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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로 세계 정복 해도 이상하지 않을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방 안만 대충 훑어봐도 좋아 보이는 가문과 절세미인이라고 해도 좋을 얼굴.

그러나 이 몸의 주인에겐 한 가지, 정말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진짜 무서울 정도로 못되게 생겼다.

예쁜데, 진짜 세상 예쁜데.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내가 살면서 봤던 여자들 중에서 가장 예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어쩜 이렇게 성격이 나빠 보일까.

분명 예쁜 얼굴인데 어디서 만나든 절대 친해지고 싶지 않은 그런 기분이 드는 얼굴이다.

지금도 인상 좀 찌푸린 거 가지고 아주 얼굴에서 사나움이 뚝뚝 흘렀다. 세상 냉정하게 생긴 것 봐.

이런 내 표정에 주변 시녀들도 덩달아 당황했다. 미안해요, 시녀 언니들.

시녀들의 태도를 보니 아무래도 생긴 것 만큼 성격도 그리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언니, 얼굴은 굉장히 예쁜데 마음은 안 예뻤나 보네요.

돌연 거울에 비친 여성의 눈동자가 점점 불쌍한 사람을 보는 듯 측은해졌다.

잠깐만, 근데 그거 지금은 나잖아?

생각해 보니 내가 지금 그런 사람의 몸에 빙의해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놈의 얼굴 품평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 중요한 사실도 잊고 얼굴이나 감상하고 앉았다니 나도 어지간히 얼빠구나.

시녀들이 내 머리칼을 조심스레 정돈하는 감촉을 애써 무시하며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일단 딱 봐도 귀족인 건 알겠는데 대체 누굴까. 원작에도 나온 사람인가?

아무리 책 속이라도 이렇게 생긴 사람이 널렸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게 무슨 미친 세계야.

보통 이 정도 얼굴이면 주인공이나 그에 준하는 캐릭터, 아무리 못해도 비중 있는 조연이지 않을까. 일단 포스로 봐서는 당연히 주인공은 아닐 거다.

그래, 아무리 그래도 이 얼굴로 주인공은 좀 아니야. 이건 로맨스지, 피카레스크식 느와르물이 아니다. 이 얼굴은 사실 어딜 어떻게 봐도 악녀…….

“큼, 크흠.”

거기까지 생각하던 나는 황급히 생각을 갈무리하며 괜히 헛기침을 했다.

여, 여기까지.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아직 단정하기에도 이르고 말이다.

“저, 마님? 혹시 마음에 안 드시는 거라도…….”

내 헛기침에 시녀들이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물었다.

내 정신 좀 봐. 뭐 하나에 꽂히면 주변이 안 보이다 보니 나도 모르게 시녀들을 잊고 있었다.

미안함에 별거 아니라고 대답해 주자 시녀는 그제야 안심한 듯 작게 숨을 내쉬며 드레스는 어떤 걸로 가져올지 내게 물었다.

그 말에 또 머리가 하얘졌다.

그거 내가 정해야 하는 거야?

나 여기 드레스코드 같은 건 전혀 모르는데. 애초에 이 몸 주인이 무슨 드레스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단 말이다.

한참을 고민하는 척 어찌해야 할까 짱구를 굴리던 나는 적당히 알아서 가져오라고 말했다.

부담스러워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미안하게도 어쩔 수가 없었다.

시녀는 그런 내 말에 역시나 조금 곤란한 얼굴이었지만 작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어딘가로 급히 움직였다.

이윽고 시녀는 짙은 보라색 드레스를 한 벌 가져왔다. 저런 걸 내가 입는다니, 새삼 머리 한구석에서 괴리감이 느껴졌다.

시녀들의 도움을 받으며 드레스를 입고 있자니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까 한번 떠올렸더니 자꾸 생각나서 미치겠네.

난 자꾸만 떠오르는 한 인물을 머릿속에서 털어 내려 애썼다. 아니야, 아직 섣불리 단정 짓기는 이르다.

세상이 얼마나 넓은데 그중에 미인이고 악녀같이 생긴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어? 하다못해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겠지.

일단 지금 가장 중요한 게 뭘까 생각했다.

