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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의 이브닝 3화



우는 게 더 좋겠다는 게 대체 무슨 의미지? 보통은 웃는 걸 좋아하잖아.

여전히 사내에게 시선을 빼앗긴 채로 이브가 제대로 이해도 못 하고 일단 고개부터 끄덕였다. 사내의 시선이 가볍게 이브를 위아래로 살피다가 떨어져 나갔다. 관심이 사라졌는지 그대로 떠나려 하기에 이브가 다급하게 붙잡았다.

“저, 저는…… 이브입니다.”

저도 모르게 말하고는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다짜고짜 애칭부터 소개하다니……. 다행히도 상대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오닐 오젤리스 엠페라움.”

오닐의 얼굴 보기에도 바빠 반쯤 넋이 나간 이브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반응에 오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름을 듣고도 놀라지 않는군요. 언제 우리가 만난 적이 있습니까?”

“아, 그건…….”

대답하기도 전에 오닐은 이브의 그림자에서 은은히 빛나는 별무리를 발견하고는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이브의 그림자를 보는 것만으로 모든 걸 이해했는지 오닐이 비스듬히 웃었다. 이브는 그의 분위기가 미묘하게 바뀐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마음이 다급하고 초조해져 무어라 더 말하려고 했으나 오닐이 무심하게 고개를 까닥이는 게 더 빨랐다.

“그럼 이만,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또 보도록 하죠.”

그 태도가 워낙 단호했기에 이브는 상대를 붙잡을 수도 없었다. 그의 시선은 오닐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끈질기게 향했다. 이브가 벅차오르는 가슴에 잠시 가쁘게 숨을 쉬었다. 오닐 오젤리스 엠페라움. 그를 여기서 이런 식으로 다시 재회하게 될 줄은 몰랐다. 당시 사정상 상대는 이브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브는 달랐다.

“아직 전장에 계실 줄 알았는데…….”

예상보다 빨리 수도로 귀환하였다. 이브는 가만히 전의 오닐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이제는 시간이 흘러, 전보다 머리가 더 길었고, 더 강건하고, 더 멋졌다. 전에는 인상을 굳히고 있을 때가 많았는데 지금은 전과 달리 잘 웃는 것 같기도 했다.

당시의 오닐은 이브에게 있어서 경외와 흠모의 대상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아니, 뜻밖의 장소에서 마주쳐 놀란 탓인지 그 감정이 더한 것 같았다. 아직도 이브의 가슴은 크게 부풀어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과거, 이브는 기사 작위를 위해 전쟁터로 나갔다가 오닐을 처음 만났다. 그리고 오닐과 함께 일 년 반이라는 시간을 함께 싸웠다. 팬텀가의 권세 덕에, 이브는 전쟁 도중 일찍 귀환할 수 있게 되었지만 결코 기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귀환하는 것보다는 전쟁터에서 오닐의 곁에서 싸우는 것이 더 좋았던 탓이다.

당시에 오닐은 지지 세력이 없는 5황자였다. 황제가 오닐을 죽을 때까지 전쟁터에서 굴릴 것이 뻔했고, 이브는 그를 이제 영영 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팬텀가로 돌아오고 나서는 한동안 실의에 잠겨 시름시름 앓을 정도였다. 아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여러 사람을 만나고 사귀며 겨우겨우 오닐에 대해서 잊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오닐을 만나니 완전한 착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닐과 지내던 그 시간들이 이렇게 선명하게 떠오르는데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그저 잠시 덮어 두었을 뿐이다. 오랜만에 다시 보니 오히려 그간 묻어 두고 있던 감정들이 더 극렬히 타올라 이브의 뺨과 귀에까지 그 열기를 번지게 만들었다.

재회의 여운에 젖은 채로 이브는 반쯤 넋이 나가 파티홀로 돌아왔다. 갑자기 오래도록 형님이 사라져 버린 탓에 안절부절못하며 파티홀을 돌아다니던 브리건이 이브를 발견하고는 아연한 얼굴로 다가와 물었다.

“형님, 어쩐 일로 술을 이리 많이 드셨습니까?”

“……응?”

한 박자 반응 느리게 대답하자 브리건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이 번졌다. 기분이 들떠 있던 이브가 만개하여 흐드러지는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브리건이 잠시 멍해졌다.

“그게, 형님 얼굴이 붉어지셨기에…….”

“아아, 딱히 술을 많이 마신 건 아니고…… 기분 좋은 일이 있었거든.”

