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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05 프로는 조용한 법이야





“차정민, 몽골에서 고생 좀 했다더니 얼굴살이 빠졌나? 카메라에 굉장히 갸름하게 잡히네?”

「깊은 밤」 촬영이 시작되었다. 사전 제작 드라마이다 보니 장소를 이동해 가며 촬영하는 일이 기존의 드라마를 찍는 방식에 비해 확실히 덜했다. 한 장소에서 해당 장면을 모두 몰아서 찍으니 시간적인 면에서는 아주 효율적이었다.

다만 감정을 잡기가 힘들었다. 1회 장면을 찍다가 8회의 장면을 찍기도 하는, 극의 흐름이 아닌 장소에 맞추어 촬영하는 방식은 사전 제작 드라마를 처음 해 보는 정민에게는 영 익숙지 않았다. 오로지 시간만이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로 보였기에, 매 순간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진짜 나는 이거 끝나면 사극은 절대 안 할 거야. 수염 기르는 거 너무 불편해.”

쉬는 시간, 막 정민과의 투샷 촬영을 끝낸 기혁이 손끝으로 수염을 문지르며 투정을 부렸다. 수염이 썩 잘 어울리는 얼굴인데도 불편한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나는 벌써 몇 달째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어. 영화 끝나면 곧바로 머리 자르고 수염부터 밀어 버릴 거라 결심했는데 막상 영화가 끝나니까 조금 아쉬워지더라? 그렇게 며칠 더 놔두고 있던 차에 드라마 캐스팅됐잖아.”

“그래도 너는 「깊은 밤」 제작진한테 엎드려서 절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야?”

“왜?”

“왜긴. 한지원을 찾았는데. 너한테는 그거 엄청 중요한 일이었잖아. 너희 두 사람 인연이긴 한가 보다. 어떻게 그렇게 헤어지고, 다시 또 이렇게 만나냐?”

조건 반사. 한지원이라는 이름은 정민에게 조건 반사와도 같은 거였다. 지원의 이름만 들으면 순식간에 얼굴이 활짝 피었다.

“어쭈, 그렇게 좋냐? 표정 관리 좀 해라. 너도 톱 배우인데 자존심도 없어?”

기혁에게 놀림을 당하는 건 유쾌하지 않았지만, 갓 시작한 연애가 주는 설렘은 숨겨지지가 않았다.

“정민이가 참 열심히도 찾았지. 예전에 누구 사촌 동생이 한지원이라더라 해서 곧바로 사진 전송시키라고 한 적도 있었고, 또 어느 스태프 아들 담임이 한지원이라고 해서 그 초등학교 앞으로 찾아간 적도 있지 않았어?”

옆에 있던 정민의 매니저 이상환도 정민을 놀리는 데 합세했다. 상환은 지원에 대한 정민의 애달픔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다.

정민에게 지원의 얘기를 전해 들은 상환은 애인이 있는데 자신이 좋다는 연예인을 뿌리치지 못해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떠난 게 분명하다며 지원을 나쁜 여자로 단정 지었다. 찔리는 구석이 있지 않고서야 차정민을 버리고 가는 게 말이 되냐고. 생각보다 지원에 대한 정민의 집착이 길어지자, 인연이 아닌 거니까 그만 포기하고 다른 여자를 만나 보라고 한 사람도 상환이었다. 하지만 정민은 쉽게 마음을 접지 못했다. 정민에게 있어 지원은 쉽게 잊을 수 있는 가벼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 궁금한 게 있어.”

은밀한 이야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기혁이 촬영 대기 의자를 움직여 정민의 곁에 바짝 붙어 앉았다.

“뭐가 그렇게 궁금하길래 이렇게 가까이 와? 징그러!”

“한지원 이름 대본에서 봤을 때, 어떤 기분이었어? 진짜 운명적인 순간이잖아. 나는 네 옆에 앉아 있었는데 네가 이상한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거든? 나라면 일어나서 만세라도 외쳤을 텐데.”

“그건 너 같은 하수나 하는 일이고. 원래 프로는 조용한 법이야.”

