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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Eune)


아침부터 학과장님의 호출이라니. 오늘 하루도 어지간하게 꼬일 것임이 분명했다.

“이 교수, 방송국에서 또 연락이 왔어.”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저 방송 출연 안 해요.”

혹시나 했던 예감은 역시나였다. 남들보다 빠르고, 특이한 삶을 살아온 덕분에 나는 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 왔다. 한국 사회에서는 그런 관심이 곧 매스컴과 직결되었다.

원치 않았지만 나에 대해 다룬 기사와 뉴스들은 사람들에게 ‘저런 대단한 사람도 있구나.’ 하는 이미지를 주었다. 그 이후 여러 번 인터뷰와 방송 출연 제의가 간헐적으로 들어왔는데, 내가 직접 그들의 제안에 응한 적은 없었다.

“이 교수 뜻은 알아. 그래도 벌써 다섯 번째야. 기분 전환으로 방송 한번 해 보는 게 어때? 다른 교수들도 원하는 눈치던데.”

“그런 건 타고난 사람들이 하는 거죠. 저 요즘 강의 준비 할 시간도 없을 만큼 바빠요. 아시잖아요. M전자 프로젝트 다음 달까지 마무리 지어야 하는 거.”

내 대답에 학과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지은 네가 고생하는 건 알아.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어.’ 하는 얼굴이었다. 그 하고 싶은 말이 결국은 나를 설득하는 말일 테고.

“알지. 누구보다 열심히 하고 있는 거. 그런데 융통성을 좀 가져 봐. 누가 연예인 하랬어? 프로그램 포맷이 자유롭고 좋으니 머리도 식힐 겸 나가서, 우리 과 홍보 좀 하고 와.”

“우리 과 오려고 전국 상위 1퍼센트 이과생들이 지금도 눈에 불을 켜고 공부할 텐데, 홍보가 왜 필요해요?”

학과장님의 억지에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말 그대로였다. 우리 과는 홍보가 필요 없는 과였다. 소위 말하는 대한민국 최고 명문대 경화대학교, 그중에서도 최고 취업률을 자랑하는 기계공학과가 굳이 나서서 홍보라니.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면서 왜 그래? MIT에서 최연소로 박사 과정을 끝낸 경화대학교 미모의 교수. 지금 내 눈앞에 이 교수가 있지만 뭐 이런 사기 캐릭터가 다 있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야.”

학과장님은 나에게 일을 떠넘길 때마다 쓰는 뻔한 칭찬을 또 시작했다. 조금도 와닿지 않는 진부한 멘트. 하지만 숨을 한 번 삼키고 최대한 공손하게 말을 이어 갔다. 어떻게든 나를 설득해 보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학과장님에 대한 배려였다.

“과분한 칭찬은 감사하지만 학과장님 선에서 마무리 지어 주시겠어요? 저 정말 방송 같은 건 관심 없어요. 제가 의사면 건강에 좋은 식품이라도 소개하겠죠. 하지만 기계에 대해서 일반인들에게 무슨 정보를 얼마나 주겠어요? 그리고…….”

“이번엔 기존에 섭외 왔던 프로그램들이랑 좀 달라.”

평소의 나답지 않게 애원하듯 이어 가는 내 말을 딱 자른 학과장님은 목이 타는지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꿀꺽. 예사롭지 않은 말이 나올 것 같아 나도 덩달아 침을 삼켰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 교수를 찾아.”

“네에?”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지금 저 양반이 예능이라고 했나? 당연히 지난번에 출연 요청이 온 교양 프로일 거라 생각한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전에 말씀하신 교양 정보 프로 아니었어요? 아나운서 두 분이 진행하시는.”

“아니야. 그건 내가 봐도 이 교수와는 안 맞아.”

가볍게 고개를 저은 학과장님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나는 프로그램 기획 의도가 깔끔하게 컬러 프린트된 종이를 받아 들었다. 방송국에서 보내온 건지, 학과장님이 직접 뽑은 건지 알 수는 없지만 한눈에 보기 쉽게 프로그램의 취지와 콘셉트가 정리되어 있었다.

