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운명같이 그대와 1화





강남 모 처, 상견례 하기 좋은 식당으로 소문난 그곳은 새해가 시작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다.

잠깐 유리문 안을 들여다보던 혜연은 다른 테이블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며 부모님을 모시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예약하신 분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김승찬이요.”

혜연이 남자 친구의 이름을 대자 금색 명찰을 단 남자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녀와 그녀의 부모님을 안내했다.

“이쪽입니다.”

지배인이 미닫이문으로 닫힌 방을 가리키며 말한 뒤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곤 사라졌다.

“들어가세요.”

혜연이 조심히 문을 열었다. 그러자 방 안에 앉아 있던 중년의 부부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세 사람을 반겼다.

“어서 오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혜연의 아버지인 나한수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풍채가 좋은 승찬의 아버지, 재호가 호탕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두 사람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옆에선 여옥과 수임이 인사 중이었다.

“일전에 통화했을 때 목소리가 고우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실제로 뵈니 얼굴이 더 고우시네요.”

“과찬이십니다. 훨씬 미인이세요.”

“호호호, 감사합니다.”

“혜연이 통해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혜연이한테 그렇게 잘해 주셨다고요.”

“오호호, 혜연이가 워낙 예쁘잖아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정도 인사가 마무리되자 모두들 자리에 앉았다. 혜연도 제 부모님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자 승찬의 어머니인 여옥이 예뻐 죽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첫 만남부터 혜연을 마음에 들어 했다.

물론 그녀의 눈에 띄는 외모도 마음에 들어 했지만 SP엔터테인먼트에 근무하는 것을 매우 흡족하게 여겼다.

일전에 승찬의 부탁으로 여옥이 좋아하는 배우의 사인을 받아 준 이후론 마치 그녀를 제 딸인 양 사람들 앞에서 자랑을 늘어놓곤 했다.

그녀는 그런 반응이 좀 부담스럽긴 했지만 미리 고부간의 갈등을 없애자는 차원에서 그러려니 여옥의 기를 살려 주곤 했다.

“어떻게 오시는 길은 편안하셨습니까?”

“네, 좋았습니다.”

“한국은 오랜만이시라고 들었습니다.”

“혜연이가 20살 때쯤, 떠났으니 거의 10년만이네요.”

“정말 대단하십니다. 국내도 아니고 해외에서 그렇게 봉사를 하시다니…….”

“별말씀을요. 아주 재밌게 생활하고 있습니다.”

한수의 말에 재호가 대단하다며 박수를 쳤다.

현재 한수와 수임은 아프리카 구호 단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평생 봉사와 뗄 수 없는 삶을 사신 분들답게 혜연이 수능을 치르자마자 아프리카로 떠났다.

주변에선 하나 밖에 없는 딸을 방치한다며 따가운 시선도 보냈지만 한국을 떠난 10년 전부터 어제까지도 매일 밤 11시면 전화를 거는 다정한 부모였다.

다행이다. 이 상태로만 가면 완벽해.

예상했던 것보다 더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혜연이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재호와 여옥의 옆 빈자리에 눈이 갔다.

“죄송한데, 잠시 승찬 씨한테 전화 좀 하고 올게요.”

혜연이 휴대폰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여옥이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부터 제 아들을 챙기는 그녀의 행동이 마음에 든 눈치였다.

방을 나와 한적한 복도로 걸어간 혜연이 벽에 기대 승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뚜르르. 계속해서 신호음이 갔지만 이상하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가 부재중으로 넘어가는 전화에 짜증이 한껏 묻어난 손짓으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신호음만 들릴 뿐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순간 혜연은 위험한 상상을 했다.

“설마, 사고라도 난 건…….”

하지만 그 상상도 잠시 혜연의 휴대폰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그녀는 곧바로 휴대폰의 화면을 쳐다봤다. 다행히 문자는 승찬에게서 온 것이었다.

순간 안도감을 느낀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가 보낸 문자를 읽었다. 그 순간 안도감은 어마어마한 분노로 뒤바뀌었다.



