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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루 1권 18화

第六章 꽃보다 남자(1)





흑강파가 항주에서 순식간에 사라지자 강호에는 소문하나가 떠돌기 시작했다.

“이보게, 이보게. 항주의 신생 사파 세력 흑강파 있지 않나?”

“어, 알지.”

“그게 말일세. 그 흑강파가 단 하룻밤만에 멸문했다지 뭔가.”

“다른 세력의 습격을 받았나?”

“아니라는데? 단 한 명한테 무너졌다는데?”

“예끼 이 사람. 참 실없는 소리하는구만. 그 흑강파는 중소 규모라서 인원이 족히 백 명은 넘을진데 어찌 단 한 사람에게 멸문 당했단 말인가. 사파의 천마나 정파의 검성이 그곳을 방문했다면 모를까. 쯧쯧쯧.”

“웬 검은 옷을 입은 청년 한 명한테 멸문했다는데…….”

“예이 이 사람아, 그 이야기 그만하세.”



이처럼 흑강파의 멸문한 이유는 단 한 명의 청년으로 인해 멸문했다는 소문이 났지만 모두 그 소문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리고 천태성은 흑강파를 멸문 시키던 날, 그곳에서 많은 수의 여인들을 보았다.

그들은 흑강파의 사람들에게 납치 당해 팔려갈 위기에 처했던 여인들이었다. 대다수 풀어주자 그들은 고향을 향해 떠났고 단 한 명만이 남았다. 그리고 천태성은 그녀를 낙화루로 데려왔다.



그녀의 이름은 왕소군.

소주출생으로 빼어난 미모를 지녔다. 항주에 잠시 놀러 왔다가 흑강파 사람들에게 몸을 빼앗긴 후 죽으려고 음독을 하였으나 운명의 장난인지 그녀는 죽지 않았다. 대신 독은 그녀의 두 눈을 멀게 했고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흑강파는 왕소군이 그러한 지경에 처하였어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고 잡아두고 있었다.

천태성이 그녀를 낙화루에 데려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녀는 말을 매우 아끼고 조용했다. 그리고 기운을 차리게 되면 고향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앉아 있는 그녀가 보기 뭐했는지 천태성은 그녀의 방을 찾아 창가에 앉히고 창문을 열어주기까지 하였다. 그러자 모처럼 왕소군이 미소를 지었다.

“참 친절한 분이시군요.”

“아닙니다. 저는 다만 빨리 쾌차하시라는 뜻에서 취한 행동입니다.”

“아무튼 고맙습니다.”

왕소군의 말투는 느릿느릿하면서도 듣기 좋았다.

천태성은 왕소군을 위해 봉공중 한 명인 독천존을 불러 볼까도 했지만 아무리 자신이 소천마라고 하지만 교내 봉공 어르신을 오라 가라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가까운 의원을 불러보았지만 그녀의 눈과 다리는 불치라는 소견을 듣게 되었다.

천태성은 봄날의 따뜻한 햇살을 내리쬐고 있는 왕소군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눈을 감고 있지만 왕소군의 미려한 얼굴 곡선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만일에 눈을 뜨게 된다면 그날부로 중원제일미는 왕소군이 될 듯하였다.

‘안타깝군.’

천태성은 자신이 멸문 시킨 흑강파를 다시 일으키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왜냐하면 다시 멸문 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왕소군은 방 안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나직이 말을 하였다.

“바쁘지 않으신지요?”

점잖게 말하는 축객령, 즉 왕소군은 혼자 있고 싶다는 소리였다. 그리고 실제로 지금은 중식 때라 손님이 많이 올 시간이었다.

천태성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쉬시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천태성은 그녀에게 자신이 흑강파를 멸하였다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왕소군은 맨 마지막에 발견되었기에 전후사정을 모르고 있었다.

천태성은 왕소군에게 어떤 사람의 부탁을 받고 데려오게 되었다며 거짓말을 한 상태였다.

왕소군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지만 천태성은 모른다는 대답으로 일축했다.



한편 식당의 황보현중은 한참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그를 찾는 단골 삼인방이 있었다.

근처에 사는 소녀들이었는데 세 명 다 모두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그녀들의 나이는 올해 십오 세로 한참 호기심이 무럭무럭 피어나는 시기였다.

그녀들은 처음 천태성을 보고 혹하였으나 천태성의 왠지 모를 분위기 때문에 어려워하던 차에 황보현중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황보현중은 그녀들과 나이 차도 얼마 나지 않고 무엇보다 활달해서 가까이 하기에 쉬웠다.

그녀들의 이름은 각각 오지영, 장수미, 등려지였다.

지영과 수미는 둘 다 외모도 비슷하고 무엇보다 말이 많았다. 하지만 등려지는 너무나 어려 보이는 외모에 말도 없고 수줍음도 곧잘 타는 편이었다.

오늘도 수미와 지영이는 다소곳이 앉아 있는 려지를 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힘찬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기필코 오늘이야말로.’

‘려지야, 고백하자!’

그런 그녀들의 속내를 까맣게 모르는 황보현중은 환하게 웃으며 그녀들을 맞이했다.