“케이블 채널에서 반년 전쯤 시작한 예능 프로그램이야. 교실 모양으로 꾸며 놓은 스튜디오에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유명 아이돌 몇 명이 교복을 입고 앉아 있어. 그리고 매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출연해 강의를 하고, 아이돌들의 질문에 대답해 주는 거지. 그게 토론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나는 종이를 눈으로 훑으며 학과장님의 설명을 들었다. 종이에 적힌 내용도 학과장님의 설명과 다르지 않았다. 출연할 마음은 없었지만 고리타분한 프로는 아닌 걸로 보였다. 다만, 상단에 쓰여 있는 『에듀라이징』이라는 제목이 너무 억지스러워 웃음이 나올 뿐.

“자네가 알 만한 교수들도 벌써 여럿 출연했는걸. 나도 우리 딸이 좋아해서 한번 봤는데 정말 재미있더라고. 섭외에 확실히 공을 들였어. 거기 나오는 아이돌들만 해도 과학고니, 전교 회장 출신이니 하며 주목을 받던 애들이고. 내용도 알찬 데다 예상 못 한 부분에서 웃기기까지 하니 시청률도 아주 높아.”

“그래도 예능이잖아요. 저는 관심 없어요. 원래 웃기는 것과는 거리가 멀기도 하구요.”

“어허, 이 교수.”

“그렇지 않아도 요즘 애들이 쓰는 언어를 못 알아들어서, 수업 시간에 종종 놀림받아요. 이런 제가 전국적으로 망신당하는 거 보고 싶으세요?”

나는 출연 요청을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걸 강하게 어필했다. 보통 이 정도 선까지 오면 학과장님도 나를 놔주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학과장님은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자, 그럼 이건 어때? 인터넷으로 프로그램 다시 보기를 해 보고 결정하는 거지. 나한테 이렇게 설명을 듣는 것보다 프로그램을 한번 보는 게 훨씬 나을 거야.”

여지를 주려는 학과장님에게 나는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다부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학과장님은 내 얼굴을 못 본 척하며 다시 한번 더 쐐기를 박았다.

“잘 생각해 보고 내일 아침까지 이야기해 줘. 방송 안 보고 거절하는 거면, 나도 거절이야!”

“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거절할거지만 그래도 대답은 고분고분하는 게 조직 사회 말단 사원의 도리였다. 그리고 이렇게라도 대답을 해야 이 의미 없는 대화를 끝낼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내내 학과장님의 말을 거절한 아랫사람치고는 경우 바르게 인사했다. 그리고 서둘러 연구실을 향해 걸어갔다.

연구실 문을 열자,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는 채진혁 조교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밤새 반복한 테스트로 인해 피곤하고 힘들 게 분명한데, 채 조교는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고맙기도 하고, 듬직하기도 해서 학과장실에서 흥분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채 조교는 나보다 세 살 많았다. 나이 서른세 살, 박사 과정 2년 차, 작년에 결혼해서 딸 하나를 둔 가장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여자 교수 밑에서 일하는 게 불편할 법도 한데, 그는 단 한 번도 그런 내색을 한 적이 없었다. 중학교 때까지 유도 선수였다는 걸 증명하는 큰 키와 떡 벌어진 어깨만큼 마음도 크고 넓은 사람이었다.

“채 조교님!”

“네.”

나의 부름에 채 조교가 하던 일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붉게 충혈된 눈에는 졸음이 가득했다.

“혹시 『에듀라이징』이라는 프로 알아요?”

“당연히 알죠. 요즘 그거 모르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사람이 여기 있었다. 내가 요즘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듣는 거야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니,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듯 눈만 깜빡이고 있는 나를 보고도 채 조교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어떤 건데요?”

“쉽게 말하면, 한 분야에서 괜찮은 실력을 가진 강사가 교생 선생님 콘셉트로 나와서 자신의 전공 분야를 가지고 학생들 앞에서 수업을 하는 거예요.”

“오호라.”

