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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6화 정령술[精靈酒](3)


점심때가 되었다.
아침에 떡갈비 꼬치를 먹지 못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미와 운디네들이 정신없이 꼬치와 돈을 주고받았다.
“흐음. 이 정도면 잘 숙성이 됐겠지.”
시박이 포장마차 뒤에 설치한 천막으로 들어갔다.
떡갈비만 열 개를 먹어치운 로난드가 그 모습을 유의 깊게 살펴봤다.
‘얼굴도 예쁜 게 요리도 잘하는구나.’
“……호올.”
“방금 천막 안에서 이상한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로난드가 귀 기울이며 천막으로 조심스레 다가갔다.
촤아악.
“홀홀.”
촤악.
분명 땅의 하급 정령 노움의 소리였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기에 이런 소리가 나는 건지, 때마침 시박이 천막을 걷고 나왔다.
“으힉!”
“뭐야.”
“아, 아니. 그러니까 오해하지 말게나. 난 그저 레이디를 돕고 싶은 마음에 일로 왔을 뿐이니까.”
로난드가 얼굴이 붉어져 횡성수설했다.
시박은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이만한 능력자가 왜 자신한테 접근하는 것인가. 생긴 것은 꼭 영락없는 사기꾼 형상이었다.
“네놈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자꾸 얼쩡거리는 거야, 사람 귀찮게. 혹시 발발인가 뭔가 하는 놈이 보내서 온 것이냐?”
시박의 냉랭한 어조에 로난드가 바짝 긴장했다.
‘아뿔싸. 내가 너무 속 보이게 행동했구나. 필시 이 정도 정령술을 다루는 여자라면 자존심도 강할 터인데. 더군다나 이 먼 곳까지 와서 꼬박 밤이슬을 맞혔으니.’
로난드가 시박이 들고 있던 술독을 낚아챘다.
“내가 본의 아니게 네게 실망감을 줬구나. 그래 우선 한창 바쁠 때이니 장사부터 같이하자꾸나. 그러고 나서 오해를 풀기로 하고.”
로난드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람들에게 술독을 가져갔다.
시박은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인간 나이로 제법 찰 만큼 찼으니 노망이 난 것인가.
시박은 자신의 팔뚝에 소름까지 돋게 했으니 필시 제정신은 아닌 듯싶다고 생각했다.
“이것들아, 술이 공짜다. 공짜!”
“뭐, 뭐? 이봐, 늙은…… 인마!”
시박의 뒤늦은 외침은 사람들의 환호에 묻혔다.
정령술[精靈酒]은 순식간에 동이 나기 시작했다. 영지 수비대장인 로난드가 직접 나눠 주니 얼굴마담 효과가 톡톡히 발휘된 것이다.
“오오.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야!”
“허, 허리가 아프지 않다! 10년간 항상 쑤셨던 허리가!”
로난드는 술을 마신 저마다의 반응에 내심 흐뭇했다.
‘이것들이 안 보는 사이에 아부가 늘었군. 내가 집적 술을 나눠 준 것만으로 이런 반응을 보이다니, 기특한 것들이야. 앞으로는 자주 어울려야겠어.’
그때였다.
병이 고쳐졌다, 시력이 좋아졌다는 말들 사이에서 로난드의 심기를 자극하는 발칙한 대사들이 터져 나온 것은.
“운디네의 표정 하나하나 확실하게 보인다!”
“방금 운디네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아!”
정령은 정령사에게 영향을 받지 않으면 보통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다. 정령이 의도적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한에는 말이다.
그런데 세세한 표정을 보고 목소리를 듣다니.
계속해서 듣고 있자니 어떤 이는 말까지 알아들었단다.
“이것들아, 술을 마시려면 곱게 마셔야지 과장이 너무 지나치지 않더…… 잠깐, 영지에 뭔 놈의 친화력을 가진 종자들이 이리 많지?”
로난드는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언뜻 느껴지는 친화력만 해도 스물이 넘었다. 이런 시골 영지에서는 절대, 아니 운명을 건 국가 전쟁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현상이었다.
“알테, 바론, 셈마, 차돌…… 카, 카알 저 늙은이까지?”
다들 미약했지만 설마 마구간 똥지게꾼 카알까지 그럴 줄을 몰랐다. 늙은 나이에 친화력을 갖고 있기란 흔히 말해 정령사였던 과거가 있어야 한다.
