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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연우는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는 하경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때마침 저를 주방장이 찾는다는 은비의 말에 그대로 걸음을 돌려 주방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는 문 뒤에 몸을 숨기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경과 다시 쉽게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제가 잘못이었다. 생각해 보니 만날 일은 얼마든지 차고도 넘쳤다. 언제든 로비에서 마주쳐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또 이렇게 하경이 레스토랑을 찾는다면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는 건 무리였다.

“연우 씨.”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에 놀라 고개를 든 연우는 눈앞에 선 예준을 발견했다. 빈 잔을 잔뜩 든 예준은 연우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왜 그래? 아직도 아파?”

“아, 아니에요. 잠깐 생각 좀 하느라.”

“생각?”

“아, 잔 이리 주세요.”

연우는 예준에게서 잔을 받아 들고 다시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바라보고 섰던 예준도 곧 걸음을 돌려 주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주방을 빠져나온 예준은 직원들이 두 손을 모은 채 바라보고 있는 하경을 바라봤다.

젊은 대표이사, 확실히 눈길이 갈 만했다. 여직원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눈동자는 확실히 언뜻 보면 검다 못해 붉어 보이기까지 했다. 눈만큼이나 날렵한 인상의 코가 눈에 확 들어왔다. 그리고 예사롭지 않아 보이는 입술선이 그 아래로 곱게 자리하고 있었다.

입술 끝을 누가 올려놓은 것마냥 위로 올라 있는 것이 확실히 눈이 가긴 했다. 그 입술선이 더 날카로워 보이기도 하면서 오히려 어떻게 보면 부드럽게 보이기도 하고. 어떻게 보아도 평범한 인상은 결단코 아니었다.

예준은 자신이 그를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하경이 자신에게로 걸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였다.

저에게로 가까이 다가온 하경이 가만히 자신의 가슴께에 매달려 있는 명찰을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정예준 캡틴.”

예준은 그의 부름에 고개를 숙였다.

“잘해 봅시다.”

간략하지만 힘이 들어간 그의 말에 예준이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보다 키도 반 뼘 정도 더 컸다. 자신도 작은 키가 아닌데 그는 강해 보이는 몸만큼이나 키도 큰 듯했다.

예준은 자신을 지나쳐 가는 하경을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다. 고개를 들어 옆을 보니 여직원들이 여전히 두 손을 모은 채 자신과 하경의 흔적이 남겨진 그 자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일들 합시다.”

예준의 눈치 아닌 눈치에 직원들은 그제야 제자리로 아쉬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예준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전히 연우는 보이지 않았다.


예준은 호텔 앞에서 추운 몸을 비비며 아직 나오지 않은 연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오늘이었다. 연우와 저녁 식사를 같이 하기로 한 날.

녹색 머플러를 칭칭 감고서 핸드백을 쥐고 나온 연우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예준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곧 화색이 돌며 자신에게 눈인사를 하는 예준이 보였다.

“춥지? 뭐 먹고 싶어? 너 먹고 싶은 거 먹으러 가자.”

“음. 기름진 거 먹으러 갈까요? 알리오 올리오?”

“좋아.”

그녀와 함께라면 뭔들 좋지 않으리. 예준은 웃으며 연우의 제안에 긍정했다. 의미 없이 흔들거리는 연우의 손을 잡고 싶었지만 예준은 그저 가만히 흔들리는 손을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레스토랑에 자리 잡을 때까지도 예준의 눈은 연우에게만 향해 있었다.

얌전히 자리에 앉는 조심스럽지만 우아하고 단정한 몸가짐, 긴 머리를 귀 뒤로 넘길 때마다 느껴지는 여성스러움, 오목조목 자신을 바라보는 눈과 작지만 봉긋하게 자리에 안착해 있는 입술까지. 예준은 어느 것 하나 눈을 뗄 수 없었다.

“알리오 올리오 하나랑, 선배.”

“아,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연우는 기분이 좋은 듯 미소를 띠면서 작은 잔에 담겨진 물을 예준에게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이렇게 선배랑 둘이 밥 먹는 거.”

