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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고백

1화

프롤로그



자극을 견디다 못해 저도 모르게 허리가 들렸다. 악다문 입술에서 새어 나오는 신음에 연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쉴 틈도 없이 맞대어 오는 아랫도리가 정처 없이 흔들렸다. 눈가를 타고 진득하게 번지는 물기를 닦는 남자의 손길은 부드러웠지만 독점적이었다. 몇 번이고 질척하게 맞춰지는 농도 짙은 키스에 연우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의 뺨을 감싸 쥐었다.

연약한 입술은 용암 같은 혀끝으로 침범당하며 갈구하듯 빨리고 빨렸다. 그의 뺨을 감싸 쥐고 있는 가느다란 손가락 위를 포개는 남자의 손이 느껴졌다.

연우는 떨어지는 입술 사이로 거친 숨을 뱉어 내며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참고 있던 눈물이 후두둑 쏟아졌다.

“하, 하경 씨…….”

연우가 쉰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기 위해 단단한 어깨에 손을 두르는 순간, 다시 남자는 욕심껏 욕망을 밀어 넣고 휘청이는 작은 몸을 품었다. 침대가 요동치며 흔들릴 때마다 길고도 새된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에도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는 남자의 손길에 그를 원하고 있는 심장이 떨렸다.

“……하경 씨.”

“쉬, 울지 마.”

연우는 부드럽지만 명령과도 같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열락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뱉어 내는 남자의 신음에 연우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렇게 울면 밤새도록 더 울리고 싶어지잖아.”

충만해진 애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깊고 뜨거운 까만 눈동자에는 제가 담겨 있었다.


연우는 눈을 번쩍 떴다.

파리해진 손가락으로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연우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옆으로 돌아보았다. 꿈속에서의 저를 비웃기라도 하듯 반듯하게 정돈된 자신의 옆자리가 눈 안에 들어왔다. 꿈이었다.

연우는 땀으로 흘러내리는 두 눈을 손등으로 쓸어 내고 어둠을 응시했다. 아무도 없는 어둠이었다. 고요한 새벽은 그 남자의 눈동자만큼이나 깊은 어둠이었다.

“미친 거야. 연연우. 하경 씨 꿈을 왜 꾸는 거야. 그것도…….”

이런 음란한 꿈을.

연우는 고개를 내저으며 어둠을 헤집고 부엌으로 걸었다. 그리고 손을 더듬어 찾은 시원한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순식간에 발끝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다. 식은땀이 공중으로 흩어지며 등줄기에 한기가 돌았다.

자신을 바라보며 쾌락을 이기지 못한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던 그, 귓가에 속삭이던 욕망 젖은 목소리.

“정신 차려.”

주먹으로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몇 시간 남지도 않았네.”

2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최하경, 그는 아직도 제 일상을 방해하는 가장 커다란 요인이었다. 연우는 앞으로 쏟아지는 머리칼을 넘기며 다시 침실로 몸을 어기적어기적 옮겼다.

월요일 출근 첫날부터 자신의 잠을 방해하는 이 엄청난 꿈으로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일주일의 처음을 모조리 망쳐 버린 기분이었다.

눈을 다시 감고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려 몸을 뒤적였다. 정말 꿈에서 나눈 사랑 때문인 건지 흠뻑 젖어 버린 시트에 연우는 몇 번이나 감았던 눈을 다시 뜨기를 반복했다. 그러더니 편두통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내일 출근은 망했다. 순전히 그 남자 때문에.



1. 다시, 너



이디에이 호텔, 이미 미국을 비롯한 해외 여러 나라에 체인을 두고 있는 이디에이는 우리나라 최고의 호텔이라 불리었다. 이디에이 호텔은 그 명성에 버금가는 최고의 레스토랑을 보유한 호텔로 레스토랑은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언제나 예약이 풀로 차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에 힘든 기색 한 번 할 법했지만 연우는 바쁘게 지나다니면서도 생긋 웃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호텔에 들어온 만큼이나 눈코 뜰 새 없이 바쁨은 그녀에게 만족감을 주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에게로 다가온 직원 하나가 바쁘게 속삭였다.