별게 다 궁금하다는 듯 기혁의 말을 무시했지만 대본에서 지원의 이름을 발견했던 그날은 감동적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순간이었다.



❀ ❀ ❀



사극이라니……. 고려 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 「하늘의 검」을 찍으며 너무 고생을 했던지라, 한동안 사극은 쳐다보지도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깊은 밤」 대본은 그런 정민의 결심을 뛰어넘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배경만 조선시대일 뿐, 내용은 거의 90퍼센트 이상이 픽션이었다. 그 덕에 정통 사극에서는 찾을 수 없는 신선한 재미가 느껴졌다.

게다가 김진양 작가 작품이었다. 단 한 번도 시청률 20퍼센트 이하의 작품을 내놓은 적이 없는 자타 공인 히트 제조기. 신인 시절 우연한 기회에 김진양 작가의 눈에 들어간 정민은 첫 작품부터 주연 자리를 꿰차서 연예계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운이 좋게도 시청률까지 고공 행진 했고 정민은 순식간에 최고의 자리에 발을 디뎠다. 김진양 작가가 정민의 은인이 된 건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정민은 「깊은 밤」 대본을 들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3월 말부터 대본 리딩에 들어가면 대충 8월에서 9월 정도에 촬영이 마무리될 것 같았다. 운 좋게 10월쯤 첫 방송이 편성된다면 연말 연기대상을 노려 봄직도 했다. 동 시간대 방영되는 경쟁작들과의 대진운도 좋아야 했고, 편집의 힘도 중요했지만, 그래도 묘하게 작품 그 자체의 느낌이 좋았다. 나빠진 몸 상태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걸 핑계로 놓치기엔 아까운 작품이었다.

고민 끝에 김진양 작가에게 출연 의사를 밝히고, 소속사에도 소식을 알렸다. 그 모든 일이 첫 대본 리딩 하루 전날에 일어났다.



새로 나온 첫 대본이 배우들 앞에 놓였다.

‘읽고 오신 대본과 큰 차이는 없습니다만, 갑자기 캐스팅에 변화가 있어서 출연진 이름이 수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차정민 씨가 맡은 어의 건의 캐릭터가 조금 변했습니다. 정민 씨가 영화 촬영 하면서 검술을 배웠다기에 원래 활을 쏘던 건이 검을 쓰는 걸로 바꿨어요. 1회부터 3회까지는 어제 곧바로 수정했고 다음 부분도 빠른 시일 내에 모두 수정될 겁니다. 장면에 변화가 생긴 거지, 대사가 달라진 건 없어요. 사전 제작 드라마이니 속도감 있게 100퍼센트 대본 리딩을 마친 뒤, 곧바로 촬영에 들어가도록 합시다. 쪽대본 아니니까 좋으시죠?’

사전에 대본이 모두 준비되어 있다는 달가운 소식에 누가 싫은 내색을 할 수 있을까? 출연진과 스태프들은 만족스러움을 비치며 대본을 집어 들었다.

‘아! 정민 씨, 그리고 기혁 씨, 몸 잘 만들어 놔요. 한창 촬영 때는 여름인 거 알죠? 상의 탈의하고 계곡에 한번 빠져야지? 어차피 피피엘도 없는 드라마인데 그런 거라도 좀 보여 주자고.’

일명 ‘김진양 사단’이라 불리는 스태프들과 조연 배우들이 모여 그렇지 않아도 친근한 분위기에 김진양 작가의 농담까지 더해지니 시작부터 활기찼다. 나이가 80에 가까운 중년 배우 이해일이 자신도 몸을 만들어서 같이 벗겠다는 농담을 하자 분위기는 더욱 훈훈해졌다.

정민도 고심 끝에 출연하기로 결정한 만큼, 정말 열심히 해 보자고 스스로 각오를 다지며 대본을 펼쳤다. 김진양 작가의 말대로 자신이 미리 받았던 1화 대본과 크게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 갑작스레 합류하게 되었지만, 전날 늦은 밤까지 열심히 대본을 읽고 온 덕에 첫 리딩은 큰 무리 없이 진행될 거라 생각했다.

