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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루 1권 17화

第五章 아버지의 마음(3)





천태성의 한바탕 살풀이가 있은 후 고두식의 집에는 더 이상 흑강파 사람들이 찾아오지 않았다.

고두식은 흑강파 사람들에게 두들겨 맞은 것 때문에 한동안 몸져 누웠었다. 그리고 고미미는 예전처럼 투정부리는 일은 하지 않았다.

일을 나가지 못해 끼니를 걱정했던 고두식이었지만 그것도 괜한 걱정이었는지 매일 누군가 밤마다 하루치 먹을 음식을 자기들 몰래 가져다 놓았던 것이다.

그 후로 잠을 안 자고 기다려 보았지만 결국 누구인지 밝히지 못했다.

고두식은 음식을 처음 받았을 때부터 천태성을 떠올렸다.

‘내 다 나으면 꼭 찾아가야지.’

고두식은 병상에 누워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고두식은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몸 상태는 예전보다 훨씬 좋아진 듯했는데 퀭하던 눈가에 살이 올라 있었고 혈색이 보기 좋았다. 그리고 고미미 또한 이제 점점 아이들과 어울리며 웃음을 찾아가는 듯했다.

그저 한낱 음식일 뿐이지만 그 위력은 대단했다. 왜냐하면 한가정의 웃음을 되찾아 주었기 때문이다.

고두식은 한걸음에 낙화루를 찾았다. 그리고는 대뜸 천태성을 보더니 큰절을 올렸다.

“이 은혜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천태성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순간 고두식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전에 내가 구해준 것 때문이라면 앞뒤가 맞지 않는데.’

그렇다 천태성은 고두식을 구해주고 방에 들어가 사정을 듣고 나온 게 다였다. 이내 천태성은 뭔가 떠올렸는지 한창 일을 하고 있는 황보현중을 바라보았다.

“이 자식…….”

천태성을 보며 싱긋이 웃는 황보현중.

“헤헤헤.”

천태성은 황보현중에게 무공 수련을 시키면서 무심코 고두식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런데 황보현중은 그것을 그냥 듣고 넘기지 않았다.

그날 밤 몰래 고두식 집에 찾아가서는 집안 사정을 엿보더니 그날 후로 매일 음식을 가져다 날랐다.

고두식의 사정을 황보현중에게 들은 주동동은 고두식을 위한 음식을 특별히 만들어주었다.

“아닙니다. 별일 아니니 이러지 마십시오.”

천태성은 절하고 있는 고두식을 억지로 잡아 일으켰다.

“정말 고맙습니다. 이 은혜 꼭 갚겠습니다.”

어느새 주방에 있던 주동동이 나와 황보현중에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었다.

“이히히히.”

황보현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보 같은 웃음만 지었다.



그 길로 고두식은 낙화루를 나와 예전에 일하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이 손으로 열심히 살면 되는 거야.’

그렇게 괴롭히던 흑강파 놈들도 보이지 않고 미미는 웃음을 찾아가니 고두식은 정말이지 살맛이 났다.

이렇게 고두식은 하루하루 생활하다 보니 가난하였지만 희망이란 것이 있기에 행복했다.

그리고 고미미는 황보현중으로 인해 낙화루에 자주 들락거렸다.

황보현중이 수련을 빌미로 쇠 신발을 신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고미미를 찾아갔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황보현중의 속내는 천태성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낙화루 사람들은 미미를 친동생처럼 잘 대해 주었다. 그러한 사실을 고두식은 늦게 알고 나서 못 가게 했지만 미미는 고두식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 무렵, 고두식은 일을 마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지금 그의 품에는 자그마한 신발이 안겨져 있었다. 그것은 미미가 그토록 가지고 싶어 했던 꽃신이었다.

낙화루에 신세를 지면서도 꾹 참고 하루하루 품삯을 모아 산 신발, 고두식은 벌써부터 이것을 받고 좋아하는 미미를 생각하니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얼마나 좋아할까? 허름한 옷을 입어도 좋다. 못 먹어도 좋다. 그저 우리 미미가 웃으면 그거 하나로 족하다.’

얼마나 걸었을까 집 근처에 다 왔는지 멀리 서호가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누군가 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음? 무슨 일이지?’

고두식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웬 낯선 남자가 자신의 지척에 이르는 것을 보았다.

고두식의 눈은 크게 떠지고 아랫배에 낯선 감각이 느껴졌다.

푹.

‘윽!’

고두식은 아랫배 부분이 갑자기 화끈거리자 고개를 천천히 내렸다. 그곳에는 붉은 피가 콸콸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고두식은 자기도 모르게 품에 안았던 꽃신을 땅에 떨어뜨리며 배에 꼽힌 칼을 붙잡았다.

낯선 남자는 이를 악물더니 칼을 확 뽑았다.

푸악.

“크억!”

그리고 남자는 또다시 고두식을 찔렀다.

푹.

“윽!”

쓰러지는 고두식의 눈에 자신을 찌른 남자가 도망가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달려오는 마을 사람들, 모든 것이 느리게만 보였다.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이대로 가면 안 되는데…….’

부르르 떨리는 고두식의 벌건 손은 땅에 떨어진 꽃신을 천천히 자기 품으로 끌어당겼다.

‘졸립구나.’

그리고 고두식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 * *



낙화루에서 일을 하고 있던 천태성은 급하게 뛰어들어 오는 아이를 붙잡았다. 그 아이는 고두식의 딸인 미미였다.

미미는 천태성을 보자마자 품에 안기며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가, 아빠가…… 으아아앙!”

“무슨 일이야!”

천태성이 다급하게 물었으나 고미미는 말이 안 나오는지 그저 계속해서 울뿐이었다.

