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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응…….”

두통을 호소하다 버티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었는지 여전히 욱신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몸을 일으켰다.

설마 나 기절한 거?

외전 내용이 좀 충격적이긴 했지만 설마 기절까지 할 줄이야.

이거 작가한테 당신 작품 읽고 정신적 충격을 받아 기절했다면서 진단서 끊어 보내면 돈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그건 좀 아니…… 어어?”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에 흘러나온 목소리가 낯설었다.

내 목소리는 이렇게 매끄럽고 높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동물에 비유하자면 지금 내가 내뱉은 목소리는 꾀꼬리 같다.

하지만 내 원래 목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목소리가 돼지 멱따는 소리 같으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예전 친구에게 들은 말에 의하면 그냥 길거리를 지나다 우연히 볼 수 있는,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해 화가 난 개가 짖는 듯한 목소리라고 했다.

그날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자, 언제 찍었는지 내가 술에 취해 개처럼 짖는 영상을 보여 줬다.

정말 지나가는 똥개가 열 받아 짖는 소리와 흡사했다.

아, 괜히 떠올렸다.

떠오른 흑역사에 몸서리치다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깨닫고 황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목소리도 내 목소리가 아니었지만 지금 내가 누워 있는 곳 또한 전혀 낯선 공간이었다.

익숙하던 원룸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영화에서 볼 법한 넓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곳곳에 어떤 화가들이 그렸는지 모를 각기 다른 크기의 유화들이 걸려 있었고 가격깨나 나갈 것 같은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내가 누워 있는 침대도 크기가 어마어마했다. 원래 내가 지내던 방이었더라면 이 침대 하나만으로 방 안이 꽉 차고도 남을 것이다.

침착하게 몇 번이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멍청한 숙주로 인해 뇌도 드디어 퇴화하기 시작한 듯 생각하기를 그만둬 버린 뇌 덕분에 도통 지금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납치는 아닐 거고 꿈이라기엔 너무 생생하다.

‘이게 말로만 듣던 루시드 드림인가?’ 하고 팔을 찰싹 때리려는 찰나, 머릿속에서 번역 프로그램에서나 나올 법한 이질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원 이루어 드렸습니다.」

앞뒤 다 잘라먹은 그 문장에도 난 그게 뭘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내가 소설 속으로 들어가면 소원이 없겠다.’

물론 그렇게 생각은 했지만 엄청 간절하게 빈 것도 아닌데?

누가 장난치는 게 아닐까 의심하자 또다시 무기질적인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꿈은 이루어진다.」

설마설마했지만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았다.

꿈이라면 깨 보라며 팔을 내려쳐 봤지만 도통 깨지는 않고 애꿎은 팔뚝만 벌겋게 부어올랐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전혀 믿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난 소설 속으로 들어온 게 분명했다.

그것도 내가 읽던 <그대여, 나를 놓지 말아요.>에.

그렇구나, 나 소설 속으로 들어 왔구나……는 개뿔!

“‘꿈은 이루어진다.’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렇게 복권 1등 당첨되게 해 달라고 빌 때는 안 들어주더니 뭐 이딴 소원을 들어주고 앉았냐!”

결국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끙끙거리다 결국 참지 못한 나는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옆에서 보면 웬 미친년인가 싶겠지만 나는 진지했다.

막상 필요할 때는 개무시해 놓고 이제 와서 소원이니 들어주겠다며 엿을 먹였는데 화가 안 나면 그게 정상인가?

악을 써 가며 불만을 토로하자 또다시 머릿속으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텔레파시가 가능하다면 이런 기분이 아닐까 싶었다.

「말이 씨가 된다.」

묘하게 비웃는 어조였다.

분을 참을 수 없어 나는 한참 동안 그 목소리를 향해 역정을 냈다. 그때 다시 한번 목소리가 말했다.

「소원을 이루면 돌려보내 주겠다.」

그 말에 나는 내 소원을 떠올렸다.

‘악녀에게서의 구제? 남편의 행복?’

만약 저 목소리의 말이 사실이라면 괜히 악 쓰며 역정을 내는 것보단 차라리 목소리의 말대로 내 소원? 이라는 걸 이루는 게 훨씬 가능성이 있었다.

