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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같이 그대와 3화




“자, 소화제!”

“소통과 화합이 제일이다! 신인개발팀 아자!”

돼지 껍데기가 익어 가는 철판 위로 잔에서 흘러나온 알코올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크으으, 술이 쓰다. 글라스에 담긴 소주를 원 샷 한 혜연의 입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과장님, 여기 안주요! 아, 하세요!”

신인개발팀의 비타민 같은 막내이자 혜연을 롤모델로 생각하는 상미가 잘 익은 돼지 껍데기를 그녀의 입에 가져다 댔다.

그녀가 입을 벌려 껍데기를 받아먹자 상미의 눈이 마치 새끼에게 모이를 주는 어미의 것처럼 반짝거렸다.

“맛있네! 우리 막내도 얼른 드세요!”

오물오물 돼지껍데기를 먹은 그녀가 상미의 앞 접시에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얹어 줬다.

“어어, 과장님 또 상미만 챙기시는 거예요? 저도 상미랑 입사 동긴데…….”

“과장님! 저도 주세요, 저도!”

그녀의 행동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진원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뿐인가. 진원의 옆자리에 앉은 박 대리 역시 제 접시를 들이밀며 덧붙였다. 별것도 아니건만 매 회식마다 반복된 팀원들의 행동에 그녀가 픽 웃으며 진원과 박 대리, 남 대리의 앞 접시에도 똑같이 고기를 놓아 주었다.

“자자, 저 똑같이 놓아 드렸으니까 이제 마음껏 드세요! 오늘은 제가 쏩니다!”

그녀의 말과 함께 팀원들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팀원들의 환호에 그녀가 손사래를 치며 팀원들 잠재웠다.

“진짜 오늘 PT 준비하느라 꼬박 두 달을 고생하셨는데, 오늘 만큼은 배 터지게 드시고 들어가셔서 편안히 주무세요!”

“과장님 잘 먹겠습니다!”

“과장님 사랑합니다!”

그녀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팀원들의 젓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녀도 부지런히 젓가락을 놀렸다.

“과장님, 한 잔 받으세요.”

맞은편에 앉은 남 대리가 초록 병을 들어보이자 그녀가 제 빈 잔을 잡았다.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과장님. 한 달 뒤에 반드시 승진하실 겁니다.”

“전 괜찮아요. 괜히 저 때문에 여러분이 더 고생하시니까…….”

“이런 게 무슨 고생이에요.”

“맞아요! 과장님하고 일해서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다른 부서에서 저희 얼마나 부러워하는데요!”

자신들을 먼저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팀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남 대리의 말을 거들었다.

“과장님 저희는 정말 좋으니까 진짜 이대로 쭉 같이 가요.”

“맞아요! 과장님 절대 저희 버리지 마세요!”

“자, 그럼 이쯤에서 다 같이 건배할까요?”

남 대리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남 대리가 목을 가다듬고 우렁차게 외쳤다.

“신인개발팀 아자!”

“아자!”

“아자아자!”

남 대리의 선창을 따라 그녀를 포함한 팀원들 모두 목청 높여 따라했다.

“캬아, 술 맛 좋다!”

“오오! 대리님 원 샷!”

“대리님 짱!”

가득 채워졌던 술잔이 빈 잔으로 바뀌고 신인개발팀 팀원들의 웃음소리가 점차 커져갔다.

“다음은 과장님 차례!”

“오오, 과장님! 과장님!”

“사랑해요 과장님!”

“당신 없인 못살아!”

점점 더해 가는 취기만큼 팀원들의 목소리 역시 점점 높아지며 이미 가게 내부를 가득 채운 소음들에 녹아들었다.



* * *



“으으…….”

침대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에 혜연이 새하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못가 그녀가 급히 침대에서 내려와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우욱, 우웩, 웩.”

변기 커버를 치켜든 그녀가 그대로 변기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마치 어제 먹은 걸 복기라도 시켜 주듯 총천연색의 것이 변기에 쏟아졌다.

“으아…….”

온갖 걸 쏟아 내느라 힘이 빠진 몸을 추스른 그녀가 변기 커버를 닫은 뒤, 변기 레버를 꾹 눌렀다. 쏴아아. 물 먹은 솜처럼 축 처진 몸을 이끌고 샤워 부스에 들어가 온수를 틀자 부스스한 머리 위로 증기가 솟아올랐다. 몇 분간 꼼짝없이 물을 맞던 그녀는 몸에 쫙 달라붙다 못해 늘어진 옷을 벗고 본격적으로 씻기 시작했다.

“아, 개운해.”

여느 술 먹은 다음 날과 같이 샤워로 아침을 연 그녀가 수건을 잡은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털어 냈다.

“먹을 건 당연히 없겠고…….”

