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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같이 그대와 2화





“안녕하십니까. 신인개발팀 나혜연 과장입니다.”

사람들로 가득 찬 회의실 안.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와 함께 스크린 앞으로 혜연이 걸어 들어왔다. 움직일 때마다 굵은 웨이브가 진갈색 머리카락이 가슴께에서 찰랑이고 PT를 위해 차려 입은 세미정장이 그녀의 곡선을 한 층 더 부각시켰다.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으나 그녀는 당황한 기색이 전혀 없이 되레 여유로워 보이는 미소를 입가에 걸었다.

“그럼, 2018년 선보일 LIKEY 프로젝트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겠습니다.”

당당한 목소리와 함께 환했던 회의실이 순식간에 어둠에 휩싸이고 순백의 하얀 스크린 위로 영상이 띄워졌다.

곧 혜연의 발표가 시작되었고 장내의 임원진들은 차분하면서도 또렷한 그녀의 목소리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준비한 자료가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그녀는 최선을 다해 임원진들을 설득시켰고 스크린은 어느새 마지막 장을 띄우고 있었다.

“이상 LIKEY 프로젝트의 프레젠테이션을 마칩니다.”

짝짝짝짝. 혜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회의실 끝 쪽에 앉은 신인개발팀 팀원들 손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 소리에 그녀가 저도 모르게 팀원들이 앉은 쪽을 보며 싱긋 웃었다.

“질의응답 시간 갖겠습니다.”

제가 생각해도 완벽했던 PT에 한껏 자신감이 붙은 그녀가 장내를 둘러봤다. 회의실 제일 가운데 앉은 대표를 중심으로 오른쪽 하 이사 세력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다만 대표의 왼쪽에 앉은 김 실장은 똥이라도 씹은 양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사람들의 표정을 차례로 살펴본 후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려는 찰나,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하이 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 좋은데 신인보다 HEAVEN을 먼저 밀어야 되는 거 아닌가?”

김 실장의 갑작스런 말에 장내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혜연은 예상치 못한 공격에 당황했지만 예의 비즈니스적인 미소를 지었다.

“김 실장님 말씀도 맞지만 일단…….”

“HEAVEN도 아직 뜨지 못했는데, 다른 신인을 또 데뷔시킨다니. 안 그래요? 대표님?”

“어? 어……. 뭐, 그거야 그렇긴 하지.”

눈에 무슨 짓을 한 건지. 관자놀이까지 닿을 듯 아이라인을 그린 눈으로 쳐다보며 말하는 김 실장에 대표가 얼결에 동의하듯 얼버무렸다. 대표의 말과 김 실장의 말에 순식간에 장내 분위기가 호떡 뒤집듯 반전됐다. 그 분위기를 느낀 듯 혜연과 신인개발팀 팀원들의 얼굴에 위기감이 서렸다.

확실히 아내의 재력만 보고 결혼한 사람답게 대표는 김 실장의 말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정도였다.

정말 이대로 무산되는 거야?

프레젠테이션 때와는 사뭇 달라진 임원진들의 표정에 그녀의 머릿속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동안 이 프로젝트를 준비하느라 밤낮없이 고생한 팀원들의 얼굴이 하나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HEAVEN이야 이미 밀어 주지 않았습니까. 벌써 그 애들 앞으로 들어간 돈이 얼만 줄 알고 그런 얘기를 하십니까?”

그때 묵직한 음성의 하 이사의 목소리가 회의실에 울려 퍼졌다.

“자그마치 5년 동안 HEAVEN한테 들어간 돈만 20억이 넘습니다. 다들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 이사의 말에 임원들이 대표의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부터 5년 전, SP엔터에서 론칭한 글로벌 그룹 HEAVEN은 세계로 나아가겠다던 거창한 기획 의도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 중이었다. 외국인 리더의 해외 도피부터 온갖 악재란 악재는 다 끼어 세계가 아닌 점점 땅을 뚫고 들어가는 행보를 보이는 SP엔터의 골칫덩이였다.

“그런 그룹에 또 돈을 투자하자고요? 제정신이 아니군.”

“뭐라고요? 그럼 제가 미쳤다는 소리예요?”

상권의 말에 김 실장이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 이사도 진아의 행동에 대응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일어나면 뭐요! 정말 해보자는 거예요?”

“김 실장!”

