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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궁의 이브닝 2화



<1. 혼인>

4년 전, 제국력 731년.

“형님, 여기 계셨군요.”

브리건이 활짝 웃으며 이브에게 다가왔다. 이브는 이야기를 나누던 영애에게 양해를 구했다. 영애가 퍽 아쉬워하는 얼굴로 다른 사람을 찾아 멀어졌다. 브리건은 영애의 뒤를 바라보다가 이브에게 손에 들고 있던 과실주 잔을 내밀었다.

“고마워, 리브. 내가 어디 있을 줄 알고 이렇게 잔을 들고 돌아다녔어?”

이브가 애정을 담아 브리건의 애칭을 불렀다. 브리건의 브리를 뒤집어 이브와 비슷한 애칭인 리브다.

올해 열아홉 살인 브리건은 이브와는 한 살 차이가 났다. 어머니인 아이린 백작이나 이브와는 달리 브리건의 머리카락은 검은색이었다. 아버지인 네이썬을 닮은 것이다.

금빛으로 빛나는 과실주를 마신 이브가 혀끝으로 미세한 기포를 굴려 보고는 으음, 하는 감탄사를 뱉었다. 이렇게 훌륭한 품질의 과실주라니, 요즘 같은 때에는 구하는 것도 힘들고 제법 비쌌을 텐데……. 그윽하다 못해 아름다운 향이 혀에 달게 감겼다.

이브가 순식간에 한 잔을 마셔 없애자 브리건이 자신의 몫으로 가져왔던 과실주 잔 하나를 마저 건넸다. 이브는 사양하지 않았다.

“형님은 오늘도 인기가 많으시네요.”

“사람은 많이 사귈수록 좋으니까.”

“그래도 형님의 격에 맞는 사람들을 골라 사귀셔야죠.”

리브, 나무라는 어조로 불렀으나 브리건은 그저 웃어 보이기만 했다. 브리건은 항상 이브와 사귀는 사람들을 향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곤 했다. 격에 맞는 사람을 사귀라고는 하는데, 매번 보이는 반응을 고려하자면 그냥 이브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이브는 비사교적인 브리건이 조금 걱정되기도 했다.

“이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 정도면 충분히 내 격에 맞아. 그리고 이제 슬슬 제대로 사람들을 만나 봐야지. 나도 스무 살이니 혼인할 때도 되었고.”

이브가 가볍게 파티장을 둘러보았다. 영애와 영식들로 가득한 홀이다. 이브의 인기는 내내 하늘을 찌를 듯했다. 혼인 적령기인 데다 팬텀 백작가의 영식이다. 화려한 외모에 기사이고, 결정적으로 그는 그 드문 룬이었다.

엠페라움의 건국신화에 따르자면 은하수와 별들의 신이자 모든 것들의 첫 번째 신인 루나(Luna)가 자신의 일부를 떼어 반신인 태양 라(La)를 빚었다. 라는 인간 세계에 내려와 제국 엠페라움을 건국했고, 어머니 신에게 청해 짝을 만들어 달라 요청했다. 신화에 따르면 그게 바로 룬이다. 은하수 신에게서 태어난 인간이기에 룬의 그림자에는 은하수가 흐른다고들 했다.

보통 인간과 다른 건 그림자 광휘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은 마력을 다루는 데 있어 아주 뛰어났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마법사와 기사들의 상당수가 룬이었다. 자식을 가지는 방식도 인간과는 달라 혼인 시에 남녀를 가리지 않았다.

또한 그들의 자식이 높은 확률로 룬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귀족들은 눈에 불을 켜고 룬을 영입했다. 재능 때문만이 아니다. 반신의 피가 흐르는 황제들 ‘거의’ 모두가 짝으로 룬을 원하기 때문이었다. 황제 계승의 기본 자격이 되는 ‘라’는 오로지 직계 황족과 룬의 사이에서만 태어났으니. 때문에 권세 높은 귀족 가문에서는 룬이 없다면 입양이라도 해 자신의 가족으로 만들었다.

이브도 그런 경우였다. 그는 팬텀 백작가에서도 이름만 팬텀을 달았을 뿐이지 평민에 가까운 방계 출신이다. 아주 어렸을 때 가난한 부모가 팬텀 백작가에 자신을 내주는 대신 돈을 받아 외국으로 떠났고, 이브는 그때부터 아이린 팬텀 백작을 부모 삼아 살아왔다. 아이린과 머리색이 비슷하여 다들 친자로 오해하곤 했기에 널리 알려진 사실은 아니었다.