‘똥퍼가 첩자였어?!’
카알이 정령술[精靈酒]을 한 잔 더 마셨다.
미약했던 친화력이 한층 짙어졌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술을 마실 때마다 하급 정령들과 계약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친화력이 넘쳐났다.
“포션이 들어간 게 틀림없어!”
“예끼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포션이 뉘 집 개 이름이야? 공짜 술에 포션을 넣게?”
정령술[精靈酒]을 마신 사람들이 갑론을박을 펼쳤다.
이들에게는 차라리 포션보다 공청석유가 들어갔다 해야 진정될 분위기였다.
‘이 술이 원인인가?’
로난드는 조심스레 정령술[精靈酒]을 한 잔 마셨다.
순간 알 수 없는 알싸함이 로난드의 머리를 강타했다.
쨍그랑.
술독이 깨져 바닥에 뒹굴었다.
로난드는 잠시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이내 바닥에 누워 버렸다.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귓가에 들려왔다, 이내 멀어졌다.
‘따스하다…… 부드럽다…… 호올…….’
로난드의 몸속에 작은 변화가 일었다.
한평생 불의 친화력만을 가졌던 그가 땅의 친화력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불은 그 외의 원소를 태워 버린다.
이 공식은 300년간 불의 정령사들을 옳아매었다.
두 개의 원소를 갖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우습게도 로난드는 단지 술 한 잔으로 땅의 친화력을 갖게 되었다.
찰싹, 찰싹.
아미가 눈을 뜨지 않는 로난드를 향해 뺨을 때렸다.
“우씨. 왜 돈도 안 내고 배째요, 할배!”
“…….”
아미의 말에 로난드를 걱정하던 사람들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혀 차는 소리와 손가락질이 한 사람을 향해 쏟아졌다.
“수염 태워 먹었을 때부터 제정신은 아니었…… 히익!”
카알은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로난드가 갑작스레 몸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는 깨어진 술독을 끌어 모아 떠돌이 강아지마냥 냄새를 맡았다.
확실했다.
술독에 배어 있는 향에서는 흙냄새가 났다.
“대, 대체 어찌 이런 일이…….”
문득 시박이 천막에서 술을 가져온 것이 떠올랐다.
이 모든 비밀은 거기에 숨겨져 있을 듯했다. 생각은 곧바로 행동으로 이어졌다. 넋 놓고 있던 시박이 깜짝 놀라 말릴 새도 없었다.
촤아악!
천막이 찢어질 듯 걷어졌다.
로난드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뭐, 뭐야. 이게!”
반신욕이다. 커다란 대야에 노움이 반신욕을 즐기고 있다.
호올거리는 신음성. 로난드의 몸속에 들어찬 땅의 친화력이 소리에 반응하듯 심하게 울렁거렸다.
노움은 로난드와 눈이 마주치자 얼굴을 붉혔다.
‘찰싹’ 소리와 함께 로난드의 얼굴에 술이 튀었다. 입가로 흘러 들어오는 맛은 분명 자신이 마셨던 공짜 술, 아니 친화력이 분명했다.
“이, 이게 대체 뭐…….”
로난드는 말조차 다 잇지 못했다.
시박이 황급히 천막을 치며 들어왔다.
“흠, 흠.”
“…….”
잠시간의 정적이 흘렀다.
두 사람 모두 함부로 말을 꺼내지 못했다.
분명 법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다. 사람들 몸에 해 끼치는 제조 방식도 아니다.
그렇다고 천막을 걷고 사람들에게 공개할 만큼 떳떳한 것도 아닌 건 분명했다.
시박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맛있으면 된 거 아니야?”
“분명 맛이 좋으면 좋은 거긴 하지만…….”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니고 이런 거 갖고 놀라긴.”
“아, 아무렴 이 로난드가 이런 거로 놀…….”
“놀? 왜 말을 하다 말아?”
시박은 태연스레 로난드의 어깨를 쳤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모든 신경을 목구멍에 집중시켜 놨는데 충격을 받아 버리다니. 꾹 다물어졌던 로난드의 입이 벌어졌다.
“우, 우엑……!”
로난드의 구토가 노움에게 쏟아졌다.
노움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스프링필드의 하늘을 향해 울려 퍼졌다.



7화 적과의 동침(1)


아미는 밤바람에 기분이 좋았다.
