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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의 이브닝 4화



“그런데 손수건을 얼려 주셨다고요?”

문득 걸리는 점이 있기에 벨제가 이브에게 물었다. 손수건을 사각사각 접어 개며 이브가 대답했다.

“그래. 마법사시거든.”

“제가 알기론 5황자는 기사인데…….”

“기사이시기도 하지. 하지만 마법도 쓰실 수 있어.”

이브가 예전의 일을 떠올렸다. 그는 오닐처럼 잘 싸우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기사이며 동시에 마법사였기에 전쟁터에서 어렵지 않게 상대의 목숨을 거두곤 했다. 오닐과 함께하며 이브는 한 번도 패배를 경험한 적이 없었다. 벨제가 생각에 잠겼다.

“혹 5황자가 얼마나 강한지 아십니까?”

벨제의 질문에 이브가 잠깐 눈썹을 찡그렸다. 기사 대 기사로 싸운다면 그가 이길 것이었다. 그러나 오닐이 마법을 동원한다면 결코 이길 수가 없었다. 이브가 직접 보고 겪은 바에 따르면 그랬다. 게다가 이 예측도 2년 전 전쟁터에서 본 오닐의 실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니 지금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정보는 오닐과 함께 싸운 기사만이 알 수 있는 법. 전쟁터에서 있었던 일을 허락된 사람 외에는 입 밖에 낼 수 없었기에 이브는 어깨를 으쓱하며 글쎄, 하고 모호하게 대답했다. 벨제의 반응을 보니 그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감이 왔다.

‘마법사인 동시에 기사인 사람이 드물기는 한데…….’

오닐은 엠페라움의 성을 가진 황자다. 그리고 황자 중에서도 ‘라’는 보통 마법사에도, 기사에도 능한 편이었다. 설마, 하다가 이브가 고개를 저었다. 이브가 알기론 오닐의 모친인 세피아 오카프는 평범한 인간이었다. 오닐이 라가 될 수가 없다. 그런데 한번 의심을 하자 이상한 점이 떠올랐다.

‘그런데 분명, 전하께서는 한 번도 다치신 적이 없단 말이야.’

룬에게 인간을 초월한 여러 특징이 있듯이 라에게도 그런 특징들이 있었다. 마법사와 기사에 모두 능한 것도 능한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이 만든 무기에는 결코 상처 입지 않는다. 마법사이니 마법에 당할 일도 드물고 무기에는 상처 입지 않으니 죽을 일도 없음이라, 전장의 선두에 직접 나아가 두려움 없이 적을 몰살하는 황제는 제국이 전쟁에서 항상 승리할 수 있는 큰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어야만 했다. 만약 오닐이 ‘라’라면…… 오닐이든 황태자든 둘 중 한 명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 황태자가 지금의 지위를 지킬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이던가? 황제가 강력하게 밀어주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귀족들이 마지못해 황태자를 지지하는 이유는 황자들 중에 라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었다.

이브는 쓸데없는 생각이라며 고개를 털었다. 만약 세피아 오카프가 룬이었다면 황제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이브의 마음속에서는 희미한 의구심과 불안감이 남았다.

그날 이브는 밤새 뒤척였다.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워하다가도 다른 한편으로는 빛나는 태양의 관을 쓴 오닐의 모습이 얼마나 근사할지 상상해 보기도 했다.

이날 이후로도 사교 모임에서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다. 이브는 꼬박꼬박 오닐이 가는 곳마다 모습을 드러냈고, 오닐과 이브는 인사를 건네고 사담을 나눌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오닐을 볼 때마다 이브는 자신이 태양 빛에 눈이 먼 사람 같다고 생각했다. 오닐 외의 것은 도무지 신경이 쓰이질 않았다…….

이브가 오닐의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오닐 오젤리스는 매일 이브의 심장을 태웠다. 이브의 심장은 매일 같이 새로이 뛰고 또 새로이 정염의 불길에 달아올랐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자 이브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보통 길어도 이브의 연애는 한 달이 채 가지 않았던 탓이다. 브리건은 어째서인지 내내 침울하고 불안해했고, 벨제는 이브에게 언제쯤 그만 만날 거냐고 찔러보기까지 했다.

‘언제쯤 그만 만날 거냐니, 사귄 적도 없는데.’