“연우 씨, 캡틴이 찾아요.”

음식을 나르다 말고 연우는 예준이 저를 찾는다는 호출에 서둘러 그를 찾아갔다. 그의 표정에서 지친 기색이 역력한 걸로 보아 문제가 생긴 듯했다.

“캡틴, 찾으셨어요?”

“연우 씨, 대경그룹 VIP 손님 예약 다음 주 월요일인 거 확실해?”

“예. 29일 오후 1시 예약하셨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선 28일이라고 계속 그러시는데?”

“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 몇 번이나 확인했었는데. 그래서 특별 주문하신 요리 중에 들어갈 고급 재료들은 29일 오전 중으로 예약 주문해서 도착 예정이고요. 제가 직접 말씀드려 볼게요.”

“아냐. 내일 찾아 주신다고 하셨어.”

예준은 더 나설 것 없다는 듯 연우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리고 그녀의 가슴께에 매달려 있는 삐뚤어진 명찰을 정갈하게 정돈해 준 예준은 제 손목시계를 내려다보며 연우를 향해 싱긋 웃었다.

“퇴근하면 같이 가자.”

“일찍 퇴근하세요?”

“응. 같이 갈 거지?”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예준은 그제서야 그녀에게서 등을 돌려 마치 전쟁통 안으로 들어가듯 바쁘게 지나다니는 직원들 틈으로 돌진했다.


사무실을 나서기 전에 연우에게 호텔 앞에서 보자는 문자를 보낸 예준은 호텔 앞을 살펴보았다. 아직 퇴근 전인지 연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호텔 앞의 번잡함을 피해 한쪽에 물러서 기다리고 있는데, 손가락으로 목을 매만지며 걸어오는 연우가 보였다.

그런 연우를 유심히 보던 예준은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뻗어 그녀의 가방을 낚아채듯 가져왔다. 놀란 연우의 눈이 예준에게로 향했다.

“내가 들어줄게.”

“아니에요. 선배.”

“이 정도는 괜찮아.”

그 말에 예준에게로 뻗은 손이 허공을 헤매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연우는 시린 손을 비비며 가방을 잃은 손으로 코트를 여몄다.

호텔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근방 빌라에 도착한 연우는 그에게 넘겨줬던 가방을 돌려받으며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리고 발걸음을 돌리려 할 때, 예준은 연우를 불러 세웠다. 그를 뒤돌아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남자는 괜히 제 목을 매만지며 시선을 땅으로 떨어뜨렸다.

“이번 주 토요일에 저녁이나 같이 할까? 아니, 뭐. 혼자 사는 사람이 주말 저녁까지 혼자 먹으면 슬프잖아. 그날 약속 없지?”

연우는 안 될 것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하게 하루 종일 꽁꽁 얼어 있는 것만 같던 연우의 얼굴에 오늘 처음으로 꽃이 활짝 폈다.

“그럼 들어가. 내일 호텔에서 보자.”

예준은 그런 연우의 따뜻한 봄바람 같은 미소에 저도 입술이 말려 올라갔다.


* * *



아침 일찍 출근한 직원들은 나이프를 닦다 말고 호들갑을 떨어 댔다.

연우는 조잘대는 직원들의 목소리에 테이블을 정돈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연우를 발견한 미희가 수다에 동참하라는 듯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하지만 연우는 의미 없는 웃음으로 대꾸하며 고개를 돌리고 다시 정돈을 시작했다.

그들의 화제는 오늘 취임하는 새 대표이사에 대한 이모저모였다.

“이번에 취임하는 대표이사님이 우리 호텔 회장님 아들인데, 이번에 미국에서 돌아왔나 봐.”