그때 누군가 쏜살같이 밖으로 튀어 나갔다.

천태성이 고개를 들어보니 그는 황보현중이었다. 그러자 천태성도 미미를 품에 안더니 극성의 신법을 전개 했다.

황보현중을 간단히 제꼈으나 천태성은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이윽고 마을에 도착한 천태성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니 그곳에는 고두식이 피를 흘린 채 쓰러져 있었다.

천태성의 품에서 빠져나온 미미는 재빨리 고두식에게 가더니 몸을 잡고 마구 흔들었다.

“일어나! 일어나란 말이야 아빠! 엉엉엉! 이제 말 잘 들을 게 일어나!”

천태성은 고두식의 맥을 짚어 보았다. 그러나 고두식의 손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한 손으로 작은 꽃신 한 켤레를 품에 안은 채 고두식은 누워 있었다.

울던 고미미는 고두식의 품에 있던 신발을 빼내더니 확 집어던졌다.

“이딴 거 안 신어도 돼! 그러니까 일어나 눈 좀 떠봐 아빠!”

아무리 미미가 흔들어도 고두식은 눈을 뜨지 않았다.

“아저씨!”

황보현중이 이제 도착했는지 마을 사람들을 헤치며 천태성의 옆으로 왔다. 그리고 천태성을 보며 표정으로 물었다.

미간에 주름을 잡고 있던 천태성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흑흑흑.”

서호 위에 조그마한 조각배를 띄우고 미미는 고두식의 유골을 호수 위에 뿌렸다.

한참 부모님의 품이 그리울 나이였건만 이제 미미는 혼자가 된 것이다.

황보현중이 노를 젓고 있었으며 천태성은 팔짱을 낀 채로 미미가 유골을 뿌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미는 낙화루에서 황보현중의 할머니와 함께 살기로 했다.

황보현중의 할머니는 아직 거동하시기에 불편하시지만 흔쾌히 미미와 함께 사는 것을 승낙하셨다. 그래서 미미는 낙화루의 가장 어린 식구가 되었다.



그날 밤 흑강파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무엇인지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쿠아아아앙!

굳게 닫혀 있던 흑강파의 커다란 대문이 깨진 조롱박처럼 박살 나서 날아갔다.

“적의 습격이다!”

장원 곳곳에 불이 밝혀지고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저마다 칼이나 도끼 등 무기들을 들고 나왔으나 그들 앞에 보이는 것은 단 한사람이었다.

펄럭이는 검은색 무복을 입고 쭉 뻗은 검미에 좌중을 휘어잡는 기도, 단 한 명이었건만 그들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점점 더 모이기 시작하고 천태성을 보고 뛰쳐나가려는 사람들을 먼저 온 사람들이 붙잡았다.

그렇게 인원들이 둘러싸자 족히 백 명쯤 되는 사람들이 무장을 하고 천태성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천태성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한 걸음씩 걸었다.

저벅저벅.

낙화루에서 일하던 천태성이 아니었다.

이 모습은 천마 천운학을 대면하던 자리에서 느껴졌던 분위기였다. 아니, 그때의 천마 천운학을 보는 듯했다. 그리고 천태성의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은 제왕지보(帝王之步)였다.

꿀꺽.

누구인지 침을 삼켰다. 그리고 주위가 워낙 조용한지라 침 삼키는 소리조차 들리는 듯했다.

‘저놈은 누구길래 저러한 기도를 뿜어낸단 말인가.’

그들은 천태성을 보자마자 질려 버렸다.

실상 천태성은 지금 천마신공을 운용 중이었다.



천마신공 제삼결 천마군림보(天魔君臨步).



한 걸음에 적의 기선을 제압하고 겁을 주며 두 걸음에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세 걸음에 꿇어 엎드리게 만든다는 그 천마군림보를 사성의 공력으로 운용하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 오성 이상 갔으면 지금 여기에 서 있는 사람은 얼마 없었을 것이다.

장원 마당의 중앙 부분에 이른 천태성은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한 아버지가 있었지. 마누라 없이 삼 년 동안 키운 아홉 살 난 딸애가 있는 아버지. 그런데 말이야, 그 아버지를 어떤 자식이 칼로 찔러 죽였어. 그깟 돈 몇 푼 안 갚는다고……. 그 죽은 아버지는 딸애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눈도 제대로 못 감았지.”

그러면서 천태성은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그들 앞에 던졌다.

휘리리리리. 푹.

날아와 땅에 꼽힌 물체는 단도였다.

“그 칼이 아버지를 찌른 칼이다.”

이백 개의 시선은 반사적으로 칼을 향했다.

“반 시진 이내로 그 칼의 주인을 찾아라.”

순간 천태성은 천마군림보를 일성(一成) 더 추가했다.

“허억!”

곳곳에서 천마신공의 기운을 이기지 못해 주저앉는 인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천태성은 그들을 주시하며 나직이 선고했다.

“못 찾으면 이날부로 흑강파는 멸문이다.”

흑강파는 가만히 잠자던 천태성의 마인(魔人) 근성을 건드리고 말았는데.

사람들 모두 멍해 있는 상태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이 외쳤다.

“뭣들 하느냐! 빨리 찾아라!”

천마신공을 익힌 사람들이 가장 경계할 대상은 적이 아니었다. 바로 자기 자신인데 바로 격한 분노를 하게 되면 천마신공이 그 시전자를 먹어 버리는 사태가 생겨난다.

천태성은 분노의 분출구와 흑강파의 볼일이 맞물려 필연적으로 이곳으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반 시진이 지나도 칼의 주인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천태성의 말대로 흑강파는 그날부로 항주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