물론 그만 만날 생각도 없었다. 이제까지 가볍게 사귀었던 사람들과 오닐은 경중부터가 달랐다. 오닐과는 아직 사귀어 보지도 못했지만, 그래도 이브는 현재 자신의 위치에 만족했다. 이렇게 사교 모임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아이린 백작이 이브를 불러낸 건 오닐이 수도로 귀환한 날로부터 석 달 가량이 흘렀을 때였다. 그 시기에는 팬텀가 모든 식솔들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황제와 팬텀가의 대립이 전보다 더 격렬해져 살얼음판을 걷는 듯 모두가 조심스러웠다. 이브의 호위기사로 움직이는 벨제조차도 종종 아이린에게 불려 나가 자리를 비울 정도였다.

그러나 팬텀가의 사람들은 이브에게만은 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려 주지 않았다. 그를 위해서가 아니라, 원래부터 ‘에블랑 팬텀’의 위치가 그렇기 때문이다. 만에 하나라도 입양된 자식인 이브가 후계인 브리건을 위협해서는 안 되기에 어릴 적부터 이브가 배울 수 있는 것들은 한정되어 있었다. 검술이나 귀족으로서의 교양 상식 정도다. 오닐이 이브에게 정치에는 어울리지 않겠다 한 것도 이런 이유가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이럴 때마다 아주 답답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일 터였다. 그러나 이브는 이런 상황을 조용히 받아들이기만 했다. 그의 어머니, 아이린 백작의 말이 팬텀가에서는 곧 법이었으니.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사냥 모임이 끝나자마자 아이린이 부른다는 소리에 이브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바로 향했다.

“어머니.”

이브가 서재 앞에서 똑똑 문을 두드렸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긴 머리카락이 물결쳤다. 사냥을 위해 높이 동여맨 백금발과 감청색 사냥복 차림은 이브에게 정말 잘 어울려서, 그의 외모에 익숙한 사람들도 한 번씩 흠모하는 시선을 보내게 만드는 것이었다.

곧장 안에서 들어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브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통신구를 손에 쥐고 있던 아이린이 고개를 들었다. 한창 업무를 보는 중이었는지 책상 위에 서류들이 많았다.

“앉아라.”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이브가 아이린의 앞에 앉았다. 백금발은 팬텀가에서 자주 발현되는 특징이기도 했다. 이브는 자신이 아이린과 비슷한 머리색을 가진 것에 대해 진심으로 다행으로 여겼다.

“짐승 냄새가 나는구나.”

“아, 죄송합니다. 막 사냥을 하고 돌아온지라…….”

이브가 당황했으나 아이린은 지적하면서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녀가 통신구를 내려놓으며 잠깐 이브를 살폈다. 이브가 마른침을 삼켰다. 옷을 갈아입고 올 걸 그랬나, 작은 후회도 들었다. 이브에게 있어 아이린은 언제나 상대하기 어려운 존재였다.

“요즘 자주 사교 모임에 나간다고 들었는데.”

“예, 그렇습니다.”

“그래, 요즘에는 누구를 만나러 다니지?”

찔리는 게 있었던 이브는 잠시 아이린의 눈치를 보았다. 평상시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가 화를 낼 때나 기분 나쁠 때나 항상 저런 모습이란 걸 알기에 이브는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린이 추천한 약혼자들이 새삼 다시 떠올랐다.

“저…… 한 달 전쯤에 에이든 영애와 무도회에서 만났습니다.”

“에블랑.”

아이린이 이름을 한 번 부른 것만으로도 이브는 애써 변명하려던 의지를 잃고 말았다.

“실은 최근에는, 5황자 전하와 자주 만남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질책을 감수하고 말을 꺼냈으나 뜻밖에 아이린은 그다지 노여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심지어 놀랍게도 이브에게 이렇게 물어 왔다.

“5황자 전하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군.”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5황자 전하와 혼인을 올리면 어떻겠느냐?”

이브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뒤늦게 예? 하고 반문하자 아이린이 이브의 앞에 작은 상자를 하나 놓았다. 조심스럽게 열어 보니 보석이 하나 들어 있었다. 꽤 알이 굵은 오팔이었다. 이브가 잠깐 입을 벌렸다.

“어머니, 이건……?”

“5황자 전하 쪽에서 보내온 보석이다.”

“전하께서 제게 약혼을 청하셨단 말입니까?”

귀족들은 약혼을 하기 전 서로 보석을 교환했다. 귀족뿐만이 아니다. 일반 백성들도 보석까지는 아니어도 값싼 광석이나 예쁜 돌 따위를 교환하곤 했다. 보석처럼 그들의 사랑이, 혹은 동맹이 오래가기를 바라는 기원에서였다. 게다가 오팔은 별을 상징하는 보석이다. 룬인 이브에게 오팔을 보낸 건 아무리 봐도 약혼을 하자는 의미였다.