대본 전체를 한 번 훑어본 뒤 출연자와 스태프들의 명단이 빼곡히 적힌 첫 장을 눈으로 읽어 갔다. 주연, 조연, 그리고 스태프들의 이름을 쭉 내려 보던 정민의 시선이 거의 마지막에 있는 ‘한지원’이라는 이름에 고정되었다.

‘한지원, 한지원, 한지원……. 설마 그 한지원?’

2년 동안 적어도 스무 명 정도의 한지원을 눈으로 확인했다. 소속사 사장의 처제, 스태프 자녀의 담임 선생님, 친구의 친척까지. 한지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20대 여자면 일단은 적극적으로 나섰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역시나로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고 그런 날이면 밀려드는 서글픔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감이 왔다. 왠지 진짜일 것 같은 막연한 예감. 자문 기관으로 표시된 ‘명성한의원’이라는 곳으로 당장 달려가고 싶었다. 등에서 흐르는 땀이 티셔츠를 적셨다. 자꾸 떨리는 입술을 이로 꽉 깨물었다. 정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리 없는 작가와 감독이 곧바로 대본 리딩의 시작을 알렸다.



❀ ❀ ❀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를 확인하는 정민의 눈매가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여보세요? 점심시간이야?”

― 네, 이제 밥 먹으러 가려고요. 정후 씨는요? 밥은 먹고 일해요?

“응, 조금 있다 먹을 거야.”

― 끼니 거르지 말아요. 쉽지는 않겠지만.

바쁜 틈에도 자신의 사소한 것들을 걱정해 주는 지원의 마음이 예뻤다. 지원은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정민의 모든 일상을 세세하게 챙길 줄 아는 섬세한 사람이었다.

― 늦게 끝나요?

“응. 그래도 저녁 9시 전에는 끝나지 않을까? 나 촬영 끝나고 너 보러 갈 거야.”

― 뭐야, 통보인가요? 내가 약속 있으면 어쩌려고.

“있어도 취소해. 한지원한테는 내가 먼저야.”

철없는 억지를 부리는 것도 연인 사이니까 가능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웃고 있는 지원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었다. 이제 더 이상 지원에 대한 것들이 흐려질까 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된다. 원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으니까.

― 오늘 약속이 한 마흔 개 정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다 취소할게요. 나한테는 유정후 씨가 먼저니까.

“하하, 영광이네. 한지원 씨에게 우선순위라는 게.”

촬영 순서가 다가온 건지 멀리서 정민과 기혁을 찾는 외침이 들려왔다. 기혁이 적당히 하라는 눈치를 주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이제 내 차례다. 중간에 또 문자 보내 놓을게. 밥 잘 먹고, 일도 잘하고.”

― 내 걱정은 하지 말고요.

“어떻게 안 해? 내가 네 생각 말고는 할 게 뭐 있다고.”

참다못한 기혁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미친놈아, 작작해라 좀!”

기혁을 무시한 정민이 대본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꽃 한 다발을 사서 지원에게 안겨 줘야지. 다른 이유는 없었다. 꽃을 받아 들고 좋아하는 지원의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을 뿐.

‘한의원 근처에 괜찮은 꽃집이 있으려나…….’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지원에게로 가는 동선을 짜 보았다.





Episode 03 오늘 하루, 잘 부탁해요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2년 전, 3월의 바르셀로나를. 아니, 바르셀로나에서 정민의 곁에 있었던 그 아름다운 여자를.

드라마 촬영을 끝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모 잡지사와 프랑스 명품 브랜드의 합작으로 진행되는 화보 일정이 잡혔다. 장소는 바르셀로나였다. 드라마를 끝내고 휴식 중이었던 정민은, 화보 촬영 스케줄 전에 혼자 하는 짧은 여행을 계획했다.

