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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새벽 소년의 전설





인우는 비어있는 카운터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카운터의 상냥한 단발머리 누나가 미소 띤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마석과 가죽, 그리고 장신구를 판매하고 싶습니다.”

“본 잡화점을 이용하시는 건 처음이신가요?”

“네.”

카운터 누나가 반짝이는 눈으로 인우를 바라봤다.

‘짐이 많아. 힘든 기색이 없어. 레벨은 높아 보이는데 젊네……. 조기 졸업자인가? 아니면 동안?’

전사, 마법사, 서포터, 상인, 장인…….

던전과 관련된 온갖 인간군상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특이한 고객이 오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 궁금증이 샘솟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안내인을 붙여 드리겠습니다.”

인우는 안내인이 오는 동안 호기심 가득한 카운터 누나의 부담스런 시선을 감내해야만 했다.



특별한 지명이 없는 관계로 가까이에 있는 안내인이 왔다.

“안내인 제나에요. 잘 부탁해요.”

제나는 가명이었다.

인우는 20대 신입 느낌이 물씬 풍기는 묶은 머리 누나의 안내를 받았다.

그녀를 따라가니, 은행의 입출금기계 같은 것이 잔뜩 늘어선 곳이 나왔다.

잡템의 판매는 자동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헌터 카드, 서포터 카드, 회원 카드, 체크카드 중 하나만 있으면 거래할 수 있어요. 혹시 지금 소지하고 계신 게 없으시다면, 저곳에서 도움을 드리고 있어요.”

왼쪽에 카드 개설 기기가 놓여 있었다.

각종 카드와 임시 헌터증을 발급받는 기계까지.

‘전부 자동이네…….’

“수수료는 저렴한 순으로 헌터 카드, 서포터 카드, 본 잡화점의 회원 카드, 그리고 체크카드와 다른 각종 카드가 되겠어요.”

안내인의 상세한 설명은 고마웠지만, 인우는 선택의 여지없이 수수료가 제일 비싼 체크카드를 사용해야 했다.



이른 오전이라 그런지 사람은 적었고, 줄 설 필요가 없었다.

인우는 먼저 마석 거래를 위해 움직였다.

큰돈이 움직이는 곳이다 보니 서비스가 좋았다.

안내인 제나가 우아한 손길로 기기를 조작했다.

띠! 띠! 띠!



/거래/- /판매/- /마석 조각/

/카드를 넣어주세요/



안내인 제나가 미소를 지으며 인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체크카드를 건네받은 그녀는 카드를 기기에 꽂고는 옆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거래할 마석을 넣어 주세요./



마석 조각의 투입구가 열렸다.

마석 조각 투입구는 옆에 따로 마련돼 있었고, 낮은 위치에 활짝 열린 투입구는 대량의 마석을 쏟아 붓기 쉽게 설계돼 있었다.

“이곳에 거래할 마석을 넣으시면 돼요.”

끄덕!

촤라라락.

장신구 세트를 따로 빼고 배낭 째로 부었다.



/4,327개 마석 조각을 처분하시겠습니까?/

/현재 시세: 5,780원/

/총금액: 2,501만 원/

/수수료 10%: 250만 원/(던전 부산물)

/부가세 20%: 500만 원/(던전 부산물)

/소득세 20%: 500만 원/(던전 부산물)

/총금액: 1,250만 원/



던전 부산물은 사회에 꼭 필요한 자원이다.

거래량이 많거나 길드나 고렙 헌터에게는 세율 혜택이 많았다.

세금은 두세 번 신경 쓸 일 없게 거래 즉시 정산됐다.

50%가 날아갔지만, 만족스러운 금액이었다.

던전에 남은 것들을 생각하면…….

‘돈 걱정은 없겠네.’



마석 조각을 투입구에 쏟아 부을 때부터 주변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안내인 제나는 조금 놀란 눈을 했다.

생각보다 거래량이 많은 것이다.



“어디 길드야?”

“뭐야? 길드가 왜 이곳에서 거래해?”

“어디 길드에서 보낸 친구지?”

“어디 소속이야?”



마석 조각 4,327개. 일개 개인의 거래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길드 단위의 거래지만, 보통 길드는 거래처를 정해두기에 이런 곳에서 거래하지 않았다.

거래를 위해 잡화점을 찾은 헌터와 서포터들이 소란스러워졌다.



/입금: 1,250만 원/

/-확인/ /-취소/



인우는 망설이지 않고 확인을 눌렀다.

빨리 거래를 마치고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인우가 확인을 누르자 안내인 누나가 화들짝 놀랐다.

“저… 헌터 세율이 적용 안 됐는데… 괜찮나요?”

“상관없어요.”

제나는 의문스러운 얼굴을 했다.

거래량이 상당한 사람이다.

보통 사람이 아닌 게 확실하다.

그러니 소속이나 헌터 자격증, 하다못해 레벨 정보만 공개해도 수수료와 세금을 크게 낮출 수 있는데…….