“그러게. 그동안 바빠서 이렇게 둘이 밥 먹을 시간도 없었네.”

오래 지나지 않아 먹음직스러운 파스타가 두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예준은 포크를 들지도 못하고 가만히 제 앞에 앉은 연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시 곁에 놓인 찬물을 한 잔 들이켰다. 오늘은 꼭 하고 싶었다. 이 말을.

“연우야.”

“네.”

연우는 차근차근 파스타를 포크로 돌돌 말아 입 안으로 집어넣으며 대답했다. 예준은 속이 타는 듯 다시 한 번 냉수를 힐끔거렸지만 물을 마시지는 않았다. 연우는 그의 말을 기다리며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고요하고 차분한, 연인들이 들을 법한 노래가 레스토랑 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예준은 들고 있던 포크를 테이블 위로 내려놓으며 좀 더 뜸 들이기를 택한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 연우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 목소리가 조금은 떨고 있었다.

“연우야.”

“네, 선배. 저 듣고 있어요.”

“우리 만난 지 2년 정도 됐나? 네가 입사한 게 2년 전쯤이니까.”

정예준. 그는 연우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호텔에 들어왔을 때, 가장 처음 본 사람이었다.

“그러네요. 우리 벌써 2년이나 알고 지냈어요.”

싱긋 웃는 그 미소가 예준의 눈에는 더할 나위 없이 참 예뻤다.

“그래, 어느새 2년이나 지났네…….”

네가 입사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고부터인 것 같아. 나 너를…… 좋아해.

그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하려다 말고 입을 닫았다. 이 말을 하면 그녀가 자신에게서 멀어질까 봐 그는 선뜻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연연우. 너를 정말 좋아한다.

그는 내뱉지도 못할 말을 삼키며 한숨을 쉬었다.

연우의 손에 들려 있던 포크가 말없이 테이블로 내려갔다. 연우의 미동 없는 눈동자에 예준이 마른침을 삼켜 넘겼다. 손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먹자. 맛있겠다.”

“선배 괜찮아요?”

“응? 아, 어, 그럼.”

예준은 다시 파스타를 맛있게 먹기 시작하는 연우를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는 연우는 그렇게 또 한 번 자신에게서 한 뼘이 멀어진 기분이었다.

예준은 식기 시작하는 자신의 파스타를 내려다보며 식욕 없는 침을 삼켰다. 그런 그를 보며 연우가 활짝 웃었다.


* * *



월요일 아침 일찍 출근한 연우와 마주친 예준은 난감한 듯한 표정으로 머리를 매만지다 말고 그녀를 보았다. 벌써 마음속으로는 수백 번 고백한 자신의 여자에게 마음속이 아닌 진심으로 고백할 또 한 번의 기회를 놓쳤다.

“캡틴.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그래.”

연우에게 다가서기 위해 한 걸음을 더 옮기던 예준이 등 뒤에서 들리는 미희의 목소리에 다시 제자리로 발을 옮겨 놓았다.

“출근하셨어요? 캡틴.”

“미희 씨, 대경그룹 VIP 예약손님 맞을 준비는 다 된 거야?”

“예. 예약된 고급 재료들은 이제 곧 도착할 거고 VIP 손님께서 아침 일찍 한 번 더 연락 주셨고요.”

두 사람은 바쁘게 말들을 주고받으며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섰다. 예준이 문득 뒤를 돌았을 땐 이미 연우는 자리에서 사라진 후였다.


바쁘게 오전이 지나갔다. 그리고 더 바쁘게 오후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연우는 앞에 놓인 음식들을 손님 테이블로 가져가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여러 귀빈들과 함께 자리한 VIP 손님을 위해 최고급 요리들이 테이블에 올랐다. 연우는 자리에 착석하기 시작한 그들을 보며 숨을 들이켰다. VIP 손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귀빈 중에는 하경도 있었다.

첫 번째 와인을 지배인이 따른 후, 와인 잔이 비기를 기다린 직원들은 서로 나서서 그들의 비워진 와인 잔에 와인을 따르고, 한눈에 보아도 비싸 보이는 최고급 음식들을 차례차례 테이블로 옮기기 시작했다.

