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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링거액 한 병이 혈관을 통해 들어갔음에도 몸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열만 좀 내리면 좋으련만 내가 느끼기에도 내 숨이 뜨거웠다. 그 와중에 대본을 손에 쥐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에듀라이징』이 대본에 의지하는 프로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날그날 출연하는 게스트의 약력 정도만 눈여겨보고, 오프닝 멘트와 클로징 멘트를 확인하면 되는 수준이었다. 오늘은 공대 여자 교수를 섭외한 것 같은데…….

“쭌, 어디 아파?”

대본을 막 들여다보기 시작했을 때 김준석 PD가 내 등을 툭 쳤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해도 좋지 않은 컨디션은 금방 들통나고 말았다.

내가 이 프로그램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내 고등학교 동창이자 절친인 바로 이 김준석 PD 때문이었다. 준석은 현석의 형이기도 했다.

갖은 어려움 끝에 케이블 방송국에 입사하자마자 프로그램 두 개를 시원하게 말아먹은 준석이 어느 날 나를 찾아왔다. 방송가에 발을 들여놓고도 나에게 단 한 번도 부탁을 한 적이 없었던 준석이었기에 나는 흔쾌히 허락을 했다.

그리고 반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차가운 이미지를 버리고 친근한 이미지를 얻는 데 성공했고, 준석은 시청률이 높은 프로그램의 PD가 되었으니 서로 공생한 셈이다.

“몸살이 오는 거 같아. 링거 한 대 맞았으니 괜찮을 거야.”

“이런. 너는 왜 오늘 같은 날 아프냐?”

“자식이. 약을 사 주지는 못할망정 왜 아픈 사람을 야단쳐? 오늘이 무슨 날인데?”

“이지은이라고 들어 봤지? 한때 뉴스를 비롯한 모든 언론이 앞다투어 보도하던 교수. 이 형이 그 대단한 분을 섭외했다는 거 아니야.”

이지은? 조금 전 대본에서 본 이름이었다. 대본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준석이 말을 거는 바람에 자세히 약력을 볼 타이밍을 놓치긴 했지만. 그런데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기에 준석이 이 정도로 호들갑인 걸까.

“그렇게 유명한 분이셔?”

교수님이라고 하니 당연히 나이가 많을 거라고 짐작했다. 나도 모르게 극존칭이 나왔다.

“야, 너 진짜 이지은 몰라? 유학 한 번 없이 한국에서 정규 과정을 밟다가 과학고등학교 졸업 전에 MIT 합격한 천재. 학사 석사 박사를 MIT 역사상 최단기간에 끝내고 스물다섯 살에 경화대 최연소 공대 교수가 됐잖아. 그게 아마 5년 전이었지? 한참 언론이 시끄러웠는데 너 그때…….”

뭔가 더 말을 하려던 준석이 멈칫했다. 준석도 알고 있었다. 5년 전 내 모습이 어땠는지. 엉겁결에 쉽게 말을 해 버린 준석은 미안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치였다. 나는 괜찮다는 듯 준석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무튼 어렵게 섭외했으니 오면 인사나 해. 난 사진발인 줄 알았는데 작가들이 사전 미팅 하고 와서는 실물이 더 예쁘다고 하더라. 지금 남자 출연자들도 미리 예전 기사 찾아보고는 설레어서 난리 났어.”

어색해진 상황을 무마시켜 보려는 듯 준석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말을 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 친구이니만큼 눈치를 볼 일도 아닌데, 준석은 필요 이상으로 미안한 기색을 비쳤다.

“그래? 대단한 사람이긴 하네. 나도 한번 봐야겠다.”

이지은이라. 지극히 흔한 이름인데도 낯선 느낌이었다.

MIT에서 박사까지 마치고 교수가 되었다는 것, 그것도 20대의 나이에 그 정도 업적을 성취했다는 것은 대단하다는 찬사를 받을 만한 일이었다. 그리고 한국처럼 학벌에 집착하는 사회는 이지은이라는 여자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겠지.

한기를 느껴 몸이 떨리는데도 호기심이 동했다. 휴대폰을 꺼내 들고 검색창을 열었다. 이지은이라는 글자를 적은 뒤 검색 버튼을 누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스튜디오 여기저기에서 환호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휘익! 하는 휘파람 소리가 섞인 유난스러운 함성이었다. 지나가던 유명 연예인이 응원차 촬영장에 들르기라도 한 걸까 싶어 고개를 돌리던 순간, 내 눈이 커졌다.

‘설마.’

165 정도쯤 돼 보이는 키에 흰 피부를 가진 호리호리한 여자 한 명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살짝 웨이브 진 단발머리에 발랄해 보이는 검은 원피스를 입고서.

