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17화

저렙 필드





능력 [정보저장] 2단계 [기억검색].

기억 속에서 원하는 정보를 떠올리는 능력은 암기에 특화돼 있었고, 인우는 수능에서 원하는 점수대의 답안지를 작성할 수 있었다.

학업에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인우는 적당한 서울 소재의 대학에 들어갔고, 전공은 회계과였다.

헌터나 던전을 동경해 서포터 학원에 다니려는 남자들이 많아 대학에는 여학생이 다수를 차지했고, 회계과의 남녀 성비 불균형은 심각했다.

남자 수가 현저히 적다 보니 똘똘 뭉치는 경향이 있었고, 과대가 주선한 모임은 필수 참여였다.

강제성이 있냐고?

있다.

참여하지 않으면, 자꾸 들러붙어 못살게 굴었다.



“이번에는 갈 거지!”

“네가 와야 한다고!”

“야, 너 안 오면 알지!”

“너 때문에 우리까지 선배한테 한 소리 듣는다고!”

끄덕끄덕.

MT, OT 모두 불참인 나였지만, 과모임은 여러 차례 나가 줘야 했다.



대학모임이라 해봐야 별것은 없다.

정보의 교환, 선배의 조언, 그리고 친목을 핑계로 마시고… 마시고… 또 마시고…….

물도 5리터쯤 일시에 마시면 죽을 수도 있는데, 모임에서는 치사량 간당간당하게 술을 마시는 부류가 있었다.

나야 [활성]의 회복력이 있어 극독을 마셔도 버티지만, 이들은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운 줄도 모르고 치사량에 아슬아슬하게 잘도 마셔댔다.

‘죽지 않은 게 용하네.’

죽기 전에 기절부터 하겠지만.



특별히 흥미가 있는 수업이 없어 대학에서 요구한 최소학점을 채울 목적으로 수업을 신청했다.

수업은 최대한 몰아 듣는 쪽이었고, 대학은 주 3일만 다녔다.

하지만 그마저도 혼자 책을 보는 쪽을 선호해 수업은 자주 빼먹었다.

대학은 학비를 내고 졸업장을 받는 곳.

동기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학교 수업보다는 자격증 공부를 중시했다.

일찍부터 자기 공부를 시작하라는 선배들의 조언까지 더해졌다.

“학교 수업보다 스펙! 공인 회계사 자격증. 세무사 자격증. 전산 회계. 너희들이 선택할 수 있는 건 많아. 교수님 믿고 따라가다 망하지 말고, 일찍 일찍 자기 공부 시작하라고!”



대학을 다니며 활동 범위가 넓어져 던전 3개를 더 발견해 매월 10억 이상의 수입이 발생했고, 그런 나에게 있어 취업은 그다지 와 닿는 얘기는 아니었다.

‘그냥, 던전 부산물이나 팔며 황금 백수로 지낼까?’

돈이 많다는 걸 자랑한 적은 없다.

그래도 은연중에 드러나는 게 있었다.

많은 여성이 접근해 왔다.

후배, 선배, 동기, 친구의 친구까지.

나도 여자가 싫지는 않다.

단지 나에게 접근하는 여성들은 속과 겉이 달랐다.

겉으론 내숭. 뒤에서는 호박씨.

탁월한 감각 덕에 모를 수가 없었다.

그녀들이 나를 돈 많고 잘생긴 호구로 여긴다는 것을.

압도적으로 예쁜 여인이 있었다면 그런 사소한 것쯤은 눈 감아 줄 수도 있었다.

문제는 내 여동생 인서보다 예쁜 여자가 없었다는 거다.



연애는 접었다.

좋은 여성을 만날 때까지.

하지만 영원히 접은 건 아니다.

정말 마음마저 예쁜 반려가 나타날 때까지만 참는 거다.

그 말을 들은 가족들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들, 걱정하지 마. 요즘은 인공지능이 이상형을 찾아준대.”

