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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6화 정령술[精靈酒](2)


발발이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도대체 김시박이란 놈이 누구인가. 김시박, 김시박…… 시박.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 괴상한 이름은 선뜻 잠 못 이루게 했다.
‘약삭 빠른 놈! 내가 나타날 거라는 건 어떻게 알았지?’
발발이가 나타났을 때 시박이는 이미 장사를 접고 숲으로 돌아간 후였다. 졸지에 허탕을 친 발발이는 애꿎은 수하들만 닦달했다.
‘설마 조직에 배신자가 있는 건가?’
발발이가 살쾡이 같은 눈으로 부하들을 쏘아봤다.
하나같이 도둑질에 종사하는 것들이라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괜히 빈센트 님의 이름을 쏜다, 만다 지껄였어.’
점수 좀 따겠다고 호언장담한 것이 독이 돼 버렸다.
설상가상 길드의 명예까지 들먹였으니 필시 추궁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빈센트 님이 이번 일로 실망하면 어쩌지? 길드 가입 추천서를 안 써 줄지도 모를 일이야. 젠장, 만에 하나 그러기만 해 봐라. 이판사판으로 나갈 거야.’
혼자만의 착각에 과잉 감정을 일으키는 발발이였다.
발발이는 아직까지 정신 차리지 못하는 토니를 바라봤다.
사람들의 목격담에 따르면 제대로 힘 한 번 못 쓰고 당한 듯했다.
조직 제일의 실력자가 이 지경이 되다니.
“두목, 우리가 시박이란 놈을 당할 수 있을까요?”
찰스가 지레 겁먹으며 물었다.
가뜩이나 머리가 복잡한 발발이는 대답이 없었다.
‘찰스, 저놈이 배신자인가?’
“그놈이 정령사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확실하군. 시박이란 놈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어. 찰스, 너 이 날치기 새끼!’
“혹 수비대장 로난드의 딱갈이가…… 왜, 왜 그러십니까?”
발발이는 뺨을 때리려 들어 올렸던 손을 슬그머니 내렸다.
무안한 듯 헛기침을 하며 찰스가 계속 말하기를 눈치 줬다.
“수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 않습니까. 정령사가 왜 한낱 노점상 따위를 하고 있을까요? 이건 필시 우리 조직을 소탕하려는 로난드의 고약한 수작이라 생각됩니다.”
“로난드. 그 노망난 늙은이가?”
“예, 두목. 솔직히 로난드, 그 늙은이가 이곳에 부임하고 조직이 많이 작아졌지만 자기도 힘에 부치는지 완전히 소탕은 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찰스는 불쌍하게도 로난드의 유희를 오해했다.
영지에 말썽꾼들이 없으면 심심해서 놔둔 것을 힘에 부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지, 그렇지. 로난드도 명색이 정령사니까. 제길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해. 그 빌어먹을 힘만 없었어도 우리 조직이 몇 배는 더 커졌을 텐데.”
찰스가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빈센트 님에게 부탁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두목?”
“안 돼.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 일이다.”
정확히 말하면 추천서를 받기 위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습니다. 로난드와 사이가 안 좋은 건 우리와 신전 측밖에 없는데, 신전에서 도와줄 리는 없으니.”
발발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항간에는 얼마 전 있었던 살라만다라는 정령들이 김시박의 소행이란 말도 떠돌고 있었다.
“일단 눈치를 살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습니다.”
“아득. 대체 이 시골 촌구석에 정령사가 둘씩이나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는 거야? 갑자기 전쟁이라도 나는 것도 아니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길래!”
발발이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끼익.
“누구야!”
발발이가 신경질적으로 소리 질렀다.
살짝 소리가 났던 문짝은 들어오는 이 하나 없었다. 발발이는 다시 김시박에 대해 격렬한 대책 회의에 들어갔다.
‘흐흐. 내게 기회가 생겼구나.’
밖에서 얘기를 엿듣던 빈센트가 자리를 떠났다.
자신이 받은 호의를 갚음으로 무전취식의 전설을 이어 가려는 수작인 듯싶었다.

시장은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했는데 앞치마를 두른 아낙네들도 더러 있었다.
아미는 촐랑거리는 걸음으로 그 사이를 뛰어다녔다.
떡갈비 꼬치가 사람들 손에 쥐어지자 여기저기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굉장해! 이게 정말 꼬치란 말이야?”
“정말이지 육즙이 끝내주는군!”