역시 가장 중요한 건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냐’겠지.

뭘 알아야 소원을 이룰 수 있게 노력을 해 보지 않겠는가? 당장 나 자신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게 없는데 무슨 수로 남을 돕겠는가?

일단 내 앞가림이나 잘해야 한다. 소원은 다음이다.

나는 이 여자의 이름도 모른다. 하나 의심 가는 이름이 있기는 하지만 아니길 바랄 뿐이다.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백전백승! 일단 정보 수집이 먼저다.

그런데 막상 정보 수집이라고는 해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다짜고짜 지나가는 사람 잡아다가 내 이름이 뭐냐고 물으면 당장 의사에게 데려갈 게 뻔했다.

가끔 가다 주인공이 기억상실증인 척하고 메소드 연기를 펼치는 걸 본 적은 있지만 내게 그런 연기력 따윈 없었다. 떠나서 그걸 할 용기도 없다.

그도 그럴 게 너무 쪽팔리잖아! 오글거려! 난 못 해!

‘다, 당신은 누구죠? 저는 누구예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요……!’라니 미친, 그걸 내 입으로 어떻게 말해? 말했다간 죽고 말 거야.

사인은 수치사, 흑역사, 등등, 자매품으로는 돌연사와 심쿵사가 있다.

헛소리를 속으로 나불거리고 있던 그때, 끝났다는 말과 함께 시녀들이 내게서 떨어졌다.

음, 역시 패완얼은 배신하지 않는구나. 내 모습을 구경하다 나는 눈을 번뜩였다.

굳이 누군가한테 물어볼 필요 없지 않나?

지금 시대라면 전화는 없을 테니 당연히 편지를 주고받았겠지?

그럼 그 편지를 몇 개 찾아보면 당연히 내 이름이나 가문 이름, 작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난 역시 천재야!

간만에 열일한 내 두뇌를 위해 마음속으로나마 건배를 하던 그때, 때마침 한 시녀가 내게 뭔가를 건네며 말했다.

“마님께 온 편지입니다.”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내게 편지를 건네는 모습이 좀 우습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편지를 받아 들려던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말을 꺼낸 시녀를 바라봤다.

똑같은 시녀인데 유독 신경 쓰인다.

양 갈래로 느슨하게 묶은 짙은 남색 머리에 잿빛 눈동자와 무뚝뚝한 얼굴이 어딘가 언밸런스하면서 잘 어울리는 상당히 귀여운 인상의 시녀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바라보고 있으니 시녀도 말없이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그 태도에 난 역시 이 시녀가 뭔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다른 시녀는 절대 눈을 안 마주치겠다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거나 시선을 피했었는데 이 시녀는 유독 태연했다.

어째서일까? 그냥 성격이 그런 건가?

여기 있는 시녀들 중에서 나이는 가장 어려 보였지만 바른 자세와 군더더기 없는 몸짓은 오히려 가장 숙달된 듯한 모습이었다.

혹시 그냥 동안이고 경력이 가장 높은 걸까?

처음에는 그냥 똑같은 시녀라고 했는데 어째 저 시녀만 유독 기분이 싸하단 말이지.

“그래. 이것뿐?”

내가 떨떠름하다는 듯 대답하자 예의 시녀는 작게 고개를 숙이며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 정갈한 움직임에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마치 로봇 같았다.

난 시녀 손에 쥐여 있는 고풍스러운 디자인에 은실로 문양이 박힌 편지를 가만히 살펴봤다.

내가 편지를 받아 들자 시녀는 작게 고개를 숙이고는 뒷걸음질 치며 본래의 시녀들 사이로 돌아갔다.

그러면서도 내게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않는 모습이 묘하게 기괴했다.

대체 왜 저렇게 나를 쳐다보는 건지 모르겠다.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건가? 보는 사람 신경 쓰이게 왜 저러지 진짜.

일단 저 시녀에게 뭔가 있다는 건 알 것 같았다. 다른 시녀들과 무슨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저 시녀 앞에서는 몸이 묘하게 긴장이 되었다.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일단 눈앞의 목적에 충실하기로 했다.

