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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의 이브닝 5화



이브는 하루아침에 제국의 룬 엠페라움이 되게 생겼으니 그저 황망할 따름이었다. 시종들은 지극히 공손한 태도로 이브를 오팔궁에 안내했다. 유일하게 바뀌지 않은 건 호위기사로서 곁에 남게 된 벨제뿐이었다. 갑자기 바뀐 상황에 신경을 쓰느라 이브는 속이 다 쓰라렸다. 고질적인 위장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벨제는 이브의 상태를 바로 파악했다.

“궁의를 부를까요?”

이브는 벨제의 권유를 무시하며 털썩 침대에 앉았다가 은연중에 감탄했다. 팬텀가에서 사용하던 침구도 충분히 질 좋은 물건이었으나 황궁의 침대는 정말 푹신하고 부드러워 온몸이 잠겨드는 듯했다.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아 문에 박힌 오팔 보석을 보던 이브가 얕은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 전하께서 내게 오팔을 주신 거였군.”

오닐이 팬텀가에 약혼 제안을 할 때, 이미 그는 황위에 오를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브가 룬이기 때문에 오닐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을 것이다. 안 그래도 선대 황제가 룬이 아닌 황후로 인해 골치를 꽤 썩였으니, 오닐의 약혼자가 룬이라는 건 그의 정통성을 돋보이도록 하기에 좋았으리라.

그리 생각하자 이브는 어쩐지 제 심장이 올가미에 채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젠 오닐이 자신이 좋아서 혼인을 올린 게 아니란 걸 알겠다. 완전한 정략혼이었다. 오닐도 팬텀가도 선대 황제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서로 손을 잡은 것이니.

‘잘된 일이잖아.’

이브가 스스로를 설득하려고 애썼다. 비록 이 모든 일이 진행되는 동안 오닐이 단 한 번도, 조금의 언질이라도 해 주지 않았다는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이제 오닐의 반려는 이브였다. 이브에게는 앞으로 시간이 많았다. 그 많은 시간 중에 오닐이 이브에게 정 한번 주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브는 그리 생각했다.

입궁 다음 날부터 그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대관식와 혼인식이 연달아 있기에 하루에도 수십 번씩 재단사가 들락거렸다. 몸에는 무수히 많은 색의 옷감이 대어졌다. 이브가 하루 종일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팔을 벌리고 재단사가 줄자를 들이대는 걸 참는 동안 옆에서는 왕궁 예법사가 달라붙어 온갖 복잡하고 까다로운 식 절차를 수도 없이 반복하여 설명했다. 그가 기사였기에 망정이었지 다른 사람 같았으면 나가떨어졌을 만한 강행군이었다.

이런 일이 일주일 내내 반복되자 지친 이브는 오닐이 자신을 약혼 대상으로 선택한 이유 중에 자신이 체력 좋은 기사라는 점도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닐까 진심으로 생각했다. 벨제에게 이런 생각을 털어놓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음, 그런데 이브 님은 이제 기사가 아니시거든요.”

그리고 과연 벨제의 말대로였다. 얼마 안 가 이브는 자신의 소중한 검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브가 기사가 된 날부터 매일같이 차고 다니던 검은 이제 대신 벨제의 허리춤에 매달렸다.

그가 이 모든 일을 감내한 건 오로지 오닐 때문이었다. 여전히 오닐을 향한 감정이 심장을 불살라 태우고 있었기에, 이 지루한 과정 끝에 기다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괴로움보다는 설렘이 컸기에 조용히 받아들였다.

한참 동안 오닐을 보지 못했기에 이브는 대관식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대관식 전날에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정도였다. 그러나 정작 대관식 날이 오자 그는 오닐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그날 하루 종일 오닐의 옆자리에 앉아 정면만을 바라봐야 했기 때문이다. 오닐에게 금색 정복이 아름다울 정도로 잘 어울린다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지루하고 힘든 대관식이 끝나고 난 뒤 이브는 완전히 지쳐 버렸고, 돌아오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겨우 한 시간쯤 잔 것 같은데 시녀들이 깨웠다. 겨우 눈을 떠 보니 벌써 아침이었다. 그는 아직 피로가 덜 풀린 몸으로 억지로 일어나 혼인식을 준비해야 했다.

이브가 잠에서 깨려고 애를 쓰는 동안 시녀와 시종들이 달라붙었다. 그들은 찬 얼음주머니로 눈꺼풀을 다독여 졸음을 쫓아 보낸 뒤 금사가 수놓인 예복을 입혔다. 긴장을 해서 그런지 식사를 할 틈도 없어서인지, 아니면 위장병이 도져서인지 속이 쓰라렸다.