브리건의 얼굴이 살짝 굳었지만 이브는 주위를 살피느라 눈치채지 못했다. 혹여나 오닐이 아직 파티홀에 남아 있지는 않을까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대로 떠나 버린 것인지 그날 파티가 끝날 때까지 오닐을 다시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팬텀가로 돌아온 이브는 그날 밤이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갑작스러운 만남을 곱씹으며 오닐의 얼굴을 떠올렸다.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다 못해 달고, 안에 봄바람을 탄 망아지를 넣어 둔 것처럼 심장이 뛰니 잠드는 것이 어찌 가능하랴.

이제는 완전히 돌아오신 걸까? 전쟁터는 위험한 곳이었다. 모든 황자들이 전쟁터에서 영영 사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 한번 가게 되면 쉬이 돌아오기 힘들기도 했다. 설레다 못해 날뛰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애꿎은 이불과 베개를 못살게 굴던 이브는 순간 멈칫했다.

“……그런데 파티에는 어쩐 일로 오신 거지?”

황태자 전하께서 혼인할 룬을 살피기 위해 파티에 들렀다는 말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생각해 보면 오닐도 마찬가지로 혼인 적령기였다. 그럼 설마 오닐도……. 이브는 갑자기 좋았던 기분이 하락하면서 숨이 턱 막혔다.

“그건 싫은데…….”

오닐은 그 누가 봐도 근사하고 멋진 사람이었다. 거기다가 황자이기까지 하니 혼인 대상으로는 최고였다. 당장 내일 누구와 혼인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이브는 오닐의 곁에 다른 누군가가 서는 건 생각해 본 적 없었고, 하기도 싫었다. 팔머나, 에이든 영애나, 혹은 다른 그 누구라도 오닐에게는 아깝다. 아깝고, 또…….

이브가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전부터 생각해 온 거지만, 자신이 오닐에게 가진 이 감정을 과연 단순히 흠모나 경외라고 할 수 있을까? 오닐이 곁에 있을 때마다 가슴이 뛰고, 다시 만난 것이 이토록 반가운데…….

한참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실의 문을 열고 나가자 긴 안락의자에 대충 구겨져 자고 있던 벨제가 번득 눈을 떴다.

“벨제, 나 궁금한 게 있는데.”

“……지금 이 시각에 말입니까?”

이브의 대련 친구이자 호위 기사이며, 또한 팬텀가의 종속이기도 한 벨제가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얕게 자는 습관을 들였다 해도 잘 자다가 깨어난 것이기에, 유쾌할 리 없었다. 벨제의 얼굴에 슬쩍 짜증이 스치는 걸, 이브는 모르는 척 무시했다.

“제5황자 전하 말이야, 이번에 아주 돌아오신 건가?”

“……5황자요?”

벨제가 잠시 동안 이브의 상기된 표정을 살폈다. 이브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브는 대답을 기다렸다. 벨제가 뺨을 긁었다.

“예, 돌아온 지 이제 막 일주일쯤 되었죠. 이번에 엑펠지아 전투에서 대단한 공을 세워 황실에서 불러들였다 합니다. 당분간은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진 않을 겁니다. 그런데 5황자는 왜요?”

“아니……. 어제 파티에서 우연히 만나 뵈었거든. 궁금해서, 뭐…….”

이브를 아주 잘 알고 있기에 벨제는 이 말을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이런 일로 새벽부터 자신을 깨운 것인가, 깊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이번에는 그분입니까? 잘생기셨나 보죠?”

“아니! 잘생기긴 했는데 지금 생각하고 있는 그런 건 아니거든!”

이브가 부정하고 보았으나 벨제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간 이브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좋아하고 헤어지는 걸 몇 번이나 보았던가. 그는 이번에도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틀렸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 기간 동안 전쟁터의 그림자로 살아야 한다. 또한 모든 기사들은 전쟁터에서 자신의 신분을 알려서는 안 된다. 귀환하고 나서도 자신이 어디에서 활약했는지 비밀에 부쳐야 했다. 그러니 자신의 주인이 어디서 기사 작위를 땄는지, 누구와 지냈는지 모르는 벨제는 이브에게 있어 오닐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모를 수밖에 없었다.

이브는 벨제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잘 알 것 같았으나, 정말 그런 게 아니었다. 이제껏 사람들을 만나 사귀었던 건 어디까지나 오닐을 잊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물론 결국에는 잊지도 못했지만…….

