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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같이 그대와 4화




“엄청 춥네.”

회사 바로 앞 카페에 가기 위해 외투만 입고 나온 혜연이 회사를 나오자마자 느껴진 차디찬 칼바람에 고개를 푹 숙였다. 서둘러 카페로 들어가기 위해 문의 손잡이를 잡아당긴 그녀가 열리지 않는 문에 고개를 들었다.

“아! 오늘 문 안 연다고 하셨는데…….”

분명 어제, 카페 주인에게 직접 들었음에도 잊고 있던 제 자신을 탓한 그녀가 서둘러 몸을 돌렸다.

그 다음으로 가까운 카페가…… 찾았다!

목적지 변경을 하자마자 거의 고개를 숙인 채 직진에 직진을 거듭한 그녀가 눈에 보이는 카페에 서둘러 문손잡이를 잡았다.

순간, 차가운 제 손에 따뜻하고 보드라운 무언가가 덮어졌다. 하지만 곧 손에 찌릿한 정전기가 튀며 따뜻했던 온기가 빠르게 거둬졌다. 그녀가 찌릿한 감각에 손을 쥐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괜찮으세요?”

순식간에 쌀쌀하고 차가웠던 무채색의 겨울 공기가 햇빛을 잔뜩 머금은 화사하고 따사로운 봄의 공기로 뒤바뀌었다. 혜연은 바로 앞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에 두 눈을 깜박였다.

모공 하나, 잡티 하나 없어 보이는 눈같이 깨끗한 피부에 먹물을 머금은 듯 짙게 자리 잡은 반듯한 눈썹, 그 눈썹을 따라 자기주장이 심한 듯 높이 자리 잡은 콧대와 도톰한 입술.

잘 나가는 엔터테인먼트에서 5년을 근무하면서도 보기 드문 수려한 외모. 아니 정확히는 제 이상형에 딱 부합하는 남자의 등장에 그녀가 믿기 힘들다는 듯 제 눈을 비볐다.

다행히 남자는 만화 속 인물은 아니었는지 길쭉한 손가락으로 눈썹을 문지르며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박…….”

“네?”

저도 모르게 속마음을 뱉어 버리자 남자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우뚱했다. 남자는 그 모습조차 아름다웠다.

“괜찮으세요?”

“괜찮을 리가…….”

남자가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웅얼거리는 그녀에 걱정스런 얼굴로 쳐다봤다.

“그럼 어디 불편하세요? 많이 불편하시면 병원에 모셔다 드릴까요?”

진짜, 목소리도 대박이야.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마치 클래식 감상하듯 듣던 그녀가 남자의 말에 정신을 차렸는지 눈에 초점이 또렷해졌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정말 괜찮으세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녀의 대답에 안심이 됐는지 남자의 입꼬리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여름의 햇살을 잔뜩 머금은 포도처럼 싱그러운 미소를 짓는 남자에 그녀의 볼이 발그레했다.

“네. 덕분에 정말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점차 붉어지는 얼굴을 느꼈는지 그녀가 꾸벅 인사를 하곤 황급히 회사를 향해 뛰었다.

“후우, 후우.”

회사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고작 그거 조금 뛰었다고 숨이 찬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에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건지. 쿵쿵쿵. 마치 몸 밖으로 튀어나올 듯 세차게 뛰는 심장 박동에 그녀는 한동안 제 가슴께를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 * *



“안녕하세요!”

헐레벌떡 아파트 단지를 나서던 혜연이 단지 앞에서 비질을 하고 있는 경비원을 보며 꾸벅 인사를 했다. 하지만 바쁜 건 어쩔 수 없는지 인사를 하자마자 서둘러 주차장을 향해 뛰었다.

“사춘기도 아닌데 왜 하필 꿈에!”

어제 카페 앞에서 만난 남자를 종일 생각하던 혜연은 결국 꿈에서까지 그를 보게 됐다. 덕분에 늦잠을 자 차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거의 한 달 동안 방치된 것을 보여 주기라도 하는 양 자동차는 자연의 영향을 고스란히 받은 모습으로 주차되어 있었다.

앞좌석의 문을 열어 차에 오른 그녀가 가방을 조수석에 던지곤 시동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배터리가 방전되진 않았는지 시동이 걸리자 안도의 숨을 내쉬곤 핸들을 잡았다. 빠르게 후진을 해 차를 뺀 그녀가 액셀을 밟으며 아파트 단지를 빠져나갔다. 차에 부착된 시계를 보며 더욱 조급해진 그녀가 핸들을 손톱으로 톡톡 두들겼다.

머피의 법칙은 왜 이럴 때만 나타나는가.

파란불을 보이던 신호는 차가 가기만 하면 빨간불로 바뀌었다. 회사 근처에 도착할 때까지 모든 신호에 걸린 그녀는 이미 지각 확정이었다.

