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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흑!”
외마디 비명과 함께 새하얀 테이블 위로 붉은 선혈이 흩뿌려졌다.
남자는 천천히 붉게 물들어 가는 식탁보를 멍하니 바라보다 자신의 입가를 닦았다.
손끝에 묻어 나오는 붉은 피와 비릿하게 올라오는 피내음이 지금 이 상황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그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손이 점점 떨리고 감각이 무뎌져 가는 와중에 결국 테이블로 쓰러진 그는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들어 보였다.
그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시선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그녀와.
죽어 가는 남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숨이 점점 가빠지며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한 그가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리라…….”
애처롭기 그지없는 목소리에도 그녀는 어떠한 반응도 보여 주지 않았다.
힐끔 시계를 쳐다보며 태연히 고개를 까딱이는 모습은, 마치 그녀 홀로 다른 세상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왜…….”
재차 토혈을 한 남자가 물었다. 테이블 위로 쏟아진 출혈량 또한 만만치 않았으며 듬성듬성 내장 조각이 섞여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숨은 끊어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싶었다. 어째서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이러면 마치 그녀가 자신을 죽인 것 같지 않은가. 그는 믿고 싶었다.
“왜냐고? 당연하잖아?”
높낮이가 전혀 없는 목소리였지만 어째선지 발랄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진심은 하나의 칼날이 되어 그의 가슴을 베어 냈다.
독으로 인한 충격마저 잊을 만큼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당신이 살아 있으면 방해되니까.”
자신의 손톱을 훑어보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자 그의 푸른 눈동자는 슬픔에 젖어 들어갔다.
억울함도 분노도 배신감도 아닌, 오로지 슬픔으로 젖어 들어가는 그의 눈동자는 죽어 가는 그의 모습과 합쳐져 너무도 아름답고, 처량했다.
“공작가는 내가 잘 이끌어 갈게, 황후가 되려면 공작쯤은 되어 주어야지 않겠어?”
“…….”
그녀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되리란 것 또한 그녀와 결혼하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제 관심 밖에 있는 것에는 한없이 무심한 사람이었다.
자신과 결혼한 것 또한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녀와 결혼했다.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미치도록 사랑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그녀를, 혹은 자신을 믿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내가 있을 수 있을 거야, 마르지 않는 사랑을 전한다면 알아줄지도 몰라, 언젠가 그녀도 날 사랑해 줄지 몰라.
그래서 그는 노력했다. 전혀 자신을 봐 주지 않더라도 항상 노력했다. 언젠가는 이런 자신을 봐 주지 않을까.
이런 내 노력을 알아주지 않을까.
하다못해 조금이라도 제게 시선을 돌려 주지 않을까란 생각에 단 한 번도 그녀를 잊어 본 적이 없다.
얼마나 그런 생활을 했을까, 그녀가 함께 차를 마시고 싶다고 말해 주었다.
며칠 전부터 조금씩 자신과의 시간을 늘려 가고 있었다.
드디어 자신을 알아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그는 저도 모르게 들뜨는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기다리는 응접실로 들어가는 순간 깨달았다.
아,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향기가 응접실 안을 맴돌았다.
그가 공작가의 가주가 되었을 때 매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맡았던 익숙한 향기.
독의 향기.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껏 본 적 없던 화사한 미소로 저를 반겨 주는 그녀가 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냥 자신의 착각이라고, 그녀가 그럴 리 없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가 건네준 차를 입에 머금었다.
“미안해…… 미안해…….”
슬픔으로 젖어 있던 그의 눈동자에 이내 미안함과 죄책감이 번지더니 눈물이 맺혔다.
내가 좀 더 사랑해 줬더라면, 내가 좀 더 아껴 줬더라면. 그녀가 이런 선택을 하지 않게 내가 열심히 했더라면.
온몸을 가득 채우는 애통함에 그는 하염없이 사과했다.
미안하다고, 더 사랑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이런 선택을 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던 그때 그녀가 다가왔다.
이제는 꼼짝도 할 수 없었지만 애써 눈동자를 올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시리게, 웃고 있었다.
그의 귓가에 대고 그녀가 말했다.
“정 미안하면…….”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시간 아까우니까 빨리 죽어.”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눈을 감았다.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피로 젖어 있는 식탁보에 떨어져 번졌다.
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죽을 수 있으니까.
다행이라고.
✧✦✧
“존나 대미친…….”
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욕설을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손꼽아 기다리던 외전이 설마 나에게 이런 빅 엿을 선사할 줄이야. 죽이겠다, 작가.