“이번에는 진짜야. 얼굴만 보고 반한 게 아니라고.”

“예, 그러시겠죠.”

벨제는 전혀 믿지 못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까닥거렸다. 하긴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게 당연했다. 전쟁터에서 귀환한 후로 다신 오닐을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이브는 오닐을 잊기 위해 온갖 애를 썼던 것이다.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려고 했다. 그 사람들 중에 오닐을 잊을 정도의 사랑이나 우정 따위가 있으리라 믿었다. 매일 오닐이 떠오르는 괴로움에 온갖 취미 생활을 시도했고, 종내에는 술과 담배, 정신을 잠시 몽롱하게 만드는 수준인 약한 마약까지도 해 봤다.

마약은 알아차린 벨제가 노발대발하며 쥐 잡듯 잡아서, 그리고 담배는 취향이 아니어서 금방 관뒀는데, 술은 완전히 입에 붙고 말아 버렸다……. 덕분에 술 하면 벨제가 아주 질색을 했다.

오닐과 다시 만나면서 이브는 그 모든 노력이 허사라는 걸 깨달았다. 그 어떤 취미 생활도 오닐을 만나는 시간만큼 즐겁지 않았고, 그 어느 누구도 오닐보다 이브의 가슴을 뛰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 어떤 독한 술의 취기보다도 오닐을 볼 때 얼굴에 떠오르는 열기가 더 뜨겁고 오래갔다.

이브는 그와의 재회를 다시 떠올렸다. 오닐이 어찌 등장했는지, 어떤 식으로 그에게 말을 걸어왔는지. 가슴속을 지글지글 갉아먹는 것 같은 벌건 정염에 이브가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벨제, 아무래도 내가 정말 그분을 좋아하는 것 같아.”

귀환한 후로는 오닐을 보지 못한 지 벌써 2년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감정이 이리 차오르는가? 다른 사람들을 만날 때는 확실히 달랐다. 가벼운 만남, 가벼운 헤어짐……. 실로 가벼운 감정들이었으니.

아무리 어머니께서 돌아오라 하셨어도, 진작 전쟁터로 돌아가 오닐을 곁에서 섬겼어야 했는데. 이브는 속으로 후회했다. ……하긴 아이린을 거역할 수는 없으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소리도 여러 번 들었습니다.”

평소와 같았다고 생각했는지 벨제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브는 그저 머쓱하게 웃었다. 하긴 새로운 사람을 만날 적마다 벨제에게 ‘이번에는 정말로—오닐을 잊게 될 정도로— 좋아하는 것 같아’라고 말하곤 했으니.

하지만 그때의 말도 진심이었고 이번의 말도 진심이다. 다만 그 경중이 다를 뿐. 완전히 잠이 달아났는지 벨제가 한숨을 쉬며 품에서 통신구를 꺼냈다. 은색의 악기처럼 빛나는 기구에는 엄지와 검지, 그리고 중지를 넣을 수 있는 구멍이 셋 있었다.

“5황자에 대한 정보를 찾아 드릴까요?”

이브가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오닐에 대한 일은 듣지 않으려 했기에 그간 오닐이 어디서 어떻게 지냈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벨제가 통신구에 손가락을 끼우며 눈을 감았다. 팬텀가의 정보원에게서 이야기를 듣는 그의 눈꺼풀과 손에 파란 빛이 번졌다.

“5황자가 그간 전쟁터에서 세운 공적이 어마어마하군요. 황실에서 다시 불러올 만도 합니다. 병사와 기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은데요.”

그럴 것 같았다. 이브가 막 전쟁터를 떠날 당시에도 그곳에 오닐을 믿고 따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안 그래도 황제는 황태자를 위해 황자들을 견제하고 있는 중이었다. 같은 자식인데도 일부러 황자들만을 전쟁터로 내몰지 않았나. 그런데 도리어 오닐의 능력이 무시무시하여 점차 백성들 사이에서도 유명해지자 위협을 느끼고 다시 불러온 것이리라.

벨제로부터 그간 오닐이 어찌 지내 왔는지 듣다가 이브가 슬며시 물었다.

“그럼…… 혹시 다음에도 어디 사교 모임에 참가는 안 하신대?”



***



오닐이 수도로 돌아온 뒤부터 이브는 매일같이 그의 뒤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오닐이 나타난다 하는 사교 모임에는 꼭 참가했다. 팔머나 에이든, 혹은 그 외의 모든 약혼자 후보들은 알 바가 아니었다. 오로지 오닐만이 중요했다.

