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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두기

본 도서는 ‘그들이 사랑하기까지(개정판 우리가 사랑하기까지)’와 ‘우리 둘만의 세상에서’의 연작입니다. 이용에 참고 부탁드립니다.




2710의 법칙

(1화)



프롤로그

김희준


12월의 어느 금요일 밤.

나는 술에 취해 알딸딸해진 상태로 양쪽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서 있었다. 한 잔만 더 마시고 가라며 붙잡는 직원들의 손길도 뿌리치고 나온 이유는 단 하나. 내가 사랑하는 나의 2710을 2주 만에 만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술집이 즐비한 길가. 도로는 연말이라 사람들로 복작거렸다. 좁은 길에는 차와 사람이 눈치작전을 펼치며 아슬아슬하게 서로를 피해 갔다. 나는 기대와 설렘이 가득 담긴 마음으로 내 앞으로 다가오는 차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살폈다.

“으, 추워.”

때맞춰 찾아온 한파 때문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숨을 쉴 때마다 하얀 입김이 나왔다. 2710은 밖에서 기다리지 말라 했지만, 조금이라도 더 빨리 그녀를 보고 싶은 마음이 나를 한파 속으로 내몰았다.

‘분명히 거의 다 왔다고 했는데.’

다시 전화를 걸어 볼까, 생각하던 찰나 눈에 익은 하얀 SUV 차 한 대가 보였다. 자동으로 내 양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이 모습을 2710도 봤으면 했다. 내가 얼마나 기쁜지, 내가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렸는지.

비상등이 켜지고 내 앞에 차가 섰다. 그 3초 남짓한 사이 나는 차에 곧바로 올라탔다. 바짝 뒤따라오는 차들 때문인지 2710은 나에게 싱그럽게 웃어 주는 걸로 인사를 대신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내 손이 기어 위에 올려진 2710의 손등을 감쌌다. 차갑게 식은 손인데도 2710은 밀어 내지 않았다.

“보고 싶었어.”

“나도.”

“출장 다녀와서 피곤할 텐데, 뭐 하러 나왔어? 택시 타고 가면 되는데.”

“조금이라도 더 빨리 내 남자 보고 싶어서. 당신이야말로 길 잃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도로에 서 있어?”

이심전심이었다. 내가 추위를 마다하지 않고 발을 동동거리며 그녀를 기다린 것과, 그녀가 한국에 오자마자 나를 위해 달려온 건.

2주는 너무 길었다. 우리는 새벽 일찍 출근해 밤늦은 시간 퇴근하기를 일삼는 사람들이었다. 집에서 서로의 얼굴을 보는 시간이 평소 하루 한 시간 채 될까 말까 한 부부이지만, 출장으로 인한 2710의 부재는 컸다. 내가 장기 출장으로 집을 비울 때, 2710도 그런 외로움을 느꼈을까.

“술 많이 마셨어?”

“연말이니까 피할 수 없지. 겨우 빠져나왔어. 윤지석 상무가 누군 결혼 안 했냐면서 얼마나 눈치를 주는지.”

“그 사람은 무시해도 괜찮아. 윤지석 씨도 지금 아내가 출장 중이라 오늘 저러고 있는 거야.”

2710이 보조개를 만들며 웃었다. 복잡한 골목을 벗어나니 뻥 뚫린 도시의 도로가 나왔다. 2710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속도를 냈다. 부웅. 속도를 낸 차는 도로를 쌩쌩 달리기 시작했다.

따뜻하게 히터를 틀어 놓은 차 안에 앉아 있자니, 차갑게 식어 있던 몸에 온기가 돌았다. 가장 먼저 정상 체온을 찾은 곳은 심장이었다.

2710을 알고 지낸 지가 벌써 만 8년. 그사이 우리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대였던 우리가 30대가 되었고, 신입 사원이었던 내가 진급에 진급을 숨차게 거듭하며 부장이 되기까지 걸린 시간이 8년이기도 했다.

그런데 수많은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며 사회의 일원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도 유일하게 변하지 않은 것. 바로 2710을 보면 반응하는 내 심장이었다.

‘이렇게 나이를 먹어 가나 봐요. 체력이 예전 같지 않네요.’라는 우스갯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나였지만, 2710을 대하는 마음만큼은 20대였던 그때 못지않았다. 아니, 더 열정적이고 더 뜨겁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처음 2710에게 반했던 순간부터 차곡차곡 더해 온 8년이라는 시간. 그 어떤 부분도 놓치고 싶지 않을 만큼 나는 매 순간 2710에게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2710 또한 변함없이 내 곁을 지켜 주었다. 내가 신입 사원으로 첫 발령을 받고 악덕 팀장 밑에서 사경을 헤매듯 일할 때도, 뜬금없이 미국으로 해외 발령을 받아 타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낼 때도.