쓰린 속을 달래기 위해 부엌으로 향하던 그녀가 어제 아침에 봤던 냉장고 안을 떠올리고 방향을 틀어 거실로 향했다. 거실 소파에 늘어지게 기대앉은 그녀가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그리곤 소파 한쪽에 널브러진 제 핸드백을 열어 휴대폰을 꺼냈다.

“뭔 연락이 이렇게 많이 왔……. 맞다! 전화!”

별 생각 없이 휴대폰을 보던 그녀가 노란 메시지의 알림 개수를 의아한 눈으로 보다 문득 생각난 어제 저녁 일에 서둘러 메시지를 눌렀다.



<페이스똑 해요>

<응답 없음>

<페이스똑 해요>

<응답 없음>

<보이스똑 해요>

<응답 없음>

<혜연아, 어디니? 집에 들어왔니?>

<혜연아, 무슨 일 있니?>

<혜연아? 혜연아?>



“오 마이 갓.”

‘사랑하는 아빠’로부터 도착한 알림 무려 50개에 그녀가 전화를 걸려다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이 아침 8시니까 거기는 새벽 2시쯤 되겠네. 전화를 걸려던 손을 물리고 죄송하다는 뜻이 담긴 이모티콘을 화면 가득 채웠다.

한창 메시지를 보내던 그녀가 인터폰에서 나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지?”

그것도 아침 댓바람부터. 의아함이 담긴 눈으로 빨간 불이 반짝이는 버튼을 눌렀다. 경비실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잠깐 내려오셔야 할 것 같은데요.

“무슨 일이신데요?”

주차 문젠가? 경비원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를 안 쓴 지 거의 한 달은 넘은 것 같은데…….

-일단 내려와 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도통 무슨 일인지 얘기는 하지 않는 경비원에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어젯밤 소파에 벗어 둔 롱 패딩을 입었다.

“역시 사길 잘했어.”

길이가 종아리까지 내려와 저의 몸을 폭 숨기듯 감싸 주는 롱 패딩에 만족스런 웃음을 짓고 모자도 단단히 눌러썼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내가 어제 무슨 실수라도 했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던 그녀가 딱히 이렇다 할 일이 없었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그럼, 뭔 일이지? 실수가 없었다는 걸 알기에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안녕하세요.”

휑하니 부는 찬바람에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그녀가 마치 고슴도치처럼 몸을 한껏 움츠리곤 경비실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에요?”

“아니, 그게…….”

그녀의 물음에 두 명의 경비원들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무슨 큰일이에요?”

“그렇게 큰 건 아니고……. 901호 자전거가 도난을 당해서…….”

“네? 도난이요?”

놀란 듯 토끼 눈을 뜨며 말하는 그녀에 경비원들이 난처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침에 순찰 도는데 자전거 보관소에 끊어진 자물쇠가 있어서 CCTV를 돌려보니까 어떤 사람이 자물쇠를 끊고 가져갔더라고요.”

상황 설명을 한 경비원이 모니터에 CCTV를 재생시켰다. 모니터에 경비원의 말대로 검은 후드를 뒤집어 쓴 남자가 제 자전거를 타고 유유히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가는 모습이 재생되었다. CCTV 속 너무나 여유 넘치게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남자의 뒷모습에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거 백만 원도 넘는건데…….”

하도 어이가 없는 상황에 그녀의 입에서 자동으로 말이 새어 나왔다. 그 말에 CCTV를 재생시킨 경비원이 놀란 듯 그녀를 올려다봤다.

“네?”

“백…… 백만 원이요?”

옆에 서 있던 경비원 역시 그 말을 들었는지 깜짝 놀라며 그녀에게 되물었다. 경비원 김씨가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는 입을 억지로 다물며 중얼댔다.

“진짜 백만 원이에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쳐다보는 경비원에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CCTV영상 복사해서 드릴 테니까 경찰에 신고 접수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경비원의 말에 꾸벅 인사를 한 그녀는 CCTV 복사본을 손에 쥐고 나서야 경비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아……. 아침부터 이게 뭔 일이야.”

곧장 파출소로 가라는 경비원의 말을 들으며 그녀는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파출소로 향했다.

“수고하세요.”



결국 아파트 단지 밖에 위치한 파출소에 가 직접 신고 접수까지 한 그녀는 두 시간 만에 집에 돌아올 수 있었다.

“으아, 진짜 요즘 일진이 왜 이렇게 사납지?”

집에 들어오자마자 거실 소파에 대자로 뻗어 누운 그녀의 입에서 넋두리가 흘러나왔다.



-자, 그래서 임영신 씨는 올해 29살. 바로 아홉수가 꼈다 이 말이죠!



미처 끄지 못하고 나간 TV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혜연은 고개를 돌려 화면을 쳐다봤다. TV에선 새해를 맞이해 무속인이 스타들의 운세를 풀이하는 코너가 재방송 중이었다. 평소 점이나 운세를 믿지 않는 그녀가 TV를 끄려 리모컨을 찾는데 순간, 무속인의 말이 그녀를 사로잡았다.



