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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박한 수준으로 만들어 줘요(삽화본)

1화

1. 수빈과 나



― 스펠링은 k.e.p.z.l.i인데, 뭐라고 읽는지는 모르겠네. 하여튼 거기로 가는 중인데, 어둡기 전에 도착했으면 좋겠어요.

전화기를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가 갈라지는 것을 보면 수빈은 지금 상당히 피곤한 상태였다.

맥스가 시차를 계산해 보니, 지금 수빈이 있는 터키는 오후 4시 반쯤이다. 오늘의 일정이 끝나 쉬려면 좀 더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안쓰러운 마음에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당장 전용기를 보내, 데리고 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게다가 어디쯤인가 싶어 마을 이름을 인터넷 지도로 검색해 보고는 욕설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시리아 국경에서 고작 몇 백 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도로를 지나고 있는 것이다!

“너무 남쪽이네.”

수빈이 불안해할까 봐 짐짓 단조롭게 중얼거렸지만, 그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는지 전화기 너머에서 아내는 어색하게 웃었다.

― 지도야 축소돼 있어서 그렇죠, 뭐. 여긴 그냥 먼지 풀풀 나는 황무지라 아무것도 없어요.

반군이 올 리가 없다는 뜻인데,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곳에 피디는 뭐 볼 것이 있다고 팀을 이끌고 간 거냐고!

프로덕션에 속한 아내 수빈은 여행 다큐를 찍는 촬영감독이었다. 주로 해외로 많이 가는데, 석 달 전에는 그의 아버지의 모국 우크라이나로 간다기에 그가 펄쩍 뛰며 반대했었다. 그곳은 경치는 어떨지 몰라도 러시아와 서방 간의 알력 다툼이 벌어지고 있어 하루에도 군인들이 수십 명씩 죽어 나갈 정도로 위험천만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동양인이 거의 없는 그곳에서 수빈은 더욱 눈에 띌 것 아닌가.

그의 극렬한 반대로 인해 수빈은 프로덕션에 거절 의사를 밝힐 수밖에 없었고 그 이유가 안전과 관계된 것이 알려지자 다른 스태프들도 하나둘 발을 빼는 바람에 결국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되었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웬걸.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을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바보 멍청이들은 위험 때문에 갈 수 없는 곳에 어떤 묘한 매력이라도 느끼는지, 다음의 행선지는 터키 남부로 정해졌다는 것이다. 그 아래쪽에 내전이 한창인 시리아가 있는데!

여행이라는 낭만적인 여가 놀이에 빠져 위험성 따위는 보지 못하는 멍청이들이었다. 말 그대로 여행 따위에 목숨을 거는 것도 모르고 시리아가 아닌 터키인데 뭐가 문제냐는 둥 헛소리를 해 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은 맥스가 아내의 직업과 관련된 일에는 결코 개입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고 그 프로덕션을 인수하는 작업을 서둘렀지만, 계약이 성사되기도 전에 아내는 터키로 떠났다.

맥스는 실권을 쥐자마자 팀을 당장 돌아오게 하라는 압력을 넣었고 그대로 처리되는 줄 알았다. 한데, 돌아오기는커녕 피디가 경유지까지 제멋대로 바꿔 가며 일정도 더 연장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상관이 전화해서 귀국을 종용하면 잘 안 들린다는 둥 헛소리를 하며 끊어 버리기 일쑤라니. 너무 화가 난 맥스는 이렇게 수빈과 통화를 할 때마다 수빈에게 그 자식을 바꿔 달라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자신이 프로덕션을 인수한 것을 수빈에게는 끝까지 비밀로 해야 하는 터라 그러지도 못하고 죽을 맛이었다. 게다가 지금 수빈이 향하는 곳은 지도를 아무리 확대해 봐도 무모할 정도로 시리아 국경에 가까운 곳이었다.

그는 시선을 들어 전체가 유리인 벽면 너머,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훑었다. 이 안전한 곳을 떠나 대체 얼마나 멀리 가 있는 건지. 이 일에 대해 그 피디라는 작자에게 톡톡히 대가를 치르게 해 줄 작정이었다.

― 시리아가 문제가 아니라 너무 덜컹거리는 버스가 문제예요. 윽! 아야야…… 좌석에서 1피트는 튀어 오르는 것 같아. 엉덩이가 남아나질 않겠어……!

수빈이 죽는소리를 했다.

“저런, ‘내 엉덩이’가 망가지면 안 되는데.”

수빈이 당장 돌아와 품에 안기기 전까지는 등줄기에 도사린 불안감을 도통 삭여 낼 길이 없으니, 눈매는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지만, 아내에게 그 모습을 들킬 염려는 없지 않나. 그래서 성질을 한껏 죽이고 목소리를 평이하게 유지했다. 그럭저럭 넘어갔는지 수빈이 킥킥거리더니 목소리를 한층 낮추고 물어 왔다.

― 내가 아니라 당신 거였구나?

“그럼, 내 거지. 우리 여보 엉덩이도 내 거고 그 앞쪽의 도도록한 부분도 당연히 내…….”

― 아, 제발. 옆에 아무도 없어요?

“있어.”