“엄마, 오빠는 이상형을 찾는 것보다 이상형으로 로봇을 주문 제작해서 선물하는 게 빠를지도 몰라. 지금의 기술 발전으로 볼 때 10년만 지나면 인간형 로봇도 나온데.”

“인우야! 우리 우크라이나 여행 한 번 갈까?”

“…….”



* * *



그렇게 어영부영 하루하루를 보내며 통장에 돈이 300억이 넘어 하루 이자 수입만 100만 원이 넘어갈 무렵, 영장이 날아왔다.

육군이었다.

대정전 이후 개인 화기와 박격포 정도는 재현해 냈다.

공군과 해군도 있지만, 군부는 공군과 해군 운영에 필요한 상위 마석이 부족해 육군 위주로 재편됐다.

보충대로 간 나는 대학생 신분에서 장정이란 신분으로 강등됐다.



20명이 나란히 앉은 장정들에게 조교가 외쳤다.

“옷 갈아입습니다. 실시!”

“복명복창합니다. 실시!”

“실시!”

“필수품을 제외한 물건은 전부 상자에 넣습니다. 실시!”

“실시!”

사유재산은 인정되지 않는 듯 장정들은 팬티까지 통일해 입고는 가져온 의복과 기타 물품을 상자에 넣어 집으로 보내야 했다.

300억 자산이 무용지물이 됐다.

‘망할 군대!’



장정의 신분으로 일주일간 보충대에서 대기하며 가방, 전투복, 활동복, 전투화, 세면도구, 각종 보급품을 받았다.

받은 보급품을 확인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매일 수차례 확인시킨다.

지능39. 탁월한 기억력을 갖춘 나에게 있어서는 고문이 따로 없었다.



밤에는 2인 1조로 불침번을 섰다.

불침번의 의미를 모르는지, 제대로 2시간을 서는 녀석은 없었다.

눈을 감고 경계라니, 나보다 뛰어난 감각을 지닌 것도 아니면서.

‘뭐… 누가 쳐들어오는 것도 아니니까.’

경계를 서는 녀석이나 세우는 녀석이나,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



20명의 장정은 생활관에서 할 일이 없었다.

가끔 불려가 짐을 나르는 정도.

지루함의 극치였다.

할 일 없는 장정들은 수다쟁이가 됐다.

대화의 시작은 언제나…….

“몇 살이세요?”

형이시네요. 동생이네. 동갑이네.

나이가 참 중요한 나라다.

그렇게 대화의 물꼬를 튼다.

“뭐하다 오셨어요?”

“나? 취직해서 돈 좀 벌다 왔지.”

“저는 대학 휴학하고 왔어요.”

어차피 여러 훈련소로 뿔뿔이 흩어질 운명이라 허풍이 조금씩 섞인다.

“고등학교 때부터 일해서 지금은 연봉 1억이 넘어.”

“지금 다니는 대학이 마음에 안 들어서요. 하버드대 편입 준비 중이에요.”

“고려대 연구소에서 일하는데, 집안에 별들을 합치면 10개쯤 돼. 근데 집에서는 최전방 갔다 오래.”

진실을 알 수 없는 사정들이 마구 쏟아진다.

거기다 다양한 주제가 섞여 들어가니 장정들의 수다는 끝이 없었다.

게임, 여자, 연예인, 헌터!

그러다 인서 이야기도 가끔 나왔다.

“고등부 전사 차인서가 레벨 40에 근접했대!”

“에이… 그건 말도 안 돼!”

인서가 언제 40레벨이 될지 토론하는 장정들도 있었다.

‘유명하네…….’

나 또한 헌터 오덕 이상의 지식을 쌓은 몸.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참기로 했다.



지루한 대기를 마치고 훈련소가 배정됐다.

중간에 선발된 특기병도 많았다.

특별한 특기를 주장하지 않은 나는 시스템 뺑뺑이로 강원도 소재의 훈련소에 배치됐다.

‘호랑이 부대?’

최전방 확정인 훈련소다.

함께 훈련소를 배정받은 장정들은 울상을 지었다.

“호랑이 훈련소라니…….”

