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8화

04 마음대로 찔러 봐





월요일 오전, 첫 예약 환자가 정민인 것을 확인한 지원은 모니터를 마주 보며 혼자 빙그레 웃음 지었다. ‘유정후’라는 이름 석 자가 자신을 웃게 하다니. 그에게 정말 깊이 빠졌나 보다. 곧 보게 될 사람인데도 기다림의 시간을 단축시키고 싶었다. 분명히 전날 늦은 시간까지 함께 있다 헤어졌건만 막 시작한 연인들에겐 턱없이 부족하게만 느껴졌다.

‘조금 더 빨리 볼 수 있는 방법이 있긴 하지.’

인터넷에서 정민의 사진을 검색하던 지원은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책상 위에 고개를 묻었다. 어제의 키스가 문제였다. 나이도 서른 살이고, 정민과 처음 한 키스도 아닌데, 그 여운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밤새 잠을 설쳤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정민의 사진을 보자 다시 온몸의 뜨거운 피가 얼굴에만 몰리는 것 같은 열감이 느껴졌다.

지원은 두 손으로 뺨을 가볍게 여러 번 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뜨거운 속을 식혀 줄 차가운 커피가 필요했다.

한 손에는 아이스커피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간호사들 몫의 커피 캐리어를 든 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지원의 손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눈부시게 잘생긴 남자 하나가 지원을 응시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

“어라? 왜 1층에서 타요? 지하에 차 세운 거 아니에요?”

“매니저 형이 태워 줬거든. 형 볼일 보고 시간 맞춰 다시 여기로 올 거야. 그런데 내 커피는 없어?”

너무나 자연스럽게 말을 놓는 정민의 노련함이 지원에게 기분 좋은 울렁거림을 선사했다. 아닌 척 뻔뻔하게 웃고 있지만 오늘은 꼭 한지원에게 반말을 하겠다고 스스로에게 주입시키며 한의원을 찾아왔을 정민이 그려졌다.

“같이 저기로 가요. 내가 살게요.”

“아니. 괜찮아. 집에서 커피 마시고 나왔는데 그냥 해 본 말이야.”

두 사람은 때맞춰 도착한 텅 빈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한의원의 위치가 강남이다 보니, VIP 전용 단독 침구실이 여러 개 배치되어 있었다. 연예인이나 주요 인사들이 자주 드나들 정도로 유명한 곳이라, 사생활 보호에 예민한 그들을 위한 한의원 쪽의 영업 전략이었다. 정민도 한의원을 찾은 첫날부터 VIP 대우를 받았다. 덕분에 지원이 정민에게 침을 놓는 동안만큼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오로지 두 사람만 침구실에 머물 수 있었다.

“오늘도 곧바로 침구실로 가면 될 거예요.”

“응.”

지원의 손에 들려 있던 커피를 빼앗아 빨대로 한 모금을 쭉 빨아 마신 정민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지원에게 커피를 되돌려 주었다.

“찝찝한 거 아니지? 키스도 한 사이인데.”

놀리듯 지원의 귓가에 바람을 불어 넣은 정민이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두 사람이 함께 한의원에 들어섰지만, 간호사들은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로지 차정민이라는 환자에 대한 반가움만이 대기실을 소란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어머, 오셨어요? 예약자 명단에 있어서 아침부터 얼마나 기다렸는데요! 저희들 요즘 차정민 씨 보는 낙에 출근하잖아요.”

간호사들의 호들갑을 뒤로한 채, 지원은 조용히 진료실로 들어갔다.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며 커피 한 모금을 들이켜고 있을 때, 딩동 소리와 함께 모니터에 유정후라는 이름이 떴다.

침구실 문을 열자, 침대에 걸터앉아 지원을 기다리는 정민이 보였다.

“정후 씨, 좀 어려운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뭔데?”

“요즘 드라마 때문에 조선시대 방식으로 침놓기 연습을 해요. 지금과는 다르게 침관 없이 굵은 침을 손으로 찔러 넣어야 해서 미리 연습해 볼 필요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연습 대상이 되어 달라고?”