조금 전 오늘 일정을 브리핑한 비서가 나간 뒤로 사무실에 혼자이던 맥스는 부러 거짓말을 했다. 그가 짓궂은 소릴 할 때마다 수빈은 눈이 휘둥그레져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니, 지금도 그럴 것이다. 그 상상을 하니 아주 잠시 즐거워졌다. 그래, 이렇게 농담이나 주고받으며 시간을 어서어서 보내서 어서 빨리 돌아왔으면.

― 당신 진짜, 엇, 아우!

또다시 덜컹거리는지 수빈이 죽는소리를 했다.

“손잡이를 꼭 붙들어야지.”

― 붙들어도, 아우, 소용이 없, 헛……!

말이 반, 신음이 반이었다.

“지금은 고생이겠지만, 돌아오면 균형은 잘 잡겠는걸. 당신한테 주도권을 주면 자꾸 미끄러지잖아.”

삽입한 채 몸을 굴려 자신의 몸 위에 올려놓으면 얼마나 수줍어하는지 모른다.

― 그거야 당신이 밑에서 자꾸 흔드니까……!

억울한지 조금 목소리가 커진다.

“옆에 누구 없어? 다 들었겠는데?”

― 핫!

화들짝 놀란 수빈의 외침에 맥스의 목에서 큭큭 하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때였다.

― 어어, 앗!

지금까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큰 외침에 이어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소음이 터졌다. 놀란 맥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한참 후, 걱정이 목까지 치밀고 나서야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나마 감이 무척 멀었다.

― 아이고…… 차가 갑자기 멈춰 서서 휴대폰을 떨어뜨렸…….

목소리가 좀 더 커지면서 여러 잡음이 섞여 들었다.

― 잠깐만요. 앞좌석 밑으로 떨어졌는데, 어디 끼었어. 일단 스피커폰 모드로 바꿨으니까, 내가 꺼낼 때까지 이상한 소리 하면 안 돼요. 그냥 듣기만 하든지…….

휴우. 어찌나 놀랐는지, 맥스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비비며 몇 걸음을 걸었다. 좌석 밑으로 기어 들어가고 있는 중인지 한껏 소심해진 아내의 목소리에 놀랐던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찰나. 총성이 울렸다.

우뚝 멈춰 선 맥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아무것도 없는 황무지라면서……?

여러 발이었다. 수빈이 숨을 삼키는 소리에 사람들의 비명이 섞여 들었다. 그의 심장이 마치 수빈과 함께 있는 듯, 아니 심지어 그 총구 앞에 서 있는 듯 세차게 뛰기 시작했다.

그래도 혹시 수빈으로 하여금 지나치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할까 저어된 맥스는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다.

“말해. 괜찮은 거지?”

― 괘, 괜찮…….

잔뜩 얼어붙은 목소리가 속삭이듯 들려오기까지 심장이 멈춘 듯했다. 알 수 없는 상황이지만, 흥분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일단 수빈을 진정시키고 일을 처리하면 될 일이다. 저런 나라에서 외국인들을 위협하는 것은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이고 그 이유는 십중팔구 돈이었다. 그리고 다국적 기업의 총수인 그, 맥스 이바첸코에게는 돈이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것이니 그런 일이라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

“겁먹지 마. 별일 아닐 거야. 위협사격일 테니까 그대로 몸을 숙이고 있…….”

― 매, 맥…… 아, 앞자리의 누군가 초, 총에 맞았는지 피, 피가 저기 바닥으로 떠, 떨…….

물론 수빈이 자신의 아내임을 아는 자들에 한해서지, 무모하게 총질을 하고 나서는 이들에게라면 달라진다. 돈이 목적이라면 섣부르게 총을 쏠 리 없으니까.

덜덜 떨리는 목소리에서 수빈이 얼마나 겁을 먹었는지 알 수 있었다. 맥스 자신의 얼굴도 하얗게 질려 있을 테니까.

그는 빠르게 중얼거렸다.

“별일이어도 상관없어. 내가 금방 데리러 갈 테니까, 그때까지만 무사하게 있…….”

― 그들이 와요……!

급한 속삭임에 이어 여전히 바닥에 놓인 휴대폰을 통해 쿵쾅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전해졌다. 괴한들이 버스에 오르는 소리인 듯했다.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자신의 목소리도 방해가 될지 몰라 가능한 한 작게 속삭이고는 휴대폰의 녹음 버튼을 누르는데, 그 손가락이 덜덜 떨렸다. 알 수 없는 외국어로 외치는 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여러 사람의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다행히 총성은 없었지만 그 비명에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섞여 드는 것으로 보아 수빈의 일행을 끌어내는 것 같았다. 수빈도 끌려가는 것인지 걱정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스피커폰으로 물었다가는 혹시 수빈이 이목을 끌게 될까 봐 초조하게 침묵을 지켰다.

얼마 후, 조금 잠잠해졌다. 수빈의 안위가 견딜 수 없이 궁금해서 어떤지 물을까 하는 순간, 휴대폰을 건드리는 듯한 잡음과 함께 남자의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크게 들려왔다. 그 사이에 섞인 수빈의 헐떡임도.

맥스는 자신도 모르게 애타게 소리쳤다.

“여보세요? 수…….”

― 맥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