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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하기까지

(1화)



프롤로그

#(June)


“김태준 씨. 이제 사적인 이야기를 좀 해 볼까요?”

“사적인 이야기라……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제 연애사가 궁금하신 거죠?”

“정확해요.”

새벽부터 시작된 잡지 화보 촬영이 순탄하게 마무리되었다. 스튜디오를 정리하느라 분주하게 오가는 스태프들 사이에서 최숙희 기자가 나에게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내밀며 마무리 질문을 던졌다. 나보다 적어도 두 시간은 더 먼저 일어나서 촬영을 총괄해야 했으니 최 기자의 눈 아래로 번진 그늘을 프로의 빛나는 훈장쯤으로 여겨도 될 것 같았다.

촬영 콘셉트 준비하랴, 짬짬이 나를 인터뷰하랴, 스태프들을 총괄하랴, 정말이지 최 기자는 오늘 하루를 위해 모든 에너지를 쥐어짰다. 내가 감히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며 불성실한 대답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새로운 영화 개봉을 앞둔 시점에서의 잡지사 인터뷰 패턴은 매번 비슷했다. 일단 고가의 브랜드에서 협찬한 옷을 갈아입으며 화보를 찍는다. 그리고 그 중간중간 작품의 대략적인 분위기와 촬영장 에피소드, 상대 배우와 감독님에 대한 생각을 묻는 형식적인 질문들에 대해 진심을 다한 답을 내어놓는다. 그게 나의 일이었다.

“지겹지 않으세요? 최 기자님은 이미 여러 번 들은 이야기일 텐데요.”

“그래도 태준 씨에 관한 거라면 사람들은 항상 궁금해하죠. 나야 물론 다 기억하지만.”

내가 신인일 때부터 유독 나에게 인심이 후하던 최 기자였다. 내 기사를 쓰는 기자들 중 가장 흡족하게 기사를 뽑아 주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소속사에서는 나에 관한 기사를 낼 때 가장 먼저 최 기자와 접촉하는 걸 관례로 여겼다.

“마지막 연애가 언제였죠?”

질문을 하는 최 기자의 눈이 천진한 곡선을 그렸다. 나에게 이미 너무 많이 한 질문이라 식상하다는 최 기자만의 장난스러운 표현이었다. 그녀는 내가 공식적으로 말할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 그럴 만도 했다.

“이 이야기를 또 하네요. 5년 전이 마지막이었어요.”

“5년 전이었으면 그사이 몇 번은 더 연애할 수 있었겠네요. 난 도통 믿을 수가 없어.”

“최 기자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저 되게 재미없는 사생활을 가진 사람인 거.”

내 대답에 ‘그래도 당신이 연예인인데 내가 그 말을 다 믿겠어?’라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최 기자는 수긍의 고갯짓을 했다.

“근데 대체 언제 연애할 거예요? 태준 씨는 여자 연예인들 사이에서도 최고 인기남인데.”

“제가요?”

“겸손한 척할 필요 없어요. 이상형이 누구냐는 질문에 따라오는 답은 늘 김태준 아니면 차정민이라 식상할 정도니까.”

“하하하, 차정민이랑 동급으로 대우받으면 영광이죠. 남자가 봐도 잘생긴 녀석이니까.”

“또 말 돌리죠? 6개월 전에도 그러더니. 진짜 여자한테 된통 당하기라도 한 거예요? 그러지 않고서야 이 완벽남이 왜 여태 연애를 안 한대?”

입술을 삐죽이는 최 기자를 보던 내 시야가 불현듯 흐려졌다. 불쑥 치고 온 기억 한 토막이 내 머릿속을 휘젓고 사라진 탓이었다.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적당히 식은 커피 한 모금을 꿀꺽 삼켰다.

5년이나 지났으면 ‘경험’이라는 라벨을 붙여 머릿속에 얌전하게 저장될 법도 한 그날의 기억. 친한 친구들 앞에서는 부러 입 밖으로 꺼내어 그 순간을 건드려 보기도 할 만큼 나는 많이 괜찮아지긴 했다. 그래도 아직 완전히 그 일에서 벗어난 건 아니었다. 느닷없이 떠오른 기억에 축축해져 버린 내 몸이 그걸 증명했다.

“이거 봐. 표정이 싹 변하잖아요.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도대체 어떤 연애를 한 거예요?”

“그건 그 누가 물어도 노코멘트입니다. 헤어진 사이인데 언급하는 것 자체가 실례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최 기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최 기자도 그 사건의 이해관계를 대충이나마 들었으리라는 걸. 그럼에도 내가 공론화한 적이 없는 일이라 예의상 깊게 묻지 않는다는 것도.