“전에 같이 일하던 내 선배 레스토랑에 그분이 식사를 하러 왔었는데 장난 아니었대. 눈매, 콧대, 입술, 무엇 하나 떨어지는 게 없대. 그런데 제일 멋있었던 건 목소리래. 완전 중저음 미칠 듯한 보이스…….”

빠져들 듯 두 손을 모아 제 뺨에 가져다 댄 은비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듯 웃었다.

“세상에 웬일이야. 그분이 우리 호텔 대표이사님이 된다는 거야? 나 회사를 향한 충성심이 막 생길 것 같아.”

영양가 없는 가십 아닌 가십에 연우는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확실히 구미가 당기는 가십이기는 했다. 아직까지 윗분들과의 로맨스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한 직원들은 그저 이 상황이 흥미롭고 가슴 떨리기만 한 모양이었다.

그러다 반듯하게 유니폼을 차려입고 걸어오는 예준을 발견한 직원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대표이사건 전무이사건 별 관심이 없는 것은 저뿐만이 아닌 듯했다.

“대표이사님 취임식 갑시다.”

예준도 직원들의 쑥덕거림에 전혀 관심 없는 표정을 하고 있는 연우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제 잘 들어갔어?”

“그럼요. 바로 집 앞까지 데려다주셔 놓고.”

연우의 말에 예준이 ‘그렇네.’ 하며 바보 같은 대답을 했다. 하지만 기분이 좋은지 연신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아침부터 내내 대표이사를 안줏거리 삼아 만담을 나누던 직원들도 예준의 미소에 곧 관심을 그에게 돌렸다.

“캡틴,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그래 보이나요?”

“예.”

예준의 미소에 뺨이 발그레해진 은비는 괜히 목을 흠흠, 하고 가다듬었다. 미소천사라 불리는 예준의 별명이 새삼 가슴으로 확 와 닿는 순간이었다.

연우는 그런 은비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대표이사의 취임식 때문에 일렬종대로 서 있는 직원들은 저마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머리를 매만졌다. 그리고 그 틈에서 가만히 자리에 서 있던 연우는 고개를 들고 화분을 가져다 나르는 직원들을 보았다.

“뭐야. 대표이사님이 특별히 주문하신 백합 어디 갔어?”

“곧 도착한다는 연락 받았습니다.”

바쁘게 화분들을 나르는 직원들의 대화를 듣던 연우는 꽃다발 하나 정도는 제가 들기 위해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직원들이 취임식 준비를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와중에 여러 화분들 사이에서 화사하게 장식이 되어 놓여 있는 백합을 향해 다가간 연우는 그것을 품 가득 안아 들었다. 가득히 제 품을 채운 꽃잎으로 앞이 잘 보이지 않아 간신히 시야를 넓히고 길을 찾았다.

그런데, 품 안에 들어와 있는 백합을 보니 생각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다시 떠올랐다. 지난 2년 동안 그와 관련된 사소한 것들이 자꾸 자신의 기억을 반추시켰다. 생각하고 싶지 않은 제 머리에 반하는 일이었다.

어느새 취임식이 시작된 것인지 바쁘게 지나다니는 직원들의 발소리가 잦아들고 있었다. 서둘러 조용해진 로비를 통과해 행사장으로 향한 연우는 슬며시 행사장 문을 열다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대표이사의 훈화말씀이 길어질수록 직원 여러분들이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저는 이쯤에서 끝내겠습니다.”

날카롭고도 잔인하도록 검붉은 저 눈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런 꿈까지 꾸었다. 독점적이었고 미치도록 격렬했으며 입술을 잡아 뜯듯 물어 삼키는 그의 자비 없는 소유욕에 숨을 헐떡거렸었다. 미쳐 버릴 만큼 뜨거운 그의 품 안에서 사경을 헤매듯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그와 나누는 사랑에 대한 응당 받는 보상과 같은 것이었다.

연우는 뒷걸음질 쳤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표이사 최하경입니다.”

백합을 있는 힘껏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등을 돌려 달아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