“갖고 가거라. 약혼은 다음 달에, 혼인식은 시기가 적절하면 올릴 계획이다.”

이브에게 이리 말을 하는 건 이미 사전에 다 논의가 끝났다는 이야기였다. 이브는 황망했다. 기쁘다기보다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고, 이해도 가지 않았다. 이브가 당혹스러워하든 말든 아이린은 용건이 끝났는지 손을 저었다.

“이만 나가 봐라. 이제는 네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며 행동하고.”

“……예, 어머니.”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이브는 서재를 나갔다. 터덜터덜 걷다가 브리건과 마주쳤다. 막 검술 훈련을 마치고 나와 수건으로 땀을 닦고 있던 브리건이 활짝 웃으려다가 이브의 표정을 보고는 의아해했다.

“형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손에 들고 있는 건 또 뭐고요?”

“아, 리브……. 그게…….”

브리건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뻔히 짐작이 가서 이브가 머뭇거렸다.

“이번에 약혼하게 되었거든.”

아니나 다를까 브리건의 얼굴이 얼어붙었다. 그는 이브가 들고 있는 함이 보석함임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가 잠시 몸을 떨었다. 이내 큰 노성이 터져 나왔다.

“약혼이요?!”

누구와 어떻게 약혼을 하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들은 브리건은 장본인인 이브보다도 더 펄펄 날뛰었다. 이브가 겨우 어르고 달래어 진정시키자 눈가가 벌겋게 물들 정도로 애써 분을 삭였다.

“백작님께서는 대체…… 형님을 어떻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괜찮아, 리브. 5황자 전하라면 오히려 내게 더 좋은 일이잖아.”

“제가 그것 때문에 화를 내는 게 아니잖습니까. 형님은 화도 나지 않으세요? 정말 이대로 혼인하게 되어도 괜찮으신 겁니까?”

이브는 그저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종종 브리건은 아이린에게 과도한 반발심을 드러내곤 했다. 어린 시절 이후로 그가 아이린을 어머니라고 부르는 걸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확실히 아이린이나 양부인 네이썬 모두가 다정다감한 부모는 아니었다. 특히 네이썬은 겨우 한 달에 한 번 얼굴을 볼까 말까 하였다.

물론 이브도 아이린이 자신을 어떤 식으로 다루고 있는지는 안다. 그러나 어쨌든 아이린은 부모에게 버려진 그를 거두어 준 사람이었다. 덕분에 물질적인 부족함 없이 자라났다. 또한 브리건이 누릴 수 있는 사치는 이브에게도 동등하게 허락되었다.

다만, 이브가 아이린을 쉬이 대할 수 없는 것이 입양된 자식으로서 가지는 감사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째서인지 이브는 가끔, 아이린을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무서울 때가 있었다…….

이브는 이내 고개를 저어 산만한 생각을 흐트러뜨렸다.

‘어쨌든 어머니시니까.’

마치 잘려 나가기라도 한 듯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아예 없는 이브에게 있어서 팬텀가는 가족이었다.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였고, 동생이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이번 일도 당혹스럽긴 했으나 화가 날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상대가 오닐인 것이 큰 이유이기도 했다.

“형님…….”

그런데 어쩐지 이브를 바라보는 브리건의 얼굴이 음울하기까지 했다. 리브? 이상하여 묻자 잠시 뒤에 브리건이 아주 이상하리만치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그러더니 이브의 손을 꾹 쥐었다. 어찌나 세게 잡던지 손이 다 얼얼할 지경이었다. 그가 애타게 이브를 바라보았다.

“형님. 혼인하시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브리건의 말에 이브는 퍽 당황했다. 이는 이브가 오닐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혼인이 아니다. 설사 그가 오닐을 싫어한다고 해도 이루어졌을 것이다. 브리건은 이브의 반응에 움찔하고는 잠시 후에 손을 떼어 내며 천천히 미소 지었다. 억지 미소였다.

“아닙니다. 그, 제가 과민하게 반응했지요. 약혼 축하드립니다.”

“그……래.”

“일이 있어서……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브리건이 고개를 까닥해 보이고는 이브를 스쳐 지나갔다. 이브는 한참 브리건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방에 돌아가 보니 요즘 따라 얼굴 보기 힘들던 벨제가 빈둥거리고 있었다. 이브의 손에 들린 함을 보고도 궁금해하는 기색도 없는 걸 보니 사전에 이 약혼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이브는 솜을 가득 넣어 푹신한 안락의자에 털썩 앉으며 솔직하게 물었다.