손으로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나누며 깡충깡충 뛰기도 했다. 간혹 튀어나온 돌부리에 넘어져 돈주머니를 흘려도 개의치 않았다.
“까르륵.”
운디네들도 덩달아 신이 났다.
꼬맹이들이 10골드나 되는 돈을 함부로 대하자 시박은 피식 웃음이 났다. 그러다 주머니가 열려 돈이 사방으로 흩어지자 안색이 굳었다.
한 시간에 걸쳐 찾은 건 결국 9골드였다.
“이 엉덩이에 고뿔 난 계집애!”
“왜 이 시박…… 아코!”
아미는 딱밤을 한 대 쥐어 맞았다.
“돈 없을 때 생각 못한다고, 금땡이 소중하게 못 다루냐!”
시박의 호통에도 아미는 생글생글 웃었다.
“히히. 상관없어. 오빠야가 내 옆에 항상 있을 텐데 무슨 걱정이야.”
“하긴 내가 옆에 있으면 걱정은, 이게 아니잖아!”
어린애만 상대하면 항상 약해지는 시박이었다.
시박은 바지춤을 올리며 끊어진 허리띠 대신 사용한 살라만다를 꽈악 묶었다.
“……안 뜨거워, 오빠?”
“뱀이 생각보다 똑똑해서 뜨겁거나 그러진 않다.”
살라만다는 체형까지 변형시켜 완벽한 허리띠가 되었다.
정 가운데 뱀의 형상은 각대의 위엄까지 풍기는 게 시박의 마음을 꿰차기 충분했다.
“밤하늘 참 재미나구나.”
죽어서도 하늘에 달이 두 개 뜬 광경은 보지 못했다.
두 개의 반달. 마침 품속에 챙긴 떡갈비도 두 개였다. 술은 한 병 있으니 잔을 들이키기 좋은 밤이었다.
“술 마시게?”
시박은 묵묵부답이었다.
이내 조용히 고개를 돌려 큼직한 나무 하나를 바라봤다.
“얼라 데리고 놀기에 좋은 밤이다.”
“노움…… 아까 충격으로 땅속에 들어가 안 보이잖아.”
아까의 충격은 로난드의 구토물이었다.
“모습이 안 보이는 건 그놈이나 저놈이나 똑같다.”
시박의 괴상한 말에 아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우웅…… 그게 무슨 말이야?”
“바람이 기척을 숨긴다 해도 이 김시박의 눈은 못 피하지.”
“물탱아, 어떻게. 우리 오빠 미쳤나 봐, 흑.”
“까르륵…….”
“그치. 제정신 아닌 것 같지?”
“…….”
시박은 끔찍한 표정을 지음으로 아미가 집으로 들어가게 만들었다. 끼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어떤 간나가 감히 내 뒤통수를 노리는 것이냐.”
시박의 말은 대꾸하는 이 하나 없이 허공을 겉돌았다.
생각해 보면 자신을 노릴 자가 없었다.
잘못 느꼈나 싶었지만 역시 한 명의 기운이 미약하게 존재했다.
“기척을 숨기는 게 제법이구나.”
시박은 여유 있게 걸음을 옮겼다.
“연초 냄새가 진한 게 자객으로 실격.”
시박의 걸음에 따라 나뭇잎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히 아미를 노리는 건 아닌 듯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집과 멀어지는 시박의 동선을 택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발레포르, 그 얼간이는 아닌 것 같고.’
자객의 소리가 점점 노골적으로 들려왔다. 그렇다고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의 실력자라면 상대를 일부러 자극시키는 게 틀림없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야. 나처럼 상냥한 저승차사한테 자객이 붙을 리가 없는데. 더불어 이쪽 세계에서는 원한 질 일도 하지 않았고.’
생각이 정리되니 괜스레 억울했다.
그간 자신을 사적으로 찾아온 손님은 염라대왕과 이덕춘이 다다. 둘은 워낙 막역하니 손님이라 칭할 수도 없었다.
천 년 만에 찾아온 이가 음흉한 자객 놈이라니.
시박이 발 앞에 있는 돌멩이를 걷어찼다.
피잉―
돌멩이가 화살마냥 수풀 속으로 날아갔다.
자객이 있을 법한 곳에 찬 것인데 용케 피했는지 자지러지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쯧. 빨리 능력을 파악하던지 해야지. 이거 창피해서.”
시박이는 계속해서 돌멩이를 걷어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