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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거마저 없으면 어떻게 지내겠는가. 이렇게 주변 인물에 대한 기억이라도 있어야 어떻게든 지내지 않겠는가.

이마저도 없었다면 진짜 기억상실증인 척 연기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묵묵히 기억을 정리하다가 순간 차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퍼뜩 들어 요고를 바라봤다.

무심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던 요고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난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이대로 시선을 홱 피해 버리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계속 쳐다보기에는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결국 슬금슬금 시선을 돌렸지만 나는 기억을 떠올리다 알게 된 그녀의 정보에 구겨지는 미간을 주체할 수 없었다.

대뜸 노려보고 고개를 돌리며 미간을 찌푸리는 내 모습에 다른 시녀들은 안절부절못했지만 요고라는 시녀는 역시나 아무래도 좋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아까는 저 모습이 그냥 조금 이상하게만 보였는데 지금은 왜 저런 태도인지 알겠다. 사람은 겉만 봐서는 모른다더니 아주 그 말이 딱이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갑자기 들려온 요고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지만 이내 황급히 놀란 얼굴을 갈무리하며 은근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어딘가 멍하게 느껴지던 눈빛과 사무적인 말투가 지금은 당장이라도 나를 꿰뚫을 듯 날카롭게만 느껴졌다.

나는 최대한 태연을 가장하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슬쩍 고개만 끄덕이는 요고의 무미건조한 모습이 괜히 지금은 찌를 듯 뾰족하게만 보였다.

나는 애써 침착한 모습으로 요고를 곁눈질하며 떠오른 기억들을 되새겼다.

보이는 대로 요고는 시녀였지만 다른 시녀들과 특별히 다른 점이 있다면 내 전속 시녀라는 점이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요고는 겉만 보면 그냥 조금 무뚝뚝하고 감정 표현이 적은 시녀였다.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면 아마 그렇게만 생각했겠지.

그래, 빌어먹을 기억만 안 떠올랐다면 말이지.

그렇다면 뭐가 그렇게 문제인가. 다름이 아니라 저 요고의 시녀라는 직책이 사실은 어디까지나 대외적인 모습이라는 점이었다.

요고는 시녀이기 전에 ‘카나리아’라는 정보 길드의 일원이다.

길드면 보통 의뢰를 받고 일을 해 주는 일종의 해결사? 같은 느낌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곳의 일원이라니.

놀라운 점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더 충격을 받은 이유는 길드에서 요고의 위치 때문이었다.

그냥 평범한 길드원인 줄 알았던 요고는,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특수 부대원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그것도 무려……

암살과 잠입이 전문인 길드원으로서 말이다.

진짜 저 귀여운 얼굴로 잠입과 암살이 전문이라니, 깨달은 순간부터 머리가 안 돌아간다.

그래, 명색이 정보 길드인데 잠입 정도야 이해는 한다. 그런데 암살이라니, 암살이 왜 나오는데! 제발 내가 아는 그 암살이 아니라고 해 줘!

너무 머나먼 이야기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솔직히 겉과 속이 너무 달라서 지금도 안 믿긴다.

아무튼 그래서 이런 살벌하기 짝이 없는 애가 왜 여기 있는가 하면 감시 의뢰 때문이었다.

골 때리는 건 그 감시 대상이 나였다. 아니, 정확히는 내 몸의 주인이었다.

그냥 감시만 할 거면 굳이 저런 애를 붙일 필요가 없잖아. 이거 레드라이트 아닌가요? 나만 신경 쓰이나? 어떻게 생각해도 감시만 할 생각으로는 안 보이는데 말이다.

자칫하면 목이 날아가는 게 아닐까 걱정됐다.

대체 이 몸뚱이의 주인이 누구기에 저런 살벌한 애가 감시를 다 하나 했는데, 결론은…… 감시할 만했다. 덕분에 이 몸의 주인도 알았고 말이다.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도 되지만…….

난 아직도 손에 쥐고 있는, 이제는 읽을 필요성이 사라진 편지를 뚱한 표정으로 노려봤다.