“역시. 태준 씨다워요. 예전에 공개 연애는 절대로 안 할 거라고 했었죠? 그 생각 지금도 변함없어요?”

“네. 연애는 보여 주기식이 아닌 둘만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응? 그럼 지금도 연애하고 있으면서 아닌 척하는 거 아니에요?”

“진짜 애인 없다니까요.”

연애에 대한 내 신념은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 매우 확고해졌다. 그리고 내가 지금까지 잘 지켜 온 부분 중에 하나이기도 했다. 기자들 입장에서는 늘 같은 내 대답이 지루하겠지만 내 마음이 정말로 그랬다. 남의 눈을 의식하는 연애에는 취미가 없었다.

“애인이 없으니 결혼 생각도 없는 거고요?”

“결혼한 형들이 그러더라고요. 결혼은 환갑쯤 하는 게 적당한 것 같다고.”

“뭐라고요?”

“하하하, 농담이고요. 저도 언젠가는 하겠죠. 그런데 아직까지는 결혼을 생각할 만큼 진지하게 다가온 여자가 없었던 것 같아요.”

“서른두 살이니, 연예계에선 아직 결혼과 먼 나이이긴 하죠.”

“맞아요. 그리고 아직은 혼자 사는 게 더 편해요. 여행 가고 싶을 때 여행 가고, 친구들 만나고 싶을 때 친구들 만나고. 일반 직장에 다니는 친구들이 하나하나 유부남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는 건 가끔 슬픈데, 아직은 제 일 같지 않아요.”

최 기자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컵을 기울이며 커피 잔을 비워 냈다. 저 커피가 오늘 도대체 몇 잔째일까? 기자도 정말 극한 직업이었다. 저 정도로 커피를 자주 마시면 피 속 성분의 절반 이상이 카페인일 텐데.

“보는 눈이 까다로워서 마음에 차는 여자를 못 만나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닐까요? 태준 씨는 굉장히 완벽한 여자를 찾고 있을 것 같아서 하는 말이에요. 예쁘고 똑똑하고 착하고, 두루두루 다 갖춘 여자.”

“그럴 리가요. 저도 완벽하지 않은데 그럴 순 없죠.”

“그래도 못생긴 건 싫잖아요.”

“하하, 예쁜 여자 거부할 남자가 있나요?”

최 기자가 그것 좀 보라는 듯 웃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어릴 땐 저도 보통 남자들처럼 외모 위주로 이상형을 가지고 있었죠. 그런데 나이를 먹는 걸까요? 요즘엔 만약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 사람이 따뜻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해요. 화려하기보다는 소박하고, 말없이 한 공간에 있어도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요.”

완벽한 여자를 찾는 게 아니라면서 구구절절 너무 많은 조건을 이야기한 걸까. 괜히 멋쩍어서 뒷목을 문질렀다. 감사하게도 질문은 연애사를 벗어났다. 마지막 질문인 줄 알았는데 최 기자가 준비한 질문이 많은 모양이었다.

“내가 태준 씨를 거의 10년 동안 봤잖아요. 그동안 요령 피우는 걸 한 번도 못 봤어요. 약속 시간에 늦는 걸 본 적도 없고 대충 하는 걸 본 적도 없어요. 그런데 참 이상해요. 왜 그런 깍듯함이 가끔은 차갑게 느껴질까요?”

“오랜 친구들 앞에서는 저도 그냥 30대 초반의 평범한 남자예요. 실수도 잘 하고 엉뚱한 장난도 잘 치죠. 그런데 일을 할 때는 이야기가 좀 달라져요. 제가 생각해도 저는 늘 과하게 긴장해요. 사소한 실수로 지금까지 제가 만들어 놓은 것들을 잃고 싶지 않다는 욕심이 있나 봐요. 차갑게 느끼셨다는 것도 이해가 돼요. 일 앞에서는 신경이 곤두서 있거든요.”

내가 조금만 나태해졌어도, 또 조금만 허술하게 일에 임했어도 지금의 나는 없었다. 나는 지금 내가 누리는 모든 것들의 원천에 나의 성실함이 있다고 믿었다. 원래 성실한 연예인은 예민한 법이었다. 시간을 어겨서도 안 되고, 대사를 외우지 못해서도 안 된다. 그건 곧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과 직결되니까.

“자, 이쯤 되면 『에듀라이징』 이야기를 안 할 수 없죠?”

“그렇겠네요.”

“시작한 지 벌써 반년 됐더라고요. 나 그거 보면서 태준 씨가 보여 주는 의외의 모습에 많이 놀랐어요. 선생님 콘셉트인 것도 독특한데 한참 어린 아이돌들과 티격태격하는 태준 씨 보면서 저 사람이 내가 아는 김태준 맞나, 했다니까요.”

