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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8장 엘레나(4)


엘레나가 눈을 꼭 감고 소리쳤다.
콰콰쾅!
데네브의 가슴 한쪽이 폭발하는 듯한 느낌이 왔고,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우선 엘레나를 만나기 이틀 전부터의 기억을 조금씩 더듬기 시작했다. 하지만 취기로 인해 몽롱해져서 생각하기가 힘들었다.
‘왜…… 왜지? 날 사랑할 이유가 없는데? NPC가 사랑을? 아! 엘레나와의 친밀도 상승……. 그게 너무 올라서 사랑까지 갔나 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어떻게 하지? 아니, 그런데 나는 도대체 왜 고백을 하는 게 아니라 받고 사냐? 위치가 바뀌었잖아.’
즉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하는 데네브였다.
‘미안하지만, 나에게는 아영이가 있다고.’
“엘레나, 넌 무슨 종족이지?”
“엘프.”
“그래, 넌 천 년을 사는 빛의 종족 엘프지만, 난 백 년도 못 사는 빛과 어둠에 흔들리는 하찮은 인간. 둘이 사랑을 나누고, 결혼하고, 자식을 기르는 것까지는 좋겠지. 행복할 때니까. 하지만 그 행복은 잠시일 뿐. 시간이 지나면 난 인간이니 늙어서 죽겠지. 하지만 넌 엘프이니 늙지도 않고 그대로 살잖아. 그러면 그때까지의 정으로 넌 나의 죽음에 슬퍼할 거야. 그 슬픔으로 끝나지도 않아. 만약에 자식이 있다면…… 혼혈인 하프 엘프는 하이 엘프와 닮았지만 수명은 인간과 똑같아. 그러면 그 자식도 늙어서 죽겠지. 네가 지켜보는 가운데. 난 여태까지 책에 인간과 엘프에 대한 사랑 이야기를 많이 보았어. 거기서 엘프들의 결말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폐인으로 전락하는 것으로 끝나. 난 네가 그렇게 되는 걸 원하지 않아.”
‘휴우, 뭔가 좀 이상하지만, 판타지 소설책에서 본 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데네브는 정확히 쇄기를 박기 위해 말을 이어 갔다.
“난 아까 말한 대로 다시 여행을 위해서 여기를 떠날 거야. 그 마음은 좋게 간직할게. 우리는 친구로 지내자. 인연이 있으면, 언젠가 다시 만나자고.”
무겁고, 슬프게 표정 연기를 하면서 데네브는 안도의 한숨을 속으로 내쉬었다. 술기운에 점점 졸음이 왔다.
“흐흑.”
엘레나가 훌쩍이며 조금씩 울기 시작했다.
“울지 마. 뭐, 내가 엘프가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핫핫핫! 난 인간이라구. 나중에 좋은 엘프 하나 만나서 꼬셔 봐. 하암, 졸리다. 그래비티 볼. 같이 내려갈래?”
데네브가 엘레나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으……응.”
데네브는 엘레나의 얼굴을 보았다. 눈에 눈물이 조금 고였지만, 뭔가 결심한 듯했다.
‘포기……했나? 다행이군.’
조금 뒤 데네브는 엘레나의 집에서 레오나르도의 배려로 침대에서 잘 수 있었다.
[가수면 모드로 갑니다. 수면 중에 로그아웃하시겠습니까? (예/아니오)]
“아니오.”
데네브는 그렇게 꿈나라로 떠났다.
“흑, 흐흑, 흐윽.”
데네브가 잠든 사이에 엘레나는 거실에서 울고 있었다.
“괜찮아, 그만 뚝. 살다 보면 그럴 수 있는 거야.”
울고 있는 엘레나를 위로하는 레오나르도였다.
“흐윽, 34번째로 차인 거란 말이야.”
“허어…… 그만 해라. 여태까지 차인 건 다른 엘프들이지만 데네브 님은 인간이야, 인간. 엘프와는 절대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구. 데네브 님도 그걸 아시고 거절하신 거야. 생각해 봐. 데네브 님이 너처럼 긴 수명이라면, 예쁜 얼굴에 나올 덴 나오고 들어갈 덴 들어간 몸매와 큰 키를 가진 엘프를 거절하실 리 없잖아.”
“아! 맞다, 오빠! 깜빡했네. 나 그 약 만들어 줘!”
“뭔 약?”
레오나르도의 얼굴이 약간 굳어졌다.