“시발, 내가 프리실라라니…….”

시녀들에게는 들리지 않을 아주 조그마한 소리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프리실라.

자기 남편을 죽이고 작위를 가진 것도 모자라 황후가 되겠다고 주인공들과 독자들에게 고구마를 먹이던, 여태껏 내가 본 모든 악녀들 중에서도 탑을 달리는 쌍년이었다.

애써 아닐 거라 모른 척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한다. 밀려오는 암담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망할! 하고 많은 등장인물 중에 악녀라니, 내가 악녀라니……!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는데 적이 나다. 자폭이 답인가? 존나 어쩌라는 거지.

악녀의 손에서 탈출시키려고 왔는데 내가 악녀가 됐다니.

내가 악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을 때도 멘탈에 금이 조금 갔었는데 확신하게 되니 와장창하고 깨질 것만 같다. 굉장히 착잡한 기분이다.

지금 내가 들어와 있는 몸이 자기 남편도 서슴없이 죽인 여자의 몸이라는 거잖아? 으으, 소름 돋아. 아직 일어난 일도 아닌데 찝찝하다.

밖으로 나가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쳐다보는 거 아니야? 앞으로 받게 될지도 모르는, 그리 곱지만은 않은 시선을 생각하니 의욕이 꺾인다.

어쩐지 시녀들이 겁먹고 덜덜 떨면서 대하더라니. 나 같아도 덜덜 떨겠다.

당장 본인도 이런 사람인데 아주 끼리끼리 모인다고 전속 시녀라는 애도 멀쩡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진짜 이런 인간들 사이에 끼어 있으려면 목숨이 여러 개라도 부족할 것 같은데. 나 소원 이루기도 전에 능지처참당하는 거 아니야?

무엇보다 그런 생각에 신빙성을 더해 주는 게 이런 태생부터 못돼 처먹은 악녀의 아버지가 요고의 의뢰주라는 점이었다.

프리실라도 이런 정신 나간 년인데 아버지라고 멀쩡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친딸한테 이런 애를 감시로 붙인 사람이니까. 아니, 이런 애라서 붙인 것일지도 모른다.

아버지니까 프리실라의 이런 뒤틀린 심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테고, 그래서 이런 일을 벌였을지도 모르지.

아니, 그래도 아빠인데 딸을 죽이기야 하겠어? 내가 너무 과민 반응 하는 거겠지!

아니다, 프리실라라면 죽어도 괜찮을지도……. 잠깐만 지금은 내가 프리실라잖아? 하하, 다메요!

아아, 아직 기억이 몇 개 더 있는 것 같은데 괜히 떠올리기 싫어졌다. 여기서 더 내 멘탈을 깎아서 어쩌려고.

요고는 식사 준비가 끝났다며 깍듯이 인사를 하고 먼저 방을 나섰다.

예전에 어디서 보니까 종자는 주인의 앞에 서면 안 된다는 말이 있던데 여긴 아닌가 보다.

앞으로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도 신경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피로가 몰려왔다.

이내 식당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난 연신 요고를 살폈다.

굳이 떠올리고 싶지는 않았지만 혹시라도 실수했다가 저 친구가 자기 전문을 살리는 참사가 벌어질까 봐 결국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보아하니 프리실라 쪽에서 요고를 회유하려 든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물론 거절당했지만.

그 뒤로도 떠오르는 기억이라고는 하나같이 요고와 프리실라가 서로 대치하는 것들뿐이라 난 새삼 이 두 사람의 정체가 몹시 궁금해졌다.

이십대 초반, 많이 쳐 줘야 이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주제에 잠입과 암살이 전문인 요고와, 그런 그녀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신경전을 벌이는 프리실라.

둘 다 좋든 나쁘든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다. 존나 무슨 어디 느와르물에서나 나올 법한 여자들이다.

이거 로맨스 아니었나? 왜 얘들은 여기서 지들끼리 첩보 느와르물을 찍고 있는 거지.

