느니 쓸데없는 걸 위에 적어 놨을까?

가장 현실적이고 정상적인 데다 법적인 효력까지 있는 방법이 있는데 왜 범죄를 저지를 생각만 했을까.

새삼 내 두뇌 수준에 기가 막혔다.

문명인으로서의 사고방식을 저버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스스로에게 크게 실망했지만 그저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잠시 내 두뇌가 일을 하지 않았다는 걸로 치부하기로 했다.

그래도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건 다름이 없었다.

만약 이혼이 성사된다면 아까 보류해 놨던 야반도주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이혼하고 난 다음엔 내가 사라지든 말든 신경 쓰는 일 따윈 없을 테니까.

다만 걸리는 게, 나는 이 세계에선 이혼을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모른다. 똑같이 쌍방 합의? 아니면 고소해야 하나?

만약 쌍방 합의라면 조금 힘들어질 수도 있겠다. 저 남편이 순순히 이혼해 줄 리가 없을 테니까.

방법은 두 가지다. 하나는 내 쪽에서 정식으로 이혼을 하자고 제안을 하는 것.

다만 왜 이혼하고 싶은지 묻는 것부터 시작해서 구구절절 안 되는 이유를 늘어놓으며 거절할 게 뻔했기에 불가능에 가까웠다.

질척하게 매달리면 해 줄지도 모르지만 그건 나중 이야기.

다른 한 가지 방법은 저쪽에서 이혼을 하자는 이야기가 나오게 하는 것이다. 저 해바라기를 의인화한 것 같은 남편에게서 어떻게 이혼 서류를 받느냐, 그건 간단하다.

정나미를 떨어트리면 된다.

하지만 평범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해 보인다. 내가 아무리 날고 기어 봤자 저 부처 같은 남자는 무슨 짓이든 용서할 것이다.

아마 내가 지치는 게 먼저겠지. 그렇기에 내가 돌아설 일이 없다는 걸 저 남자에게 인식시키는 게 중요하다.

분명 소설 마지막 구간에서 남편은 자신이 노력하면 돌아봐 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즉, 프리실라의 마음을 돌릴 여지가 있었다는 말이다.

그러니 그걸 역으로 이용해 내가 돌아설 일 따윈 없다는 걸 인식시켜 일말의 여지도 없다는 걸 보여 주면 될 거다.

자세한 방법은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금으로선 최선이자 최고의 방법이었다.

내가 생각했지만 너무 괜찮은데?

난 ‘이혼한다.’라는 글자 밑에 밑줄과 함께 별표를 무려 다섯 개나 그려 놨다.

그래, 너로 정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