하이힐이 아닌 단화를 신고 단정한 걸음걸이로 걸어오는 여자는 순식간에 내 시선을 붙들었다. 킬힐이 득실대는 연예계에서 플랫 슈즈를 신은 모습이 신선하게 와닿아서일까? 나는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나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녀의 얼굴이었다. 이목구비가 또렷한 전형적인 미인형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밝음과 선함이 공존하며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얼굴. 시술과 성형으로 만들어 낸 어색한 얼굴들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그녀의 깨끗한 얼굴에 넋을 빼놓고 말았다. 무엇 하나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그 자체로 굉장히 조화로운 여자였다.

“현석아, 저 여자 누구야? 저…… 저 여자가 이지은 교수는 아니지?”

매니저 현석을 부르는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다는 걸, 나는 그때 미처 알지 못했다.



(Eune)


‘거봐 내가 뭐랬어. 『에듀라이징』 괜찮다고 했지?’



방송에 출연하기로 결정했다고 말씀드리자, 학과장님은 내가 경화대 교수직 제안을 수락했을 때보다 더 환하게 웃으며 나의 결정을 지지해 주었다. 좋아하기는 채 조교도 마찬가지였다.

“방송이 그렇게나 재미있었어요? 생각보다 출연 결정을 빨리 내리셔서.”

채 조교는 모를 것이다. 그의 묵직한 설득이 방송 출연을 마음먹게 한 적시타였다는 걸. 하지만 굳이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냥 신선하더라고요.”

“그 이유가 다예요? 교수님 혹시 김태준 때문에 나가는 건 아니고요?”

“김태준? 그분이 누구죠?”

묻긴 했지만 사실 들어 본 이름이었다. 채 조교의 설명에 의하면 프로그램의 인기 비결 중 하나가 바로 그 사람이라지. 하지만 다른 업무를 보며 『에듀라이징』을 곁눈질로 대충 보느라, 그가 누군지 제대로 확인하지는 못했다.

나는 프로그램에 나왔던 출연진들의 얼굴을 한 명씩 떠올려 보았다. 내가 머릿속에서 김태준의 얼굴을 찾아내기 전에 채 조교가 나섰다.

“참 나. 교수님은 진짜 공부랑 연구 외에는 전혀 관심이 없으시긴 한가 봐요. 그 프로 진행자요. 선생님 콘셉트로 애들 관리하는.”

“아! 그 슈트 잘 어울리는 잘생긴 분? 전에 그분이 배우라고 했죠? 저는 아나운서인 줄 알았어요.”

그러고 보니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 하나가 있었다. 프로그램의 오프닝과 클로징을 담당하던 진행자. 큰 키와 잘생긴 외모를 가진 남자의 이름이 김태준이었구나.

“하하, 아나운서만 하기에는 너무 잘생기지 않았던가요? 김태준 씨 배우예요. 드라마 위주로 활동하긴 하지만 간간이 영화도 찍는 A급 배우인데, 어떻게 김태준을 모르시죠?”

연예계 일에 무지한 나를 잘 아는 채 조교건만 그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무리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대도 어떻게 김태준을 모를 수가 있냐는 얼굴이었다. 김태준이라는 인물이 아주 유명하다는 것에 대한 방증이기도 했다.

“아시잖아요. 저 연예인 잘 모르는 거. 그런데 그런 배우가 왜 예능 프로그램을 진행해요? 보통 유명한 배우들은 체면 지키느라 예능 프로그램은 꺼리지 않나요?”

“김태준을 모르시는 분이 그런 건 아시네요?”

채 조교의 일침에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냥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해 본 말인데 실제 연예계의 흐름이 그런 모양이었다.

“추측해 본 거죠 뭐.”

솔직하게 인정하니 채 조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었다.

“아마도 이미지 변화를 노린 거겠죠. 김태준은 프리미엄급 배우라 그런지 도도해 보이는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거든요. 아, 그럼 그것도 모르시겠네요. 김태준 우리 학교 공대 출신인 거.”

“정말이요? 우리 학교 출신이 왜 연기를 해요? 연예인을 하기엔 학벌이 좀 아까운데.”

프리미엄급 배우가 우리 학교 출신이라니. 그건 좀 신선했다. 우리 학교에서 그렇게 유명한 배우를 배출해 냈단 말인가? 배우를 하려면 이과 감성보다는 문과나 예과 감성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고리타분한 나만의 편견인가?

“학벌이 좋으면 우리나라에선 플러스로 작용하죠. 김태준이 이만큼 뜰 수 있었던 데에는 학벌의 힘도 작용했을 거예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 친구가 아마 저보다 한 살 어릴 거예요. 제가 제대하고 복학한 뒤에 교양 필수 수업을 같이 들은 적이 있어요. 그 친구가 군대 가기 전에도 광고를 몇 개 찍었던 모양인데 그때는 크게 성공하지 못하고 군대를 갔나 봐요.”