자신이 상사임에도 불구하고 되레 뻔뻔하게 나오는 진아의 모습에 상권 또한 화가 났는지 소리쳤다. 그리고 순식간에 회의실 안엔 싸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어쨌든, 전 반대예요! HEAVEN 아직 죽지 않았어요. 이번에 반드시 뜰 거예요.”

“하! 뜨긴……. 개 풀 뜯어먹는 소리 하네.”

“뭐라고요?”

“다들 그만!”

하 이사와 김 실장의 계속되는 설전에 대표가 안 되겠다는 듯 책상을 내리쳤다. 그러자 장내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대표를 향했다.

“그럼, 투표로 정합시다.”

“좋아요! 투표하시죠.”

“그럽시다. 누가 겁날 줄 알고.”

대표의 말에 하 이사와 김 실장이 서로를 죽일 듯 노려봤다.

“그럼 간편하게 거수로 정합시다.”

대표의 말에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심해졌다. 상권의 편을 들자니 김 실장과 대표의 눈치가 보이고 그렇다고 진아의 편을 들자니 하 이사의 눈치가 보이는 게 현실이었다.

“그럼 LIKEY 프로젝트 찬성하시는 분은 손 들어 주세요.”

대표의 말과 함께 상권을 필두로 혜연과 하 이사 쪽의 사람들이 잇따라 손을 들었다. 혜연은 손을 들면서 빠르게 수를 파악했다. 그러다 김 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 역시 수를 헤아리는 듯 눈이 빠르게 돌아갔다.

진짜 언젠가 저 개구리 튀겨버리고 만다.

혜연이 마치 불결한 것을 본 사람처럼 고개를 홱 돌렸다.

“하나, 둘, 셋……. 열둘. 찬성은 열두 명. 그럼 자연히 반대도 열두 명이군.”

대표의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되는 거야? 모두들 하 이사와 김 실장의 눈치를 살폈다. 혜연 또한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하 이사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저보단 발언권이 센 하 이사가 이 사태를 마무리 지어 주길 바랐다.

“자, 모두들 조용히 하시고, 그렇다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말을 꺼낸 대표 역시 고심이 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섣불리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때 하 이사가 먼저 손을 들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일단 보류하기로 하죠.”

“보류?”

“앞으로 딱 한 달 뒤, 이 날짜에 다시 회의를 열도록 합시다.”

“그래서?”

“김 실장은 HEAVEN을 밀어주는 게 맞다고 했으니 HEAVEN의 최종 기획안을 가져오고, 나 과장은 LIKEY 프로젝트의 최종 기획안을 가져와 두 기획안을 경합하기로 하죠. 경합에서 이긴 쪽 먼저 진행되는 겁니다. 다들 어떠십니까.”

“흐음, 괜찮은 생각인데……. 두 사람 생각은 어때요?”

하 이사의 절충안에 대표가 제 턱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회의실 안에 있던 사람들 또한 나쁘지 않은 제안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혜연도 고개를 끄덕여 제 의사를 표시했다.

한 달 뒤라면 좀 더 확실한 기획안을 뽑을 수 있으리라. 그녀는 자신했다.

“그럼, 나 과장은 동의했고 김 실장은 어때요. 혹시 자신 없으면 이쯤에서…….”

“누가요? 해요. 하자고요!”

하 이사의 도발적인 발언에 발끈한 김 실장이 하이톤의 목소리로 답했다. 그 대답에 상권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남 잘되는 꼴 못 보더니. 어디 한 달 동안 스트레스나 왕창 받아 봐라.

“자, 그럼 두 사람 모두 동의했으니 오늘 회의는 이쯤에서 파하시죠.”

“그래, 그러자고.”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하 이사의 인사를 끝으로 회의실의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속속히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그 때문인지 탁했던 내부의 공기가 점차 맑아졌다. 사람들이 빠져나가는 사이로 하 이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오늘 수고 많았어. 나 과장.”

“아닙니다. 오늘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나 과장이 잘해서 그런 거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하 이사의 칭찬이 가득한 말에 그녀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상권이 그녀의 편에 섰기에 그나마 기회가 한 번 더 주어졌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예산은 넉넉하게 잡아 줄 테니 한 번만 더 수고하게. 이번 기획안만 통과되면 승진도 꼭 될 걸세.”

“네, 감사합니다.”