혼인식은 대관식을 올렸던 그 장소에서 진행되었다. 워낙 정신이 없던지라 이브는 나중에야 그 장소가 ‘다이아몬드 홀’이라 불린다는 걸 알았다. 그때의 이브에겐 홀 이름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다이아몬드 홀의 시작점, 오닐이 그와 함께 나란히 서 있었다. 살면서 그다지 긴장해 본 적이 없는데 이브는 이때만큼은 손을 떨 정도로 긴장했다.

신관이 금색 천을 태워 혼인식의 시작을 알렸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브는 오닐과 함께 긴 홀을 걸어 지나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옷자락에 매달린 보석들이 부딪치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긴 홀을 걷는 그 시간은 영원처럼, 혹은 아주 짧은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혼인식을 주관하는 신전의 신관 앞에서 오닐과 마주 섰을 때, 이브는 모든 피곤함을 잊었다.

오닐의 눈부신 금발 위에 루비와 토파즈들을 통째로 깎은 뒤 금으로 이어 만든 화려한 관이 씌워져 있었다. 그의 머리 위에서 루비가 이글거리는 붉은 색을 발했다. 마법사가 띄운 환한 광구에서 쏟아져 나온 빛이 자색 눈동자 안에 영글었다. 오닐이 가진 보석 중 가장 빛나는 것은 그의 눈동자였다.

그가 입은 예복이 자신과 동일한 것임을 눈으로 보고 난 뒤에야 이브는 그제야 자신이 정말 오닐과 혼인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모든 일이 워낙 빠르게 진행되어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이어 이브의 머리에도 보석으로 만든 관이 씌워졌다. 마찬가지로 오팔과 토파즈를 깎은 뒤 은으로 이어 만든 화려한 관이다. 이브의 얼굴이며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신관이 무어라 말하는지 도통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브는 눈도 깜박이지 않고 그저 오닐만을 바라보았다. 그간 오래도록 보지 못했으니 새삼 반갑고 그리움이 넘쳤다.

무심하게 신관을 바라보던 오닐이 마침내 몸을 돌렸다. 뒤늦게 이브의 긴 시선을 알아차리고는 얼굴에 웃음을 걸쳤다.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숙였다. 넋을 놓은 이브의 입술에 부드럽고 말랑한 것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신관이 길게 종소리를 세 번 울렸을 때에야 이브는 혼인식이 끝났다는 걸 깨달았다.

다이아몬드 홀을 나가기 직전 이브는 신관이 건네는 등불을 받았다. 이 등불의 불이 꺼질 때까지 황제와 황후는 침소 밖으로 나와서는 안 된다.

오닐과 등불을 쥐고 오팔궁으로 향하며, 이브는 긴장하여 숨을 몰아쉬었다. 혼인식이 왜 벌써 끝났더라. 그러고 보니 아까 오닐과 입 맞춘 것이지. 그럼 오팔궁에 들어가고 나서는……. 생각이 가닥가닥 끊겨 이어지는 가운데 이브의 얼굴이 점차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오팔궁의 침소에 들어가니 시종들이 조명을 모조리 꺼 두어 사방이 어둠에 잠겨 있었다. 사방에 박혀 있던 오팔이 오닐과 이브가 든 등불 빛을 반사하며 반짝거렸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별 같았다.

사락거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뒤돌아보니 오닐이 등불을 내려 둔 채 겉옷을 벗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이브도 등불을 내려 두었다. 하지만 그러고도 긴장하여 옷을 벗진 못하고 옷깃만 만지작거렸다. 오닐은 어느새 목을 죄고 있던 예복의 옷깃을 풀어 느슨하게 하고 있었다. 오닐이 팔을 움직일 때마다 푸른 핏줄이 느리게 꿈틀거렸다. 벌어진 옷깃 사이로는 전쟁터를 전전하면서 잘 다져진 근육이 드러났다.

“에블랑.”

오닐이 부르자 저도 옷을 벗을까 말까 망설이며 바짝 긴장하고 있던 이브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이브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음? ……아, 그래. 뭐 이 정도는 괜찮겠지. 그대에게 해 둘 말이 있습니다.”

침소에 들어오고 난 뒤 그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있던 이브가 눈을 깜박였다. 오닐이 제게 할 말이란 게 대체 무언가 싶었다. 방금 혼인식을 마친 젊은 황제는 탁자로 걸어가 그 위에 놓여 있는 술병을 들었다.

“오늘 밤 이후로 내가 밤에 오팔궁을 찾는 일은 없을 겁니다.”