모두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이 행복해할 금요일 저녁,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다름 아닌 내가 찜해 놓은 소설 작품의 연재가 시작되었다는 알림이었다.
자주 이용하는 자유 연재 사이트에서 연재될 때부터 즐겁게 읽던 나는, 얼른 완결이 나서 정식 연재가 시작되었으면, 하고 손꼽아 기다렸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정식 연재에서는 추가 외전까지 공개하겠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그 연재가 바로 오늘부터 시작된다는 알람이 울린 것이다!
난 곧바로 외전을 보기 위해 현질을 시전했다.
외전의 구성은 대개 그렇듯 완결난 뒤의 주인공들의 일상과 비하인드 스토리, 악녀의 과거였다.
바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악녀.
이야기 초반부터 등장하는 악녀는 이야기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를 즘에야 사라지는데, 그 행보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 여주와 남주를 훼방 놓는 걸로도 모자라, 그 방법이 하나같이 같은 사람 머릿속에서 나온 게 맞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고약했다.
그런 주제에 자신의 흔적은 조금도 남기지 않는 치밀함까지 겸비한 아주 똑똑한 미친년이었다.
너무 똑똑한 나머지 아주 돌아 버리기라도 했는지 상식이나 윤리관이 아주 일반인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덕분에 사람들은 주인공들보다 악녀에게 관심이 더 많았다.
그 수준이 어느 정도였냐면 연재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인공들이 이어지는 내용보다 악녀가 정의 구현 당하는 모습을 더 보고 싶어 할 정도였다.
악녀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구마에 허덕였는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물론 나도 그중 한 명이었고.
분명 그 악녀가 정의 구현을 당한 회차에 댓글이 폭발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도 당장 날아갈 것 같은 기분에 그날은 축배를 들었었다.
그런 악녀의 과거라니 안 볼 수 없지.
혹시 예전에는 상냥했다는 클리셰가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나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외전을 정독했다.
어쩌면 클리셰를 따라 이 악녀도 사실 과거에는 착하고 순한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하하.
이 악녀가 과거에 착했다니, 김밥 옆구리를 뚫고 나온 단무지가 탭댄스를 추는 소리였다.
여기 등장하는 악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흔히 말하는 ‘진짜’였다.
분명 지금 내 눈동자는 격하게 떨리고 있겠지.
울컥 올라오는 욕을 입술을 짓씹어 가며 참아 냈다.
부들부들 떨려 오는 손으로 떨어트렸던 휴대폰을 주워 끝 문장을 재차 읽었다.
[다행이라고.]
“미친, 이게 뭐야!”
결국 참지 못하고 분노에 몸을 맡겨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혼신의 힘으로 제정신을 유지하며 휴대폰을 바닥이 아닌 베개에 내팽개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부서진 멘탈은 회복되지 않아 휴대폰을 노려보고 욕을 내뱉었다.
“이, 이…… 구제할 길 없는 년! 쓰레기 같은! 으아아아!”
과거에는 착했을 거라는 클리셰를 기대한 나를 노리기라도 한 듯한 거지 같은 악녀의 행보에 누군가가 고구마를 갈아다가 내 목에 들이붓는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한여름에 전기장판을 고온으로 올려놓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쓴 듯한 기분에 당장이라도 과호흡을 일으킬 것만 같았다.
한참을 발버둥 치며 이불이고 베개를 샌드백마냥 뚜드려 패고 소리를 지르면서 괴로워하고 나서야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나는 가빠진 숨을 고르며 침착하게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
[다행이라고.]
“끼에에에!”
휴대폰 액정 너머로 보이는 글귀에 또다시 충격과 공포가 엄습해 왔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배배 꼬았다.
가슴을 가득 채우는 답답함에 수조에서 탈출한 생선마냥 파닥거리기를 또 한참.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내게 충격을 안겨 준 외전의 댓글들을 읽어 내려갔다.
역시나 댓글창은 수많은 절규와 고통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충격받은 건 나만이 아닌지 천사 같은 악녀의 과거를 기대했다는 글과 외전으로도 독자들의 뒤통수를 후리는 작가가 괘씸하다는 댓글들이 주를 이뤘다.
외전에서까지 이어지는 악녀의 악행 퍼레이드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역시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혹시라도 이 작가가 팬 사인회를 열면 군고구마를 가져가 작가 놈 입에 쑤셔 넣어 주겠다는 다짐을 하며 쓰러지듯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래도 잃은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연재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악녀가 공작가의 가주인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었는데 외전에서 그 이유가 밝혀졌으니 말이다.
