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2화



수빈의 마지막 부름은 겁먹은 울음이었다. 다음 순간 귀청을 찢을 듯한 소리와 함께 통화가 끊어졌다.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전원이 꺼져 있다는 메시지만 들려왔다. 다시, 또다시 눌렀지만 역시나였다.

이제 맥스는 완벽한 고요 속에 서 있었다. 커다란 유리 너머로 뉴욕 시내가 저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쾌적한 사무실에 선 채로. 뉴욕에서도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마천루의 맨 꼭대기 층을 차지하고 선 이가 이런 공포를 느낄 수 있으리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그렇게 전화가 끊어진 후 알아본 결과, 수빈을 비롯한 촬영 팀 모두가 납치됐었다. 아니, 카메라맨 한 명은 총격으로 그 자리에서 숨지고 조연출은 폐에 총알이 박힌 채로 남겨졌으니 모두는 아닌가? 피가 마르는 한 달이 지나갔다. 정부는 신중을 기하는 척했지만, 시리아와 문제가 생길까 싶어 주저하고 있음을 알아챈 맥스는 더 이상 그들이 조치를 취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수빈이 지금 살아 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고 살아 있다 해도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 있을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자국민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정부의 개소리를 마냥 신뢰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개인적으로 용병을 고용했다. 소개받은 팀은 용병 파견 업체로 유명한 BLACK WATER 출신의 한국계 미국인이 대장으로 있는 멕시코, 브라질, 러시아 출신들로 구성된 최고의 팀이라 했다. 그런 만큼 비용이 비쌌지만, 상관없었다.

아니, 비용이 비싼 만큼 실력이 있다는 것이니, 비쌀수록 좋았다. 아내를 무사히, 한시라도 빨리 제게 데려다주기만 한다면야 요구한 금액의 열 배, 백 배라도 지불할 용의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처음에 설명을 들은 대장 JW Kim은 의뢰를 거절했었다. 상대가 워낙 지독한 놈들이라 인질이 살아 돌아올지 확신이 없고 일전에 이런 일로 비용을 떼인 적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맥스는 모든 비용을 선불로 지불했다. 죽었다면 시신이라도 수습해 오라고. 시신이라도 찾아오면 두 배, 살려서 데려오면 열 배를 주겠다고 했다.

2주일 전. 터키 남부의 한 비행장에서 맥스는 팀을 싣고 이륙한 헬기 2대가 4시간 뒤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활주로에 그대로 선 채 기다렸다. 돌아오기 한 시간 전쯤 재개된 통신에서 ‘오렌지’를 샀다는 연락이 왔었다.

‘오렌지’는 이번 작전의 목표명, 그의 아내 이수빈이었다. 팀의 대장인 JW가 덧붙이는 소리를 맥스는 똑똑히 들었다. ‘오렌지가 아주 싱싱하다’라고. 헬기가 다시 돌아오는 한 시간 내내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헬기가 도착하고 대기하던 구급차들이 달려왔다. 함께 구출된 이들이, 어떤 이는 제 발로, 어떤 이는 부축을 받으며 내렸다. 마지막으로 내린 JW가 안고 내린 사람. 아까 출발하던 JW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천으로 눈을 칭칭 감싼 검은 머리 여인. 내 아내, 수빈이었다. 아아. 기쁨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서둘러 다가가 받아 안으려 하자, 웬일인지 수빈은 그의 손길이 닿자마자 움찔 놀라며 JW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몇 달 사이 고생한 탓인지 더 가늘어진 팔로 그의 목을 감아 안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기까지 했다.

그럴 수 있다. 억류되어 있으면서 많은 위협을 받고 끊임없는 두려움에 노출되었을 테니 겁이 나겠지. 그래도 내 목소리를 들으면,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의 목소리를 들으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보, 수빈아? 나야. 맥스.”

하지만 아내의 반응은 달라지지 않았다. 눈을 감싼 천이 귓바퀴도 조금 덮고 있어 그런가? 다시 한 번 팔을 내밀려 하는데, JW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 병원으로 데려가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병원은 당연히 갈 테지만, 한시라도 빨리 내 곁으로 돌아왔다는 확신을 가져야 두려움에서도 해방될 것이 아닌가.

어딜 끼어드느냐는 투로 눈을 부라렸다. 감히 네까짓 게 뭔데, 아내를 구해 오는 것을 부탁했지, 감히 우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드는 것을 허락한 것이 아니라고 쏘아붙이려는 순간. 상대가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기억을 잃은 것 같습니다.”

뭐……? 그게 무슨……?

들을수록 가관이다. 의학과는 거리가 먼 용병 따위가 섣부른 판단을 내리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빈은 자신을 안은 이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억지로 떼어 내려 했더니, 괴성과 함께 발작을 일으키는 바람에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난 것은 맥스였다.

수빈의 그 울부짖음은 그의 가슴을 바닥까지 후벼 파는 것이었다. 억류되어 있는 동안 어떤 시간을 겪었는지 아직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다시 그곳으로 돌아간 것처럼 두려움에 가득한 울부짖음이라니.