<나…… 못 가. 기다리지 마. 미안해.>



***



“어머님!”

“이제 그만 찾아오렴. 나도 승찬이 어디 있는지 몰라. 얘.”

퀭한 얼굴의 혜연을 보는 여옥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상견례 후, 하루도 빠짐없이 제집을 찾아오는 혜연에 여옥도 슬슬 짜증이 나고 있었다.

올 거면 좀 잘 차려입고 오기라도 하든지.

벌써 한 달째, 초췌한 몰골로 찾아오는 혜연 때문에 아파트 내 소문이 돌고 있었다. 그 이유로 요즘 제대로 된 외출은 꿈도 못 꾸는 여옥이었다.

“이제 그만 와도 돼. 이쯤하면 너도 고생 많았어. 언제까지 승찬이만 쫓아다닐래. 너도 네 인생 살렴. 솔직히 식장에 들어갔던 것도 아니니…….”

여옥의 말에 혜연이 왈칵 눈물을 쏟아 냈다.

승찬보다 저를 챙겨줄 때는 언제고 이제와 안면몰수하고 내치는 여옥의 행동에 억울함과 허탈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승찬을 한 번은 만나고 싶었다. 도대체 왜 그랬느냐 묻고 싶었다.

“어머님 제발…….”

“내일부턴 문도 안 열어 줄 거야. 그만 오렴.”

고상한 목소리로 최후의 통첩을 날린 여옥이 소파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쿵하고 닫히는 문소리가 마치 승찬과 연결된 마지막 끈을 끊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흡, 흐흑, 흑…….”

눈물이 가득 찬 눈에 거실이 비춰졌다. 환상처럼 하하호호 웃던 저와 승찬, 여옥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때만 해도 이렇게 끝이 날 줄은 몰랐었다.

방울지어 떨어지는 눈물을 옷소매로 쓱 닦자 신기루처럼 세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휑한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 모든 게 끝이었다.



* * *



“나 과장님, PT자료 회의실에 가져다 놓을게요.”

“그래 주면 나야 고맙죠.”

혜연이 파티션 위로 손만 올린 채 말했다. 모니터 속으로 빨려 들어갈 기세로 집중하던 그녀가 드디어 끝을 냈는지 기지개를 펴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으아, 다 했다!”

“과장님, 다 된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파티션 바로 건너에 앉아 있던 남 대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가 그렇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엔터키를 눌렀다. 그리곤 컴퓨터 본체에서 USB를 빼내 남 대리를 향해 흔들었다.

“과장님 그럼 이제 실장님으로 승진하시는 거예요?”

“그거야 PT 끝나 봐야 알죠.”

“PT야 형식적인 건데요. 뭐. 미리 축하드려요!”

“축하드려요, 과장님!”

“저도, 축하드려요!”

“어허, 다들 괜히 김칫국부터 마시지 말자고요.”

하나둘 축하 인사를 하는 팀원들에 혜연이 나름 근엄하다고 생각하는 표정을 지으며 USB를 들고 일어났다.

“20분 뒤에 회의실로 오세요.”

“네! 과장님 파이팅!”

“과장님 응원합니다!”

“PT대박!”

사무실을 나서는 혜연의 뒤로 팀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원을 뒤로 하고 먼저 사무실을 나온 그녀는 곧장 화장실로 직행했다. 주변을 의식하며 화장실로 들어온 그녀가 화장실 안을 돌며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점심시간이 끝나가는 시간이라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 그녀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승진이다! 승진, 승진! 드디어 승진…….”

아이처럼 좋아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수그러들었다. 분명 기분은 좋은데 어딘지 씁쓸하기도, 울컥하기도 했다.

사실 어처구니없는 이별을 당하고 전보다 배는 일에 매달렸다. 주변에서 저를 향해 쑥덕이는 소리들 때문에라도 더 열심히 일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 결과 이번 승진 대상자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그녀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 거울 속 저를 쳐다봤다.