그렇다. 이 악녀는 무려 자신의 남편을 죽이고 공작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정말 악녀의 귀감이었다.
이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악녀였던 게 분명하다.
그동안 궁금했던 사실을 알게 된 건 좋았지만 잃은 게 너무 컸다.
굳이 말하자면 내 정신적 안녕을 잃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자기 남편을 죽일 수 있지?”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악녀의 행보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차라리 남편이 구제할 길 없는 쌍놈이었다면 직접 칼빵을 놨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현실이라면 아무리 그래도 죽이는 건 너무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악녀의 남편은 그런 거지깽깽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내밖에 모르는 애처가였다.
마지막 장면만 보더라도 자신을 죽인 아내에게 더 사랑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울며 사과하는 호구 같은 남자였다.
그런 남자를 죽인 거다. 심지어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아무리 황후 자리를 갖고 싶어도 그렇지,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자를 이용하고 끝내는 죽여 버리기까지 한 악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저런 여자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오히려 이해한다면 진지하게 정신과 진단을 받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쌍해서 어떡하냐…….”
하긴 잘 생각해 보면 그렇게 유명한 악녀가 과거에는 마냥 순둥이에 착해 빠진 인물이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착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삐뚤어질 만한 일을 만들어 내려면 머리가 아플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하니 이런 과거를 가진 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저런 전분을 가져다가 의인화 시켜 놓은 찰흙 인간이 아닌, 악녀의 손에 죽어 간 남편이었다.
잘생기고 공작가 가주인 데다 아내밖에 모르는 해바라기 같은 남자.
그런 남자가 나 좋다고 따라다니면 진짜 잘해 줄 텐데.
어쩌다 저런 여자한테 코가 꿰여서, 쯧쯧.
솔직히 말하면 난 악녀가 정의 구현 당하는 걸 보고 싶어서 본 거지, 딱히 등장인물들에겐 애착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악녀의 남편이 맘에 걸린다.
죽는 순간까지도 저를 죽인 여자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그 호구 같은 모습에 몇몇은 진저리를 치겠지만 내 눈엔 그저 애처롭고 불쌍하게만 보였다.
“악녀 남편으로 해피 엔딩 외전 같은 건 안 써 주겠지?”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걸 난 확신할 수 있었다.
외전에만 잠깐 등장한 악녀의 남편에게 그 누가 관심을 가지겠는가?
댓글들도 대부분 악녀의 거지 같은 성격과 작가를 욕하는 글이고 악녀의 남편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나만 신경 쓰이나? 혹시 나 치인 건가?
치였다고 생각하니 악녀의 남편이 정말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뤄질 수 없는 바람이란 걸 알기에 괜히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짠내 가득한 설정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얘는 진짜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이럴 때는 차라리 내가 소설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나 같은 사람들이 책 속의 인물에 빙의하는 내용의 소설도 간혹 보이던데 굉장히 거지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만큼은 부러웠다.
내가 들어가서 저 남편 좀 구제해 주고 싶었다.
소설 속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하다못해 저 악녀의 남편이라는 작자만 악녀 손에서 벗어나게 해 주면 소원이 없겠다.
행복해하는 모습도 보면 더 좋고.
그것만 보고 다시 돌아올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는 최애캐가 꽃길 걸어서 좋고, 최애캐는 행복해져서 좋고. 그리고 다시 집으로 컴백 홈 하면?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다.
물론 이뤄질 리는 없겠지만.
바보 같은 망상에 헛웃음을 지으며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
술을 진탕 마시고 다음 날 아침에나 느낄 법한 두통에 미간을 구겼다.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머리가 갑자기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설마 외전을 읽고 난 후의 정신적 충격 때문은 아니겠지? 별 같잖은 가설까지 세워 보며 어지럼증의 원인을 알아보던 그때였다.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더니 졸음이 쏟아져 왔다.
눈이 점점 감겨 오며 끝내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새하얀 테이블 위로 붉은 선혈이 흩뿌려졌다.
남자는 천천히 붉게 물들어 가는 식탁보를 멍하니 바라보다 자신의 입가를 닦았다.
손끝에 묻어 나오는 붉은 피와 비릿하게 올라오는 피내음이 지금 이 상황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그에게 말해 주고 있었다.
손이 점점 떨리고 감각이 무뎌져 가는 와중에 결국 테이블로 쓰러진 그는 온 힘을 다해 고개를 들어 보였다.
