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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한지원 선생님, 애인이 잘해 줘요? 뭐 하는 사람인데요?”

지원에 대한 기혁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우선 지원이나 기혁, 둘 중 한 사람을 이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게 급선무였다.

“박기혁, 나랑 담배 한 대 피우고 오자.”

“담배도 끊은 놈이 무슨 소리야?”

기혁의 푸념은 사실이었다. 5년 전, 드라마 촬영 사이사이 담배를 피우느라 자리를 비웠던 정민에게 함께 드라마에 출연 중이던 선배가 쓴소리를 한 적이 있었다.

‘크게 되고 싶으면 담배 피울 시간도 아껴. 그 시간에 차라리 대본을 봐. 담배 하나도 못 끊는 놈이 앞으로 무슨 큰일을 하겠어?’

그날 이후로 정민은 독하게 담배를 끊었다. 하지만 지금 기혁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적절한 핑계는 없었다. 지원 또한 정민이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던지라 의아한 표정으로 정민을 올려다보았다.

“일단 나가. 할 말 있어.”

정민이 기혁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차가운 밤바람이 얼굴에 닿자 마음이 조금은 안정되는 것 같았다. 그래도 가슴속은 여전히 답답함으로 꽉 차 있었다.

“너 혹시 기억나냐? 내가 예전에 어떤 여자 하나를 찾고 있다고 한 거.”

기혁도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정민은 주변 사람들에게 한지원이라는 사람을 찾아 달라는 부탁을 스스럼없이 했다. 어떻게라도 지원을 찾고 싶은 정민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도대체 한지원이 누구냐는 지인들의 질문 앞에서는 말을 아꼈지만 정민의 주변인들 중 그가 어떤 여자를 찾고 있다는 사연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응, 그 바르셀로나? 이름이 뭐였더라?”

“찾았어. 지난 월요일에.”

“뭐? 진짜?”

담배 연기를 급하게 뿜어낸 기혁이 믿기지 않는 다는 듯 재차 물었다.

“진짜 찾은 거 맞아?”

“응. 지난 일요일, 「깊은 밤」 대본에서 그 이름을 찾아냈어. 그리고 월요일에 곧바로 찾아갔어.”

“무슨 소리야? 누군데? 뭐야, 스태프야?”

“아니야. 사실은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이 상황이 더 길어지면 너를 기만한 게 될 것 같아서. 너라면 이해해 줄 것 같기도 하고.”

기혁의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담배가 소리 없이 타들어 갔다.

“설마…….”

“맞아. 한지원. 그 여자야.”

기혁의 입술이 스르르 벌어졌다. 멍하니 정민을 쳐다보던 기혁이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뭐야, 아 겁나 쪽팔리네.”

바닥에 내리꽂은 담배를 비벼 끄며 기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진짜 그 여자 맞아?”

“맞아. 내가 찾던 한지원.”

“나는 그것도 모르고 엄청 들이댔잖아. 너도 알겠지만 나도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닌데 너무 예쁘더라고. 그냥 예쁜 게 아니라 자꾸 눈이 가는 얼굴이라 적극적으로 굴었지. 아 씨, 진작 말하지. 내 꼴이 뭐가 돼?”

“말할 틈이 없었잖아. 지금 말한 것도 빠른 거 아니야?”

새 담배를 꺼내 문 기혁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스쳤다. 기혁의 라이터를 빼앗아 든 정민이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차정민 네 집요함의 승리냐? 결국 찾았구나. 다시 만나기로 한 장소에 왜 안 나타났대?”

“내가 연예인이라, 그냥 여행지에서의 잠깐의 유희로 자기를 만난 거라 생각했대. 그럼 자기가 상처받게 될까 봐 겁났나 봐.”

기혁이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직업, 참 뭣 같지? 진심으로 다가서도 사람들이 색안경을 끼고 쳐다보고, 바람둥이일 거라는 오해를 받는 건 이제 일 같지도 않아. 겨우 마음이 통해서 사귀면 뭐 해? 남들 눈 피해서 좋은 시간 다 놓치고, 그런 생활에 지쳐 상대방은 떠나고.”

“그러게. 나도 정말 별짓을 다 한 끝에 겨우 한지원을 찾았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좀 막연하긴 하다. 공개하자니 피곤하고, 숨기자니 오늘 같은 일이 자꾸 생길 거고. 드라마 찍으면서 만나면 한 번이라도 더 보니까 좋을 줄 알았는데, 또 그것도 아니네.”

정민의 한쪽 어깨를 두드리는 걸로 가벼운 위로를 하던 기혁이 갑자기 식당 입구를 향해 큰 소리를 냈다.

“한 선생님 가시게요?”

지원이 자리를 뜰 채비를 한 채 식당에서 나오자 기혁이 급하게 담배를 비벼 껐다.

“아까 실례가 많았습니다. 제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무례하게 군 거 잊어 주세요.”

