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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5화 시박마차(嘶搏馬車)(4)


‘내가 왜 이리 왔을까…….’
빈센트는 한숨을 쉬었다. 자신이 은퇴한 지 햇수로 십 년째였다.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자신이 죽기 전에 해 보고 싶던 세계 일주를 낙 삼으며 살아왔다.
그렇게 마침표를 찍기까지 단 두 곳만 남은 시점이었다.
북부 대륙의 숨겨진 나라 암스와 남부 대륙의 끝이라 할 수 있는 이곳 스프링필드.
암스를 남겨 두고 빈센트는 그간의 여독을 풀며 휴식을 취하려 했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빈센트는 그만 향수에 젖어 버렸다.
도둑길드가 없는 곳이어서 그랬는지도 몰랐다.
빈센트는 평소 도둑길드가 있을 법한 지형과 외관을 따지며 비린내 나는 뒷골목 술집들을 찾았다.
‘설마 이런 괴짜들이 있을 줄이야.’
발발이가 몸을 일으키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이 발발이가 빈센트 님의 이름을 마지막으로 쏘아 올리겠습니다. 부디 이곳에 천년만년 머물러 주시기 바랍니다!”
“……난 다시 떠나야 할 것 같은데.”
“사양할 필요 없으십니다!”
“…….”
“제 능력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수하로는 부족할지 모르겠지만 길드의 말단이라면 충분히 해내고도 남는 스프링필드의 발발이입니다.”
빈센트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발발이가 답답했다.
생각 같아서는 뒤도 안 돌아보고 스프링필드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이놈이 도둑길드에 대한 환상만 없다면…….’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잘못하면 괜히 싹수 있는 얼라 하나 망치겠구나.’
이미 자신이 먹은 밥값도 발발이가 계산한 후였다.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됐다.
빈센트는 세계 여행과 동시에 한 가지 전설을 더 만들려고 하고 있었다.
빈센트가 먹고 자는 곳에는 돈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 말도 안 되는 명언은 한마디로 무전취식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자신이 도둑임을 직시하는 빈센트는 놀랍게도 세계 곳곳에서 이 같은 만행을 저질러 온 것이다.
물론 이것에도 한 가지 룰은 존재했다.
후학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여관과 술집들에 한해서 하는 것이다.
‘미치겠군. 자칫 내 전설이 깨질 위기에 처했어.’
빈센트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은퇴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도둑들에게 있어서는 정신적 지주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6화 정령술[精靈酒](1)


“고것 참 달 한 번 억수로 밝구나.”
시박은 나무 위에 올라가 청승을 떨고 있었다.
휘파람까지 휙휙 불며 술잔을 기울이니 이곳의 달이 제법 마음에 드는 듯했다.
“확실히 내 몸이 이상해졌어.”
매일 아침 가부좌를 통해 확인한 결과였다.
한 달간의 휴식을 갖기로 하며 몸에 생긴 이상 변화의 원인을 찾았다. 하지만 결론은 ‘알 수 없다.’였다.
한 가지 짐작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차원을 넘어온 괴상한 부작용이라는 것밖에.
그렇다고 단전을 파괴당한 무인처럼 폐인이 된 것도 아니었다.
단지 기존의 능력이 계절에 따라 옷을 바꿔 입는 것처럼 그 기능이 바뀐 듯싶었다.
“월영검의 봉인도 그대로인 것 같고.”
시박은 차원이동을 하기 전 자신의 머릿속에 던져진 기억을 떠올렸다. 기억이라기보다는 하나의 단어였다.
“에잉.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마음에 안 드는 것 하고는.”
시박은 기지개를 펴며 노움을 기다리기로 했다.
능력이 파악될 때까지 당분간 노움을 활용해 청룡의 행방을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청룡 역시 힘의 특성이 바뀌었을 수도 있겠군.”
여의주를 잃어버린 청룡이니 승천하기 전의 이무기로 되돌아갔을 확률도 제법 높았다.
문득 나무 한 그루가 시박의 눈을 사로잡았다.