그 순간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시선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그녀와.
죽어 가는 남편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에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숨이 점점 가빠지며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한 그가 금방이라도 꺼질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리라…….”
애처롭기 그지없는 목소리에도 그녀는 어떠한 반응도 보여 주지 않았다.
힐끔 시계를 쳐다보며 태연히 고개를 까딱이는 모습은, 마치 그녀 홀로 다른 세상에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켰다.
“왜…….”
재차 토혈을 한 남자가 물었다. 테이블 위로 쏟아진 출혈량 또한 만만치 않았으며 듬성듬성 내장 조각이 섞여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 그의 숨은 끊어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알고 싶었다. 어째서 그렇게 태연할 수 있는지.
이러면 마치 그녀가 자신을 죽인 것 같지 않은가. 그는 믿고 싶었다.
“왜냐고? 당연하잖아?”
높낮이가 전혀 없는 목소리였지만 어째선지 발랄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진심은 하나의 칼날이 되어 그의 가슴을 베어 냈다.
독으로 인한 충격마저 잊을 만큼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당신이 살아 있으면 방해되니까.”
자신의 손톱을 훑어보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하자 그의 푸른 눈동자는 슬픔에 젖어 들어갔다.
억울함도 분노도 배신감도 아닌, 오로지 슬픔으로 젖어 들어가는 그의 눈동자는 죽어 가는 그의 모습과 합쳐져 너무도 아름답고, 처량했다.
“공작가는 내가 잘 이끌어 갈게, 황후가 되려면 공작쯤은 되어 주어야지 않겠어?”
“…….”
그녀가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되리란 것 또한 그녀와 결혼하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제 관심 밖에 있는 것에는 한없이 무심한 사람이었다.
자신과 결혼한 것 또한 뭔가 이유가 있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녀와 결혼했다.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미치도록 사랑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그녀를, 혹은 자신을 믿었다.
그녀의 마음속에 내가 있을 수 있을 거야, 마르지 않는 사랑을 전한다면 알아줄지도 몰라, 언젠가 그녀도 날 사랑해 줄지 몰라.
그래서 그는 노력했다. 전혀 자신을 봐 주지 않더라도 항상 노력했다. 언젠가는 이런 자신을 봐 주지 않을까.
이런 내 노력을 알아주지 않을까.
하다못해 조금이라도 제게 시선을 돌려 주지 않을까란 생각에 단 한 번도 그녀를 잊어 본 적이 없다.
얼마나 그런 생활을 했을까, 그녀가 함께 차를 마시고 싶다고 말해 주었다.
며칠 전부터 조금씩 자신과의 시간을 늘려 가고 있었다.
드디어 자신을 알아준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 그는 저도 모르게 들뜨는 기분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기다리는 응접실로 들어가는 순간 깨달았다.
아, 그녀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향기가 응접실 안을 맴돌았다.
그가 공작가의 가주가 되었을 때 매일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맡았던 익숙한 향기.
독의 향기.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그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껏 본 적 없던 화사한 미소로 저를 반겨 주는 그녀가 있었으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냥 자신의 착각이라고, 그녀가 그럴 리 없다고 믿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녀가 건네준 차를 입에 머금었다.
“미안해…… 미안해…….”
슬픔으로 젖어 있던 그의 눈동자에 이내 미안함과 죄책감이 번지더니 눈물이 맺혔다.
내가 좀 더 사랑해 줬더라면, 내가 좀 더 아껴 줬더라면. 그녀가 이런 선택을 하지 않게 내가 열심히 했더라면.
온몸을 가득 채우는 애통함에 그는 하염없이 사과했다.
미안하다고, 더 사랑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이런 선택을 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그의 목소리가 잦아들던 그때 그녀가 다가왔다.
이제는 꼼짝도 할 수 없었지만 애써 눈동자를 올려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시리게, 웃고 있었다.
그의 귓가에 대고 그녀가 말했다.
“정 미안하면…….”
그녀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온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시간 아까우니까 빨리 죽어.”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눈을 감았다. 투명한 눈물이 볼을 타고 피로 젖어 있는 식탁보에 떨어져 번졌다.
그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죽을 수 있으니까.
다행이라고.
✧✦✧
“존나 대미친…….”
난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욕설을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손꼽아 기다리던 외전이 설마 나에게 이런 빅 엿을 선사할 줄이야. 죽이겠다, 작가.
모두는 아니겠지만 대부분이 행복해할 금요일 저녁, 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휴대폰이 진동했다.