“죽었다.”

훈련이 힘들기로 이름난 부대 같았다.



장정들은 버스에 실려 훈련소까지 배달됐다.

운전병은 떠나갈 장정들에게 친절한 편이었다.

“여기 정말 힘든가요?”

“요? 앞으로 ‘다’와 ‘가’만 쓰는 게 좋을 텐데. 뭐 됐고.”

버스 운전병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야. 시간 금방 가니 힘내라고.”

장정들은 버스 운전병의 위로에서 직감했다.

‘죽었다…….’



버스에서 내리자 조교들이 장정들에게 담배, 라이터, 간식 등의 자진 제출을 요구했다.

숨길 정도로 간 큰 녀석은 없었다.



소대와 분대가 정해지고, 생활관을 배정받았다.

우린 장정에서 훈련병으로 신분이 상승했다.

난 14번 훈련병이 됐고, 군기를 잡기 위한 조교의 정신 공격이 시작되었다.

사소한 것에 꼬투리를 잡아 갈구기 시작했다.

그렇게 훈련병은 조교만 보면 긴장하며 전전긍긍하는 졸보로 새롭게 태어났다.



군기를 잡은 후, 대표 훈련병을 뽑아야 했다.

시작은 아주 민주적이었다.

하고 싶은 사람을 세워 투표하는 식이다.

하지만 우리 분대는 달랐다.



“20번 훈련병!”

“예! 20번 훈련병 남주한!”

“20번 훈련병이 분대장을 맡습니다.”

조교는 20번 훈련병을 지명해 분대장으로 임명했다.

“예!”

“지켜보고 있습니다, 20번 훈련병!”

“예!”

조교는 몇 가지 주의를 주고는 나갔다.

분대장 훈련병이 되려고 벼르고 있던 녀석들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 20번 훈련병을 쳐다봤다.

‘분대장 전화 포상이…….’

‘외박 1일 포상이…….’

하지만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24살 유도 선수 출신, 남주한.

대다수가 20살에서 21살인 군대에서 나이로도 형님이었고, 강자였다.

“이렇게 된 거 함께 잘해보자. 사고만 치지 말고, 적당히 중간만 하자고.”

여유 있고 패기 있는 형님이었다.



생활관에서 식당으로 이동할 때는 제식 훈련을 겸했다.

조교가 식당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열과 오를 잘 맞춰 이동하는지 채점하는 식이다.

점수는 분대별로 주어졌고, 중간에 발목 잡는 분대원이 있는 경우 조교가 생활관으로 되돌려 보냈다.

식사 순번이 한참이나 밀린 분대는 굶주린 배를 달래며 인내심을 기르는 한편, 다른 분대의 놀림감이 됐다.

우린 운이 좋았다.

20번 훈련병 남주한은 통솔력이 높았다.

우리 분대는 제식을 무리 없이 소화했다.



그리고 본격적인 훈련에 앞서 체력 테스트가 진행되었다.

첫 번째, 팔굽혀펴기!

2인 1조로, 한 명이 측정하고 한 명이 시험을 치른다.

나와 같은 조가 된 13번 훈련병.

남주한과 같은 최고령인 24살.

하지만 같은 24살이지만, 둘은 너무도 달랐다.

패기 넘치는 남주한과 달리 13번 훈련병 유연학은 허약했고, 사람 좋은 인상의 소유자였다.

‘따 당하기 쉽게 생겼네.’

“잘 부탁합니다.”

“네, 저도 잘 부탁합니다.”

13번 훈련병 유연학이 안경을 고쳐 쓰고는 정중한 인사를 건네 왔다.

조교가 없을 때는 서로 터놓고 지내는 훈련병이 많았는데, 13번 훈련병은 누구에게도 말을 놓지 않았다.

예의가 있어 보이는 한편, 조금 고지식해 보였다.



주관은 중대장이었고, 보조로 조교 둘이 있었다.

“시간은 2분. 여기 조교가 시범을 보일 것이다.”

조교가 바른 자세와 잘못된 자세의 시범을 보였다.

