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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5화 시박마차(嘶搏馬車)(3)


시박이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시장에 괴상한 놈이 나타났다.
정령들로 하여금 유부남을 유혹한다.
수도에서 공주를 사랑해 쫓겨난 수석 요리사다까지.
시박이 장사를 시작한 지 불과 두 시간 만에 이룬 성과였다.
“안 먹으면 내가 손해냐 니들이 손해지.”
시박은 떡갈비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간이 제대로인 게 육즙이 뚝뚝 떨어져 나왔다.
“저놈이 소문의 수석 요리사야?”
“유부남을 유혹한다는 운디네도 보이는구만.”
사람들로 시장통이 다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한적했던 스프링필드에 괴소문은 공포보다 호기심을 자극했다.
“환장하긋네. 대체 장사를 하겠단 거야, 말겠단 거야?”
“진짜 미친 척하고 하나 사 먹어 볼까?”
사람들의 망설임에 시박은 피식 웃었다.
무섭다 도망갈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먹으려 들다니. 시박은 목이 칼칼한지 아미가 사 온 술까지 마시기 시작했다.
“크으. 술맛 한번 좋네.”
노움은 한 술 더 떠 시박이 비운 잔에 술까지 따랐다.
그 모습을 본 맥스가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사람들이 다시 모인 것은 기쁜 일이지만 하나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시박이란 놈 가게에만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발발이 놈들은 오늘 똥구멍에 설사가 터졌나. 왜 코빼기도 안 보이고 지랄이야, 지랄이.’
참다못한 헬렌과 벤은 이미 가게를 비우고 발발이를 부르러 간 지 오래였다.
‘그냥 내가 해결할까? 아냐, 괜히 나섰다가 개망신당하면 반장 자리에서 쫓겨날지도 몰라.’
맥스가 시박의 등 뒤에서 주먹을 쥐었다 피기를 반복했다.
그런 맥스의 마음을 대변하듯 아미가 소리쳤다.
“작작 먹어. 바보 시박아!”
“너나 먹지 마라. 똥강아지야.”
어린애와 말다툼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자기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었다. 분위기가 한층 풀어지자 하나둘 포장마차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흐흐. 노움아, 손님 받아라.”
“어떤 새끼가 남의 구역에서 허락도 없이 장사질이야!”
맥스의 얼굴이 밝아졌다.
내심 기다리던 발발이가 나타난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짤막한 비명 소리가 났다.
‘뭐야. 발발이가 아니잖아?’
헬렌과 벤이 데리고 온 사람은 발발이가 아니었다.
칼 솜씨보다 입이 더 더럽기로 유명한 발발이의 오른팔 토니였다.
아미가 토니와 안면이 있던지 얼굴이 사색이 됐다. 먹고 있던 떡갈비까지 떨어트렸다. 운디네들이 놀라 아미 주위로 모여들었다.
“누가 씨불, 아니 씨바야?!”
토니가 왼뺨에 칼자국 난 얼굴을 찡그렸다.
“대체 누구야! 어디서 따라 할 게 없어서 남의 별명을 표절하고 지랄이야, 지랄이! 씨바가 그렇게 탐났더냐?”
끝까지 대답이 없자 결국 토니의 성질이 폭발했다.
화풀이라도 하듯 주인 없이 빵만 진열된 노점상을 발로 차 버렸다.
쿠당탕!
밀가루가 날리고 빵들이 흙더미에 굴렀다. 헬렌이 황당한 눈길로 토니를 바라봤다. 순식간에 자신의 가게가 무너졌으니 오죽하겠는가.
헬렌이 토니의 등짝을 집 나간 남편 뺨 싸대기 때리듯 때렸다.
“크으. 이 여편네가 죽고 싶어 환장했나. 어디서 손찌검이야! 죽고 싶어, 썅?”
“이 정신 나간 놈아, 왜 내 가게를 부수고 난리야!”
“어, 뭐야? 아줌마 가게였수? 진작 말하지, 그럼!”
토니가 눈깔을 부라리며 단검을 꺼냈다. 앞서 망신을 만회라도 하려는 듯 한 손으로 단검 저글링했다.
“뭐야, 여기는 우리한테 신고 안 된 노점상 같은데?”
토니가 시박이의 포장마차를 발견했다.
장사를 하는 인물들을 살펴보니 자신이 아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오호. 왈미, 요 꼬맹이 오랜만이네? 저번엔 겁대가리 없이 물건 팔다가 도망갔다더니만.”
아미가 재빨리 시박의 등 뒤로 숨었다.
토니는 그제야 헬렌과 벤이 말한 인물을 볼 수 있었다.
‘저놈인가 보군. 깜장 보따리라는 씨바 새끼가.’
토니가 팔자걸음으로 시박이에게 걸어갔다.
시박은 묵묵히 가만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에 토니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시박이 자신의 기세에 눌렸다고 생각한 것이다.
“너는 대체 누구세요?”
“…….”