-이때는 뭘 해도 안 돼요. 연애도 안 되고, 일도 안 풀리고…….



마치 제 이야기를 읊는 듯 딱딱 들어맞는 역술가의 말에 그녀가 리모컨을 찾던 손을 멈췄다.



-자, 이렇게 뭘 해도 안 되는 아홉수일 때는 말이죠. 매사에 조심해야 됩니다. 아홉수는 일단 기본적으로…….



“정말 아홉수가 존재하는 건가.”

그렇게 무속인의 말이 모두 끝나고 나서야 시선을 돌린 그녀가 멍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하루하루가 이렇게 고난의 연속일 리 없어. 벌써 연초부터 크고 작은 사건이 수두룩했다. 정말 입 밖에도 꺼내고 싶지 않지만 상견례 날 문자 한 통 달랑 남기고 잠수 탄 승찬부터, 미끄러진 승진과 자전거까지.

아무리 호사다마라지만 그래도 이건 진짜 아니다.

“진짜 굿이라도 해 봐?”

민무늬의 하얀 천장을 바라보던 그녀가 방금 전 무속인의 말을 되뇌었다.



* * *



-웃기고 있네.

“아니야. 내가 어제 TV에서 봤는데…….”

-그거 다 미신이야.

“근데 아홉수가 아니면 이 모든 상황이 설명이 안 돼.”

-그래서 뭐 굿하면 좋아진대? 물 떠놓고 매일 밤 빌라고 하진 않든?

휴대폰 너머로 나리의 킬킬대며 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리야, 나 지금 진지하거든?”

-자꾸 헛소리하지 말고 일주일 뒤 밤 11시 도착이니까 마중이나 나와.

더 이상 제 말은 듣지 않겠다는 듯 단숨에 잘라낸 나리가 화제를 바꿨다.

“알겠어. 두바이는 좋아?”

-어차피 잠깐 경유하는 건데, 뭐…….

“나가서 구경도 하고 그러지 그래.”

-피곤해 그냥 잘래. 나중에 같이 한 번 오자. 여기 호텔은 좋아.

“그래. 근데 너 우리 집으로 바로 와도 돼? 그래도 어머님한테 들려야 되는 거 아냐?”

걱정이 듬뿍 담긴 혜연의 목소리에 나리의 웃음소리가 휴대폰 밖으로 울려 퍼졌다.

-뭣하러. 갔다가 영영 집 밖으로 못 나오라고?

“아냐, 지난번에 어머님 생신 때 가서 뵈니까 많이 누그러지신 것 같았어.”

-그럴 리가 없어. 괜히 안 되는 머리로 지어내지 마라. 골만 아프다.

정곡을 콕 찌르는 나리에 그녀가 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야. 진짜 아버님도 이제는 이해하신다고 하셨어.”

-헹, 됐다. 나 이만 잘게. 끊자.

나리의 말과 함께 통화가 종료되고 그녀가 안타까운 듯 화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부모님 보고 싶어 하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겪는다는 사춘기 시절, 부모님과의 마찰. 나리는 그 마찰을 10년째 겪는 중이었다. 자식과 같은 길을 가고 싶으셨던 부모님과 그 길을 가고 싶지 않았던 친구. 그 당시엔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갈등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았다. 결국 참다못한 나리가 집에서 나온 것이 벌써 5년 전 일이었다.

“기집애. 고집 좀 그만 부리지.”

혜연이 책상 위 모니터 옆에 위치한 액자 속 나리의 얼굴에 손가락을 튕겼다. 액자 속엔 유치원 졸업 가운을 입고 해맑게 웃고 있는 두 꼬마가 자리하고 있었다.



* * *



사무실 안, 점심 후면 밀려드는 식곤증에 잠을 부추기듯 등을 데워 주는 따뜻한 히터 바람까지. 이래저래 사람들의 눈꺼풀이 점차 그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혜연 역시 슬슬 둔해지는 신경과 찌뿌둥해지는 몸에 안 되겠다 싶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자, 간단히 티타임 어때요?”

“그럼, 저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요!”

“저는 카페모카 뜨거운 거요.”

“그럼, 저는…….”

혜연의 박수 소리에 감기던 눈을 크게 뜨며 하나둘 주문을 넣었다. 막내 상미까지 주문을 마치자 그녀가 싱긋 웃으며 외투를 집어 들었다.

“알겠습니다. 다들 회의실로 가 계세요. 금방 배달해 드릴게요!”

그녀의 활기찬 목소리에 다들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티타임. 그녀가 신인개발팀 과장이 된 이후로 만든 일종의 휴식 시간이었다.

어차피 책상에 앉아 있어 봐야 졸음만 밀려오는 터라 다 같이 커피라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금세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했다.

그래서인지 그녀가 과장을 맡은 뒤로 신인개발팀의 기획안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