“하하하하. 어서 와 저기 앉아, 이 오라버니가 성심성의껏 대해주마!”

수미와 지영이는 황보현중을 보며 까르르 웃고 있었으나 려지는 얼굴을 붉힌 채 황보현중의 얼굴도 바라보지 못하였다.

“자아 뭐 먹을래?”

세 소녀가 자리에 앉자 황보현중은 물 묻은 행주로 탁자를 닦았다.

황보현중은 그녀들의 주문을 기다렸지만 정작 그녀들은 다른 답을 내놓았다.

“저기 황보 오빠.”

“응?”

“저기 있잖아, 저기 있잖아.”

수미가 뭔가 중요한 말을 하려는 듯 자꾸 뜸을 들였다. 그리고 왜인지는 몰라도 그런 수미의 옷을 려지는 꼭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말은 지영이가 꺼냈다.

“황보 오빠, 어떤 여자 좋아해?”

황보현중은 갑자기 애들이 이상한 소리를 하자 황당한 듯 웃으면서 말했다.

“하하,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아, 그러지 말고 어떤 여자를 좋아하냐구!”

수미와 지영이는 볼을 한껏 부풀리며 제 딴에는 한껏 무섭다는 표정으로 눈을 치켜뜨며 황보현중을 압박했다. 그런데 황보현중의 뒤에서 조그마한 아이가 툭 튀어나오더니 그녀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안 돼! 황보 오빠는 미미 거야!”

짧은 양팔을 펼치며 황보현중 앞에 선 고미미는 눈에 힘을 콱 주었다.

“어머, 귀여워라!”

“얘 누구야? 오빠.”

수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안으려 하자 고미미는 작은손으로 수미의 손을 찰싹 때렸다.

“어딜!”

“꺄아. 어머 얘 봐. 무섭다 무서워.”

고미미는 이젠 아예 황보현중의 한쪽 다리를 양손으로 안으며 말을 했다.

“미미는 나중에 황보 오빠한테 시집갈 거야. 그러니까 언니들은 건드리지마.”

그런 고미미의 말을 들은 황보현중은 아주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뒷머리만 긁적였다.

“하하하.”

“호호호호. 정말 귀엽구나.”

“예쁘게 커서 꼭 시집가거라.”

황보현중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화재를 돌렸다.

“자아, 뭐 먹을래?”

“수미는 화월채!”

“지영은 자소면.”

등려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소면.”

황보현중은 안 들린다는 듯 귀를 등려지의 얼굴 앞에 바짝 대었다.

“뭐? 안 들려.”

그러자 등려지는 갑자기 다가온 황보현중 때문에 화들짝 놀라며 뒤로 몸을 황급히 제꼈다.

두근두근.

려지의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황보현중은 다시 귀를 려지에게 가까이 대며 물었다. 그러한 모습을 본 지영과 수미는 무척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었고 미미는 한껏 뚱한 표정이었다.

“저기 저도 소면 주세요.”

“뭐? 소면! 알았어!”

황보현중은 주방으로 가면서 등려지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어 주었다.

등려지의 얼굴은 순식간에 빨개졌고 지영과 수미는 작은 소리로 킥킥거렸다.



한편 식당 입구에서 일을 하고 있던 천태성은 눈에 확 띄는 미녀가 들어오자 고개를 들었다.

천태성을 발견한 그 미녀는 생긋 웃더니 다소곳이 인사를 하였다.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뵈었죠.”

진흙탕 속에 고고히 핀 한 송이 연꽃 같은 그녀, 바로 유리봉황의 단짝 친구인 남궁연지였다.

천태성은 부드러운 미소로 답했다.

“이번에는 혼자 오셨네요. 저쪽으로 앉으시지요.”

“네에. 수고하세요.”

갈 때도 살짝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모습은 참 보기 좋았다.

‘언제 봐도 훈훈하구나. 그런데 어쩐 일로 혼자 왔지?’

천태성은 그 점이 궁금했으나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남궁연지는 황보현중에게 무엇인가 전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무슨 서찰 같았는데 겉면이 연한 녹색으로 되어 있었다.

황보현중은 그것을 받더니 주방으로 쏜살같이 사라졌다. 그러자 남궁연지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입구 쪽으로 걸어 나왔다. 그리고는 천태성에게 인사를 하였다.

“그럼, 저는 이만.”

“살펴 가십시오.”

천태성은 왜 음식을 먹고 가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리고 천태성은 그녀가 사라지자 주방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한편 주방의 북궁설은 황보현중으로부터 한 통의 서찰을 받았다.

연녹색으로 된 서찰의 겉면에는 한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恩(은).



남궁연지가 직접 가져온 것으로 보아 그것은 나예은이 쓴 서찰인 게 분명했다.

천태성은 북궁설이 편지를 읽고 있는 모습을 멀찍이서 바라보았다.

‘남궁 소저가 저 얼음땡이에게 관심이 있단 말인가? 취향 참 독특하네.’

그런데 편지를 읽던 북궁설이 그냥 확 구기더니 아궁이 속으로 던져 버리는 것이 아닌가.