‘길드 혜택이라면 500만 원은 감면 받았을 텐데.’

아까운 공돈이 날아간 것 같아 안타까웠다.



주변이 더욱 소란스러워지기 전에 인우는 자리를 뜨고 싶었다.

“가죽을 거래하고 싶은데요.”

“아, 네! 이쪽으로…….”

제나는 쌓이는 의문을 뒤로하고 표정을 바로 잡고는 프로의 자세로 돌아갔다.



가죽도 마찬가지로 자동거래 기기로 처분했다.



/거래/-/판매/-/일반 코볼트 가죽/

200장.

수수료, 세금, 세금…….

총금액: 500만 원

/-확인/ /-취소/



역시 망설임 없는 확인이다.

인우는 마지막으로 하급 체력의 장신구 1세트를 처분했다.

3층에선 방어구, 무기, 장신구를 주로 거래했고, 그곳에서 감정을 받고 입금을 받을 수 있었다.

목걸이와 팔찌는 수요가 많아 1천 500만 원.

반지와 귀걸이는 500만 원이었다.

합계 4천만 원이지만, 세트로 거래를 하자 5천만 원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이 가격은 매입가였고, 잡화점에서 판매할 때는 매입가보다 40% 비쌌다.



오늘은 적당히 챙겨온 아이템들을 처분해, 1,250(마석)+500(가죽)+2,500(장신구)=4,250만 원을 벌었다.

본래 있던 40만 원과 합쳐 통장 잔액이 4,290만 원이 됐다.

인우는 그 중 3,000만 원을 남기고 1,290만 원을 인출했다.

주변을 보니 안내인에게 봉투나 5만 원권 여러 장을 건네는 게 보였다.

여러모로 안내하느라 지친 제나에게 물어봐야 했다.



“팁은 얼마나 드려야 하죠?”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제나가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다들 주는데… 신경 쓰지 말라니.

‘뭐 먹을까?’라는 물음에 ‘아무거나’라고 답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어쩌지? 필요한 만큼만 빼고 줘야지.’

인우는 봉투 몇 개를 챙겼다.

자투리 돈을 봉투에 넣어서 줬다.

안내인 누나는 프로답게 밝게 웃으며 다소곳하게 봉투를 받고는 인사했다.

“본 잡화점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필요하실 때는 언제든 제나를 불러 주세요.”

“네.”



* * *



그렇게 인우는 첫 거래를 무사히 마쳤다.

한 번의 거래로 거래 방식을 알 수 있었고, 다음에는 사람 없는 조용한 시간 때에 들려 던전에 쌓인 나머지 템을 처분하기로 했다.



고객을 보내고 제나는 기분 좋게 화장실에 들어갔다.

신입이라 해도 감은 좋다.

봉투의 두께가 나쁘지 않았다.

‘가끔 손이 큰 헌터들이 있기 마련이지!’

제나는 내용물을 확인해 보았다.

한 장, 두 장, 세 장…….

290만 원!

‘와와와, 대박!’

인우가 두 뭉치 즉, 1,000만 원을 빼고 남은 돈을 팁으로 건넨 것이다.

이렇게 큰돈을 팁으로 준 이유?

딱히 이유는 없었다.

가진 자와 원하는 자가 종종 다른 게 세상이다.

인우에게 있어 돈이란 필요하면 언제든 벌 수 있는 종이에 불과했고, 딱히 원하는 게 없던 인우는 그저 필요한 만큼만 있어도 충분했다.

‘던전은 널렸고, 돈도 널렸는데 뭐.’



별생각 없이 팁을 건넨 인우와는 달리 받는 제나 입장에선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제나의 월급은 150만 원.

두 달 치 월급을 팁으로 받았지만 조금 놀랐을 뿐,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에 빠졌다.

거액이 움직이는 곳이다 보니 종종 이런 행운이 찾아온다.

하지만 대가 없는 행운 따윈 없었고, 거액을 받고도 입을 잘못 놀린 선배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지워졌다는 소문도 들었다.

‘거액이라 하기에는 작지만, 마냥 무시할 수 있는 액수도 아니야. 이건 경고인 걸까?’

비약이 심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의심스러운 게 한둘이 아니었다.

‘그 정도 물량을 다루는데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어. 다른 곳에서 활동하던 헌터라도 분명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을 텐데.’

대리인?

깊게 알아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의도치 않은 오해로 인해 제나는 인우의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신경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금세 알 수 있었다.



매일 새벽, 사람이 없는 시간 때에 가죽과 마석을 대량으로 팔고 가는 의문의 소년.

그 양은 절대 개인에게서 나올 수 없는 양이었고, 어떤 거대한 조직의 한 축이 확실해 보였다.

인우는 가끔 낮에 제나를 찾아와 아티팩트의 처분을 부탁했고, 그럴 때마다 거액이라 하기에는 작지만 상당한 액수의 팁을 건넸다.