“거리의 법도를 어기셨쎄요? 별명은 왜 표절하셨쎄요? 그렇게 씨바가 되고 싶으셨쎄요?”
토니가 제집 강아지 만지듯 시박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따닥, 딱, 딱.
물론 장단에 맞춰 때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말린 미역처럼 쭈그러진 갓이 토니의 손길을 못 이기고 벗겨졌다.
노움이 그 모습에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화로 속에 있던 살라만다는 꼬리로 자신의 머리를 때리며 기절하기를 수차례 시도했다.
도망가야 한다. 아니, 다른 곳으로 피난가야 한다.
노움과 살라만다의 머릿속은 오만 가지 잡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기어코 갓이 바닥에 떨어졌다.
시박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로난드는 씩씩거리며 네엘을 찾았다.
10년간 늘은 건 정령술이 아닌 줄행랑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후우, 후우. 오늘 밤에 들어오기만 해 봐라, 아주!”
로난드는 습관적으로 수염을 갈무리하려 했다.
대머리가 주제 파악 못하듯 휑한 진실에 얼굴이 붉어졌다.
“발모제라도 사야 되는 건가.”
로난드는 주위를 둘러봤다. 얼마나 정신없이 달려왔던지 자신이 시장통에 있는지도 몰랐다.
퍽, 퍽, 퍼억.
발길을 돌리려던 로난드의 귓가에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싸움이라도 하는 건가?’
자세히 들어 보니 싸움이라기보다 일방적으로 때리는 소리에 가까웠다. 자신이 수비대장으로 있는데 이런 간 큰 짓을 벌이는 것들은 발발이 패거리밖에 없었다.
“에잉. 귀여운 것들 같으니. 심심할 때쯤이면 한 번씩 터트려 주는구나. 흐흐.”
내뱉은 말과 달리 로난드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어렸다.
워낙 시골 촌구석이라 유일한 낙이 발발이 패거리들 말썽밖에 없었다.
“이 몸이 또 한 번 나서 줘야겠군. 맞는 놈이 신전 놈들이라면 모른 척하고.”
로난드는 주책 맡게 어린아이처럼 신나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골목을 한 번 지나니 사람들이 제법 모여 있는 게 보였다.
‘내가 왔는데 누구 하나 인사하지 않다니.’
로난드는 혀를 차며 사람들 사이를 뚫고 지나갔다.
인사는커녕 사람들은 길도 잘 비켜 주지 않았다.
오히려 질서를 어기는 로난드에게 여기저기서 핀잔이 쏟아졌다.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 뭐, 이게 내가 다 치안을 훌륭하게 한 덕분이지. 흐흐.’
로난드는 착각 속에 맨 앞자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역시나 그의 생각대로 싸움이 아닌 일방적인 구타가 이어지는 현장이었다.
‘어라, 저놈은 발발이 놈 오른팔 아닌가? 별명이 씨바인가 하는 놈인데? 쟤가 왜 저기서 맞고 있는 거야?’
토니는 멱살을 잡힌 채 허공에 들려 있었다.
뭐라고 웅얼거리고는 있었는데 얼굴이 마구간 똥지게처럼 망가져 있어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으흑. 시바, 시바…… 선생님이 가지세요.”
“어금니 악물어.”
시박이의 손이 토니의 뺨따귀를 계속해서 때렸다.
로난드는 그 모습에 그만 감탄해 버렸다.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애가 저리 박력 넘치는 모습을 가지고 있다니.
갓이 벗겨짐으로 저승차사 분위기는 사라진 시박이었다.
‘응? 잠깐 이 농도 짙은 친화력은 뭐지?’
로난드는 시박의 뒤에서 고래고래 욕하며 응원하는 아미를 바라봤다.
‘설마 저 어린 소녀한테서 이런 기운이 나오는 건가? 어랏, 저건 운디네인데. 그것도 세 마리나 있어?’
“홀홀.”
노움의 웃음소리에 로난드의 눈이 소 눈망울처럼 커졌다.
‘땅의 정령 노움까지?’
로난드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대륙에서 유일하게 정령들이 자유롭게 출몰하는 바이온 왕국이라지만 이런 경우는 생전 들어 보지도 못했다.
‘혹시 네엘 녀석이 말한 게 저 어린 소녀인가?’
순간 뺨 때리는 소리가 멈췄다.
시박이가 노움에게 손을 내밀었다. 노움이 행여 불똥이 튈까 재빨리 지게 작대기를 건넸다.
‘뭘 하려는 거지?’
지게 작대기를 건네받은 시박은 토니를 들고 있는 상태로 화로에 다가갔다. 지게 작대기가 화로 속에 있던 살라만다를 꺼내 들었다.
“땅, 땅꾼?!”
로난드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시박은 살라만다를 향해 일말의 대꾸도 할 수 없게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넌 지금부터 뱀이 아니라 헝겊이다. 헝겊이 불을 토해 내면 안 되겠지?”
살라만다가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박이는 그대로 토니의 입 속에 살라만다를 처박아 넣었다. 탄력을 잃었던 토니의 얼굴이 볼거리에 걸린 것처럼 항아리 모양이 됐다.