『에듀라이징』. 반년 전 우연한 계기로 출연하게 된 예능 프로그램으로 케이블 채널임에도 높은 시청률을 찍는 것 외에도 다양한 화제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김태준의 재발견’이라는 기사가 가장 많이 뜨는 프로그램이기도 했다. 프로그램의 분위기상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이미지를 많이 내려놓고 임하다 보니, 대중들이 나를 친근하게 보게 된 계기가 되어 주었다. 나는 퍽 좋은 일이라 생각했다.

“어린 친구들과 방송을 해야 하니 그 친구들 눈에 맞추게 되더라고요. 사실 처음 방송 제의가 들어왔을 때는 나랑 안 맞는 프로라고 생각했어요. 슈트를 잘 차려입은 30대 초반의 남자가 개성 넘치는 아이돌들을 통제하고, 초대한 게스트를 이끌며 예능이라는 장르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예능도 아니고, 교양도 아닌 프로를 만든다는 게 낯설어서요. 하지만 지금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매주 다양한 분야의 최고 권위자들을 만나잖아요.”

“맞아요. 나도 태준 씨가 그 프로를 맡은 건 정말 신의 한 수였다고 봐요. 그 전까진 이삼십 대 여성 팬들이 많았다면, 『에듀라이징』 이후로는 전 국민이 태준 씨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요.”

“아아, 과찬이세요.”

등을 뒤로 젖히며 손사래를 치는 내 모습이 재미있는지 최 기자가 호호 소리 내어 웃었다. 연예인이면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을 먹고 사는 직업의 표본이건만, 나는 누군가가 나를 칭찬하는 게 여전히 쑥스러웠다.

“『에듀라이징』은 앞으로도 계속하실 건가요?”

“처음엔 반년 정도 생각하고 시작한 프로그램인데,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더라고요. 솔직히 이제는 제가 재미있어서라도 한동안 계속하게 될 것 같아요. 진행에 대한 부담감은 있지만 배우는 게 너무 많아서요.”

“허허, 이미 연예계의 브레인이면서 더 배우고 싶은 게 있어요? 욕심쟁이예요. 그럼 한동안은 매주 TV에서 태준 씨 볼 수 있는 거네요?”

“하차하라고 하시지만 않는다면요. 지금으로선 유일한 고정 스케줄이죠.”

“누가 태준 씨를 잘라요? 매주 태준 씨를 볼 수 있다는 건, 팬들 입장에서는 기쁜 일이에요. 물론 나도 포함.”

“그렇게 봐 주시면 저도 영광입니다.”

이제 인터뷰를 마무리하려는지 최 기자가 녹음기와 노트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말 길고 긴 하루였다.

“오늘 인터뷰 감사했어요. 우리 또 볼 수 있겠죠? 새벽부터 촬영 준비 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변함없이 열심히 해 줘서 고마웠어요.”

“언제든 불러 주세요. 오늘 같은 분위기는 늘 환영이니까요. 기자님도 스태프분들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여기저기서 끝을 알리는 박수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마음 같아선 나야말로 그 누구보다 크게 박수를 치고 싶었다.

“아…… 피곤해.”

혼잣말을 하며 손을 모아 마른세수를 했다. 드디어 끝이 났다. 여러 번 합을 맞춰 일해 온 사람들과의 화보 촬영이라 확실히 편한 분위기긴 했다. 평소 같았으면 즐기면서 일했을 법도 한데 오늘은 유독 힘들었다.

이유는 컨디션 난조였다. 아침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던 감기 기운이 이제 내 몸을 완전히 꽁꽁 묶으려 했다. 마지막 촬영을 위해 옷을 갈아입는 순간, 이 감기가 쉽게 지나가지 않을 것임을 직감하긴 했지만 내 예상보다 더 지독하게 나를 덮칠 모양이었다.

잠시 물을 마시며 숨을 가다듬었다. 어쨌든 오늘의 일과는 이렇게 무사히 마무리된 거니까. 어서 집에 가서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그 뒤에는 침대 위로 몸을 던지면 더할 나위 없겠지.

‘이런. 내일 『에듀라이징』 녹화가 있는데.’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아 왔다. 특히나 정직한 몸의 반응에 대해서는 더 그랬다. 현재 내 몸은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다. 약을 먹고 푹 잔다고 해도 나을 수준의 감기가 아니었다.

속도 모르고 매니저 현석은 한참이나 최 기자와 의견을 조율하고 있었다. 새로운 작품 위주로 기사를 적어 줄 것과, 사진이 나오면 잡지에 싣기 전에 미리 보여 달라는 것을 요구하는 중이겠지. 그런 말은 나중에 전화로 해도 될 텐데.

아, 어서 집에 좀 가자 현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