“아, 또!”

바로 코앞이 회산데! 이번에도 제 앞에서 바뀌는 신호에 그녀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운이 없는 거…….”

핸들에 얼굴을 묻다시피 하던 그녀가 곧 바뀔 신호에 고개를 들었다.

“어? 저 남자…….”

바로 제 차 유리창 너머로 할머니를 모시고 가는 사람에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분명, 맞았다. 어젯밤 제 꿈속에 나타나 저를 지각의 길로 인도한 바로 그 남자!

긴 검은색 코트를 걸친 그 남자는 마치 얼마 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의 주인공 같았다.

“번호!”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지나가는 남자의 모습에 마음이 급해진 혜연은 차에서 내리려 문의 손잡이를 잡았다. 하지만 때마침 뒤에서 울리는 커다란 클랙슨 소리에 그녀가 어쩔 수 없이 핸들을 잡았다.

“진짜 바로 눈앞이었는데…….”

결국 회사 주차장으로 들어설 때까지도 연신 백미러를 살펴대던 그녀는 입사 이래로 단 한 번도 한 적 없던 한 시간 지각이라는 신기록을 수립했다.



“우리 SP는 지금보다 더 넓고 견고한 인프라를 구축해 세계 시장에서도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SP엔터의 대회의실, 감색 슈트를 잘 차려입은 하 이사의 당당하고 힘 있는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울렸다.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며 기립 박수를 보냈다. 혜연도 자리에서 일어나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그동안 그가 SP엔터를 위해 고생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는 허리 숙여 인사를 하는 등을 보며 시큰시큰한 코를 매만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제 앞에 다리를 꼬고 앉아 심통이라도 난 사람인 양 뚱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 실장에 남몰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가 개구리의 뚜껑을 열리게 만들었던 그날, 대표실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었다는 걸 마케팅팀의 현 대리의 입에서 들을 수 있었다.



“아니 글쎄, 거기가 어디라고 그런데요?”



세상 듣도 보도 못한 일이라며 현 대리의 수다는 끝없이 이어졌었다.

회의실에서 나가자마자 바로 대표실로 간 개구리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손수 가져다 뒀던 귀한 난 화분을 바닥에 던졌다는 그런 막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아마 두고두고 회자될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과장님?”

“네?”

한창 현 대리의 이야기를 회상하던 그녀가 제 어깨를 툭 건드리는 손길에 뒤를 돌아봤다.

“여기 꽃이요.”

“아, 고마워요.”

남 대리가 잘 포장된 꽃다발을 테이블 아래로 건넸다. 취임식이 끝나 간다는 의미였다.

“그럼 이것으로 하상권 대표님의 취임식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참석해 주신 내, 외빈 여러분께 감사하다는 말씀 전하며…….”

사회자의 말이 끝나자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 움직이기 시작했다. 혜연도 남 대리가 전해 준 꽃다발을 들고 상권에게 다가갔다.

“축하드립니다. 대표님.”

“허허허, 뭘 이런 걸 다 준비하고 그래.”

혜연이 건네는 꽃다발을 받아 든 상권의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대표님.”

“뭘, 또 새삼스레. 나야 항상 나 과장 편인데 몰랐나?”

“하하하,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권의 넉살스런 농담에 혜연도 만면에 미소를 띄우며 대꾸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앞으로 많이 도와주게나.”

상권이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하자 그녀가 알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다. 혜연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상권이 빙그레 웃었다.

“이번 주 안으로 회식 잡자고.”

“네, 그때 뵐게요.”

제 말에 짧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그녀를 흐뭇하게 보던 상권이 하나둘 몰려드는 사람들을 맞았다.

“대표님, 축하드립니다.”

“이제 더 바빠지시겠습니다.”

임원급의 사람들이 말을 건네자 그녀가 슬며시 그 무리를 빠져나왔다. 이럴 때 괜히 자리에 있어 봤자 피곤한 일만 생긴다는 걸 혜연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아직도 사람들로 혼잡한 회의실을 둘러보던 그녀가 이미 사무실로 돌아간 팀원들을 따라 사무실로 향했다.

“일찍 들어오셨네요? 같이 점심 식사 하러 안 가셨어요?”

사무실로 들어서자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던 박 대리가 고개를 들었다.

“나중에 따로 회식하자고 하시네요.”

“저희도요?”

“그럼요. 이번 주 안으로 회식 잡으라고 하셨습니다.”

“오오, 그럼 한우?”

“하 이사님, 아니 하 대표님은 항상 한우집이잖아.”

“그럼 저희 소고기 먹는 거예요?”

상미의 물음에 박 대리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박 대리의 말에 상권과 회식을 해 본 적이 없는 상미의 눈이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자자, 일단 진정들 하시고 지금은 구내식당으로 내려갑시다.”