“여기 선배들이랑 지난 목요일부터 연습은 해 보고 있는데, 대학 때 그냥 경험 삼아 해 본 거 외엔 처음 해 보는 방식이라 손에 안 익어요. 침이 굵으니까 아프기도 해서 한의사들끼리 말고는 연습해 볼 수가 없거든요. 본가에 가서 가족들 상대로 연습해야 되나 생각했는데 주말에도 집에 못 가서요.”

당연히 정민이 허락해 줄 거라고 생각했는데 혼자만의 앞선 생각이었나 보다. 정민은 조금 전 웃음기가 어른거리던 표정을 싹 감추고 잔뜩 미간을 모았다.

“많이 아픈 거야?”

“침이 굵고, 손으로 찔러 넣는 방식이라 아무래도 더 깊이 들어가긴 해요. 선배들이 놔 주는 걸 맞아 봤는데 기존 방식보다는 확실히 아파요.”

괜한 부탁을 했다는 마음이 들어 원래 쓰던 사이즈의 침을 꺼내려는데 정민이 진료복 옷깃을 슬그머니 잡아당겼다.

“공짜로?”

그가 자신에게 장난을 걸고 있다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그럼 그렇지. 차정민이라는 남자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인 건지, 지원에게 있어 정민은 무엇이든 다 들어줄 것만 같은 남자였다.

“저녁 살게요.”

“아니, 그거 말고. 혹시 여기 CCTV 같은 거 없지?”

“없어요. 환자가 옷을 벗을 수도 있는 곳인데 어떻게 카메라를 달아요?”

정민이 의도가 무엇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연애란 게 참 우스운 거였다. 한번 시작한 스킨십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었다. 그다음 단계를 위한 직진만이 있을 뿐.

“유정후 씨, 누워요.”

모른 척 누워 달라는 눈짓을 했지만 정민은 그대로 앉아 있었다.

“알면서 모른 척하지? 영악하게 사람 애태우는 거야?”

“여기는 직장이라서요.”

“앞으로 여기 와서 치료받는 내내 아픈 침 맞을 테니까, 어제 한 거 100분의 1만큼만.”

“어서 누우라니까요.”

지원이 정색을 하자, 정민은 더 버틸 일이 아니라 생각했는지 입술을 삐죽거리며 침대에 누웠다.

“네 직장이라서 봐주는 거야. 아픈 거 잘 참는 편이니까 마음대로 찔러 봐. 대신 사람 마음 찔러보고 하는 건 절대 안 돼.”

이 남자가 오늘 왜 이러지? 작정한 것처럼 귀여운 모습을 드러내는 정민을 직장에서 마주하는 건 고역이었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참아 보려 했지만, 쉽게 숨길 수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얌전히 누워 있는 정민의 머리카락을 이마 너머로 한 번 쓸어 준 지원이 살포시 웃었다. 정민의 갈색 눈동자에 오로지 자신만이 가득 차 있는 게 보였다. 이런 남자에게 너무 무리한 부탁을 한 것 같아 벌써부터 마음이 쓰렸다.

“진짜 아파요. 나 미리 말했어요.”

“뭐야, 사람 애태우고는 쓰담쓰담으로 끝?”

정민의 말을 애써 무시한 지원은 기존의 침보다 더 굵은 침들을 골라냈다. 최대한 조심조심 침을 놓으며 정민의 반응을 살폈다. 아픈 게 분명할 텐데, 정민은 큰 내색 없이 누워 있기만 했다.

“안 아파요?”

“전보다는 확실히 아파.”

“그런데 왜 움찔거리지도 않아요?”

“내가 움직이면 네가 더 당황할 거 아냐. 너 편하게 침놓으라고. 그런데 나 진짜 아픈 거 잘 참는 편이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정민의 배려 덕에 지원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침을 놓을 수 있었다. 고마운 마음이 들어 정민을 쳐다보니 정민이 뿌듯하게 입술 양 끝을 올렸다. 뿌듯해해도 될 법한 일이었다. 분명히 많이 아팠을 텐데 늠름하게 아픔을 감당해 냈으니까. 대견한 생각이 들어 뭔가 해 주고 싶었지만, 당장 해 줄 수 있는 건 짧은 입맞춤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누가 볼세라 후다닥 정민의 입술에 짧은 키스를 한 지원은 서둘러 침구실을 빠져나갈 요량이었다. 하지만 키스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정민의 모습을 조금 더 감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100분의 1도 좀 길 것 같아서, 1000분의 1만큼만 한 건데요?”