잠시 후에야 이브는 오닐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혼인식 동안에는 괜찮더니 이제와서 갑자기 속이 쓰리기 시작했다. 통증을 무시하려고 애쓰며 이브가 물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내가 혼인을 올린 건 그대가 룬이며, 당시에는 팬텀가가 내 정치 기반으로 삼기 가장 적합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브도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제국이 존재하는 한 오닐의 반려는 자신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오닐이 벌써부터 후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니 이브는 입안이 바짝 말랐다.

“언젠가는 그대의 몸에서 자식을 봐야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난 팬텀가에 과도한 힘을 실어 줄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 혹여나 오해는 말길. 그대를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것도 아니니.”

술병을 여는 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울렸다. 오닐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브를 돌아보았다.

“어차피 정략결혼이란 게 다 이런 것이지, 안 그래요?”

이브는 꿈결 같던 지난 며칠 동안의 시간에서 빠져나와 비로소 현실에 던져졌다. 아까는 별처럼 빛났던 오팔이 지금은 그저 광석의 희미한 반사광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오닐은 유리잔에 술을 따르고는 이브의 얼굴을 살펴보다가 물었다.

“그래, 날 좋아한다고 했었지. 실망했습니까?”

아까부터 오닐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이 날카롭고 잔인하여 가슴이 난도질당하고 있던 이브가 가까스로 예, 하고 대답했다. 오닐은 가볍게 웃었다.

“그러니 앞으로는 실망하지 않도록 기대도 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이브는 깨달았다. 오닐이 웃는 것은 그저 습관에 의한 것이라 이브를 향해 웃어 주는 게 아니고, 얼핏 다정해 보이는 말투와 태도는 그저 선을 긋는 방법 중 하나일 뿐이었다.

오닐이 술을 따른 유리잔을 내밀었다. 이브는 굳은 팔을 움직여 유리잔을 받았다. 갑자기 요 며칠 사이에 받았던 피곤함이 한꺼번에 밀려들기 시작했다. 어깨며 팔, 그리고 다리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귀한 술을 마시면서도 술 맛이 좋은지도 몰랐다. 식 절차에 따라 오닐도 술 한 잔을 깨끗하게 비웠다.

“내일부터 바빠질 테니 일찍 자는 게 어떻겠습니까. 어차피 더는 우리가 이곳에서 할 일도 없으니.”

내용은 권유였으나 말투는 명령이었다. 이 또한 모욕적이었다. 오닐이 이불을 걷었다. 그의 말에 머리가 멍했던 이브가 침대로 향하다가 멈칫하고는 예복을 벗었다.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가 예상한 밤은, 혹은 혼인은, 그와 단둘이 나누리라 생각한 대화는 결코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이브가 옷을 벗어서 차곡차곡 개어 놓는 걸 보다가 오닐이 문득 물었다.

“그러고 보니 기사였다고 했죠. 어디에서 활동을 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서 만난 것 같은데.”

별로 대답할 기분도 아니었고 대답하기도 싫었던 이브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기사였을 때부터 좋아해 왔다는 걸 오닐이 알게 되면 더욱 비참해질 것 같았다. 이브가 조용히 이불을 덮고 눕자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았는지 아니면 그 정도의 동정심은 있었는지 오닐은 더는 묻지 않았다.

그날, 속이 몹시 아프고 쓰라려 새벽에 깬 이브는 오닐이 침소를 떠나고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 아직도 불이 일렁이고 있는 등불을 껐다.



***



오닐의 말대로 그다음 날부터 이브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난 이브는 일단 궁의부터 불러 위장약을 먹은 뒤 태후에게 문안 인사를 올리러 갔다. 태후가 지내는 수정궁은 커다란 호수 옆에 바로 지어져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는 곳이었다.

태후인 세피아 오카프는 아름답고 우아한 여인이었다. 이브를 바라보는 표정은 무심하다 못해 무표정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럼에도 그는 태후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문안 인사를 올리자마자 태후가…….

“팬텀 백작은 사사건건 신전이 하는 일에 훼방을 놓았지.”

눈빛을 번득이며 말했기 때문이다. 신전 출신인 태후는 아이린에게 사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이브는 오랜 시간 동안 숨 막히는 침묵 속에 태후와 차를 마시며 보내다가 나왔다. 정신적으로 기력 소모가 심했다. 그다음으로는 황궁 안을 돌며 내궁을 하나하나 살펴야만 했다. 오닐이 황성 밖을 다스린다면 황성 안을 다스리는 건 이브의 몫이었다.

황궁을 모두 돌고 나자 시종과 시녀들의 체계를 다시 편성해야 하는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이 처음인 이브는 혼이 다 빠져나갈 지경이었다. 이제까지 이브의 인생은 오로지 검술과 사교 모임, 이 두 가지뿐이었던 탓이다.