다름 아닌 내가 찜해 놓은 소설 작품의 연재가 시작되었다는 알림이었다.
자주 이용하는 자유 연재 사이트에서 연재될 때부터 즐겁게 읽던 나는, 얼른 완결이 나서 정식 연재가 시작되었으면, 하고 손꼽아 기다렸다.
그것도 그럴 것이, 정식 연재에서는 추가 외전까지 공개하겠다고 했으니까.
그런데 그 연재가 바로 오늘부터 시작된다는 알람이 울린 것이다!
난 곧바로 외전을 보기 위해 현질을 시전했다.
외전의 구성은 대개 그렇듯 완결난 뒤의 주인공들의 일상과 비하인드 스토리, 악녀의 과거였다.
바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악녀.
이야기 초반부터 등장하는 악녀는 이야기가 클라이맥스에 다다를 즘에야 사라지는데, 그 행보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 여주와 남주를 훼방 놓는 걸로도 모자라, 그 방법이 하나같이 같은 사람 머릿속에서 나온 게 맞을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고약했다.
그런 주제에 자신의 흔적은 조금도 남기지 않는 치밀함까지 겸비한 아주 똑똑한 미친년이었다.
너무 똑똑한 나머지 아주 돌아 버리기라도 했는지 상식이나 윤리관이 아주 일반인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덕분에 사람들은 주인공들보다 악녀에게 관심이 더 많았다.
그 수준이 어느 정도였냐면 연재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인공들이 이어지는 내용보다 악녀가 정의 구현 당하는 모습을 더 보고 싶어 할 정도였다.
악녀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구마에 허덕였는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물론 나도 그중 한 명이었고.
분명 그 악녀가 정의 구현을 당한 회차에 댓글이 폭발했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도 당장 날아갈 것 같은 기분에 그날은 축배를 들었었다.
그런 악녀의 과거라니 안 볼 수 없지.
혹시 예전에는 상냥했다는 클리셰가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나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외전을 정독했다.
어쩌면 클리셰를 따라 이 악녀도 사실 과거에는 착하고 순한 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하하.
이 악녀가 과거에 착했다니, 김밥 옆구리를 뚫고 나온 단무지가 탭댄스를 추는 소리였다.
여기 등장하는 악녀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흔히 말하는 ‘진짜’였다.
분명 지금 내 눈동자는 격하게 떨리고 있겠지.
울컥 올라오는 욕을 입술을 짓씹어 가며 참아 냈다.
부들부들 떨려 오는 손으로 떨어트렸던 휴대폰을 주워 끝 문장을 재차 읽었다.
[다행이라고.]
“미친, 이게 뭐야!”
결국 참지 못하고 분노에 몸을 맡겨 소리를 지르긴 했지만 혼신의 힘으로 제정신을 유지하며 휴대폰을 바닥이 아닌 베개에 내팽개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부서진 멘탈은 회복되지 않아 휴대폰을 노려보고 욕을 내뱉었다.
“이, 이…… 구제할 길 없는 년! 쓰레기 같은! 으아아아!”
과거에는 착했을 거라는 클리셰를 기대한 나를 노리기라도 한 듯한 거지 같은 악녀의 행보에 누군가가 고구마를 갈아다가 내 목에 들이붓는 기이한 감각을 느꼈다.
한여름에 전기장판을 고온으로 올려놓고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쓴 듯한 기분에 당장이라도 과호흡을 일으킬 것만 같았다.
한참을 발버둥 치며 이불이고 베개를 샌드백마냥 뚜드려 패고 소리를 지르면서 괴로워하고 나서야 조금 진정할 수 있었다.
나는 가빠진 숨을 고르며 침착하게 휴대폰을 주워 들었다.
[다행이라고.]
“끼에에에!”
휴대폰 액정 너머로 보이는 글귀에 또다시 충격과 공포가 엄습해 왔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비명을 지르며 온몸을 배배 꼬았다.
가슴을 가득 채우는 답답함에 수조에서 탈출한 생선마냥 파닥거리기를 또 한참.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내게 충격을 안겨 준 외전의 댓글들을 읽어 내려갔다.
역시나 댓글창은 수많은 절규와 고통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충격받은 건 나만이 아닌지 천사 같은 악녀의 과거를 기대했다는 글과 외전으로도 독자들의 뒤통수를 후리는 작가가 괘씸하다는 댓글들이 주를 이뤘다.