처음에는 파리를 여행하고 바르셀로나로 넘어갈 계획이었지만, 반년 전 마드리드로 스페인어 어학연수를 떠난 친척 동생이 때마침 정민에게 연락을 해 왔다. 한 번도 마드리드에 가 본 적이 없었던 정민은 곧바로 자신의 목적지를 정했다.

정민에게는 마드리드는 심심한 도시였다. 3일 정도로 짧게 일정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간마저 길게 느껴질 만큼, 별다른 특징이 없게 느껴졌다. 모처럼 친척 동생을 만난 것 외에는 의미가 없는 여행이었다.

하루빨리 바르셀로나로 가고 싶었다. 화보나 광고 일정 때문에 자주 방문하는 곳이었지만, 언제 가도 바르셀로나는 사람을 강하게 끄는 매력이 있는 도시였다. 특히나 어두워진 밤, 카탈루냐 뮤지엄 앞에서 마법의 분수 쇼를 보는 것은, 정민이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좋아하는 일정 중 하나였다.

결국 정민은 마드리드에서의 일정을 줄이고 하루 일찍 바르셀로나로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다행히 호텔 숙박 일정도 쉽게 조율되었다. 친척 동생의 원망을 듣긴 했지만, 늦은 밤까지 호텔방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는 걸로 아쉬움을 달래 주었다. 그러다 보니 술이 조금 과하게 들어갔다. 바르셀로나로 떠나는 날 아침, 늦잠을 잔 정민은 택시를 잡아타고 헐레벌떡 역으로 향했다.

역에 도착해 플랫폼에 섰을 때는 기차 도착 10분 전이었다. 드문드문 한국 사람들이 보이는 아토차역은 오전 시간이라 그런지 한산한 모습이었다.

어서 기차가 왔으면 했다. 급하게 온 탓에 목이 말랐고 채 떨치지 못한 잠을 깨워 줄 커피 생각도 간절했다. 기차 도착 시간이 가까워져 플랫폼 밖으로 벗어날 수가 없었기에, 모든 건 기차 안에서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5미터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 있는 여자 하나가 정민의 눈에 들어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우연히 그 여자에게 시선을 준 정민은, 순간 온몸에 찌릿한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강렬한 떨림은 좀처럼 멈출 기미가 없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고 여자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이미 뿌옇게 흐려진 지 오래였다.

‘뭐야, 유정후. 금단 현상도 아니고 왜 자꾸 떨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인데도 생경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원인이 무엇인지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여자가 정민의 마음에 너무 강하게 들어온 탓이었다. 그것도 1초보다도 더 짧은, 눈 깜빡할 찰나에.

휴대폰 카메라 화면을 확장하듯 여자의 모습이 정민의 눈 안에서 조금씩 커졌다. 여자가 움직인 게 아니었다. 정민 스스로가 마음의 눈을 크게 뜬 거였다.

딱 봐도 한국 사람이었다. 그것도 아주 예쁜 얼굴을 가진 한국 사람이었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검은 머리카락이 여자의 하얀 얼굴색과 대조를 이루었다. 짙은 눈썹과 오뚝한 코, 그리고 붉은 입술까지. 뭐 하나 모자람 없이 예쁜 여자였다.

여자의 시선은 먼 곳에 있었다. 정민이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려 보았지만, 구름 한 점 없는 하늘만 있을 뿐이었다.

어깨에 숄더백을 멘 채 혼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여자의 무심한 표정이 자꾸만 정민의 관심을 붙들었다. 옷차림이 정갈한 걸 보니 여행을 목적으로 스페인을 방문한 것 같지는 않았다. 출장과 같은 사무적인 일정이 있어 보였다.

기차가 들어오는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플랫폼 듬성듬성 서 있던 사람들이 분주해졌다. 요란한 소음을 만들며 기차가 플랫폼에 정차하자, 여자는 옆에 놓인 캐리어를 들고 정민보다 한 칸 앞 출입구로 들어섰다. 정민도 서둘러 기차에 올라탄 뒤 망설임 없이 앞 칸을 향해 걸어갔다. 앞 칸의 문을 열자 창가 좌석에 홀로 앉아 있는 여자의 모습이 바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