채 조교와 나는 특정인에 대해 오래 대화를 나눈 적이 별로 없었다. 그만큼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무심하기도 했고, 우리는 일에 관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할 이야기가 많았으니까. 그런데 김태준이라는 이름이 나온 뒤로 우리의 대화가 길어지고 있었다. 재미있는 건, 김태준이라는 사람에 대해 전혀 모르는데도 내가 채 조교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친구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린 건, 제대 후였죠. 무슨 드라마 한 편을 찍었는데 그게 대박이 났어요.”

“당연히 몸값도 올랐겠네요.”

“그럼요. 그런데 제가 그 친구가 괜찮은 사람이구나 싶었던 게, 스타가 됐는데도 학교에 잘 나오더라고요. 수업 참여도도 좋고.”

“오호, 학벌도 좋은데 잘생겼고 성실하기까지? 사람들이 좋아할 조건은 다 갖췄나 봐요.”

채 조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모니터에 가 있었다. 저렇게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잘할 수 있다니. 채 조교도 이제 신의 경지에 가까워지나 보구나 싶었다.

“공대라 여자가 거의 없었으니 무사히 졸업했지, 인문대였음 여자들이 가만두지 않아서 졸업 못 했을 거예요.”

“일리 있는 의견이네요. 그런데 공대 나온 사람이 연기라니. 매치가 잘 안 되긴 해요.”

“초반에는 연기가 어설프다는 평을 들었던 모양인데, 머리가 좋아서인지 연기도 금방 습득했나 보더라구요. 요즘은 연기파 배우라는 수식어를 달고 사니까.”

“단순히 습득만 가지고 연기가 늘었겠어요? 타고난 것도 있고 노력한 것도 있겠죠.”

“그럼요. 그래도 그 친구는 타고난 외모를 바탕으로 자기 갈 길을 잘 찾은 거예요. 그 친구 입장에서는 대기업 사원이 된 것보다는 지금이 낫잖아요.”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주는 느낌이 자유로워서인지, 김태준이라는 사람이 회사원인 모습이 쉽게 그려지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연예인이었을 것만 같았다. 나 같은 사람은 평생 화면으로만 봐야 될 것 같은 사람.

“참, 교수님. 촬영장 가시면 리나 사인 좀 받아다 주세요.”

“리나요? 아아, 그 눈이 엄청 큰 예쁜 아이돌?”

내내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박고 있던 채 조교가 불쑥 고개를 돌리며 엉뚱한 요청을 해 나를 웃게 만들었다. 큰 덩치를 가진 사람이 한 부탁 치고는 너무 귀여웠다. 나만 그렇게 느낀 건 아니었는지 각자의 일을 하던 대학원생들이 피식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걔가 S과학고 다니는 애인데 요즘 대세거든요.”

채 조교의 눈이 반짝 빛났다. 일할 때는 사뭇 진지하다가도 장난을 치기 시작하면 한없이 밝아지는 사람이 채 조교였다.

“어머어머, 채 조교님 와이프는 이 사실을 알고 계시려나요? 30대 아저씨가 10대 소녀를 좋아한다는 걸.”

“하하하, 좋아하지도 못하나요? 저는 걔가 우리 학교 오면, 시험 감독 하면서 답도 다 가르쳐 주고 그럴 건데요?”

“아유, 리나는 절대로 우리 학교 오면 안 되겠네요.”

웃음으로 대화를 마무리하고 나는 내 업무를 시작했다. 방송을 하려면 예정에 없던 시간을 써야 한다는 건데, 그러려면 본업무에 차질이 없도록 일을 해 둬야 했으니까. 검색해 볼 것이 있어 검색창을 연 순간, 내 시선이 한곳으로 고정되었다.



[김태준, MaK과 모델 계약 연장]



몰랐을 때는 그냥 넘겼을 이름 세 글자가 나를 멈추게 할 줄이야. MaK이면 맥주 브랜드 이름 같은데……. 자동적으로 기사를 클릭하자 화면 상단에 김태준의 사진이 떴다. 하얀 셔츠 차림으로 맥주잔을 들고 있는 그는 영상으로 봤을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

『에듀라이징』 영상에서의 그가 단정하고 반듯한 모습이었다면 광고 사진 속에 있는 그는 자유분방하고 밝은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분명히 같은 사람인데도 다양한 색깔을 낸다는 게 나로서는 신기했다.

그러고 보니, 느낌 위주로 보느라 대충 훑어봤던 『에듀라이징』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적정선을 모르는 어린 아이돌들을 통제하고, 게스트로 나온 전문가가 편히 말을 꺼낼 수 있도록 진행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슈트가 잘 어울리는 목소리가 좋은 남자라…… 뒤늦게 그를 직접 만나는 게 실감이 났다.

나는 모니터 화면에 떠 있는 그의 사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에듀라이징』 방송에서 본 슈트 차림이 아닌 편안한 차림의 그가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