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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 *



사라져 버린 백합의 행방에 대해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꽃이 예뻐서 누가 훔쳐 간 거다, 꽃을 가지고 오던 여직원이 납치된 거다, 애초에 꽃 자체를 배달받은 적이 없다 등, 직원들의 추측이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난무하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 음식을 세팅하고 손님에게 깍듯이 인사를 마친 연우는 자신의 캐비닛 안에 처박혀 있는 백합을 떠올렸다.


7년이었다. 그와 만남을 해서 끝을 본 것까지 걸린 시간은.

스물하나, 대학 시절 그를 처음 만났었다. 그 남자는 자신보다 두 살이 많았고, 가슴 떨리는 첫사랑이었다. 누구보다 격렬하고도 뜨거운 청춘을 함께 보냈으며 연우의 모든 것을 가져갔던 남자. 그리고 2년 전 겨울 연우와 하경은 헤어졌다. 아니, 떠났다. 미국으로 간다는 단 한 마디 말과 함께.

“연우 씨, 뭐해. 일하다 말고.”

갑작스레 다가와 어깨를 툭 건드리는 은비의 행동에 화들짝 놀란 그제야 연우는 지금 자신의 일터인 호텔, 레스토랑 안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묻지 못했다. 아직 왜 그때 그렇게 떠나 버린 것이냐고 묻지 못했다. 묻고 싶었지만 그런 질문까지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미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가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 주지 않으면 외로워 잠조차 청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다 알면서도 그는 그렇게 떠났으니까. 그가 없으면 이 세상에 홀로 남겨질 자신을 알면서도 그는 떠났으니까.

연우는 비틀거렸다. 하루빨리 정신을 차려야 한다. 미워해 봤자 더는 소용도 없는 이 상황에서 어서 정신을 차리고 제 갈 길을 찾아야 한다.

연우는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돌아오는 빈 접시를 주방으로 날랐다. 어차피 대표이사와 말단 직원이 만날 만한 일은 거의 없으니 자신만 그를 피해 다니면 되는 문제였다. 사적인 일로 만날 일은 더더욱 없으니.


어느새 식은땀 범벅이 되어 벽을 붙잡는 연우를 불러 세운 것은 예준이었다. 연우가 다가오는 그를 올려다봤다.

“어디 아파? 안색이 안 좋아 보여.”

“그냥 좀 힘이 없어서요.”

“오늘은 일찍 들어가는 게 좋겠어. 이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의 친절을 물리치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한시라도 빨리 이 호텔에서 나가고 싶었다.

연우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텅 빈 탈의실로 걸어가 캐비닛 문을 열었다. 커다란 제 몸을 다 펼치지 못하고 잔뜩 구겨져 있던 백합이 이때다 싶어 캐비닛 밖으로 터져 나왔다. 나풀거리는 꽃잎을 다시 안으로 쑤셔 넣은 연우는 옷을 갈아입고 빠르게 탈의실을 나왔다. 다시 떠오르는 아까의 그 상황에 연우의 두 눈이 꽉 감겼다.

연우는 두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꿈일 거야. 이건 꿈일 거야.’

그리고 다시 눈을 떴다. 유니폼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직원들이 바쁘게 로비를 지나다니고 있었다. 눈앞에는 대표이사 취임에 쓰였던 화분들이 곳곳에 장식되어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 * *



잔뜩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일으킨 연우는 곁에 있던 점퍼를 걸쳤다. 잠깐 집 앞으로 나와 보라는 예준의 문자에 잔뜩 헝클어져 있던 머리카락을 대충 귀 뒤로 쓸어 넘기며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섰다.

아직 가시지 않은 추위에 예준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어깨를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의미 없이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며 코를 훌쩍이고 있었다.

연우를 발견한 예준은 자신의 손목에 달랑거리는 종이봉투를 바로 쥐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파리한 안색의 연우가 눈 안에 들어왔다.

“많이 아파?”

“아니에요. 좀 피곤했나 봐요.”

“네가 그렇게 가고 나서 다들 걱정 많이 했어.”