“와, 어제 우리 그 정도였어? 1000분의 1도 장난 아닌데?”

옴짝달싹도 못 한 채 누워 있지만 정민의 표정만큼은 굉장히 능동적이었다. 어떻게 미소만으로 사람의 온몸을 어루만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할 수 있는 거지? 순간 정민의 온화한 미소가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곰곰이 되짚어 보니 2년 전에도 그런 생각을 했었다. 사람의 웃음이 이렇게 다정할 수도 있구나. 그저 정민의 웃는 얼굴을 본 게 전부인데 온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어 그렇게도 신기했더랬다.

“무슨 생각 해?”

“아, 그냥. 바르셀로나요.”

“어느 장면? 자는 나 놔두고 혼자 짐 챙겨서 나가는 장면?”

“치.”

지원은 정민의 몸 곳곳에 꽂힌 침들을 한 번 더 만져 가며 자극을 주었다. 그 또한 아플 법도 한데 정민은 가만히 지원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다행이야.”

“뭐가요?”

“너를 찾은 거. 만약 너를 찾지 못했다면, 나는 여전히 한지원이라는 이름에 집착하고 있겠지.”

진료실로 돌아가야 했지만, 지원의 발걸음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한순간의 실수 때문에 자신과 보내 온 5년이라는 시간을 하루아침에 엎어 버렸다. 그런데 또 다른 누군가는 한순간의 추억 때문에 자신을 2년이나 찾아 헤맸다. 갑자기 눈가가 뜨거워졌다.

“너를 찾았으니까 이제 다수의 한지원에게 집착할 필요가 없잖아. 내가 아는 딱 한 명의 한지원한테만 집착하면 되니까 얼마나 능률적이야?”

이대로 정민의 옆에 더 머물면 혹시라도 눈물이 날까 봐, 지원은 정민을 향해 한 번 웃어 준 뒤 조용히 침구실을 나왔다.





Episode 02 나와 같이 있어 볼래요?



‘나, 어쩌면 첫눈에 반한 것 같아요. 한지원 씨에게요. 이게 나도 좀 어이없긴 한데, 자꾸만 심장이 뛰고 얼굴에서 열이 나네요. 뭐 이런 상황이 다 있죠?’

만난 지 이제 겨우 30분 정도 된 남자가 갑자기 지원에게 ‘반했다’는 말을 했다. 지원은 멍하니 그 남자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넋 놓고 정민을 쳐다보는 것도 잠시, 어이가 없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의 남자는 차정민이었다. 직업만 연예인인 사람이 아니라, 연예인 중에서도 최고의 자리에 있는 프리미엄 배우.

세상 혼자 산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잘난 남자가, 자신에게 고백을 했다. 지원은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나도 이런 말을 하고 있는 나를 이해하기 힘들어요. 첫눈에 반한다는 거, 그 누구보다 내가 믿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반했다는 거 말고는 내 감정을 다르게 설명할 수 있는 말이 없어요. 보여요? 내 손 자꾸 떨리는 거?”

정민이 지원을 향해 두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지원의 눈에는 정민이 말하는 그 ‘떨림’이 잘 보이지 않았다.

“기차가 흔들려서 떨리는 걸로 보이는데요?”

만 5년간 문성현이라는 남자와 연애를 했다. 이상적이었던 시작과는 달리 연애의 끝은 비참했다.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날, 대기 환자 명단에서 ‘주가영’이라는 이름을 클릭했다. 싸늘한 표정으로 진료실에 들어선 여자가 ‘문성현 씨의 아이를 낳을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부른 배를 문질렀다. 그때 그 여자의 손은 지원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장면 중 하나였다.

사랑으로 충만했던 지원의 마음속에는 순식간에 허무함과 상실감이 깊게 뿌리를 내렸다. 아무리 부정해도 지원은 성현에게 버림받은 거였다.