빙의한 몸 주인도 골 때리는데 옆에 있는 사람도 정상이 아니란 말이지.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무사히 집에 돌아갈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기 시작한 그때, 요고가 문을 열더니 옆으로 비켜섰다.

여기가 식당인 것 같았다. 너무 고풍스러워 이게 식당인지 미술관인지 모를 공간에 발을 들어설 때 우연히 요고와 눈이 마주쳤다.

정체를 안 뒤로는 계속 쳐다보는 듯한 느낌이라 우연이라도 이렇게 눈이 마주치면 묘하게 섬뜩하다.

차라리 표정이라도 풍부했으면 좋으련만 인형마냥 무뚝뚝한 얼굴과 마주치니 섬뜩하기도 하고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다.

또 다른 시녀가 빼 준 의자에 살며시 걸터앉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소원을 이루기까지 넘어야 할 산이 한두 개가 아닌 듯했다. 내가 만약 등산가였더라면 전 세계에 이름을 널리 알렸을 텐데.

터져 나오는 한숨을 애써 삼키며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 냈다.

이씨, 왜 그딴 소원을 빌어 가지고…….

과거 나레기의 주둥이를 당장이라도 후려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물론 할 수는 없지만.

나 진짜 잘할 수 있을까? 아니, 잘하고 자시고 스타트나 끊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쌓여 가는 근심과 걱정에 나는 애먼 테이블을 노려봤다. 식탁 주제에 번쩍번쩍한 것이 식탁이 아니라 식탁 님이었다.

“……리라?”

이거 하나만 가져가 팔아도 몇 달은 놀고먹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낮고 차분해서 꿀성대라는 게 이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기분 좋게 하는 목소리였다.

난 당장이라도 취할 것 같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하고자 고개를 들었다.

내 정면에는 언제부터 앉아 있었는지 모를 금발, 금안의 미남자가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굽어져 살짝 떠 있는 머리와 처진 눈꼬리가 강아지를 연상시켰다.

등 뒤에 날개만 안 달렸지 꼭 천사 같은 그 모습에 넋을 뺀 채 미남자의 얼굴을 요모조모 살펴봤다.

소설을 보면 곧잘 ‘순금을 녹인 듯한 금발’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난 솔직히 그 표현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금발이면 그냥 금발이지, 순금을 녹인 건 무슨 색이야? 비싸 보이는 머린가? 그런 생각을 하며 그 표현을 우습게 봤었다.

하지만 저 남자의 금발은 나의 금발이라는 개념을 산산조각 냈다. 내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금발은 금발이 아니었다.

내가 알던 금발은…… 그래, 금발이 아니라 보리였다. 잘 익은 보리색.

그에 반해 저 남자의 금발은 진짜였다. 머리칼에서 흐르는 윤기부터가 남달랐다. 조명에 비친 머리칼이 찬란했다.

머리에 금칠이라도 했나? 머리카락을 뽑아다가 뭉쳐서 금이라고 속이면 속을 것 같다는 다소 그로테스크한 상상이 머릿속을 스쳤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어딘가 포근함이 느껴지는 따스한 금안. 대개 고양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눈동자 색이었지만, 짐승에게서 느껴지는 특유의 날카로움은 없고 오히려 따스한 노을을 연상시켰다.

동화에 등장하는 왕자님이 이런 사람이지 않을까.

목소리만 미인인 줄 알았는데 얼굴도 미인이시네요.

“……진짜 잘생겼다…….”

“응?”

앗! 머리로만 생각한다는 게 무심코 입 밖으로 내뱉었나 보다. 내가 내뱉은 말에 남자도 조금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쩜, 그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재빨리 화제를 돌리려 했지만 남자의 표정 변화에 하려던 말도 까먹은 채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놀란 듯 동그래졌던 남자의 눈이 천천히 접히고 입술이 기분 좋은 호선을 그렸다. 얼굴 가득 피어오르는 미소에 나는 숨을 들이켰다.

이윽고 그 살인적인 눈웃음이 내게 향하는 순간 난 숨이 멎는 착각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