외전에서까지 이어지는 악녀의 악행 퍼레이드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역시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혹시라도 이 작가가 팬 사인회를 열면 군고구마를 가져가 작가 놈 입에 쑤셔 넣어 주겠다는 다짐을 하며 쓰러지듯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래도 잃은 것만 있는 건 아니었다.
연재 당시 많은 사람들이 악녀가 공작가의 가주인 것에 대해 의문을 가졌었는데 외전에서 그 이유가 밝혀졌으니 말이다.
그렇다. 이 악녀는 무려 자신의 남편을 죽이고 공작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정말 악녀의 귀감이었다.
이 여자는 태어날 때부터 악녀였던 게 분명하다.
그동안 궁금했던 사실을 알게 된 건 좋았지만 잃은 게 너무 컸다.
굳이 말하자면 내 정신적 안녕을 잃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자기 남편을 죽일 수 있지?”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악녀의 행보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차라리 남편이 구제할 길 없는 쌍놈이었다면 직접 칼빵을 놨다고 해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현실이라면 아무리 그래도 죽이는 건 너무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악녀의 남편은 그런 거지깽깽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내밖에 모르는 애처가였다.
마지막 장면만 보더라도 자신을 죽인 아내에게 더 사랑해 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울며 사과하는 호구 같은 남자였다.
그런 남자를 죽인 거다. 심지어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아무리 황후 자리를 갖고 싶어도 그렇지,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자를 이용하고 끝내는 죽여 버리기까지 한 악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하긴, 저런 여자를 이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오히려 이해한다면 진지하게 정신과 진단을 받아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쌍해서 어떡하냐…….”
하긴 잘 생각해 보면 그렇게 유명한 악녀가 과거에는 마냥 순둥이에 착해 빠진 인물이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되고 착한 사람이 이렇게까지 삐뚤어질 만한 일을 만들어 내려면 머리가 아플 것 같았다.
그리 생각하니 이런 과거를 가진 게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저런 전분을 가져다가 의인화 시켜 놓은 찰흙 인간이 아닌, 악녀의 손에 죽어 간 남편이었다.
잘생기고 공작가 가주인 데다 아내밖에 모르는 해바라기 같은 남자.
그런 남자가 나 좋다고 따라다니면 진짜 잘해 줄 텐데.
어쩌다 저런 여자한테 코가 꿰여서, 쯧쯧.
솔직히 말하면 난 악녀가 정의 구현 당하는 걸 보고 싶어서 본 거지, 딱히 등장인물들에겐 애착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악녀의 남편이 맘에 걸린다.
죽는 순간까지도 저를 죽인 여자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그 호구 같은 모습에 몇몇은 진저리를 치겠지만 내 눈엔 그저 애처롭고 불쌍하게만 보였다.
“악녀 남편으로 해피 엔딩 외전 같은 건 안 써 주겠지?”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걸 난 확신할 수 있었다.
외전에만 잠깐 등장한 악녀의 남편에게 그 누가 관심을 가지겠는가?
댓글들도 대부분 악녀의 거지 같은 성격과 작가를 욕하는 글이고 악녀의 남편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없었다.
나만 신경 쓰이나? 혹시 나 치인 건가?
치였다고 생각하니 악녀의 남편이 정말 잘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뤄질 수 없는 바람이란 걸 알기에 괜히 울적한 기분이 들었다.
짠내 가득한 설정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얘는 진짜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이럴 때는 차라리 내가 소설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나 같은 사람들이 책 속의 인물에 빙의하는 내용의 소설도 간혹 보이던데 굉장히 거지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만큼은 부러웠다.
내가 들어가서 저 남편 좀 구제해 주고 싶었다.
소설 속에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하다못해 저 악녀의 남편이라는 작자만 악녀 손에서 벗어나게 해 주면 소원이 없겠다.
행복해하는 모습도 보면 더 좋고.
그것만 보고 다시 돌아올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는 최애캐가 꽃길 걸어서 좋고, 최애캐는 행복해져서 좋고. 그리고 다시 집으로 컴백 홈 하면?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다.
물론 이뤄질 리는 없겠지만.
바보 같은 망상에 헛웃음을 지으며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
술을 진탕 마시고 다음 날 아침에나 느낄 법한 두통에 미간을 구겼다.
방금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머리가 갑자기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설마 외전을 읽고 난 후의 정신적 충격 때문은 아니겠지? 별 같잖은 가설까지 세워 보며 어지럼증의 원인을 알아보던 그때였다.
시야가 점점 어두워지더니 졸음이 쏟아져 왔다.
눈이 점점 감겨 오며 끝내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