“꼭 혼인하시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브리건이 단호하게 말했다. 이브는 처음엔 농담이겠거니 했으나 가만히 브리건의 표정을 보니 진심인 듯했다. 그가 웃었다. 이브에게는 막연히 그리고 있는 삶이 하나 있다. 정략이든 연애결혼이든 상관없으니, 혼인하여 자식을 둘이나 셋 정도 낳아 살아가는 게 소망이었다.

“가족을 만들어야지, 안 그러면 외로워서 어떻게 살아?”

“형님에게는 제가 있잖습니까. 제가 팬텀가를 이어받으면, 성에서 같이 살아요.”

최근 어른스러워졌나 했더니, 열아홉 살이라 그런지 조르는 듯한 말투에 역시 어린 티가 났다. 이브가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들을 많이 사귀다 보니 자연히 소문도 많이 듣는데, 어쩐지 항상 소문에서는 브리건이 재수 없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그런 브리건은 도통 상상이 가지 않는다.

“혼인도 하지 않고 가주에게 얹혀사는 형이라니, 네 부인이 얼마나 싫어하겠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농담처럼 말하자 브리건은 풀이 죽어 예, 하고 대답했다. 누군가 그들에게 다가온 건 바로 그때였다. 친하게 지내곤 했던 팔머와 그 일행들이었다. 브리건의 얼굴에서 미소가 싹 지워졌다. 웃으며 다가온 팔머의 시선에서도 브리건을 향한 떨떠름함이 묻어났다.

“이브, 친애하는 내 친구. 요즘엔 왜 이리 모습 보기가 힘들어?”

성큼성큼 다가온 팔머가 팔을 쭉 뻗더니 힘 있게 이브를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토닥하는 손길이 은근히 묘했다. 대충 호응해 주고 떨어지고 나니 브리건의 얼굴이 묘하게 싸늘했다. 그가 팔머를 한번 쏘아보고는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이야기 나누세요, 형님. 전 친구를 좀 만나러 갈게요.”

“그래, 리브. 나중에 보자.”

다시 팔머에게 차가운 시선을 보낸 브리건이 자리를 떠나고 나자 팔머가 투덜거렸다.

“자네 동생은 좀 이상해.”

“어렸을 때 브리건이 날 많이 따라서 그래.”

이브가 브리건을 변호했다. 사실이기도 했다. 아이린이나 네이썬 모두 자식에게 친근한 부모는 아니었다. 네이썬은 사냥과 승마 외에는 관심이 없었고 아이린은 일로 바빴을뿐더러 냉정하고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자연히 브리건은 이브를 졸졸 따라다니는 게 일이었다. 팔머가 쯧, 혀를 찼다.

“그래도 이젠 애도 아닌데 자중해야지. 또 몰라? 사람 인연이 어떻게 될지.”

팔머의 말 속에 내포한 의미를 알아차린 이브는 그저 웃었다. 최근 아이린은 이브의 혼처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는데, 팔머는 그 후보 중 한 명이었다.

이브는 속으로 에이든 영애와 팔머를 가늠해 봤다. 당연하지만 에이든 영애가 훨씬 아름다웠다. 다들 가문의 권세나 조건은 비슷하니 이왕 결혼한다면 아름다운 사람과 하는 것이 좋겠지. 무슨 의미의 웃음인지도 모르고 팔머는 이브가 웃는 모양을 보자 누그러졌다.

“보통은 기사가 되면 삭막해지는데, 너는 어쩐지 기사가 된 후로…… 예전과는 완전히 달라졌어. 아니, 예전보다 훨씬 사람이 좋아졌어. 어찌된 일이야?”

귀환한 뒤로는 자주 듣는 이야기다. 이브는 사람마다 다들 다르니까, 하고 대꾸해 주었다. 팔머는 이브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참, 그 이야기 들었나? 이번 파티에 황태자 전하가 오신다는데.”

“황태자 전하가?”

의아하게 물었다가 이브가 잠시 뒤에 납득했다. 이 파티에는 이브처럼 룬들이 꽤 참석해 있는 중이다. 황태자가 파티에 참가한 이유는 아마 자신의 룬을 찾아보기 위해서일 터다. 팔머는 잠시 듣는 사람이 있나 없나 주위를 둘러보고는 빈정거렸다.