아미는 사람들의 반응에 얼굴이 상기됐다.
“히히. 정말요?”
“꿀꺽, 그래 왈미야. 꼬치 하나만 더 가지고 와라.”
“네!”
아미는 막대기를 회수하며 포장마차로 달려갔다.
시박은 못마땅한 얼굴로 아미를 맞이했다. 장사가 잘되는 건 좋은데 좀처럼 숨 돌릴 기회가 없었다. 더군다나 가격도 문제가 있었다.
“적어도 금 한 덩이는 받아야 하는데.”
“시박이 또 그 소리 한다!”
아미가 태연히 이름을 부르자 시박의 이마에 힘줄이 하나 돋았다. 그것이 장사 잘하는 이들의 노하우라는 아미의 말을 들은 게 잘못이었다.
꼭 틀린 말도 아니었지만 막상 뭔가 손해 보는 기분이 드는 시박이었다.
‘염라대왕한테도 똑같이 해 줘야지.’
후일을 기약하는 시박이었다.
“왈미야, 여기 떡갈비 꼬치 다섯 개 추가!”
“내가 먼저 주문했어! 왜 안 갖다 주는 거야?”
사람들의 재촉에 아미가 막 석쇠에서 꺼낸 떡갈비들을 들고 사라졌다. 시박은 잠시 허리를 폈다.
바구니에 담겨진 고기는 고작 열 개 내외 정도.
이 상태라면 점심이 되기도 전에 고기를 다시 다져야 할 듯했다.
‘흥. 이렇게 처먹을 거면서 내숭들 떨긴.’
시박은 한 시간 전의 일을 생각했다.
자신들이 시장에 들어서자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환호성을 질렀다. 어제 토니라는 녀석을 박살 낸 것이 효과가 있었던 것이다.
발발이 패거리는 조직 내 최고의 실력자가 당했다는 것에 비상소집이 걸렸고 거리는 의도치 않게 깨끗해진 것이다.
더불어 시박은 망가진 갓도 팽겨 치고 상투가 잘려 공포 어린 이미지에서 탈피하는 데 성공해 있었다.
“여기 꼬치 왜 안 갔다 주는 거야!”
“네놈이 직접 갔다 쳐 먹어!”
시박의 호통에 남자는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얼굴에 웃음꽃이 만발했다.
이상스레 욕을 먹어도 꼭 할머니한테 듣는 것처럼 구수한 게 알 수 없는 중독성이 있었다.
“예, 시박 나으리!”
“친한 척하지 마라. 어디서 나으리, 나으리 하는 거야!”
“꺄악! 저 남자 흥분하는 모습 좀 봐봐!”
“이봐요. 여기 좀 봐 주세요!”
시박은 꼬치 막대기 하나씩들 들고 있는 처녀들을 신경질적으로 쳐다봤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처녀들은 얼굴이 붉어지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다.
“저것들은 또 어디서 굴러먹다 온 호박이야.”
운디네들로 하여금 정신 차리게 물이나 한 바가지 뿌리라 하고 싶었지만 꼬치를 먹지 못한 손님들 앞에서 재롱떨기에 여념이 없었다.
시박은 남은 떡갈비를 마저 굽고는 포장마차 뒤에 설치한 천막으로 걸어갔다. 홀홀거리는 소리가 제법 나는 것이 점심때부터는 술도 내놓을 수 있을 듯했다.
시박이 임시 휴업이란 말을 내뱉었다.
사람들의 아쉬운 야유 소리 사이로 맥스와 노점상 주인들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아침 장사가 끝나고 사람들이 생업을 위해 사라졌다.
아미와 운디네들은 옹기종기 모여 멧돼지 고기를 다지느라 정신이 없었다.
“시박아…… 아코!”
기어코 시박에게 딱밤 한 대를 얻어먹은 아미였다.
시박은 다시 판자에 뭔가를 새겨 넣는 듯 조각을 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장사하는 중이 아니니까 심기 거스르지 말라는 거야.”
아미가 자신이 맞은 이유를 운디네들에게 설명했다.
운디네들이 천진난만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박은 그 모습에 내심 기가 막혔다. 꼭 자신이 어린애가 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령이란 게 원래 이렇게 오지랖이 넓은 존재냐?”
시박이 턱으로 운디네들을 가리켰다.
“오지랖이 뭐야, 시박 오빠야?”
“까르륵.”
“이 일, 저 일에 관심도 많고 참견도 많이 하는 것들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
아미는 운디네와 오지랖을 연관시켜 봤다.