연우는 미안한 얼굴로 그에게 사과했다. 자신이 걱정이 되어 이렇게 들른 그를 보니 더욱 미안해졌다.

“아 참, 죽 좀 가져왔어. 어떤 죽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그냥 집에 있던 야채로 대충 끓였어. 입맛에 맞을런지 모르겠네.”

“정말 괜찮은데…….”

그의 친절에 연우는 문득 콧잔등이 시큰거렸다. 그의 작은 배려에 바보처럼 감동의 눈물이라도 날 것 같았다. 급하게 죽을 쒀서 나왔는지 대충 옷을 걸쳐 나온 그의 어깨가 시려 보였다.

연우는 예쁘게 포장되어진 죽을 받아 들다 주춤했다. 아무래도 이렇게 그를 돌려보내기는 미안했다. 아니, 그래도 제가 죽을 맛있게 먹는 모습이라도 보여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연우는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같이 먹을래요?”

“어?”

“죽 같이 먹어요.”

연우의 연약한 입술에서 흘러나온 꿀같이 달콤한 말에 예준의 입술이 상승곡선을 그렸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같은 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죽을 두고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말없이 숟가락을 쥐고 있었다. 연우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죽을 떠 입 안으로 넣었다. 고소한 참기름 맛에 입 안이 따뜻해졌다. 예준은 연우의 입에서 떨어질 말을 기다리며 저도 조심스레 죽을 떴다.

“맛있어요.”

“이거 진짠지 그냥 하는 말인지 구분이 잘 안 가는데?”

“정말이에요. 저 솔직한 거 아시잖아요.”

“알지. 잘 알지.”

연우는 그가 맞춰 주는 맞장구에 슬쩍 웃음을 흘렸다.

“아프지 마.”

예준의 말에 연우가 고개를 들었다.

“네가 아프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잖아.”

그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캐치하지 못한 연우가 한참을 침묵했다. 죽을 열심히 삼키던 예준이 그제야 고개를 들고 멍하니 자신을 보는 연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곧 변명하듯 제 입장을 설명했다.

“아니…… 이렇게 죽을 줘야 할지 아니면 병원이라도 데려가야 할지…….”

“전 괜찮아요. 이 정도 아픈 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근데 선배, 저 너무 편애하는 거 아니에요? 다른 직원들이 보면 캡틴이 한 직원만 편애한다고 또 뭐라 하겠어요.”

가볍게 흘려 넘기며 다시 숟가락을 죽 속으로 푹 담그는 연우를 보며 예준이 입을 열었다.

“네가 그만큼 열심히 하잖아. 다들 수긍할 거야.”

예준은 혹여나 제 마음이 탄로 날까 입가에 묻은 죽을 마른 혀로 닦으며 초조한 듯 침을 삼켰다. 곧 연우의 가벼운 웃음이 돌아왔다.

“그래서 항상 고마워요. 선배.”

연우는 잔뜩 긴장한 예준에게 웃으며 답했다.

별것 아니라는 듯 그렇게 말하고 넘기는 연우를 보며 예준은 쓴웃음을 지었다. 갑자기 목이 답답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연우는 진심이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사고로 부모님을 여의고 홀로 남겨졌던 그녀를 가장 괴롭게 하는 것은 외로움이었다. 그래서 하경과도 더욱 애틋했고 더 사랑했었다.

연우는 제가 하경을 떠올렸다는 것을 깨닫고 곁에 놓아두었던 물을 벌컥거리며 마셨다. 식도를 지나쳐 폐부까지 차가운 기운이 꽉 들어차는 느낌에 연우는 고개를 들고 아직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예준을 보았다.

“뭐 더 드릴까요?”

“……아냐.”

예준은 뻑뻑하게 굳어 가는 입 안에 숟가락을 식탁 위로 놓고 입을 다물었다. 연우도 곧 수저를 식탁 위로 놓으며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 예준은 까끌까끌한 제 목을 손으로 더듬으며 연우에게 저도 모르게 재촉하듯 말을 내뱉었다.