“벨제, 아무래도 리브가 나한테 좀 집착하는 면이 있는 것 같지?”

“그걸 이제 아셨습니까? 눈치가 없으신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시는 건지…….”

벨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히 물어봐선 타박이나 받았다. 이브는 보석함을 다시 열어 보았다. 동그란 오팔이 빛을 발했다. 처음 아이린에게서 약혼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너무 갑작스러워서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는데, 오팔을 손에 쥐어 보니 갑자기 열기가 훅 치밀어 올랐다.

“약혼…….”

아마도 팬텀가와 오닐 사이에 이해득실이 맞으니 약혼을 하게 된 것이겠지. 정략혼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이브는 좋았다. 적어도 오닐이 자신을 만나는 동안에 일종의 호감이라도 있던 게 아닐까. 자신을 약혼자로 삼은 이유에는 그 호감이 어느 정도라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이브는 별무리처럼 흰 빛을 뿌리는 오팔을 만지작거리며, 그날 밤 한참을 오닐의 생각에 잠겼다.



그날로부터 한 달도 채 안 되어 두 사람은 약혼을 했다. 약혼식은 서로 서류와 보석을 몇 가지 나누는 것으로 간소하게 이루어졌다. 사실 약혼식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했다. 이브는 오닐의 얼굴을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정작 약혼을 하고 난 뒤부터 이브는 전보다 오닐의 얼굴을 보기 힘들어졌다. 그는 이제 사교 모임이 아니라 황궁을 들락거리며 귀족들을 포섭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이조차도 브리건이 만날 때마다 귀띔을 해 준 덕에 알 수 있었다. 이브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은연중에 느끼고 있었으나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자, 팬텀가에는 사병과 기사들의 수가 늘어났다. 언제부터인가 집사장은 이브가 외출하려 하자 은근하게 막으며 저택에 머무를 것을 권유했다. 사실상 권유지 아이린의 지시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정문까지 나갔다가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다.

이브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이었다. 오닐은 물론이거니와 아이린과 브리건의 얼굴도 보기 힘들어지고, 자주 즐기던 사교 모임에도 나가지 못하니 벨제나 곁에 끼고 지냈다. 벨제가 시무룩해진 이브를 안쓰럽게 여겨 평소에는 못 마시게 막던 귀한 술을 가져다주자 감동한 이브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잔소리를 너무 많이 하는 편이라 별로긴 하지만 벨제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해.”

줬던 거지만 다시 뺏어 버릴까 말까, 고민하며 벨제가 바라보자 이브는 얼른 벨제의 술잔에도 술을 꽉꽉 채워 주었다.



그렇게 또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다.

어느 날 갑자기 팬텀가에 상주하고 있던 사병과 기사가 싹 사라졌다. 팬텀가에 감돌던 긴장감도 사그라들었으나 정작 이브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아이린이 황궁 근위 기사단과 함께 나타났다. 다들 침착한 가운데 이브 혼자서만 이게 무슨 일인가 놀랐다.

“어머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에블랑.”

아이린은 전에 없던 부드러운 태도로 이브를 불렀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 이브의 뺨에 손을 얹었다. 마치 귀한 것을 대하는 듯 가볍게 쓰다듬은 뒤 다시 손을 떼어 낸 아이린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녀는 마치 황족이라도 대하는 것처럼 아들을 대하고 있었다. 이브는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앞으로 당신께서는 황제 폐하와 함께 더불어 이 제국을 이끌어 가시게 될 겁니다.”

그리 말하며 다시 고개를 든 아이린의 얼굴에는 처음 보는 낯선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바로 승자의 미소였다.



***



입궁한 뒤에야 이브는 그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오닐 오젤리스가 라 엠페라움이라는 칭호를 달고 황제가 된 것이다. 자연스럽게 약혼자였던 이브도 이제 황후가 되어 엠페라움의 칭호를 달게 될 예정이었다.

오닐 오젤리스는 11년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국경지역의 전쟁터를 돌며 착실히 명성을 쌓아 올렸다. 기사들과 병사들 사이에서는 결코 패하지 않는 지휘관으로 용맹을 떨쳤으며, 복구 지역에 직접 찾아가 상처 입은 백성들을 위로해 민심을 얻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닐이 쌓은 공적에 따라 명예와 부가 드높아져만 갔다. 믿기지 않는 전설 같은 무훈이 수도에까지 다다랐다. 더는 내버려 둘 수 없겠다 싶어 황제는 마침내 오닐을 수도로 다시 불러들였다.