그렇게 곧장 병원에 가 갖가지 검사와 상담을 통해 알게 된 사실도 다르지 않았다. 신체적으로는 약간의 영양실조가 있을 뿐이고, 눈은 내내 어두운 곳에 갇혀 있었던 탓에 천천히 빛에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신은 아니었다. 20대 초반 이후 모든 것이 백지로 돌아간 것이다.

의사 말로는 납치되던 순간과 연관된 모든 것을 잊고 싶었던 것 같다고 했다. 감당하기 어려운 충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무의식의 세계로 도망쳐 숨은 것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 남편인 내가 있는데? 나마저도 까맣게 잊었다고? 첫눈에 반해 일주일 만에 결혼했던 자신을? 대체 어떻게……?



자신이 소유한 호텔 체인에서 다음 호텔 부지의 후보로 올라온 모로코의 마라케시를 둘러보러 방문했을 때, 한 레스토랑에서였다. 몇 테이블 떨어진 곳에 있던 수빈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고 식사를 먼저 끝낸 그가 다가가 명함을 건넸다. 비즈니스가 아닌 경우, 여자에게 먼저 명함을 내민 것은 난생처음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여자들은 늘 적극적으로 그에게 대시해 왔으니까.

그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식사 중간중간 계속해서 시선이 수빈 쪽으로 갔고 두세 번에 한 번은 수빈도 그를 쳐다보았다. 그나마도 뻔뻔하고 당당히 쳐다보는 그와 달리, 흠칫거리며 놀라는 식이었지만.

이후로 일정을 늦춰 가며 기다렸지만, 수빈은 사흘이 넘도록 연락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듣기로는 명함을 받은 것도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이 불편해서 그냥 받아 넣었던 것이라고 했으니 자칫하면 그대로 영영 헤어질 뻔했다.

그러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느긋한 척 전화를 받았는데 상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도 맥스는 상대가 누구인지 눈치를 챘다. 한데, 안내 방송이 들려오는 것으로 보아 공항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녀가 떠나기 직전이라는 것도 알아챘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역시나 촬영 일정이 끝나 한국으로 돌아가던 길에 공중전화로 연락한 것이라고 했다.

이대로 헤어지면 끝이라는 생각에 조급해진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지금 갈게요.”

― ……10분 후에 탑승해야 해요.

머뭇거리는 작은 목소리가 전하는 말은 전혀 희망적이지 않았다. 남녀 사이의 밀당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전하는 투였으니까.

제기랄.

“내가 갈 때까지 그대로 있어 줘요. 최대한 빨리 갈 테니까…….”

이름도 모르는 그녀가 자신을 기다려 줄지 자신이 없었다.

“Please.”

그 말도 여자에게는 처음이었지만, 상대가 누구든 형식적이 아니라 간절히 그 말을 건넨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전화는 대답 없이 끊겼지만, 맥스는 기사를 재촉해 미친 듯이 달려갔다. 공항에 도착해서도 서둘러 달려간 곳에 그녀, 수빈이 있었다. 다른 일행들은 이미 비행기를 타고 떠난 뒤였고 그녀만이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혼자 앉아 있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던 그녀의 표정을 잊을 수 없었다. 혼란스럽지만,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저와 똑같은 심정을 담고 있었다. 맥스가 손을 내밀었고 주저하며 내밀어지는 작은 손을 굳게 잡았다. 그러고는 자신이 묵는 호텔로 데려갔다.



“좀 어떻습니까?”

거실에 있던 맥스가, 침실에서 나오는 의사에게 물었다. 그는 수빈을 진료하고 나오는 참이었다. 무표정을 가장한 맥스와는 다르게 상대는 역시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충격이 무척 심했던 것 같습니다. 심리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네요. 그나마 몸이 나아지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 할 수 있겠지요.”

맥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의 붕대는 언제쯤 풀 수 있습니까?”

“이틀 후에 다시 보겠습니다. 아직까지 눈을 부셔 하시네요.”

“알겠습니다.”

의사가 가고 난 뒤, 맥스는 침실로 향했다. 조용히 문을 여니, 침대에 누워 있던 사내가 시선을 주었다. 그 품에는 맥스 자신의 아내, 수빈이 꼭 안긴 채였다. 소리를 들었다면 몸을 움츠리며 사내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을 텐데,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면 그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사내도 입 모양으로 ‘잔다’는 말을 벙긋거린다. 수시로 찾아오는 악몽 때문에 깊은 잠을 자지 못하니, 저렇게라도 토막 잠을 잘 땐 결코 방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게 많이 자고, 어서 잊어야…… 남편인 자신도, 결혼 생활도 다시 기억해 낼 터였다. 낯선 사내에게 맹목적으로 매달리며 한시도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지금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것인지도 깨닫게 될 것이고.

조용히 문을 닫고 돌아서는 맥스의 얼굴이 굳은 채였다. 수빈이 돌아온 뒤로 내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