“전 국민이 다 보는 프로라 강의 주제는 대중적인 편인데, 내용은 정말 알차요. 거기 출연진으로 나오는 아이돌 애들이 머리가 있어서인지, 질문의 내용이나 이해력이 정말 남다르더라고요. 그게 프로그램의 격을 높이는 데 한몫하고.”

채 조교의 설명도 학과장님의 설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학과장님에게 구구절절 묻지 못했던 것들을 채 조교에게 묻기 시작했다.

“나도 가르치는 입장이지만 강의라는 게 사실 지루하잖아요. 그런데 그 프로는 시청률도 높다면서요? 인기 아이돌들 덕분에 그럴까요?”

“그것도 인기의 원인 중 하나이긴 하겠죠. 아이돌이라도 머리 좋거나 학벌 좋은 애들이 더 주목받는 세상이니까. 근데 그것만으로 시청률이 잘 나올 수 있겠어요?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그럼 채 조교님이 보기엔 인기 비결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음…… 강사와 학생들의 세대 차이에서 오는 언밸런스가 만들어 내는 재미도 하나의 요인이 되겠고……. 그게 그 프로에서 웃음을 만드는 부분이니까요. 그리고 진행자 김태준이 생전 처음 하는 예능이라는 점 때문에 주목을 받기도 했고요. 연기만 하던 톱배우가 갑자기 예능을 진행하니 팬들의 관심이 그쪽으로 간 거죠. 그런데 갑자기 교수님께서 그걸 왜 물으시죠?”

구체적으로 설명을 늘어놓던 채 조교가 본론으로 들어가는 질문을 했다. 역시. 실험과 논문에 파묻혀 사는 사람이라 그런지 핵심을 짚는 능력이 탁월했다. 살며시 미소가 나왔다.

“학과장님 뵙고 오는 길인데, 저한테 섭외가 왔대요.”

채 조교는 잠시 생각하더니 이내 씩 웃었다.

“안 하겠다고 하셨겠죠?”

“맞아요.”

“해 보시지 그래요?”

“왜죠?”

나의 물음에 채 조교가 웃음기를 싹 지우고는 느슨하게 의자에 기대앉으며 팔짱을 꼈다. 나는 채 조교가 이런 자세를 취할 때가 가장 무서웠다. 나에게 조언을 할 때 나오는 채 조교의 습관이었으니까.

“사실 그 프로 보면서 교수님이 나가면 어떤 그림이 나올까 생각해 봤었거든요. 저도 그랬으니 프로그램 관계자들도 마찬가지였겠죠. 교수님만큼 언론이 뜨거운 관심을 가진 사람도 이 바닥에선 드무니까요.”

“그래요? 도대체 어떤 느낌이기에 채 조교님까지 그러세요?”

“딱 보면 느낌이 올걸요? 분명히 교수님도 괜찮게 보실 거라 확신해요.”

내 편이 되어 줄 거라 생각한 채 조교마저 학과장님의 편에 서니 아군 하나 없이 혼자서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하나 싶어 괜히 서러웠다. 눈썹 끝이 중력을 받아들여 점점 아래로 처지는 기분이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세요. 학교에서 이 교수님 무지 배려해 주고 있다는 건 아시죠?”

학과장님의 집요한 설득을 피해 왔더니 더 큰 적이 기다리고 있었다. 채 조교는 아예 학교 편에 서서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채 조교의 말이라면 내 마음이 먼저 동하는 게 문제였다. 나는 슬며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교수님 밑에 있는 학생 입장에서야, 연구만 하니까 편해요. 교수님이 알아서 선을 그으시니까 학교 측에서 요구하는 쓸데없는 일에 투입되지 않으니 좋죠. 그래도 여기는 한국이에요. 교수님도 더 높은 데 가시려면 사회생활 좀 하셔야죠. 학과장님도 오죽하시겠어요? 딸뻘 되는 교수한테 매번 거절당하시고.”

나는 조목조목 사실만 짚는 채 조교의 말을 홀린 듯 경청하고 있었다. 내가 반문할 수 있는 구멍이라고는 요만큼도 없었다. 그나마 채 조교는 좋게 잘 둘러말해 준 거였다. 연구자, 학자로서의 나는 어떨지 몰라도, 조직 사회 일원으로서의 나는 융통성 제로의 표본이었으니까.