막연하게 홀로 돌아갈 방법을 찾다간 평생을 이곳에서 지낼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뒤늦게 냉정을 찾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지금 상황을 정리했다.

소설 속으로 들어왔는데 돌아갈 방법은 ‘소원을 이루는 것’이란다. 도대체 평범하게 잘 살다가 이게 뭐 하는 시추에이션인지 모르겠다.

내 소원은 악녀의 남편이 행복해지는 것이었고, 그게 맞다면 내가 할 일은 악녀의 남편이 악녀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목소리로 보건대 이 몸 또한 내 몸이 아닌 듯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평민은 아니고 귀족은 되는 것 같다는 거다.

평민이 이런 방을 가지고 있을 리 없으니까.

악녀에게서 남편을 벗어나게 하려면 적어도 귀족쯤은 되어야 가능성이 있을 텐데 다행이었다.

생각해야 할 게 너무 많았지만 일단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게 가장 급했다.

그때였다. 상념을 깨우는 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똑똑똑.

“마님, 무슨 일 있으신가요?”

노크 소리와 함께 안부를 묻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좀 전에 소리쳤던 게 밖으로 뚫고 나가며 근처에 있던 사람들에게 들린 것 같았다.

갑작스런 목소리에 당황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허둥거리고 있자 재차 문 밖에서 “마님?” 하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쩌지? 일단 괜찮다고 하면 되나?

아니야, 차라리 일단 들어오라고 하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도 알아보는 편이 낫지 않을까.

“드, 들어와.”

앗, 말 더듬었다. 아, 아니야 사람이 말을 더듬을 수도 있으니까 분명 이 정도는 괜찮겠지.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몇몇의 시녀(?)들을 슬그머니 확인했다.

시녀 중 한 사람이 가만 서 있는 나를 확인하더니 작게 어깨를 떨며 물었다.

“호, 혹시 뭔가 불편하신 일이라도 있으셨나요?”

막상 들어오라고 하기는 했는데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내가 여기 있는 것 자체가 불편해요, 이러면 이상하게 쳐다보겠지?

“별거 아니야.”

“앗, 네.”

반말하는 거 맞겠지? 저쪽에서 존대했으니까 내가 윗사람인 거겠지?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어째 시녀들이 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왜 그런가 했는데 내가 들어오라고 했었다는 게 떠올랐다.

불러 놓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었구나!

불러 놓고 아무것도 안 하다니, 양아치나 할 법한 짓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황급히 돌려보내려다 뭔가를 물어보려 했다는 게 떠올랐다.

어, 이, 일단…….

“지금 몇 시지?”

“시간 말씀이신가요……?”

시녀는 얼굴을 미묘하게 찡그리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벽에 붙어 있던 시계를 확인했다.

시계는 정확하게 여덟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 저기 있었구나. 잘 좀 살펴볼 걸 후회됐다.

어이가 없어서 멀거니 시계만 보고 있자 시녀가 내게 물었다.

“저기……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지금 당장 준비하라 이를까요?”

“해야지. 식당으로 가자.”

“식당…… 말씀이신가요?”

내게 묻는 시녀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아니, 식당에서 먹지 그러면 어디서 먹어?

“그럼?”

“아, 아닙니다!”

난 황급히 고개를 숙이는 시녀를 멀거니 바라봤다.

그래, 일단 먹고 생각하자. 머리를 너무 썼더니 배가 고팠다. 사람이 배가 불러야 또 머리를 쓰지!

식당에서 밥을 먹겠다는 말에 돌연 시녀 몇이 놀란 얼굴을 해 보인 터라 또 뭔가 있는 걸까 걱정했지만 먼저 방을 나서는 시녀의 모습을 보며 안도했다.

그도 그럴 게…… 식당이 어딘지 모르거든.

그래, 일단 먹고 생각해야지. 식당으로 가는 길은 몰라서 은근슬쩍 눈치를 보며 가만히 서 있자 시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금 당황하는가 싶더니 떠듬떠듬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준비? 뭐를? 식당가는 거 아니야?

내가 이해를 못 하고 멍하니 있는 사이 시녀들이 나를 어디론가 데려갔다.

설마 식당인 척하고 나를 이상한 곳으로 안내하는 건 아니겠지?