연우는 그들을 힐끔거리면서도 최대한 멀어지려 애쓰며 다른 손님 테이블로 다가갔다. 직원들의 관심은 온통 그들에게 쏠려 있었지만 이내 곧 다시 바빠지기 시작하며 자연스레 직원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바쁘게 발을 움직이며 접시를 제 몸처럼 들고 다니던 예준은 지나가는 연우와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 지나쳤다.

하경의 등 뒤, 손님 테이블에 있던 연우는 또렷이 들리는 하경의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긴장으로 어깨가 굳었다. 가볍게 웃는 그의 익숙하고도 낯익은 웃음소리가 사정없이 제 귀를 파고들었다.

“최 대표 덕분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먹어 보고 영광입니다.”

“별말씀을요.”

연우는 답답한 가슴을 움켜쥐고 싶어 하는 손을 억지로 놀려 눈앞에 있는 빈 잔에 물을 채웠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접시가 깨지는 경박스럽고 찢어질 듯한 굉음에 고개를 번쩍 든 것은 연우뿐만이 아니었다. 곳곳에 서 있던 직원들의 눈이 단박에 연우에게로 꽂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연우의 등 뒤에 있는 남자에게로 꽂혔다. 하경의 옆자리에 앉은 귀빈 중 한 명이 접시를 깨트린 것이었다.

직원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순간 가까이로 다가오기 위해 발을 움직였고, 바로 등 뒤에 서 있는 연우는 자신을 보며 어서 가서 해결하라는 예준의 지시에 무겁게 내려앉은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곧 등을 돌려 손님에게로, 하경의 옆자리로 다가갔다.

“손님,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십니까?”

연우는 직원들을 향해 어서 새 접시를 가져오라는 신호를 보내고 다시 한 번 손님에게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흠. 괜찮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쏟아질 듯 내리쬐는 하경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새 접시를 돌려받은 VIP 손님의 괜찮다는 웃음으로 다시 레스토랑 내의 손님들과 직원들은 자신의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연우는 다시, 자신을 찾는 손님들의 부름에 응답하기 위해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그때마다 저에게 달라붙는 시선이 느껴졌다. 하경이 귀빈들과 웃으며 대화를 하면서도 시선은 자신에게 두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긴장과 함께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직원을 부르는 신호에 고개를 든 연우가 본능적으로 손님 테이블로 다가갔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부른 손님이 누군지.

“……필요한 것 있으십니까?”

“우리 레스토랑에 이렇게 친절한 직원이 있는 줄 몰랐군요.”

“…….”

“인상적이네요.”

“……감사합니다.”

연우는 하경의 눈을 보았던 시선을 아래로 숙이며 천천히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다시 그에게서 멀어졌다.

갑자기 어깨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손님들과 직원들의 북적거리는 흔적들을 차단하듯 문을 닫은 연우는 그대로 제 캐비닛으로 다가와 딱딱한 캐비닛에 힘없이 머리를 박았다.

긴장이 한꺼번에 풀리며 어깨가 사정없이 아파 왔다. 피곤으로 눈이 저절로 감겼다.


* * *



연우는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제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요?”

“대표이사님께서 연우 씨를 찾으신다고요. 그 자리에 내가 대신 갔었어야 했는데. 나도 불려 가서 직접 그 입으로 칭찬 듣고 싶다.”

“뭔가 잘못 안 거 아니에요?”

“대표이사님 비서가 방금 직접 와서 말하고 갔어요.”

우두망찰 서 있는 연우에게로 가까이 다가온 예준이 웃으며 그녀를 토닥이듯 말했다.

“VIP 손님 접대가 만만치 않다는 거 잘 알잖아. 오늘 잘했어, 연우 씨. 칭찬 들을 만해. 다녀와.”

연우는 손님이 마시다 남긴 물 잔을 집어 들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예준이 그녀의 모습에 희미하게 웃었다.

미희와 은비는 제가 다 긴장이 된다는 둥 가슴을 부여잡고 발을 동동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우는 무거운 걸음으로 레스토랑을 등지고 나와 엘리베이터로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