이내 자신이 할 말을 찾은 듯 히히거리며 말했다.
“물탱이들이 오빠한테 혼나고 난 후 정령계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말했었어.”
시박은 황당했다. 자신은 이래 봐도 평화주의자였다.
쓸데없는 다툼이 일어날까 싶어 실수를 가장해 혼백을 놓쳐 다른 차사들에게 맡겼고 근래에는 이 도령에게 개떡도 줬다.
물론 그 일이 금기에 해당되는 일이었지만.
“염라대왕이 웃을 일이다. 나같이 착한 저승차사가 언제 혼냈다고 거짓말을 하는 거야.”
“까륵, 까르륵!”
“까륵, 철썩. 꺄아악!”
운디네들이 격하게 반응했다.
“그래그래. 너희들도 그리 생각하는 거 다 안다.”
“숲에서 오빠 처음 보고 물장구치자고 했는데 난데없이 부채로 때리고 밧줄로 묶고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
시박은 말없이 조각을 마무리했다.
색소가 없어 입체감은 떨어졌지만 그런 대로 볼 만했다.
시박은 포장마차 간판 앞에 자신이 조각한 그림을 걸어 뒀다.
청룡이었다.
“우와 이거 드래곤이야?”
시박은 씹어 먹을 듯한 어조로 말했다.
“아니, 파랭이야.”
“여기가 혹시 시박마차(嘶搏馬車)라 불리는 곳인가?”
“어떤 놈이 남의 고귀한 이름을 가지고 장난을 쳐!”
시박은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뒤를 돌아봤다.
시박마차(嘶搏馬車)라 말한 사람은 로난드였다.
그는 시박이를 향해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맞는 것 같군. 자네가 여기 주인인가?”
뻔히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로난드였다.
시박은 딱밤을 먹이려 쥐었던 주먹을 슬그머니 풀었다.
‘이 늙은이 정체가 뭐지? 몸에서 선기가 느껴진다. 신선 나부랭이는 아닌 듯한데. 이것 봐라, 화의 속성은 반선의 경지에 가까운데?’
시박이 자신의 눈치를 살피자 로난드는 신이 났다.
‘큰일이군, 큰일이야. 얼굴만 봤는데도 이렇게 긴장하는 꼴이라니.’
“정령사 할배다!”
아미가 뒤늦게 로난드를 발견하고 외쳤다.
운디네들이 그의 몸에서 느껴지는 불의 기운에 긴장하며 아미를 감쌌다.
“허허. 나를 아는가 보구나?”
“응! 노총각에 히스테리. 그리고 주책바가지라고 사람들이 그랬어!”
“…….”
“그리고 보름달이 뜨면 속옷 차림에 거리를 뛰어다…… 읍읍!”
시박이 아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미안하군. 워낙 꼬맹이가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시박의 하대에 로난드가 당황했다.
“험험, 늙은이 귀가 어두워서 그런가 왠지 말이 짧은 듯싶은데.”
“나이도 얼마 먹지 않은 것 같은데. 뭘 그런 걸 가지고 귀찮게 따지나. 그냥 말하는 대로 들으면 되지.”
로난드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그 충격은 놀랍게도 분노가 아니었다.
오해의 골이 깊을 대로 깊었는지 로난드의 크나큰 착각이 펼쳐졌다.
‘내가 그렇게 젊어 보이나? 역시 오이 마사지를 하기를 정말 잘했군. 아니, 어쩌면 날 정말 좋아해서 그러는 거일 수도 있어. 원래 연인들 사이에 존댓말 따위는 없으니까. 흐흐.’
“으엑. 이 할배 기분 나쁜 표정 지어.”
어린애는 언제나 솔직한 법이었다.
“험, 험.”
로난드가 재빨리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그는 바구니에 가득 쌓인 돈을 바라봤다.
장사에 어려움이 있는 줄 알고 찾아왔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이었다.
‘내가 한 발 늦었구나! 어쩌면 너무 늦게 나타나 심통이 난 걸지도 모르겠어. 뭐, 도와줄 거라도 없나?’
시박은 로난드가 계속해서 자신을 쳐다보자 은근한 불편함을 느꼈다. 아직 장사할 시간도 아닌데 왜 자꾸 서성이는 건지 신경 쓰였다.
‘귀찮아 죽겠네. 여기 터가 안 좋은 건가? 어제오늘 자꾸 이상한 종자들만 나타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