“바라던 승진이잖아. 나혜연, 정신 똑바로 차리고 PT 잘해야…….”

하지만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화장실의 문이 열렸다.

“자기, 여기 있었구나?”

급하게 화장실을 나가려던 그녀가 하이 톤의 째지는 목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아…….

거울에 비친 상대의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릿속에 비상 경고음이 울렸다.

마케팅 부서 김진아 실장.

타칭, 개구리. 개구리를 닮기도 했지만 행색이 말 그대로 ‘개 구리다’라는 뜻에서 붙여진 별명. 말로 사람 속 박박 긁는 것이 취미요, 사사건건 그녀가 하는 일에 태클을 거는 기피 대상 1호였다.

그럼에도 회사 대표의 처제라는 이유로 입사 3년 만에 실장으로 초고속 승진한, 혈연주의의 표본.

김 실장의 출현에 경고등이 반짝였다. 작정하고 붙는다면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15분 뒤 중요한 PT를 앞두고 있었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옛 선조의 말을 되새기며 빠르게 화장실을 나서려 했지만 저를 붙잡는 하이 톤의 목소리에 다시 뒤를 돌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다들 자기가 승진할거라 그러더라?”

“뭐, 뚜껑 열어 봐야 알죠.”

혜연의 말에 어울리지도 않는 빨간 립스틱을 바르던 김 실장의 입꼬리가 비틀어 올라갔다.

“하긴, 그래. 주변 반응이야, 뭐.”

“…….”

“그 사람들이 승진시켜 주는 것도 아니고. 임원들 눈은 또 다르니까.”

“아, 네.”

1분도 채 되지 않는 대화였음에도 좋았던 기분을 망치는 김 실장에 혜연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러다 순간 거울에 비치는 제 얼굴을 확인한 그녀가 얼른 표정을 풀었다.

나혜연 마인드 컨트롤. 요가는 이럴 때 쓰라고 배운 거야.

그녀가 지난 1년 동안 배운 요가의 호흡법을 생각하며 깊이 숨을 들이켰다 내뱉었다.

“자기, 정정당당히 알지?”

하지만 1년간 거금을 들여 배운 호흡법 역시 개구리의 화법 앞에선 하등 쓸모없었다.



“오셨어요?”

“네. 준비는 다 됐어요?”

“그럼요, 퍼펙트 합니다!”

상미의 말에 혜연이 회의실을 쭉 둘러봤다. 책상 위, 자로 잰 듯 반듯하게 놓인 자료에 그녀의 입꼬리가 만족스러운 듯 위로 올라갔다.

“수고했어요. 오늘 PT끝나면 빵빵하게 쏠게요.”

“정말요? 나 과장님 파이팅!”

그녀의 말에 상미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애교스럽게 들어보였다. 상미의 상큼한 행동에 방금 전까지 다운됐던 기분이 한층 좋아졌다.

“어서 오세요. 이사님.”

“오, 나 과장 이제 나 실장이라 해야 되나?”

“이사님도 참……. 저야말로 대표님이라고 불러야 되는 거 아니에요?”

“허허, 하여튼 나 과장한텐 못 당한다니까.”

혜연의 센스 있는 말에 하 이사가 호쾌하게 웃었다.

“이번 나 과장 프로젝트 기대하는 사람들 많은 거 알지?”

“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혜연의 똑 부러진 대답에 하 이사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잘해 보라고.”

그녀가 처음 입사하던 시절, 지금의 하상권 이사가 신인개발팀 실장으로 있었다. 그 당시엔 SP엔터가 업계에서 주목받는 곳이 아니라 어려운 시기였다. 그 때문인지 그 시기를 같이 넘기며 온 사람들의 끈끈한 정이 아직도 지속되었다. 하 이사와 그녀 역시 그때의 전우애로 똘똘 뭉쳐진 사이였다.

“감사합니다.”

하 이사의 말에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양 그녀의 가슴 한편에서 자신감이 솟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