“이제야 때릴 맛이 좀 나겠군.”
토니는 울고 싶어졌다. 이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은 자신의 별명을 내줘도 계속해서 때렸다.
행여 말을 하면 할수록 더욱 세게 때렸다.
‘쟤가 네엘이 말한 여잔가?’
로난드는 나름대로 상황을 정리해 봤다.
자신의 제자가 되고 싶어 땅꾼 흉내를 냈는데 연락이 없다.
안달이 난 나머지 영지로 들어왔는데 불량배인 토니가 사람들을 괴롭혔다. 자신이 나섬과 동시에 명성을 얻어 자연스레 내 귀에 흘러 들어가게 한다.
로난드의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흐흐. 그 녀석 참 기특하구나. 생긴 것도 참 마음에 들고 성격도 저 정도면 남자 못지않아. 정령도 능숙하게 다루니 내가 제자로 삼지 않을 이유가 없어.’
문득 토니의 눈에 수비대장 로난드의 얼굴이 보였다.
토니는 마지막 힘을 짜내 그를 향해 손짓으로 도움을 청해 봤다.
‘흥이다, 요놈아. 안 그래도 네놈이 내 욕하고 다닌다는 소문은 잘 들었다.’
로난드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행여 시박이 자신을 알아볼까 싶어서다. 필시 제자가 되고 싶어 하는 녀석이니 조금 더 골려 주며 이 상황을 즐기려는 속셈이었다.
‘암, 행여 날 보면 내가 쉬운 남자로 보일 수도 있을 거야. 아무리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된다 하지만 남녀 간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니까.’
착각은 때로 행복한 상상을 가져오기도 한다.

***

발발이는 올해 나이 마흔 살을 맞이한 도둑놈이었다.
스프링필드 유일무이한 불량 집단을 이끄는 그는 오랜 꿈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자신의 조직이 당당하게 도둑길드란 명함을 다는 것이다.
불행히도 그 꿈은 다섯 번이나 거절 딱지를 맞은 상태였다.
종이 한 장을 빽빽하게 채운 이유들 중 크게 두 가지가 중점을 이뤘다.
첫째, 벌어들이는 수입이 조직을 유지하기에도 시원찮다.
둘째, 발발이를 포함해 조직의 구성원이 꽤나 볼품없다는 것이었다.
“씨바, 아니 토니가 당했다고?”
발발이는 자신 앞에 있는 남자를 뒤늦게 의식하고 황급히 목소리를 낮췄다.
상황 보고를 하러 온 찰스가 몸을 떨며 대답했다.
“그, 그렇습니다. 두목.”
발발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체 이게 뭔 날벼락인가.
토니는 자신이 직접 외부에서 고용한 실력자였다. 칼 다루는 솜씨와 걸쭉한 입담은 길드에서 내민 이유 하나를 없애기 충분했다.
그런 그가 한낱 장사치한테 당해 버리다니.
“면, 면목 없습니다. 빈센트 님.”
발발이는 술독으로 가린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자신 앞에 있는 남자가 대체 어떤 남자인가.
불과 십 년 전까지만 해도 자신 따위는 그림자도 봐선 안 될 사람이었다.
그 놈의 방랑벽만 없었어도 세대교체는 이루어지지 않을 남자 앞에서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발발이가 흥분하며 몸을 일으켰다.
“당장 애들을 보내 노점상 이 잡것들을 때려 부수겠습니다!”
“아냐, 아냐. 난 어차피 은퇴한 늙은이일 뿐이야. 뭘 그렇게 신경 쓰고 있나?”
빈센트의 늙은이란 발언에 발발이가 마른침을 삼켰다.
‘화가 나신 게 틀림없어. 동안의 암살자가 스스로를 늙은이라 칭하다니. 이십 대라 해도 충분히 믿을 만한 얼굴인데.’
발발이는 빈센트의 입김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자신을 충분히 도둑길드에 추천하고도 남을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도 직감적으로 느꼈다.
여기서 점수를 따야 한다. 눈칫밥으로 이 바닥에서 버텨 온 발발이었다.
“제가 직접 나서겠습니다!”
발발이의 확고한 목소리에 빈센트는 한숨을 쉬었다.
‘진짜 괜찮은데, 이놈아가 대체 왜 이러지?’
발발이가 흥분한 듯 열변을 토했다.
“전 항상 빈센트 님을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
“그 믿기 힘든 일화들을 들으며 어릴 적 도둑이 되고 싶단 꿈을 가졌습니다. 돈이 있음에도 빵을 훔쳤고 집에 도둑이 들으면 박수 치며 좋아했습니다!”
‘무서운 놈이군. 집에 도둑이 들었는데 박수 치고 좋아하다니, 필시 제정신이 아닌 게야.’
“제가 무너진 도둑길드의 명예를 되찾아 오겠습니다!”
은근슬쩍 자신을 도둑길드와 함께 묶는 발발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