‘생각하지 말자, 제나야! 나랑 다른 세계의 사람이야.’

의문의 소년에게 호기심이 동한 사람들이 유일한 접점을 가진 제나를 찾았지만, 제나는 굳게 입을 다물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실력 있는 헌터들이 미행까지 해보았지만,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했다.

인우의 뛰어난 감각을 속이며 따라붙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최상위 헌터가 분명해!”

“아마 이름 있는 길드 소속일 거야!”

“최상위 길드의 서포터 일지도 모르지.”

“아니… 그 실력으로 서포터는 아닐걸.”



이름, 신분, 소속 모두 베일에 싸인 인우는 잡화점의 전설이 되어갔고, 주로 새벽에 거래하는 인우를 사람들은 ‘새벽 소년’ 이라 불렀다.



* * *



서울 남쪽에 위치한 계획도시 수성은 전사 학교와 마법사 학교가 위치해 있었고, 던전 관련 산업이 발달해 가는 곳이다.

나는 수성에서 잡화점을 이용하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잦은 지진 탓에 8층 높이로 지어진 아파트 단지.

수성 아파트 3단지.



19일간 실종된 아들이 돌아오면 어떤 기분일까?

분명 그동안 걱정으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초췌해진 가족들을 생각하며 급해지는 마음을 다잡았고, 발걸음을 돌려 근처 마트에 들렸다.

마트에서 소고기 2㎏을 샀다.

학교에서는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지, 여동생은 뭐든 잘 먹었다.

여동생 1㎏, 그리고 남은 가족 1㎏.

이것이 우리 가족의 식사량이다.



띠! 띠! 띠! 띠! 띠리링!

전자 도어에 암호를 입력해 문을 열었다.

위잉! 위잉!

어머니는 청소기를 돌리고 있었다.

“다녀… 왔습니다.”

평소와 같은 인사였지만, 오늘은 조금 어색했다.

“어머, 인우 왔네!”

어머니는 변함없이 나를 반겼다.

변한 게 있다면, 생각 이상으로 얼굴이 좋아 보였다.

“고기 사왔구나. 잘 사왔어. 고기는 아무리 많아도 금방 떨어져서 말이야.”

너무 일상적인 반응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학교에서 연락 안 왔어?”

“왔었지. 학교 안 나온다고 묻더라.”

모르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아프다 했어.”

“음… 담임선생님이 뭐라 안 하셔?”

“별말 없던데?”

정말이지, 학생에게 무관심한 걸 미덕으로 아는 담임이다.



저녁에 가족이 모여 단란하게 식사를 했다.

“주말에도 안 왔으면서… 평일에는 왜 와?”

“…….”

여동생 인서는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삐딱하게 나왔다.

“내가 좋아하는 마트 고기 아니잖아. 나 먹는 집 따로 있단 말이야. 그리고 요즘엔 던전 토끼 고기 엄청 맛있단 말이야.”

여동생은 걸신들린 듯 고기를 고속으로 흡입하며 불만을 마구 쏟아냈다.

“인서야, 오빠한테 그러면 못 써. 집에 있을 때라도 편하게 해줘야 자주 오지. 인서가 널 얼마나 기다렸는지 주말에 잠도 안 자고…….”

“엄마! 누가 누굴 기다렸다고 그래!”

인서는 빨개진 얼굴로 극구 부인했다.

“그래… 19일간 잘 있었더냐?”

“아하… 네, 그럭저럭…….”

난 인서를 힐끔거리며 아버지의 물음에 얼버무렸다.

“커험, 그래… 밥 먹고 서재에서 얘기 좀 하자꾸나.”

아버지는 나의 눈짓을 알아차렸다.

인서는 아직 나의 능력을 모른다.

비밀을 숨기며 산다는 것은 그만큼 답답한 일이라는 걸 알기에 우린 구태여 인서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집에 서재가 있었던가?

방 3개에 화장실 둘로 알고 있는데…….

“앗! 미안. 네 방을 아빠 서재로 꾸몄지 뭐니.”

어머니가 해맑게 말씀해주셨다.

난 허망한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봤다.

“크험.”

아버지는 헛기침을 뱉고는 고개를 돌리셨다.

10일간의 실종으로 나는 마이룸을 잃었다.

“저… 그럼 어디서 자죠?”

자취방으로 돌아가야 하나?

집에 방도 없는데?

“…….”

불편한 침묵이 가족 사이에 맴돌았다.



사랑이 식은 것은 아니었다.

요즘 아버지가 진급하면서 자택 근무하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했다.

조용히 일할 방이 필요했고, 그래서 부득이하게 내 방을 서재로 쓰게 되었다는 변명 아닌 변명을 들어야 했다.



“오빠가 집에 잘 안 오니 그렇지!”

‘그래도 주말에는 꼬박꼬박 왔었는데.’

전부 내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