오래 기혁을 봐 온 정민은 그가 진심으로 지원에게 사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기혁은 사과 또한 신속하고 시원시원했다. 지원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서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에게 치근덕거리던 남자가 정민과 함께 나간 뒤로 태도가 싹 바뀌어 점잖게 구니 상황에 대해 쉽게 판단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기혁이한테 말했어요.”

“아…….”

“집에 가요?”

“네. 벌써 11시네요. 내일 진료도 있어서요.”

정민도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지원이 돌아가야 하는 시간인 건 맞았다. 하지만 자신은 자리를 더 지켜야 했다.

“가. 내가 잘 말할게. 너 머리가 아파서 좀 일찍 들어갔다고.”

잠깐 고뇌하는 정민의 표정을 눈치챈 기혁이 선심을 썼다. 조금 전 일에 대한 미안함의 표현인 것 같았다.

“한 선생님, 정민이 잘 부탁드릴게요. 2년 동안 술만 마시면 어찌나 그 이야기를…… 아야! 왜 때려!”

더 말하려던 기혁이 몸을 비틀며 엄살을 떨었다. 계속 말하도록 놔뒀다가는 지원의 앞에서 별의별 소리를 다 할 기혁의 성격을 알기에 그저 등을 한 대 툭 쳤을 뿐인 정민도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지원은 유치하게 구는 두 남자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봤다.

“좀 태워 줄래요? 택시 타고 갈 생각으로 매니저는 오늘 먼저 보냈는데.”

“그럴게요.”

깔끔한 허락이 떨어졌다. 혹시라도 누가 볼까 봐 잔뜩 몸을 움츠린 정민은, 차로 향하는 지원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차에 올라탄 지원이 시동을 걸었다. 백미러를 매만지는 모습도,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입력하는 모습도, 지원이 하는 건 사소한 행동도 다 예뻐 보였다. 정민의 시선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을 텐데, 지원은 정민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차를 출발시키려 했다.

“잠깐. 지원 씨, 휴대폰 좀 줄래요?”

“네?”

“나쁜 짓 안 할 테니까 잠깐만요.”

머뭇거리는 지원을 대신해 정민이 휴대폰 거치대에 얹어져 있는 지원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뭐 해요?”

“같이 사진 찍어요. 아, 밤이라 차 안이 어둡네. 실내등 좀 켜 봐요.”

지원이 움직임이 없자 정민이 차 천장으로 손을 뻗어 실내등을 켠 뒤 휴대폰 카메라를 작동시켰다.

“자 여기 봐요.”

정민은 지원의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줬다. 지원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뭐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아까 물었잖아요. 진짜 남자 친구 있는 거 맞냐고. 남자 친구 있으니까, 증거를 남겨 놔요. 누가 보여 달라면 보여 주고.”

“어떻게 보여 줘요? 어디 공개하면 큰일 나는 사람인데.”

“큰일 안 나니까, 또 난다고 해도 내가 다 책임지니까, 애인 있다고 당당하게 말해요. 나는 지원 씨가 늘 지금처럼 당찬 모습이면 좋겠어요. 나에 대한 괜한 걱정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돼요. 뭐 해요? 여기 보라니까.”

찰칵. 정민이 버튼을 눌렀다. 만족스러운 결과물이었다. 정민은 자신의 휴대폰으로 사진을 전송했다.

“아, 이제 연애하는 것 같네.”

그깟 휴대폰 사진 한 장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 거라고, 이렇게도 기분이 좋은 건지. 정민이 자신의 휴대폰 배경화면을 바꾸는 사이 지원이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또 필요한 거 있어요.”

“뭔데요?”

“호칭. 나 이제 그냥 지원이라고 해도 돼요? 말도 편하게 하고.”

“그런 걸 굳이 허락받고 해요? 진작 그랬어도 상관없었는데.”

“워낙 소중한 여자라 뭐든 다 조심스러워서.”

두 사람 사이에 잔잔한 애틋함이 가득 찼다.

“그럼 나도 호칭 바꿔도 되는 거죠?”

앞만 보고 묵묵히 운전하던 지원이 신호 대기를 하는 동안 정민을 향해 몸을 틀었다.

“뭘로요?”

“정후 씨로. 유정후라는 이름도 예쁜데 왜 예명을 써요, 유정후 씨?”

오랜만에 듣는 자신의 본명에 정민의 가슴이 떨려 왔다. 가족과 오랜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신을 차정민이라 불렀고, 스스로도 그 이름에 더 익숙해져 있었다.

어떻게 보면 유정후라는 이름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부르는 특별한 애칭이 되어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원이 ‘정후 씨’라고 부르는 순간, 지원 또한 정민에게 뗄 수 없는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확신이 들었고 묵직한 책임감이 몰려왔다.