‘와, 역시 저놈답군. 미녀가 편지를 줘도 관심 없다 이거지.’

북궁설은 아무렇지 않게 다시 일을 하였다.

천태성은 등을 돌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은 아무래도 남자를 좋아하는 남색(男色)인 게 확실해.’

천태성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북궁설이 주동동만 보면 웃음을 짓기 때문이었다.



한편 유장팔은 언제나 고정된 자리에 앉아 유화영이 음식 먹는 모습을 헤벌레 지켜보고 있었다.

유화영이 최근 들어 달라진 점이라면 음식 먹는 속도가 현저히 줄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유리봉황의 만남 이후로 자신의 별호 때문에 신경을 쓰는 듯했다. 그러나 그 먹는 양은 변하지 않았다.

유화영이 음식을 먹다가 말고 젓가락을 내렸다. 그리고는 옆으로 고개를 슥 돌려 유장팔을 바라보았다.

“히엑!”

갑자기 유화영이 자신을 쳐다보자 유장팔은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는데 여태 하지 않던 행동이라 예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유장팔은 유화영이 무슨 말을 할까 내심 걱정하며 바라보았다. 그러나 유화영은 말 대신 턱짓을 하였다.

휙휙.

“음?”

유화영이 자신의 탁자 쪽으로 턱짓을 하는 것으로 보아 앉으라는 소리 같았다.

‘오오오오오!’

천태성을 비롯한 장태봉, 노득출은 손에 땀을 쥐고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화영의 이상한 행동에 유장팔은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검지로 유화영의 탁자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휙휙.

그러자 유화영이 답답했는지 한마디 툭 내뱉었다.

“앉어.”

‘오오오.’

노득출과 장태봉은 서로 손을 잡고 흥미진진하게 유장팔을 바라보았다.

유장팔은 낙화루 식구들이 주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다. 지금 그는 주위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유화영의 행동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유장팔이 천천히 다가와 자리에 조심스럽게 앉자, 유화영은 자기가 먹던 닭고기에 다리를 북 뜯어서는 유장팔에게 내밀었다.

“먹어.”

‘우와아아아!’

천태성과 장태봉, 노득출은 소리 없이 만세를 부르며 서로 얼싸안았다.

유장팔을 보라, 저 닭다리를 들고 감격하는 표정을. 눈물이 글썽글썽 하여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내 지금 황제가 상을 내린다고 해도 이것과 안 바꿔.’

그렇다. 지금 유장팔은 황제가 내리는 상보다 유화영이 뜯어준 닭다리가 더 좋은 것이다.



한편 소미와 지영 그리고 려지는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중이었다.

그녀들은 평소 차 마시는 것도 싫어 했는데 웬일인지 차까지 마신 후였다.

수미가 황보현중을 보며 작별(?) 인사를 하였다.

“오빠 우리 이제 그만 가볼게.”

“응, 내일 보자.”

뒤따라오던 려지는 그냥 고개만 꾸벅거렸다. 그런데 그때 지영이가 려지의 발을 걸어 버렸다.

“꺄아!”

넘어지는 려지를 황보현중이 급히 잡았다. 그런데 그만 려지가 황보현중에 품에 안긴 꼴이 되어버렸다.

황보현중은 사심 없이 이야기했다.

“괜찮아?”

“…….”

등려지는 황보현중의 말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런 것이 어찌되었던 간에 지금 좋아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있기 때문에 정신이 혼미했다.

두근두근.

그런 것을 알 턱이 없는 황보현중은 려지를 자신의 품에서 떼어 놓더니 재차 물었다.

“려지야, 괜찮은 거야?”

려지는 그제야 신색을 회복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몇 번 껌뻑였다. 그리고는 좀 전의 상황이 떠오르는지 얼굴이 급 빨갛게 달아올랐다.

“어?”

얼굴을 가리고 냅다 밖으로 후다닥 달려나가는 등려지.

그 뒤를 따라 수미와 지영이는 재밌다는 듯이 까르르 웃으면서 달려나갔다.

황보현중은 수건을 목에 걸친 채 멀뚱히 그녀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왜들 저러지?’



한편 천태성은 작은 소반 위에 자기로 된 찻잔을 올려놓고 왕소군의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왕소군은 창밖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있었다.

천태성은 천천히 왕소군이 위치한 탁자 위에 찻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원래 이 일은 황보현중이나 다른 사람들이 주로 하던 일이었다. 그런데 웬일로 오늘은 천태성이 들고 온 것이다.

천태성 쪽으로 고개를 돌린 왕소군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천 대협이시군요.”

진동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발걸음 소리도 내지 않았는데 그녀가 알고 있자 천태성은 내심 궁금했다.

“제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나요?”

“궁금하오.”

“본래 다른 분이라면 걸음 소리도 내고 말도 하지요.”

지금 상황은 소리를 안 내는 것도 특징이 될 수 있는 경우였다.

슬쩍 웃는 천태성.

“후후후.”

천태성은 그녀의 목소리를 계속 듣고 싶었다. 그래서 선수 쳤다.

“오늘은 장사가 잘 안 되나 봅니다. 손님들이 적군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직접 들고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