불과 두 시간 전, 어깨를 두드렸던 것과 동일하게 그녀를 토닥인 하 이사가 회의실을 나갔다.

그렇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나서야 그녀는 흘러내리듯 의자에 앉았다. 거의 두 시간 가까이를 힐을 신고 서 있었더니 담이라도 왔는지 온몸이 욱신거렸다.

“아우…….”

“과장님, 괜찮으세요?”

“네, 뭐……. 아, 오늘 진짜 수고 많았어요. 상미 씨.”

“아니에요. 과장님이 더 고생하셨죠.”

“다른 팀원들은요?”

“방금 전에 남 대리님이 데리고 가셨어요.”

“아아, 상미 씨도 먼저 가 봐요. 여긴 내가 치우고 갈게요.”

“아니에요! 제가 얼른 가지고 갈게요! 과장님은 쉬고 계세요!”

“아니, 그럴 필요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먼저 책상에 놓인 자료들을 차곡차곡 정리하는 상미에 그녀도 의자에서 일어났다.

혜연이 상미의 반대편 책상에 놓인 자료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때 회의실 문 쪽에서 거슬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 아직 안 가고 있었네?”

그렇게 간 게 이상하다 했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혜연이 김 실장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묵묵히 자료를 포갰다. 그런 행동을 봤음에도 진아는 굳이 그녀의 앞에 와 섰다. 그리곤 비아냥거리며 입을 열었다.

“자긴 참 좋겠어. 하 이사가 그렇게 챙겨 주고.”

“그러게요. 얼마나 감사한지. 정말 다행인거 있죠. 하 이사님께서 챙겨 주셔서.”

“그래봤자 이사 주제에…….”

하 이사를 깎아내려 말하는 김 실장에 혜연의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게 진짜 해보자는 거야?

혜연이 자료를 정리하던 손을 멈추곤 고개를 들었다. 아까 상권에게 당한 화가 아직도 빠져나가지 못했는지 김 실장의 얼굴은 여전히 붉으락푸르락했다.

가뜩이나 짜증나 죽겠는데, 이거 어떻게 혈압 좀 올려 줘?

제 PT를 망친 장본인에게 빅 엿을 선물하고 싶은 혜연이 작정한 듯 부러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실장님 아직 못 들으셨나봐요?”

“내가 뭘 못 들어?”

“하 이사님 곧 공동대표 취임하시는데…….”

“뭐? 그게 무슨 말이야?”

제 말에 김 실장이 다그치듯 묻자 정말 몰랐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어쩜, 정말 모르셨구나.”

“그게 무슨 소리냐고!”

“이미 알 사람은 다 알아요. 하 이사님 이번 주에 공동대표로 취임하시는 거.”

“……사실이야?”

“그럼요, 사실이죠. 김 실장님 정말 모르셨어요? 저는 대표님께서 이미 다 말씀해 주신 줄 알았는데……. 형부시잖아요.”

“…….”

“어떡해……. 제가 괜히 말을 꺼냈나 봐요. 그렇죠?”

“…….”

“근데 왜 말씀 안 해 주셨지? 임원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인데…….”

마무리로 말끝을 흐리며 안 됐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열이 제대로 받았는지 김 실장의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그리곤 그녀에게 이렇다 하는 말도 없이 빠르게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아마, 곧장 대표실로 가겠지.

“쌤통이다.”

“과장님……. 지금 김 실장님한테…….”

김 실장이 나간 문을 쳐다보며 고소하다는 히죽 웃던 그녀가 저를 부르는 상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상미가 저를 오묘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좀 심했나? 그래도 실장님인데……. 상미의 표정에 혜연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아, 그게…….”

“과장님 나이스 샷!”

“어?”

“진짜 잘하셨어요! 제 속이 다 후련해요!”

“…….”

“아까 PT때부터 입을 꿰매 주고……. 앗!”

거침없이 말을 하던 상미가 혜연의 얼굴을 보곤 손으로 제 입을 급히 막았다.

“하하하하하.”

“과장님……?”

상미의 말에 그녀가 제 배를 잡으며 깔깔댔다. 어쩜 저와 생각이 일치하는지. 같은 팀이라 그런가? 상미가 저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어 보이는 그녀에 제 입을 막았던 손을 내리며 따라 웃었다. 조용하던 빈 회의실에서 두 여자의 밝은 웃음소리가 새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