“이렇게 중간까지 내려간 경우는 숫자에 넣지 않는다.”



특급 72개.

1급 64개.

2급 56개.

3급 48개.

4급 39개.



“우리는 3급 미만은 불합격으로 본다. 불합격자는 매주 있는 체력 단련에 필참이다.”

3급부터는 체력 훈련에서 열외다.



“1조 시작!”

팔굽혀펴기 측정이 시작됐다.

나는 2조였고, 13번 훈련병의 횟수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열…….”

열이 지나자, 13번 훈련병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설마… 벌써?’

빨개진 얼굴로 13번 훈련병의 몸은 올라오지 못했고, 팔에 힘이 빠지며 엎어졌다.

‘헐…….’

충격적인 체력이다.

13번 훈련병은 13개가 한계였다.

‘심각하네.’

조교가 내게 물어왔다.

“13번 훈련병!”

“13번 훈련병 13개!”

중대장과 조교들도 어이없어했다.

약골은 13번뿐만이 아니었지만, 그는 약골 중에서도 특출났다.



남주한도 유연학을 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분대 단위로 평가되는 훈련소다.

체력적으로 심각한 유연학은 분대의 커다란 짐이었다.

남주한은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꼈다.

‘저런 녀석을 데리고 분대장이라니… 망할!’



팔굽혀펴기 48개 이상인 통과자는 30%밖에 없었다.

조금 놀랍다.

‘생각보다 체력들이 약하네.’

나는 평균 수치를 생각해 적당히 50개만 할 생각이었다.

‘천천히 하자, 천천히. 속도 조절이 포인트야!’



“2조 시작!”

나와 남주한 그리고 2조가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유도 선수 출신 조교는 훈련병들을 눈여겨봤다.

파박! 파박! 파박!

남주한은 전혀 힘든 기색 없이 빠르게 내려갔다 올라왔다.

초속 일회를 넘어선 빠른 스피드.

“오오오!”

1조 훈련병들은 감탄하며 별명을 붙였다.

“완전 터미네이터!”

“기계 인간!”

처음에는 남주한과 비견되던 녀석들도 30초 만에 페이스 오버로 체력을 다해 후들거렸다.

남주한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 * *



유도선수 출신 조교는 흐뭇한 표정으로 남주한을 바라봤다.

자신의 후임으로 점찍은 녀석이었다.

‘운동 좀 해본 녀석들이라도 운동에 일생을 바친 사람과 같을 수는 없지.’

남주한 외에는 특별히 뛰어나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특급 정도 되는 아마추어는 몇 보이네.’

그런데 주변을 보다 이상한 녀석이 시선을 끌었다.

조금 전의 심각하게 걱정스러운 훈련병과 같은 조를 이룬 14번 훈련병.

‘뭐야, 저놈?’

선수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

녀석은 여력을 충분히 남긴 채 아주 장난을 치고 있었다.

“14번 훈련병, 장난합니까? 제대로 합니다. 실시!”



움찔.

인우는 조금 놀라며 페이스를 올려야 했다.



‘아니, 조교를 물로 보는 거야?’

조교는 인우의 근육 상태를 보며 여력을 남기고 있다는 걸 알았다.

“14번 훈련병! 지금 조교가 우습습니까? 다시 측정합니다.”

인우는 기록이 리셋 됐다.

‘에휴… 너무 느리게 해서 그런가?’

인우는 재측정에 들어가며 속도를 조금 올렸다.

‘60개만 하자. 2급 정도면 뭐라 안 하겠지.’

하지만 속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조교가 보고 있는 것은 인우의 근육.

인우의 몸이 말해주고 있었다. 충분한 여력이 남아있다고.

“14번 훈련병, 10개부터 다시 측정합니다!”

‘또!’



무엇이 불만인지 조교는 인우를 붙잡고 늘어졌다.

“다시 합니다!”

인우는 욕을 삼키며 조금씩 팔굽혀펴기 속도를 높여야 했다.

‘왜 나만 특별대우인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