몰라서 그런 부분도 있었지만, 알아도 모른 척한 적도 많았다. 내 연구와 프로젝트, 그리고 강의만으로도 벅차서, 교수들끼리 조성한 파벌이나 위계질서에 맞춰 움직일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채 조교의 진실한 조언이 내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당장 결정을 내린 건 아니었지만 일단 프로그램을 한번 보는 것이 학과장님에 대한 예의라 여겼다.

“프로그램 다시 보기는 어디에서 하죠?”

“당장 대령하지요.”

채 조교가 씩 웃으며 인터넷 창을 열고 마우스를 움직였다.



1.

#(June)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깨질 듯한 머리를 붙잡고 일어나니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이런 날은 집에서 쉬어야 하는데.

몸이 침대 속으로 점점 더 깊이 꺼져 가는 느낌이지만, 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침을 삼킬 때마다 목이 따끔거렸다. 헛기침을 해서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매니저에게 전화를 걸었다.

― 형, 괜찮아요?

“전혀 괜찮지가 않아. 감기가 제대로 덤비려고 하는데 그냥 지나가겠어? 한번 호되게 아파야 지나가지.”

― 큰일이네요. 죽이라도 좀 사 갈까요?

“아니 괜찮아. 먹는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조금 일찍 와. 병원 들러서 링거라도 한 대 꽂고 그거 맞으면서 촬영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럼 열은 좀 내리지 않을까?”

― 네 그렇게 할게요. 바로 출발할 테니까 준비하고 계세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면 오늘은 그냥 휴가를 냈겠지. 하지만 내가 몸담고 있는 세상은 갑작스런 휴가가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나 혼자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부모님이 돌아가시지 않는 한 나는 내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게 싫다면 이 바닥을 떠나면 되는 거였다. 내가 떠난다고 해도 내 자리를 채울 사람은 넘치도록 많으니까.

혼자 사는 건 여러모로 편했지만, 아플 때는 서러움을 유발했다. 하지만 지금은 나쁜 컨디션을 핑계로 혼자 감성에 젖을 여유가 없었다.

물먹은 솜뭉치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켜 샤워를 하고, 냉장고를 열어 인스턴트 수프를 꺼냈다. 약을 먹어야 하니 뭐라도 배 속에 넣어야 했다. 10년 가까이 혼자 살면서 깨달은 나를 돌보는 법 중 하나였다.

수프를 반 정도 먹어 갈 즈음 매니저 현석이 집 안으로 들어섰고, 내 이마에 손을 짚고는 특유의 호들갑을 떨었다.

“형 많이 뜨거운데요?”

“말했잖아. 아프다고.”

매섭게 생긴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현석은 자기 사람들에게 무척 살가웠다. 다른 연예인들을 보면 마음이 맞지 않는 매니저를 만나 고생하는 경우도 많은데, 나는 예외였다. 현석은 자신보다 나를 더 챙기는 헌신적인 매니저였다.

“이 몸으로 촬영할 수 있겠어요?”

“대안이 없으니까. 다행히 팔다리가 움직이고 말도 할 수 있으니 가야지.”

“아, 이런 날은 괜히 그러네요. 아픈 사람 등 떠밀어 일시키는 것 같아서요.”

착한 녀석 같으니라고. 나는 괜찮다는 듯 웃어 보이고 남은 수프를 부지런히 떠먹었다.

스물아홉 살 김현석. 내 친한 친구의 동생. 군대 제대 후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게 고민이라는 녀석을 내 매니저로 고용했고, 그 후 5년이 흘렀다.

“짜식. 내 일인데 왜 네가 그런 마음을 가지냐?”

걱정해 주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더 괜찮은 척 일어나 일과를 시작했다. 숍에 들러 간단히 머리와 메이크업을 한 뒤, 병원으로 갔다. 열을 내리는 게 급선무라 임시방편으로 링거를 꽂고 스튜디오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