힘든 업무도,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도 2710에 대한 내 마음을 방해하지 못했다. 나로서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저 한 여자가 너무 좋았고, 그래서 내 옆에 두고 싶다는 피 끓는 청춘의 단순한 바람으로 시작된 연애. 그 연애가 이렇게 오랜 시간 뜨거울 수 있다는 것이.

“이번 출장은 어땠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결혼한 여자를 2주 동안 말레이시아로 보내냐?”

“결혼한 지 3주 된 남자를 한 달 동안 두바이로 보내는 회사인데 2주쯤이야.”

“오, 내 아내 뒤끝 있네. 그때 서운했나 봐?”

“그럼. 온기 없는 집에 불 켜고 들어가는 걸 한 달이나 했다고. 신혼, 그게 뭐였지?”

그랬다. 우리는 이제 부부였다. 매일 아침에 함께 눈을 뜨고 싶어서, 당당하게 한 침대에서 자고 싶어서, 연애가 시작되고부터 내가 더 안달했던 2710과의 결혼은 2710의 만류로 몇 년이 늦춰졌다.


‘그래도 희준 씨 형이 결혼한 뒤에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네가 그 연예인 걱정을 왜 해! 당장 애인도 없는 사람을.’

‘나는 당신이랑 원 없이 연애한 뒤에 결혼하고 싶어. 알잖아. 나는 당신이 첫 연애 상대라는 걸.’


그 당시 2710이 진심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내 뜻과는 별개로 우리는 ‘아주 오래된 연인들’의 수순을 밟았다.


‘나를 피 말려 죽일 셈이야?’


그럼에도 그 몇 년간 나는 2710을 만날 때마다 끈덕지게 청혼을 했었다. 이만하고 같이 한집에 살자고. 이젠 그만 튕기라고.


‘그래도 순서가 있지 않아?’


2710도 집요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를 말하며 우리의 결혼을 늦췄으니까.

연애를 시작한 지 만 3년이 넘어갈 때였던가. 이제 2710이 뭐라 하든 내 맘대로 할 거라고 다짐한 순간, 평생 혼자 살 것 같았던 나의 형이 험난한 위기를 이겨 내고 결혼했다. 형의 결혼은 물론 기뻤지만 나는 2710이 내 청혼을 거부하던 큰 이유가 사라졌음이 더 감격스러웠다.


‘이제 핑계가 없을 텐데? 그냥 넘어와. 나랑 결혼해서 같이 살아.’


내 생각을 보여 주기 위해서 나는 형의 결혼이 끝나자마자 2710과의 결혼을 추진했다. 하늘도 이런 내 마음을 알고 도와주기라도 했던 걸까. 당시 미국 지사에 있었던 나는 극적으로 한국으로 가는 발령장을 받아 냈다. 팀장으로의 특진은 결혼 선물과도 같았다. 2710도 더는 물러서지 않았다.


‘집을 따로 구할 필요 없이 자기가 그냥 우리 집으로 와.’


그게 내 청혼에 대한 2710의 대답이었다.

“아까 형님이랑 통화했는데, 주말에 어머님 아버님 모시고 같이 식사나 하는 게 어떠냐고 하시던데?”

“형수님도 학생들 방학 기간이라 시간이 괜찮은가 보네. 그러지 뭐.”

“대학 교수는 좋은 직업이야. 그래도 방학 때는 한 템포 쉬어 갈 수 있잖아.”

“연예인만 하려고? 우리 형 봐. 작품 하나 끝나면 그냥 가정주부야.”

“그러게.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러고 살까.”

2710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지금 삶에 대한 그 어떤 원망도 담겨 있지 않은 어리광 섞인 리액션 정도로 느껴졌다. 바쁘고 고되지만 우리는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정말 좋아하지 않으면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집에 도착했다. 2710은 가뿐하게 차를 주차시켰다.

“내리자.”

나는 벨트를 풀며 내리려는 2710의 팔을 붙들었다. 2710이 왜 그러냐고 눈으로 물었다.

“당신 말대로 2주 만이야. 그런데 아직 한 번 안아 보지도 못했어.”

“누가 들으면 욕해. 결혼 몇 년 차면 손도 잡는 거 아니라더라.”

“자꾸 못된 것만 배워 오지?”

꾸짖듯 흘겨보자 2710이 기다렸다는 듯 내 품 안으로 달려들었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건 나쁜 사람이나 하는 건데. 그래도 이런 식의 나쁜 짓은 언제나 환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