그렇게 오랜만에 수도로 돌아온 오닐은 사교계를 두루 돌아다니며 귀족들과 착실히 인맥을 쌓았다. 그의 세력을 다지고 포섭하고 끌어들였다. 귀족 중에서는 꽤 유서 깊은 가문인 팬텀가의 장자와 약혼을 맺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어느 날 공표했다.

오닐 오젤리스는 평범한 황자가 아닌 제국의 적통 핏줄을 이은 ‘라’다.

하루아침에 제국이 발칵 뒤집혔다. 황태자가 황위를 잇는 걸 마지못해 인정하고 있던 귀족들과, 라가 아닌 황태자를 반대하던 귀족들, 황제, 황자들까지 핏대를 올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온갖 부정과 중상모략, 비난과 불신이 오갔다.

황제가 왜 오닐을 내버려 두었는가. 그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그저 황자일 뿐이었기에 그리했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 황후와 그 적장자란 이점을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란 자질은 그 모든 것을, 황제의 총애와 무수한 노력들을 무시해도 될 만한 것으로 만들었다.

황제는 안간힘을 다해 오닐을 죽이려고 들었다. 오닐뿐인가, 그와 손을 잡은 팬텀가의 숨통도 조였다. 오닐의 친모인 세피아 오카프가 평범한 인간일진대 어찌 거짓 우롱하느냐 고성이 매일같이 비취의 방을 쩌렁하게 울렸다.

그러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없애기에는 오닐은 너무나 커 버린 상태였다. 아무리 그간 황제와 대립하며 그 세가 많이 줄었다지만, 대대로 기사들을 배출해 낸 가문인 팬텀가도 쉬이 찍어 누를 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또한 오닐의 모후인 세피아 오카프는 신전 출신이었다. 신을 섬기는 신전은 본래 세속을 멀리하여 황가의 일에는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국 사람들 모두가 신을 섬겼기에 민심이 세피아 오카프와 그의 아들인 오닐에게 향했다.

오래도록 황제가 인정해 온 황태자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라’인 황자. 어느 한쪽이 죽지 않고서는 쉬이 승부가 나지 않을 싸움이었다.

결국 황궁에는 한바탕 피바람이 불었다.

한 달에 걸친 지루하고도 날 선 공방 끝에 오닐은 황제의 수족을 모조리 꺾어 냈다. 그는 황제를 죽이지는 않았다. 다만 궁지에 몰았다. 결국 황후만은 살려 준다는 조건으로 황제에게서 옥새를 건네받을 수 있었다. 반역이나 다름없는 행위였으나 황궁 사람들이 모두 모르는 척 눈을 감았다. 이제껏 황후와 황태자가 마음대로 국고를 축내는 것도, 전쟁이 벌어지는 것도 황제가 모두 내버려 뒀던 탓이다.

그날 밤, 오닐은 호박궁의 정원을 가로질러 걸어가 겁에 질린 황태자를 끌어냈다. 그는 목숨을 구걸하는 황태자의 멱살을 쥔 채 눈을 가린 궁수들에게 활을 쏘라 지시했다.

오닐을 비껴가는 화살이 황태자에게만은 그대로 쏟아져 내리는 걸 수많은 이들이 눈으로 직접 목격했다. 비처럼 쏟아지던 무수한 화살들은 오닐의 머리카락 하나 상하게 만들지 못했다. 단지 하나의 화살, 그 화살의 깃만이 겨우 오닐의 귀걸이를 흔들리게 만들었을 뿐이다.

화살 세례가 끝난 뒤 오닐은 아량을 베푸는 모양새로 어의를 불러 황태자를 치료하라 지시했다. 어의는 황태자의 몸에서 총 열일곱 대의 화살을 제거했다. 마법사도 기사도 아닌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그날 동이 트기 전 황태자는 숨을 거두었다.

황태자뿐만이 아니었다. 모든 황자들과 후궁들이 황궁에서 쫓겨났다. 황태자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던 귀족들은 모조리 목이 잘렸다. 오닐은 황제와 황후에게 감시를 붙여 제국의 수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별궁으로 보낸 뒤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선대 황제의 사랑 놀음에 질려 있던 귀족들은 이 젊은 황제에게 기꺼이 머리를 조아렸다.

이 모든 게 이브가 팬텀가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지내는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