“이번 주 토요일, 그러니까 내일 저녁 약속 잊지 않았지?”

“네.”

연우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녀는 죽에 대한 고마움도 잊지 않고 다시 한 번 덧붙였다. 예준은 그녀의 웃음에 저도 모르게 입술이 올라갔다. 그러다가 다시 속절없이 올라가는 제 입술을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 * *



호텔 앞에서 연우를 만난 은비가 손을 흔들며 그녀에게 인사를 해 왔다. 연우는 아침부터 활기찬 은비를 보며 저도 힘껏 손을 흔들었다. 추운 아침 공기에 입에서는 입김이 올라왔다.

“연우 씨. 몸은 괜찮아요?”

“네? 아, 네. 괜찮아요.”

“다들 어제 얼마나 걱정했게.”

은비는 저를 닮은 벙어리장갑을 낀 손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곧 정말 궁금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열변을 토해 냈다.

“근데 진짜 대표이사님 백합 누가 가져갔지? 아니, 그게 없어질 이유가 없잖아.”

연우는 은비의 말에 저도 모르게 옅게 립스틱이 칠해진 제 입술을 깨물었다.

“가져갈 거면 대표이사님을 가져가지 왜 대표이사님의 백합을 가져가냔 말이야, 내 말은.”

그런 연우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한 은비는 제 말에 설명만을 덧붙였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훔칠 거면 잘생기고 멋있는 대표이사님이 더 훔칠 만하지 그깟 꽃다발이 뭐라고 그걸 훔쳐 가냐 이 말이야.”

“꽃 예쁘던데…….”

“네?”

“네?”

서로 놀란 듯 반문한 두 사람은 곧 호텔도어를 열며 입을 다물었다. 은비가 놀란 듯 벙어리장갑을 낀 투박한 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대, 대표이사님이다.”

은비의 소리 없는 외침에 연우는 하고 있던 녹색 머플러를 입까지 끌어 올리고는 지나가는 직원들 틈 사이로 몸을 숨겼다. 언젠가는 마주친다고 해도 지금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어렵사리 들어온 회사를 그 남자와 마주치기 싫다는 이유 하나로 때려치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잘못은 네가 했는데 왜 내가 회사를 그만둬? 연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스쳐 지나가는 연우의 옆에서 은비의 쨍쨍하면서도 간드러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대표이사님.”

연우는 은비에게 인사를 받고 있는 하경을 스치듯 바라봤다.

그는 자신의 몸에 알맞게 달라붙은 새하얀 화이트 셔츠를 입고, 그 위에는 푸른 톤이 살짝 도는 블랙 슈트에, 연우가 유난히 좋아했던 깔끔하고 세련된 푸른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단단해 보이는 손목에는 한눈에 보아도 고급스러운 메탈시계가 자리하고 있었다.

하경은 은비의 인사를 받으며 임원들과 가볍게 호텔을 돌아보고 있었다. 곧 돌아오는 그의 시선에 연우는 머플러를 더욱 올려 세우며 고개를 홱 돌렸다.


탈의실로 들어와 문을 쾅 하고 닫는 연우에 직원들이 유니폼을 입다 말고 의아한 눈으로 쳐다봤다. 곧이어 은비가 탈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나 대표이사님이랑 인사했어요. 부럽죠?”

은비의 말에 직원들은 순식간에 은비를 둘러싸며 연우의 등장을 까맣게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슈트가 그렇게 잘 어울리는 남자는 처음 봤어요. 웬일이야, 정말.”

“우리도 프런트나 객실 쪽으로 갔어야 했어. 왜 레스토랑에 처박혀 가지고.”

연우는 다 갖춰 입은 유니폼을 정리하며 직원들이 말을 하든가 말든가 상관 않고 다시 탈의실 문을 열었다.

“일부러 확 넘어지는 척하면서 안겨 볼까요?”

그리고 다시 문을 쾅 하고 닫았다.


직원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하경을 비롯해 임원들이 레스토랑과 바를 살펴보러 손수 걸음 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