‘그저 오닐을 좋아하기만 했지, 내가 뭐 많은 걸 바란 것도 아닌데.’

피곤한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엎어진 채 이브가 생각했다. 오닐과 혼인한다고 했을 때 이런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누구도 이브에게 한 마디 언질도 주지 않았다. 누가 손에 쥐고 이리저리 방향을 움직이는 장난감 조각배가 된 것만 같았다.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어쨌든 이제 그는 황후였다. 이 자리를 무를 수는 없었다. 그는 불평도 하지 않고 꾸역꾸역 맡은 일들을 해치웠다. 억지로라도 이 자리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이브에게 위안이 되는 것 하나는 전보다 오닐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일주에 한 번, 이브는 황족들과 함께 저녁 만찬에 참가했다. 오닐이 가차 없이 모조리 내쫓은 탓에, 황족들이라고 해 봤자 이브까지 포함해 고작 다섯 명밖에는 되지 않았다. 황제, 태후. 그리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족이자 오닐의 친동생 둘이다. 새로운 성을 하사받은 세트라 호라이스 엠페라움은 행정부에 소속되어 있었고, 다른 한 명 스카는 신관이 되면서 엠페라움이라는 호칭을 포함하여 모든 성씨를 버렸다.

식사 시간은 빈말로도 화기애애하거나 떠들썩한 분위기라고 할 수 없었다. 종종 황제가 참석하지 않을 때도 허다했다. 게다가 태후 세피아나 오닐은 딱히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다. 신관 스카는 묵언 수행이라도 하는지 아예 말이 없었다.

유일하게 세트라가 그중에는 사교적인 편이었다. 그는 혼인식 날 밤 오닐에게서 들은 말 때문에 아직까지 시무룩한 이브를 안쓰럽게 여겼는지 종종 다정하게 말을 걸어 주곤 했다.

이브를 안쓰럽게 여긴 건 세트라 뿐만은 아니었다. 한 달 내내 기가 죽어 다니자 벨제는 평소에는 그리 술 좀 자제하라고 잔소리하더니 슬그머니 이브가 가장 좋아하는 술을 안겨다 주었다. 이브의 시중을 드는 시종과 시녀들은 부드럽다 못해 간들거리도록 비위를 맞추려고 무던히 애를 썼다. 심지어 태후도 문안 인사를 받을 때마다 날카롭던 눈매를 차츰차츰 누그러뜨리더니 하루는 대놓고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가장 이브를 가엾게 여긴 건 브리건이었다. 아니, 사실 가엾게 여기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팔궁을 방문한 브리건은 얼굴이 몹시도 음울했다. 약간 수척하기까지 했다. 이브가 다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리브……. 어디 아픈 것은 아니지?”

“아닙니다, 형님.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전혀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심지어 브리건은 오닐이나 아이린을 향한 비난 비슷한 것도 입에 담지 않았다. 그저 정말 순수하게 형님이 뵙고 싶어 찾아온 것처럼 한참 이브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돌아가기만 했다. 이브가 한숨을 쉬었다. 브리건도 저처럼 그다지 잘 지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혼인식으로부터 한 달이 지난 때, 오닐이 오팔궁을 찾았다. 이브가 어느 정도 황궁 생활에도, 가까이 있어도 전처럼 거의 볼 수 없는 황제를 향한 그리움에도 그럭저럭 익숙해지고 있을 시기였다.

처음으로 열게 된 테라리움에서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나 이브가 고심하고 있는데 황제가 별 기별도 없이 들이닥친 것이다. 오닐은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는 시종과 시녀들을 손짓으로 물렸다. 벨제만이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이브의 눈짓을 받고 물러났다. 당황한 건 이브도 마찬가지라 겨우 인사를 했다.

“라 엠페라움을 뵙습니다.”

오늘의 오닐은 평소에 비해 가벼운 옷차림이었다. 초여름에 접어드는 때라 그도 갑갑했는지 소매를 걷어 올려 그을린 팔뚝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채신이 없다기보다는 그조차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그 오랜 기간을 전쟁터에서 보냈으나 피부에는 흉터 하나 없었다. 그러고 보면 전쟁터에서도 유달리 가벼운 갑주만을 즐겨 입곤 했다. 아무래도 ‘라’니 무거운 갑주는 오히려 방해만 되었을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열심히 오닐의 갑주를 챙겨 다녔지…….

과거 일을 떠올리니 이브는 다소 침울해졌다. 정말 이런 자리 같은 건 꿈에도 바란 적 없었다. 차라리 기사로서 오닐을 위해 움직이던 때가 좋았는데. 정말 좋았는데…….