잎이 희고 수술은 연지를 찍어 바른 것처럼 붉었다. 나무껍질마저 청초함이 묻어나는 자태는 북해의 눈을 연상케 하는 듯했다.
“매화나무? 저것은 중원의 것인데 왜 여기 있는 거지?”
시박은 눈을 비비며 다시 한 번 나무를 바라봤다.
십중팔구 매화나무였다. 거리가 멀어 확실하게 장담을 못하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숙함마저 느껴졌다.
“매화가 이곳에도 있는 식물이었나?”
때마침 노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시박은 한참을 매화나무를 노려보다 끝내 시선을 거뒀다.
보통 매화나무보다 크기가 큰 것이 비슷한 나무라 치부해 버린 것이다.
“홀홀!”
노움이 지게 작대기를 짚고 모습을 드러냈다.
불편한 몸으로 고생했다는 티를 팍팍 내는 모습이었다.
“우리 노움이 왔냐?”
시박의 친근한 어조에 노움이 징그럽단 표정을 지었다.
“퍼런색 생선 비늘 같은 것은 찾았나?”
노움이 고개를 저었다.
“호수 같은 핏자국은 있었고?”
노움은 손사래를 쳤다.
“큼지막한 발자국은…… 그래, 못 봤구나.”
시박은 수고한 노움에게 나무 밑의 술독을 가리켰다.
큼지막한 항아리가 한 동 있는 것이, 낮에 토니에게서 회수한 노잣돈으로 마련한 것이었다.
“한잔하고 푹 쉬어라.”
“홀홀!”
노움은 시박이에게 삿대질하며 항의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황당하고 억울한 노움이었다.
“음, 그러니까 어떻게 널 집어 던질 수 있냐는 말이냐?”
시박이 자신의 말을 알아듣자 노움이 깜짝 놀랐다.
아미가 자고 있어 마음 놓고 욕까지 하려 했는데 큰일 날 뻔한 것이다.
“홀홀!”
“허리까지 삐끗했다고?”
노움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 같았으면 엄살 핀다고 딱밤을 호되게 갈겼을 것이다.
하지만 시박은 그저 과장되게 허리를 두드리는 노움에게 사람 좋은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누가 그 잡것이 칼을 휘두를 줄 알았나.”
“홀홀!”
“내 상투도 잘려 나갔으니 그만 주둥이 닫아, 이놈아.”
확실히 시박이 공격을 허용할 준 몰랐다.
노움은 시박이의 투정 아닌 투정에 낮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토니라는 녀석이 오줌을 지릴 때까지 뺨을 때린 시박이었다.
그러고는 생전 처음 듣는 욕을 퍼부으며 토니를 풀어 줬다. 하지만 등을 보인 게 화근이었다.
정신을 잃었다 생각한 토니가 단검을 휘둘러 시박이의 상투를 잘라 버린 것이다.
시박이 머리카락은 단발머리를 한 여자처럼 바람에 살랑거렸다.
“홀홀!”
노움은 상관없다는 듯 끝까지 소리쳤다.
시박이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덤덤하게 말했다.
“다음부터 장가도 안 들은 너의 허리를 다치게 하는 이기적인 짓은 안 하겠습니다.”
“홀홀!”
“나는 변태입니다.”
“홀홀! ……홀?”
노움의 표정이 기괴해졌다.
시박이 내뱉은 말은 자신이 한 말과 달랐다. 시박이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그러고는 짓궂은 표정으로 노움의 목덜미를 잡아 올렸다.
“흐흐. 내가 네놈의 말을 알아들으면 그게 더 이상하다 생각되지 않냐?”
시박은 그대로 노움을 술독에 빠트렸다.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노움이 허우적거렸다.
확실히 난쟁이 똥자루라 그런지 머리 하나만 겨우 술에 잠기지 않았다.
노움이 기분 나쁜 듯 당장 술독에서 나오려 했다.
시박은 그런 노움의 정수리를 꾸욱 누르며 행동에 제약을 걸었다. 잠시간의 팽팽한 힘겨루기가 이어졌다.
따악!