“데뷔할 때, 유정우라는 선배가 있었어요. 사건 사고가 많아서 지금은 이 세계를 떠났지만, 그 당시에는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거든요. 그 사람과 이름이 너무 비슷해서 예명을 쓰는 게 더 좋겠다는 소속사의 의견을 따랐어요. 어떤 사람들은 유정후보다 차정민이 나랑 더 어울린다고도 해요.”

말을 편하게 하겠다고 선언은 했지만 갑자기 말을 놓으려니 어색했다. 당장은 불편해도 서서히 조율해 나가면 괜찮아지겠지.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오늘은 많은 일들이 있었네요. 앞으로 우리, 더 힘들게 될까요?”

“오늘 힘들었어요?”

“그냥, 여러 가지로 생각할 일이 많아진 거죠. 눈치 봐야 될 것도 많아지고. 그래도 아까 정후 씨가 그런 식으로 날 구해 준 건 정말 멋있었어요.”

“아, 그건 구해 준 게 아니죠.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데.”

지원이 운전하는 차에는 처음 타 보았는데 정말 큰 장점이 있었다. 운전을 하지 않아도 되니 오로지 지원의 얼굴만 쳐다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언제 또 올지 모르는 기회라 눈을 깜빡이는 것까지 참아 가며 지원을 쳐다봤더니 눈이 따끔거렸다.

“다 왔어요. 여기 맞아요?”

“네, 저기 주차장 입구로 들어가면 돼요.”

보안이 철저한 곳이라 세 번의 확인 절차를 거쳐야만 했다. 귀찮을 법도 하건만, 싫은 내색 없이 순순히 보안 절차에 응한 지원이 무사히 차를 주차시켰다.

“고마워요. 내일 한의원으로 갈게요. 아, 내일부터는 무조건 반말할 겁니다.”

“좋으실 대로.”

정민은 지원이 시키는 대로 꾸준히 한의원에 들렀다. 지원에게 진료를 받기 위한 예약 환자들이 대기실을 꽉 채우고 있는 날도, 정민에게 침을 놔 주는 사람은 변함없이 지원이었다. 정민과 지원의 연애를 알 리 없는 간호사들의 과잉 친절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정민이 한 일이라고는 한지원 원장님께 계속 진료를 받고 싶다는 말을 넌지시 한 게 전부건만, 간호사들이 자처해서 정민의 진료 스케줄을 조율해 주었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유정후 씨.”

정후라는 이름을 부르는 게 재미있는지 지원이 자꾸 정후 씨라는 호칭을 썼고, 그때마다 지원의 입가에는 수줍은 미소가 떠올랐다.

“아쉽네요. 시간이 늦지만 않았어도 같이 집에 올라가자고 했을 텐데.”

“다음에 초대해 줘요. 연예인들은 어떻게 하고 사나 궁금하니까.”

“사람 사는 게 다 똑같죠 뭐. 진짜 다음에 꼭 초대할게요. 조심해서 가요.”

정민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차에서 내렸다. 지원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이대로 지원을 보내기 싫은 마음에 정민은 괜히 발끝으로 땅을 툭툭 건들며 지원의 차를 바라보았다.

“잠깐만요.”

차를 출발시키려던 지원에게 멈추라는 손짓을 보낸 정민이 다시 지원의 차에 올라탔다.

“모든 걸 천천히 해 보려고 마음먹었거든요? 그런데 도저히 안 돼요. 일주일이나 그냥 헤어졌는데, 우리 조금 더 가까워져도 되지 않을까요?”

떨리는 건 지원의 두 뺨을 감싸 쥔 정민의 손뿐만이 아니었다. 정민의 눈에 보이는 지원의 속눈썹도 미약하게 떨렸다.

“이 정도 분위기면 내가 뭘 하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은데. 싫으면 거절해도 돼요.”

거절해도 된다고 말해 놓고는 조금씩 팔에 힘을 줬다. 두 사람의 얼굴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반짝하는 순간 정민의 눈이 커졌다. 조금 더 빨리 얼굴을 내민 예상 못 한 지원의 행동에 두 사람의 입술이 잠시 맞닿았다.

“뭐야? 나 당한 거예요?”

“이게 하고 싶었던 거 아니에요? 어차피 할 거 조금 더 빨리한 것뿐인데요?”

여전히 정민의 손은 지원의 양 볼을 감싸고 있었다. 조금 전 도발적인 행동으로 자신을 놀라게 한 여자라고는 믿을 수 없는 청초한 얼굴이 정민의 손안에 있었다.

“잘못 안 거 같은데요? 나는 그보다 더 센 걸 원했거든요. 나 수염이 길어서 아플지도 모르는데 지원 씨가 참아요.”

곧바로 지원의 입술에 가볍게 입맞춤한 정민은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더욱더 깊이 입술을 머금었다. 그다음은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지원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정민의 목을 당겨 안았고, 정민은 지원의 등허리를 더욱 강하게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