이대로 독방에 가둬져서 시녀들이 하극상을 벌이는 장면을 상상하다가 이윽고 도착한 곳을 확인했다.

다름 아닌 욕실이었다.

욕실? 욕실은 왜…….



그 뒤로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다.

입고 있던 잠옷인지 드레스인지 모를 옷이 일사천리로 벗겨지고 탕에 들어가게 되었다.

옷을 벗기는 순간에 ‘싫어요! 안 돼요! 이러지 마세요!’ 하고 소리쳐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귀족들은 씻는 거나 옷을 입는 것도 시중을 받는다는 걸 떠올리고 겨우 입을 다물 수 있었다.

여러 사람의 손길에 씻기며 평정심을 몇 번이고 잃을 뻔했지만 다행히 별일 없이 목욕을 마쳤다.

누가 씻겨 준 기억이라곤 목욕탕에서 때밀이 아줌마가 등 밀어 준 것밖에 없었는데.

내 살을 벗겨 내겠단 의지가 느껴지던 아줌마의 손길과 시녀들 손길은 천지 차이였다.

어찌나 조심스럽게 대하던지 무슨 폭탄 만지는 줄 알았다.

유리 인형이나 도자기도 있는데 왜 하필 폭탄이냐 하면…….

“어디 불편하신 곳은 없으신가요……?”

그리 말하며 시녀가 쭈뼛거렸다.

그냥 조심스러우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뭐가 그리 무서운지 씻으면서도 하나같이 내 눈치를 보느라 안색들이 그리 좋지 않았다.

혹시 지금 내 몸의 주인은 성격이 별로 좋지 않았던 걸까?

영 예감이 좋지 않아 작게 한숨을 내뱉으며 정면의 거울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 모습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뒤늦게 호기심이 일었다.

그리고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을 확인한 나는 시녀들이 왜 그렇게 조심스러웠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거울에 비친 나는 성격이 굉장히 나빠 보이는 얼굴이었다.

나도 모르게 넋을 놓고 쳐다보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이게 사람 얼굴인가 싶어 거울을 노려보자 거울에 비친 여자도 불쾌하다는 듯 눈가를 찡그렸다.

정말 신기한 건, 본래의 내가 이런 표정을 지었다면 지나가던 사람이 내 얼굴을 보고 ‘뭐야, 똥이라도 밟았나?’ 했겠지만 이 여자는 어째 찡그린 얼굴도 더럽게 예뻤다.

내가 하면 오만상이고 얘가 하면 예쁜 짓이었다. 분명 똑같이 눈 두 개, 코 하나, 입 하나인 사람 얼굴인 데다 같은 표정인데 하늘과 땅 차이다.

잘생긴 사람이 싸가지 없으면 나쁜 남자고 못생긴 사람이 싸가지 없으면 나쁜 놈이라는 게 이런 걸까.

새삼 느낀 외모지상주의에 슬퍼하면서도 거울에 비친 지금의 ‘내’ 얼굴을 오목조목 뜯어보았다.

어째 볼수록 예쁜 것이, 번화가를 돌아다니면 따라다니는 남자들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줄을 세울 수 있을 것 같다.

엷게 자줏빛을 띠고 있는 흑발은 비단처럼 곱고 전혀 엉켜 있지 않았다.

손으로 대충 빗어 봤는데 젖어 있음에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것이 당장 샴푸 광고를 찍자고 제의가 들어와도 이상하지 않을 모발이었다.

젖어도 이 정도인데 뽀송하게 말리면 어떨까.

난 매일 트리트먼트다 뭐다 과학의 산물로도 어쩔 방도가 없는 개털이었는데 말이다.

속눈썹은 또 얼마나 긴지 바람 불면 팔락이지 않을까 걱정될 수준이고 피부는 백옥 같은 게 도자기 같았다.

그 흔한 잡티 하나 보이지 않는 깨끗한 피부에, 광합성 좀 해 보겠다고 태양빛을 쬐면 흡혈귀마냥 타들어 가던 내 피부가 오버랩 됐다.

작고 탱탱한 입술하며 실리콘이라도 박아 넣은 게 아닐까 의심스러운 오뚝한 코,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눈매. 보라색 눈동자가 또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그야말로 차도녀의 귀감이었다.

그래, 마치 악녀같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