그랬던 자신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고백을 하는 남자라니.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잘생긴 연예인에 대한 설렘과 호기심으로 가득 찼던 마음이 싸늘히 식어 갔다.

“그럼 잡아 봐요. 내 손에 땀이 얼마나 흐르고 있는지.”

차정민이 자신의 양손을 더욱 가까이 디밀었다. 지원은 그저 한심하다는 듯 웃는 것 말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아요. 지원 씨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그런데 이렇게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될 것만 같아서요. 어린애도 아닌데 자꾸만 떨리는 마음이 내 뜻대로 다스려지지가 않아요. 살면서 이런 경험은 처음인 것 같은데.”

조금이라도 더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 보려는 정민의 노력도 헛수고라 여겼다. 그런데 이상했다. 믿기지도 않고, 믿을 마음도 없는데 자꾸만 정민의 미소에 마음이 흔들렸다. 어쩜 저렇게 근사한 웃음을 지을 수가 있을까? 배우라서 가능한 건가? 정민은 그저 웃고 있을 뿐인데 지원의 온몸이 따스해졌다. 마치 정민이 자신을 꼭 안은 채 온기를 나눠 주는 것만 같았다.

“계속 못 믿겠다는 눈빛이네요. 그럼 이건 어때요? 어차피 바르셀로나에 여행 가는 거면, 오늘 하루 나와 같이 있어 볼래요? 분위기 좋은 데서 맛있는 것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요. 구엘 공원도 정말 좋고, 마법의 분수 쇼도 굉장해요.”

복잡한 지원의 마음과는 다르게 정민은 설레어 하며 바르셀로나를 설명했다.

“심플하게 생각해요. 여행 친구가 한 명 생겼다고. 어차피 혼자 돌아다닐 거,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밥 먹을 사람이 생긴 거라고.”

지원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정민이 상황을 정리했다. 지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성현 또한 항상 진지하고 다정한 눈으로 지원을 바라봤었다. 가영이 찾아오기 전날까지도 두 사람은 애틋한 눈빛을 주고받으며 저녁을 먹었다. 결국 그 모든 건 하루아침에 무의미해졌지만.

가영은 성현이 공중보건의로 근무했던 시골 마을의 8급 보건직 공무원이었다. 모처럼 서울에 온 가영이 과거 동료애를 앞세워 성현을 찾았고, 두 사람이 과하게 마신 술이 어마어마한 파장을 몰고 왔다.

한바탕 거친 폭풍우가 쓸고 간 뒤, 점심을 함께 먹던 선빈이 ‘동양 의학의 신비’라는 주제를 다루는 한의학 홍보 세미나 팸플릿을 지원에게 내밀었다. 개최지는 마드리드의 한 대학교였다.

그렇게 오게 된 스페인이었다. 무사히 마드리드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바르셀로나로 가는 길, 우연히 옆자리에 착석한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가 하루를 같이 보낼 수 있냐고 묻고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도 진지하고 다정한 눈빛을 보내며.

“좋아요. 그런데 저도 마스크 같은 거 해야 하나요?”

지원이 결정을 내리자 정민이 속 시원하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어떤 대답을 꺼내 놓을지 꽤나 신경 쓴 내색이었다.

“지금부터 생각해 보죠. 사람들 눈을 피해서 바르셀로나를 돌아다니는 법. 나는 신경 안 쓰고 막 다니는 편이지만, 지원 씨는 다르니까요.”

밝게 웃는 정민에게는 미안했지만, 지원은 오늘 하루로 끝날 사이라고 생각했다. 여기까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일탈이었다. 그러니 자신에 대한 말을 아끼고, 최대한 정민과의 하루를 즐겁게 보내 보자며 보이지 않는 마음의 선을 그었다.

두려웠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누군가를 믿고 마음을 주는 그런 과정이. 그 과정의 끝에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지 뼈아픈 경험을 통해 깨달았고 그 고통은 여전히 지원의 가슴 한가운데에 잔존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종류의 아픔이었다. 그러니 더욱 조심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