“그래 봤자지. 어차피 ‘라’도 아니잖아. 이러다가는 정말 황제가 라 엠페라움이 아닌 그냥 엠페라움이 되는 일이 생기겠군.”

팔머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라’가 아닌 황태자. 이 모든 건 황제인 오완트 오빌리타 라 엠페라움이 평범한 여인에게 사랑에 빠지면서 일어난 일이었다.

초대 황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황제는 라가 이어받았다. 사람들은 반신의 핏줄인 라를 섬겼고, 제국은 라를 중심으로 돌아갔다. 라 엠페라움이야말로 제국의 진정한 기둥이요, 태양이었다. 황제 오완트도 마찬가지로, 원래대로라면 그도 룬과 혼인을 올려 ‘라’인 황태자를 만들었을 것이다. 라는 오로지 룬에게서만 태어날 수 있었다.

문제는 오완트가 황궁의 어느 시녀와 사랑에 빠지고 나서부터였다. 얼마나 열렬한 사랑이었는지 오완트는 극심한 반대를 물리쳐 가며 시녀를 황후로 삼았다. 귀족들은 거의 공황에 빠질 지경이었다. 어떻게 룬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 황후가 될 수 있나? 이름만 룬 엠페라움이었지, 황제 오완트의 황후는 결코 룬은 아니었다.

물론 황제도 사람이니 얼마든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도 있다. 역대 황제들 중에서도 이런 경우는 종종 있었다. 그런 경우, 황제들은 황후만은 룬으로 맞이해 태양신의 핏줄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황제 오완트는 태양신의 핏줄이면서도 그 핏줄을 정면으로 부정한 것이다.

오완트는 매일매일 귀족들과 부딪쳐 가며 자신의 사랑을 위해 살았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 사이에서 생긴 자식을 황태자로 삼으리라 공언했다. 모든 귀족들이 들고 일어났다. 라가 아닌 황태자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완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룬이 아닌 귀족들의 여식을 대거 후궁으로 들인 뒤 그들 사이에서도 자식을 가졌다. 라가 아닌 평범한 황자들이 줄줄이 태어났다. 그는 그중 몇을 어여뻐하기까지 했다.

이리되니 정통성 있는 라의 계승을 주장하며 후궁으로라도 룬을 들일 것을 지지하던 귀족들은 욕심에 흔들렸다.

기왕에 이렇게 된 거, 굳이 라가 황위를 계승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겠는가. 그 어느 귀족 영애의 몸에서 태어나든 시녀의 몸에서 태어난 황태자보다는 출신이 고귀할 것이니, 어쩌면 자신의 손자가 황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게다가 라가 아닌 황제라니, 오랜 세월 동안 절대 권력을 자랑하던 황가가 스스로 그 권력을 내려놓으려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차츰 반대하던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오완트는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기꺼이 태양신의 맥을 끊고 제국의 근간을 흔들어 놓은 것이다. 실로 대단한 사랑이라 할 수 있었다.

700년이라는 세월 동안 견고했던 제국은 오완트로 인해 처음으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 틈을 타 아테마를 비롯하여 주변 국가에서는 국경에서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켰다. 그들에게는 다신 오지 않을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황제는 국경 지대의 안정을 이유로 황태자를 제외한 황자들을 전쟁터로 내보냈다. 황자들 중 일부는 전쟁터에서 죽어 나갔다. 제국 내에서 전쟁과 분열이 끊이지 않았다. 귀족들 중 절반은 정녕 이대로 위대한 라의 핏줄이 끊기는가 탄식했고, 나머지 절반은 새로운 시국으로 접어들려는 이때 어떻게든 권력을 손에 쥐고자 아등바등 노력했다. 마법사들은 모조리 전쟁터로 차출되었고 기사록에 이름을 올린 기사들의 수는 제국 역사상 다시없을 수치를 기록했다.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너는 황태자를 노려볼 생각은 없어?”

팔머가 짓궂게 물었다. 이브가 고개를 저었다. 딱히 룬 엠페라움이 되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아이린 백작이 받아들이지 않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현재 황제는 팬텀 백작가에 감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황후를 들일 때 가장 격렬하게 반발한 것이 팬텀 백작가였다.

바로 그때였다.

“에블랑 팬텀!”