설마 글자를 못 읽지는 않겠지 싶어 편지를 꺼내 읽어 보려던 그때, 갑자기 시야가 흔들렸다.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기억들로 머릿속이 진탕이 된 기분이었다.

덩달아 덮쳐 온 두통을 동반한 어지러움에 몸이 휘청거렸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몸이 옆으로 기울어져 이대로 가다간 바닥에 그대로 엎어질 것 같았다.

여기 바닥, 대리석인 것 같던데 넘어지면 대리석과 함께 머리도 깨지는 게 아닐까? 난 덮쳐 올 충격에 질끈 눈을 감았다.

그때 기울던 몸이 돌연 멈춰 섰다. 다행히 꼴사납게 엎어지진 않은 것 같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예의 시녀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시녀들도 놀란 듯 경악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아무리 타인이라도 모시는 사람이 쓰러지려고 했는데 여전히 동요도 없이 무뚝뚝한 얼굴의 시녀를 난 멀거니 주시했다.

무작위로 떠오르던 기억들이 정리되고 두통이 잦아들자 그제야 시녀가 똑바로 눈에 들어왔다.

무뚝뚝한 시녀, 요고의 얼굴이.

“요고?”

“왜 그러시죠.”

돌연 내가 이름을 부르자 시녀의 얼굴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아니, 이름 좀 불렀다고 그러시면 제가 마음이 아프잖아요.

그건 그렇고 난 이 시녀의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본 적도 없었고 당연한 일이지만 방금 처음 봤다.

하지만 웃기게도 정말 불현듯 시녀의 이름이 떠올랐다.

아직까지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편적인 기억들에 당황해하고 있는데 요고라는 시녀가 말했다.

“마님, 괜찮으신가요?”

높낮이는 없지만 또렷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나는 상념에서 깨어났다.

아직 조금 혼란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어지럽던 건 금세 나아졌다.

요고의 도움을 받아 몸을 세우자 그녀가 재차 내게 몸 상태를 물어 왔다. 그러고 보니 나 금방 쓰러질 뻔했었지?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쓰러질 뻔했는데도 시녀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고 잿빛 눈동자로 묵묵히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남이라도 누군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면 조금은 동요하기 마련인데 이 시녀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 나한테만 그런 건지 원체 성격이 이런 건지 잘 모르겠다.

“잠깐 어지러워서 그래.”

그 말과 함께 나는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댔다.

이런 내 모습에 시녀들이 의아하다는 듯한 반응을 해 보였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내 머릿속을 헤집어 놨던 알 수 없는 기억들을 정리하며 난 이마를 짚었다.

내가 겪어 보지도 못한 일들을 마치 내 일처럼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 조금 괴리감을 느끼긴 했지만 마치 사진첩이나 영화를 보는 느낌이라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다행인 건 떠오르는 장면들이 단편적이고 그리 많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통째로 떠올리기라도 했다간 어지러움에 속을 게워 낼지도 모른다.

심하면 정체성에 혼란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아직 이게 도대체 무슨 기억인지 모르겠지만 정황상 지금 내가 들어와 있는 몸의 주인이 가진 기억이 아닐까 추측했다.

안 그래도 이 시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어서 곤란했는데 몸 주인의 기억이 떠오른다면 정말 많은 도움이 될 게 분명하다.

다만 문제는 그 기억이 어째선지 애매모호하다는 거지.

이 기억들은 이상해도 너무 이상했다.

기억이 날 거면 전부 나든가 할 것이지 떠오르는 건 어째선지 이 요고라는 시녀와 관련된 기억뿐이다.

혹시 뭔가 이유라도 있는 걸까?

매개체라도 있는 건가?

직접 본 사람만 기억이 떠오르는 걸까 싶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다른 시녀들에 대한 기억은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심지어는 요고에 대한 기억마저도 완전하지 않았다.

시간 사이사이의 괴리감도 컸고, 그 장면조차 요고를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은 기억이 없다시피 할 정도로 흐릿했다.

끽해야 이 몸의 주인에게 있어 요고가 어떤 사람인가,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차근차근 떠오르는 기억들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