그는 사냥 대회나 무도회, 혹은 티파티 등에 참가하며 오닐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늘 갑주를 입은 모습만 보다가 잘 차려입은 걸 보니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에블랑 팬텀이 제5황자의 뒤만 졸졸 따라다닌다는 소문이 사교계에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쯤 되자 오닐도 이브를 무시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름이 이브라고 했습니까?”

엘타 자작의 정원 다과회, 한쪽에 앉아서 차를 마시는 둥 마는 둥 하며 오닐만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던 이브는 너무 놀라 손등에 찻물을 엎고 말았다. 막 우려낸 차라 뜨거웠으나 손을 털기도 전에 고개가 먼저 뒤로 돌아갔다.

오닐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앉아 있는 이브를 보기 위해 고개를 숙인 터라 눈매에 짙은 음영이 졌다.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토록 오닐의 곁에 가까이 있던 게 얼마만이지……. 벌써 귀가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이브가 고개만 끄덕거리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인사는 됐습니다. 그대로 앉아 있어요.”

일어나 인사를 하려는 걸 오닐이 어깨를 눌러 다시 앉혔다. 그 작은 행동에도 이브의 심장은 거세게 뛰었다. 가까이 선 오닐에게서는 근사한 향기가 났다. 아무래도 전쟁터가 아니니 이제는 향수를 뿌리나 본데, 정말 잘 어울렸다.

무슨 용건으로 찾아 오셨나 이브가 눈을 크게 뜨고 말을 기다리는 동안 오닐은 뭘 기다리는 사람처럼 말없이 이브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엎질러진 찻잔을 스쳤다.

“이건 무슨…….”

오닐이 무언가 중얼거렸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듣지 못한 이브의 귀가 쫑긋 섰다.

“예?”

“아닙니다. 그보다는 손등을 좀 식히는 게 좋겠는데.”

“아, 예.”

정신이 반쯤 빠진 이브가 대충 손등을 털어 내는 시늉을 했다. 결국 오닐이 말없이 품속에서 손수건을 꺼냈을 때에야 이브는 자신에게도 손수건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아무리 오닐이 좋다 해도 본인 앞에서 너무 티를 냈다. 민망해진 이브가 조용히 손수건으로 찻물을 닦아 내자 오닐이 다시 가져갔다. 그러더니 손수건을 꾹 쥐자 희미하게 파스스 하고 살얼음이 덮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다시 건넨 손수건이 이브의 손등에 덮였을 때는 찬 기운으로 어른어른했다. 마법으로 얼린 것이다.

“감사합니다, 전하.”

오닐의 모든 행동이 다 설레어 죽을 것 같던 이브는 기쁘고 행복하다는 분위기를 숨기지도 않았다. 손등을 어느 정도 식힌 뒤, 그는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차피 찻물에 젖어 못쓰게 된 손수건이니 이건 제가 가져도 괜찮을까요?”

“……그건 아무래도 좋은데 경은 참으로, 고통에 독특하게 반응하는군요. 보통 뜨거운 찻물을 엎으면 인사보다는 닦아 내는 게 먼저일 텐데.”

손등이 벌겋게 달아올라도 신경도 쓰지 않고 내버려 둔 걸 꼬집는 말이었다. 그러나 이브는 대수롭지도 않았다. 기사에게 어디 뜨거운 찻물에 입은 상처가 상처 축에나 끼던가?

“그야, 찻물 닦아 내는 것보다는 전하에게 인사하는 것이 먼저니까요.”

솔직한 이브의 대답에 오닐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이내 얼굴에 예의 바른 미소를 걸었다. 이브의 얼굴에도 절로 웃음이 활짝 걸렸다. 오닐이 제게 웃어 주니 그저 좋기만 했다.

“그나저나 요즘 따라 자주 마주치는군요. 우연의 일치라기엔 이상할 정도입니다.”

“하하, 그런가요? 이상할 일은 아닙니다. 우연의 일치가 아니니까요.”

대놓고 따라다녔다 하는 대답에 오닐의 그린 듯한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이브는 입 안으로 슬쩍 혀를 깨물었다. 솔직하고 직설적으로 툭툭 뱉는 습관을 이제는 제법 고쳤다고 생각했는데 긴장해서 그런지 다시 튀어 나왔다.