홀이 쩌렁쩌렁하도록 부르는 목소리에 이브가 속으로 혀를 찼다. 뒤를 돌아보니 바짝 성이 난 옥산이 있었다. 팔머는 옥산과 이브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이브가 얕게 한숨을 쉬었다. 옥산은 성큼성큼 걸어와 마치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길을 보냈다.

“진정해, 옥산 경.”

이브가 옥산의 허리춤에 있는 검을 의식하며 말했다. 단단히 화가 났는지 옥산은 파티장에 드레스도 입지 않고 왔다. 하긴 목적이 파티가 아니라 이브일 테니 굳이 드레스를 입을 이유도 없긴 하겠지. 옥산은 몰려드는 시선을 의식하며 목소리를 낮춰 으르렁거렸다.

“당장 밖으로 나와!”

원래도 주위에 항상 사람이 끊이지 않는 편이였지만, 오늘은 다소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브리건이 마침 자리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이브는 성큼성큼 걸어가는 옥산의 뒤를 따라 정원으로 나갔다.

인적이 드문 곳에 다다르자 옥산이 휙 돌아서더니 이브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손이 검 손잡이에 닿았다. 이브는 반사적으로 자신도 검에 손을 뻗으려다가 발도하는 상상을 해 보고는 멈췄다. 아직 그 정도 상황은 아니었다.

“아무리 그 팬텀가라고 해도 그렇지, 감히 내 동생에게 그런 모욕을 줘?!”

이브는 잠시간 가만히 옥산과 자신의 그림자가 은은히 반짝거리는 걸 바라보았다. 다시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옥산이 왜 이리 화를 내는지 잘 안다. 지난 주 옥산의 친동생인 알베르타를 기사들이 보는 앞에서 치욕스럽게 묵사발을 내놓았기 때문이겠지. 사실 그때 두들겨 패면서도 좀 심했다 생각하긴 했다.

“경은 지금 오해를 하고 있어.”

“오해? 무슨 오해! 아무 이유도 없이 다짜고짜 알비를 두들겨 팼는데 거기에 무슨 오해가 있단 말이야!”

이브가 말끄러미 옥산을 바라보았다. 옥산이 흠칫했으나 기세는 줄지 않았다. 이브 역시 그녀를 만나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꾹 참았다.

“정말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나 또한 기사며, 명예를 아는 자야. 내가 아무런 이유 없이 좋을 대로 경의 동생을 벌했다고 생각하나?”

두들겨 팬 일을 교묘하게 벌을 주었다고 바꿔 말하며 이브가 억울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어 보였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자 옥산이 멈칫했다. 어느새 검 손잡이에 올라간 손도 스르륵 내려가 있었다. 이내 이브는 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내 인망이 그 정도라는 거지. 결국은 내 책임이군.”

이쯤 되자 옥산 경은 반쯤 풀이 꺾였다. 워낙 성질이 대단해 옥산 경의 분노를 산 사람은 하나같이 반병신이 되어 돌아가기 마련이었으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럼, 대체 이유가 뭔가?”

이브가 일부러 대답을 머뭇거리자 옥산이 급하게 재촉했다.

“정당한 이유라면 어서 대답해!”

“……하아, 그래. 경은 알베르트 경의 가족이니 들어도 되겠지. 그날, 알베르트 경은 어떤 사람을 겁간하려 했어.”

상상치도 못했던 이유에 옥산의 눈이 커졌다. 이브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바로 그 현장을 목격한 사람이야. 알베르트 경은 술에 취해 말도 듣지 않지, 또 그런 파렴치한 행동을 직접 목격하다 보니 나도 꽤 화가 났어. 하지만 같은 기사를 그리 때려서는 안 되는 것이었지. 사과하겠어.”

이브의 말이 사실이라면 알베르트는 두들겨 맞는 정도가 아니라 파문되어야 옳았다. 그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행위인가. 옥산이 황망하게 입을 벌렸다가 닫았다. 믿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이브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게 사실인가?”

“나 에블랑 팬텀, 신께 맹세코 방금 한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어.”

이브의 말에 옥산이 몸을 떨었다. 룬인 이브가 신을 걸고 맹세까지 했으니 믿지 않을 수가 없던 것이다. 그녀의 얼굴이 곧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다만 이번에는 이브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한 분노였다. 이브는 오늘 알베르타가 어디 하나 부러지고 말 것임을 확신했다. 이를 악문 옥산이 사과했다. 빠득 이를 가는 소리가 났다.