“그런 얼굴로 모두를 홀렸군.”

“……예?”

무슨 말인가 해서 이브가 고개를 들었다. 오닐은 사뭇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자색 눈동자만은 서늘했다. 짙은 눈썹 끝이 살짝 올라갔다.

“몰랐습니까? 최근 황궁에서 내가 퍽 나쁜 놈이 되어 가고 있던데. 오늘은 모후께서도 내게 무어라 나무라시더군요.”

이브는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이번에는 옥산을 상대할 때와는 다르다. 고의가 아니라 정말 기분이 안 좋았으니까. 그걸 가지고 홀렸다고 하니 좀 억울하였다.

“딱히 수작질을 한 건 아닙니다.”

“수작질이라고 생각 안 합니다. 그런 일을 할 만한 성격은 아닌 것 같으니까.”

오닐은 여전히 선을 긋고 있었으나 그래도 이렇게 얼굴을 마주보고 있다고, 이브는 또 가슴이 뛰었다. 심지어는 기분도 조금 나아졌다. 저녁 만찬 때를 제외하고는 이런 가벼운 대화를 나눈 건 혼인식 이후로 처음이었던 것이다.

오닐이 느른하게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대면서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깐 침묵하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말했지만, 그대가 좋은 건 아니지만 싫은 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몸 사릴 필요는 없습니다.”

“몸을 사려요?”

이해하지 못한 이브가 되물었다. 언제 몸을 사렸단 말인가? 황후가 된 후부터는 피곤하고 하기 싫어도 꾹 참고 주어진 일도 다 했는데……. 그러나 오닐이 말하는 건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아주 바쁠 때만 아니면 종종 나를 찾아와도 된다는 의미입니다. 아무리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서라지만, 황제가 황후를 만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나.”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이브는 그저 입만 다물었다. 오닐의 의도를 도통 알 수가 없었던 탓이다. 확실히 오닐을 일부러 찾아가지 않기는 했다. 여전히 그는 오닐을 좋아했다. 하지만 기대도 하지 말라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굳이 찾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헌데 오닐이 그리 말하니 괜한 기대감이 피어오르려 했다.

“일주일에 한 번 식사도 같이하는데, 며칠에 한 번 만나는 정도는 괜찮지. 후궁도 없으니까 말입니다. 원한다면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밤에 찾아가 줄 수도 있습니다. 나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거든.”

그리 말하고는 오닐이 덧붙였다.

“물론 아직은 자식을 가지면 안 되니 안아 주는 것은 룬의 태를 가지고 있지 않는다는 조건이지만.”

조마조마 마음을 졸이고 있던 이브의 얼굴이 굳었다. 혼인식을 올린 뒤부터 꿋꿋하게 참고 있던 서러움이 기어코 터져 눈가에 고였다. 이브는 대체 오닐이 자신에게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언제 저를 좋아해 달라고 조르기라도 했던가? 이브가 오닐에게 한 거라곤 그저 그에게 좋아한다 딱 한 번 솔직하게 말한 것이 고작이었다.

더는 참지 못한 이브가 따지고 들었다.

“이렇게 저를 모욕해 남는 것이 뭡니까? 폐하께서 대체 제게 뭘 원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리 오닐을 좋아하고 있다지만 마음 같아서는 멱살이라도 쥐고 대거리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심장이 아프다 못해 뚝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오닐은 이브의 눈가가 서러움으로 발갛게 물드는 모양을 잠깐 동안 말끄러미 보더니 이내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 한 자락을 걸쳤다.

“내 황후가 이리 솔직한 사람이니, 나도 솔직하게 말하도록 하지요. 나는 그대가 나에 대한 감정을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미워하면 더욱 좋을 것이고.”

이브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오닐이 자신을 좋아해 주지 않는 건, 그렇다 치자.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러나 좋아하는 마음까지 버리라 하는 건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좋아하지 않는 걸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좋아하는 마음 또한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브가 꽉 이를 악물었다.

“폐하께서는 정말 제 마음을 가볍게 생각하시는군요.”

오닐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손을 뻗었다. 이브가 움찔했다. 오닐이 눈물을 닦아 주는 척하는 동안 이브는 얼굴이 화끈거려 바닥만 노려보았다. 젖지도 않은 손가락을 거두며 오닐이 사근사근 말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나는 나름 그대를 위한 친절을 베푸는 거니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제까지처럼 지내도 괜찮고.”

“…….”

“용건은 이게 다입니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습니까?”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오닐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그리고 이내 몸을 돌려 응접실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