“알아보니 경의 제대로 된 이름은 이브가 아니더군요.”

“그…날은…… 제가 경황이 없었습니다. 에블랑 팬텀이라고 합니다, 전하. 이브라고 불러 주시면 됩니다.”

“이브.”

오닐이 애칭을 불러 주자 이브의 기분이 반짝반짝 빛나는 날개를 달았다. 전쟁터에 있는 동안 내내 아쉬운 게 그것이었다. 오닐이 결코 이브의 이름이나 애칭을 불러 줄 일이 없다는 것.

이브가 슬그머니 손가락을 느릿느릿 움직였다. 오닐의 자색 눈동자가 그의 손수건이 이브의 품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길게 훑었다. 다시금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다들 그러더군요. 경이 그리 내 뒤만 쫓아다닌다고. 혹시 날 좋아합니까?”

티 났나? 하긴 티가 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이브가 솔직하게 예, 좋아합니다,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오닐의 눈웃음이 한층 더 짙어졌다.

“왜, 첫눈에 반했습니까?”

이브는 잠시 오닐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첫눈에 반했……다고 할 수 있을까? 사실 처음 오닐을 봤을 때에는 그다지 관심도 없었다는 게 정확할 것이다. 불편하고 또 여러모로 적응하기에 바빠서. 이브가 모호하게 대답했다.

“첫눈에 반한 건 아니고…… 몇 번 보다 보니까…….”

처음으로 오닐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나지막한 정도였으나 그게 또 좋아서 이브의 귀가 훅 달아올랐다.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시선을 돌리지는 않았다. 이브는 찬찬히 오닐의 눈가가 접히는 것을, 테이블에 올라온 손가락이 우아하게 구부러지는 모양새를, 그리고 어깨와 등이 얼마나 곧은지를 살폈다. 모든 것이 그저 보기 좋기만 했다.

“경처럼 솔직한 사람은 처음 봅니다. 정치에는 어울리지 않겠습니다…….”

웃음과 함께 말꼬리를 흐리다가 오닐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생각이 날 듯 말 듯 했는지 잠시간 침묵을 지키더니 다시 물었다.

“정말 어디서 만난 적이 없습니까?”

있다. 그것도 1년이나 근처에서 지내지 않았나. 하지만 말할 수는 없었다. 기사들이 어디서 뭘 했는지는 황제만 알고 있어야 했기에. 이브가 모르는 척 굴자 오닐도 그렇게 궁금하지는 않았는지 더는 캐묻지 않았다.

모든 볼일을 마쳤는지 오닐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지난번과는 작별 인사가 달랐다. 오닐은 젖은 손수건으로 인해 희미하게 자국이 남기 시작하는 이브의 가슴에 한번 시선을 주고는 말했다.

“다음번에 또 보도록 하죠.”



그날 다과회가 끝나자마자 이브는 날듯이 팬텀가로 돌아왔다. 그리고 귀찮아하며 몸을 빼려는 벨제의 멱살을 붙잡고 그날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오늘 전하께서 먼저 말을 걸어 주셨는데……. 또, 손수건도 주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벨제는 어처구니없어 했다.

“이브 님, 말은 바로 합시다. 손수건을 주신 게 아니라 거의 빼앗은 것이 아닙니까?”

“어차피 버릴 거 내가 가지는 게 뭐 어때서?”

“그럼 그게 더 문제죠! 그리고 둔해 터져서 쓸데없이 솔직하기만 하다고, 정치판에 끼어들기엔 부족하다고 돌려 깠잖아요!”

벨제가 막말을 퍼부었다. 시종에게 맡겨 깨끗하게 빤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면서 이브는 모르는 척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런 말투는 아니던데?”

“귀족이나 황족들이 뭐가 어떻다 노골적으로 말하는 거 보셨습니까? 솔직하게 다 뱉어 버리는 이브 님이 이상한 거지.”

사랑에 빠져 눈에 뵈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없는 이브였기에, 벨제의 속만 터져 나갔다. 이브도 오닐의 말뜻을 못 알아듣지는 않은 것 같은데 그저 대화를 나누고 손수건을 가지게 되었다는 게 기뻐서 별 신경을 안 쓰는 모양이었다.

보통은 이렇게 상대가 무시하는 티를 내면, 금방 마음을 돌려서 헤어지던데 왜 이번에는 아닐까? 오닐을 만났다고 유독 들뜬 이브를 보니 벨제는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