“내가 앞뒤 상황을 알아보지도 않고 큰 무례를 저질렀군. 미안하네.”

“받아들이도록 하지.”

이브가 사과를 받아들이자 옥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라졌다. 당분간 옥산과 알베르트를 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가 완전히 사라졌다는 걸 확인한 이브가 미간을 짚었다. 피곤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짜증 나기도 했다. 그간 사람들을 대하며 얻은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다.

“정색하면 미워하고 웃어 주면 만만히 보고……. 어쩌라는 건지.”

그는 괜히 자신의 풍성한 플래티넘 금발을 잡아 당겨 보았다. 금발인지 은발인지 모를 이 애매모호한 색의 머리카락은 희귀하여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

사람으로서 이브도 당연히 자신의 잘생기고 아름다운 외모에 만족했다. 다만, 이 외모가 항상 이브에게 유쾌한 일을 불러오기만 하는 건 아니었다. 웃으면 다들 이브를 좋아해 가까이 다가온다. 그것까진 좋다. 그러나 종종 지나치게 치근덕거리며 선을 넘는 자들이 있었다. 알베르트가 바로 그 경우다.

소문이 퍼지면 가문은 물론이거니와 이브 자신에게도 좋을 것이 없어 내버려 두었으나 이런 달갑지 않은 상황은 싫었다. 그래도 방긋방긋 웃고 다니니 확실히 사람들 대우가 예전보다는 좋기는 했다.

“……정색하는 것도 웃는 것도 안 된다면 차라리 울까.”

중얼거리며 이브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수풀도 우거졌으니 다른 사람 눈에 보일 일도 없겠다 아예 구깃구깃 구겨져 앉아 있는데, 근처에서 바스락하는 소리가 났다. 그때까진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기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드러내던 옥산 앞에서도 가만히 있던 이브가 휙 몸을 돌리며 검 손잡이를 잡았다. 실로 날카로운 기세였다.

그러나 상대방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온몸에서는 힘이 풀리고 말았다. 이브가 저도 모르게 희미하게 신음 소리를 흘렸다. 일순간 그의 심장이 멎어 버리는 듯했다. 자신의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비현실적이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나무 그늘 아래 한 남자가 서서 이브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그늘진 눈동자가 무심하게 이브를 훑었다. 건장하고 단단한 체구인데도 이브는 상대가 일부러 풀숲을 건드리기 전까지는 존재를 눈치채지도 못했다. 그가 이브나 옥산보다 뛰어난 실력자이기 때문이다.

이내 상대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길이의 남자의 금발이 은은하게 빛났다. 푸르스름한 달빛 때문인지 섬세하면서도 곧은 선으로 이루어진 얼굴이 일순간 흰 얼음 조각처럼 보였다. 세상 그 모든 일에 무심한 것처럼 보였는데 착각이었는지, 이내 상대의 깊은 눈매가 자신을 향해 조용히 휘었다. 자색 눈동자가 빛이라도 내는 듯 아름다웠다.

이브는 그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아, 그 웃는 선이 얼마나 보기에 좋은지……. 남자는 밤의 마력처럼 이브를 홀렸다. 물론 이브는 사내가 밤보다는 낮, 아니, 낮보다는 태양에 더 가까운 자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브의 눈동자 속에서 그의 태양이 푸르게 빛났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옥산이 그랬듯이, 이브는 상대의 얼굴을 보고 스르륵 검 손잡이를 쥔 손을 풀었다. 남자가 예의 바른 어투로 말을 건넸다.

“본의 아니게 사적인 대화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브의 가슴이 잠시 멎었다. 그러다가 다시 펄떡펄떡 뛰는데, 그 뛰는 모양새가 마치 열아홉 살로 돌아가 버린 듯했다. 그는 아직도 입을 조금 벌린 채 쪼그려 앉아 있는 이브를 가만히 들여다보고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마법사와 친분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 말에 못된 짓을 하다 들킨 심정으로 이브가 얼굴을 붉혔다. 아까 자신이 한 것이…… 일종의 못된 짓이 맞기는 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남자가 손을 건넸다. 이브는 크게 숨을 들이 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잡고 일어났다. 남자의 손은 무척 단단하고 뜨거웠다. 이브의 심장이 이제는 팔딱팔딱도 아니고 퍼덕퍼덕, 새의 날갯짓처럼 빠르게 뛰었다.

“확실히 웃는 것보다는 우는 게 더 좋겠습니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