하나같이 들떠있는 팀원들을 귀엽다는 눈으로 쳐다보던 그녀가 슬슬 울리는 배꼽시계에 먼저 입을 움직였다. 그러자 파티션 위로 하나, 둘 머리가 올라오며 팀원들이 일어났다. 그녀가 팀원들과 섞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 * *



“맥주 두 캔, 맛나 오징어 한 봉지 총 6900원입니다.”

“여기요.”

바코드를 찍고 검정 비닐봉지에 물건을 담은 아르바이트생이 혜연이 내민 카드를 받아 들었다. 띠링. 카드를 긁자마자 결제가 완료됐다는 문자가 휴대폰으로 수신됐다.

“여기, 카드…….”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카드와 검정 비닐봉지를 내미는 아르바이트생에 인사를 건네며 편의점을 나왔다. 아파트 정문 앞 편의점은 혼자 사는 자주 이용하는 곳 중 하나였다.

“안녕하세요.”

여느 때와 같이 아파트 현관 앞에 위치한 경비실의 경비원을 보고 인사를 한 혜연은 털레털레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으아! 오늘도 수고했다!”

센서 등이 환하게 비추는 현관에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선 그녀가 그대로 소파에 뻗었다. 덕분에 구김살 하나 없던 코트 자락이 소파와 그녀의 몸에 의해 눌려 구겨지고 있었다.

“아, 씻기 귀찮다. 그냥 잘까.”

비닐봉지와 한쪽 어깨에 메고 있던 가방을 놓지도 않은 채 소파에 엎어진 혜연이 중얼거렸다.

“내 이럴 줄 알았다. 나혜연.”

“엄마야!”

아직 불을 켜지 않아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그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뭘 그렇게 놀래. 귀신이라도 봤어?”

“야, 윤나리!”

어두컴컴했던 거실에 환하게 불이 밝혀지고 의문의 목소리의 주인공이 얼굴을 드러내자 혜연이 한달음에 달려 나리를 끌어안았다.

“이거 환영 인사가 너무 격한데? 이 언니가 많이 보고 싶었구나?”

“언니는 무슨……. 나보다 생일도 느리면서.”

나리를 꼭 끌어안고 있던 그녀가 농담에 푸스스 웃으며 끌어안은 손에 힘을 줬다.

“이거 꿈 아니지?”

“왜 꿈 같아?”

“아니, 맞다! 근데 너 어떻게 왔어? 분명 엊그제 통화할 때는 두바이였는데…….”

나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고 취조하듯 묻자 그녀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내가 그때 말했잖아. 언제고 별로면 비행기 탈거라고.”

“그럼 미리 문자라도 보냈어야지! 어떻게 혼자서 올 생각을 해!”

“됐어. 짐도 별로 없는데 회사원을 마음대로 오라 가라 할 순 없지. 암, 그렇고 말고.”

“어쨌든 잘 왔어! 진짜 보고 싶었어!”

그녀가 다시 나리를 끌어안자 나리 또한 그녀의 등을 두들겨 주었다. 그러다 별안간 그녀를 떼어 놓고는 주변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영문을 모르는 그녀가 의아한 눈으로 나리를 쳐다봤다.

“어째, 살이 좀 빠진 것 같다?”

“어? 글쎄…….”

“아냐, 빠진 것 같은데?”

눈을 세모꼴을 하고 그녀를 쳐다보던 나리가 갑자기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부엌의 불을 켜고 냉장고를 벌컥 열었다.

“쯔쯧, 내 이럴 줄 알았어.”

“응?”

“이거 봐, 이거 봐. 어떻게 냉장고 안에 김치밖에 없냐? 아줌마, 아저씨가 이 광경을 보셨어야 하는데…….”

냉장고를 살펴보는 나리를 따라 냉장고를 흘깃 본 혜연은 발동을 거는 잔소리를 피하려 얼른 냉장고 문을 닫았다.

“너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나가서 먹을까? 아니면 시켜 먹을까? 아! 너 그때 새로 나온 치킨 먹고 싶다했지?”

“불리하니까 말 돌리는 것 좀 봐.”

“에헤, 무슨 그런 말씀을! 사랑하는 소꿉친구에게 어서 빨리 음식을 대접하고 싶은 친구의 따뜻한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일 뿐.”

그녀의 말에 나리가 피식 웃으며 머리에 약하게 딱밤을 놓았다. 아! 갑작스런 나리의 행동에 벙찐 그녀가 곧 거실에서 들리는 나리의 목소리에 제 이마를 문지르며 거실로 향했다. 거실엔 나리가 소파에 널브러져 있는 비닐봉지에서 오징어와 맥주 두 캔을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고 있었다.

“자, 그럼 어디 안주도 있겠다. 술판을 벌려 볼까?”

나리의 말과 함께 그녀도 피식 웃으며 휴대폰으로 치킨집 전화번호를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