딱밤을 맞은 노움의 몸이 축 처졌다.
시박은 빙긋 웃으며 허리춤에 있던 호리병을 꺼내 들었다.
“쩝. 갑자기 독각화망이 생각나네.”
시박은 노움이 들어간 술독에 공청석유 한 방울을 흘렸다.
달 조각이 떨어진 것처럼 술독에서 강렬한 빛무리가 뿜어졌다.
“이 도령이 이걸로 덕 많이 봤지.”
정신을 잃었던 노움이 생기 있게 눈을 깜빡였다.
놀랍게도 관자놀이에 가득한 검버섯은 사라지고 주름살은 한층 줄어든 느낌이었다.
설상가상 허옇기만 했던 수염도 새살 돋듯 듬성듬성 검기까지 했다.
시박은 황당한 눈초리로 말했다.
“징그러운 놈. 설마 회춘(回春)해 버리다니…… 킁킁, 이건 또 무슨 냄새야?”
술독 주변에는 한약방에서나 날 법한 약재 냄새가 진동했다.
그것도 평범한 약재가 아닌 천 년 묵은 산삼을 백 일 동안 푹 고았을 때나 맡아볼 향이었다.
“호올, 호올.”
노움은 야릇한 표정으로 얼굴이 얼큰하게 달아올랐다.
필시 술에 취한 듯 보였다.
“이건 뭐 영물도 아니고…… 하긴 덜떨어진 게 오십보백보이긴 하지. 그래, 이제 허리는 아프지 않더냐? 장가가서 걱정은 없을 것 같아?”
노움은 기분 좋은 듯 연신 홀홀거렸다.
마치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어린아이 같았다.
혀를 차던 시박이 슬쩍 손가락으로 술을 찍어 맛을 봤다.
한 번, 두 번, 세 번…….
혓바닥을 희롱하는 알싸한 감칠맛에 시박이 정신을 못 차렸다. 목울대를 넘어갈 땐 뒷골이 찌르르할 정도로 상쾌하기까지 했다.
‘세상에 이런 오묘한 맛이 있었나?’
언제 청승을 떨었냐는 듯 시박의 얼굴에 장난기가 돌았다.
자칫 느끼할 수 있는 떡갈비와 좋은 궁합을 이룰 것 같았다.
‘물론 만드는 과정은 비밀로 해야겠지.’

***

로난드는 아침부터 기괴한 행동을 보이고 있었다.
난생처음 피부 건강에 좋다는 오이 마사지를 해 제자인 네엘을 슬프게 했다.
한 달 만에 목욕이란 의식을 행할 때는 영주마저 바짝 긴장하게 만들었다.
로난드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흐뭇한 것이다. 하지만 불에 탄 수염을 보는 순간, 갑자기 노망난 늙은이처럼 난동을 부리기도 했다.
“로브를 갖고 오너라.”
네엘이 로브란 말에 바짝 긴장했다.
10년 전 자신을 이 시골 영지로 데려온 직후 불편하다고 한 번도 입지 않았던 로브였다.
“스, 스승님?”
“허허. 뭘 그리 놀라는 게야.”
부드러운 음성에 네엘이 떨리는 손으로 옷장에서 로브를 꺼내 들었다. 지팡이마저 찾아 든 걸 보니 불안한 마음이 점점 커졌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안 하던 짓을 한다더니.’
네엘은 자신의 스승을 측은하게 바라봤다.
‘가시기 전에 정령사의 위엄을 보이시려 하는구나.’
로난드는 로브에 향수를 뿌리며 외출 준비를 마쳤다.
다시 한 번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쳐 봤다.
나이가 들어선지 한창때만큼 멋이 안 났지만 그래도 중년, 아니 노년의 미가 느껴졌다.
‘흐흐. 그 아이가 오늘도 꼬치를 팔고 있으려나? 우연을 가장해 하나 사 주면 감동 받을 거야.’
제자로 삼기로 마음먹은 이상 너무 짓궂게 굴 필요는 없다 생각한 로난드였다.
로난드의 발걸음이 시장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