“옛날에 잔이라는 인간 여자를 위해 오빠가 만든 약 말야!”
“그…… 그걸…… 네…… 네가 어떻게?”
“옛날에 몰래 훔쳐봤어.”
“으윽! 하지만 그 약은…….”
“알아. 자신의 수명을 주는 거라고……. 그래도 괜찮아.”
“엘레나!”
“데네브도 아까 엘프가 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고 했었어.”
“데네브 님이 어떻게 나의 비약을 알고 있는 거지?”
“바보! 데네브가 그걸 어떻게 알아! 이 약에 대해서 아는 엘프는 우리 둘뿐이라구.”
“그, 그건 둘째치고……. 아무튼 네 수명이……. 오빠로서 부탁한다. 그것만은…….”
“시끄러워! 나 데네브 아니면 못 살아! 난 괜찮으니까 얼른 만들어!”
몇 시간이 지난 후 데네브가 자는 방에 엘레나가 은잔을 들고 들어왔다. 은잔 안에는 노란색의 빛을 뿜는 액체가 들어 있었다.
“데네브……. 일어나 봐.”
엘레나가 데네브를 흔들어 깨웠다.
“우웅…… 왜에…….”
“자기 전에 이것 좀 마셔. 갈증나지 않아? 아, 눈 뜨지 않아도 돼.”
“아, 고마워.”
데네브는 눈도 뜨지 않고, 그 잔에 있는 노란색의 액체를 마셨다.
꿀꺽, 꿀꺽.
“아…… 시원하네? 고마워, 엘레나. 잘 자, 좋은 꿈꿔.”
“응, 너도.”
데네브는 다시 잠들었다. 그 뒤 엘레나는 가만히 데네브를 보았다.
화악!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데네브의 몸에서 밝은 연두색의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은 점점 커지더니 한순간에 도로 데네브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이제 넌 내 거야.”
엘레나는 입이 찢어질 듯이 웃으면서 데네브가 자고 있는 침대에 같이 누웠다.

짹, 짹.
아침이 되었다. 햇살이 눈부신지 데네브는 눈을 찡그리며 잠에서 깼다.
[가수면 모드를 해제합니다.]
“웅…… 으윽!”
[숙취 상태입니다. 해장하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머리가 아프고 속이 쓰려……. 으윽! 역시 술을 마시면 안 됐는데…….’
부스럭!
“어라?”
데네브는 침대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오른팔을 누르는 어떤 물체 때문에 일어나지 못했다.
“뭐지?”
화악!
데네브가 이불을 걷었다.
“으힉!”
엘레나가…… 면티와 팬티 차림으로 데네브의 팔을 베게 삼아서 곤히 자고 있었다.
‘뭐…… 뭐야? 설마 내가…… 그때 물 마실 때 술기운으로 엘레나를? 설마…… 어쩌지? 나한테는 아영이가 있는데…… 나중에 엘레나가 볼록해진 배를 내밀고 ‘책임져!’라고 하고 아영이는 ‘저 엘프 누구야? 설마 김현! 우리 헤어져!’라고 하면 어쩌지? 으아아아악! 이런 젠장! 뭐가 어떻게 된 거야?’
데네브는 머리를 잡아 뜯으면서 소리 없는 절규를 했다.
“으…… 추워. 응? 일어났어, 데네브?”
엘레나가 일어났다.
“으악! 잘못했어! 내가 술기운에 무슨 짓을 한 거지?”
데네브는 얼른 넙죽 엎드려서 엘레나에게 용서를 빌었다.
“후훗! 우리 그렇고 그런 짓 안 했어. 내가 그냥 옆에서 잔 건데?”
“그…… 그럼 그 옷차림은?”
“그럼 그냥 옷을 입고 자냐? 이불 더러워지게?”
“아…….”
‘다행이다. 십년감수했네. 그런데 쟨 왜 내 옆에서 잔 거지? 오해받을 짓을 하고.’
데네브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럼 나 좀 씻자.”
“어, 크크큭.”
“……?”
이상하게 웃는 엘레나를 뒤로하고, 데네브는 화장실로 들어가서 세수를 하기 위해 대야에 물을 담았다.
“어?”
데네브는 대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귀를 만져 보았다. 7cm 정도 되는 기다란 귀가 대야에 비쳤고, 그것이 손에 만져지기도 했다.
“이, 이게 뭐야?!”
“어때? 멋있지?”
얼어붙은 데네브에게 엘레나가 깜찍하게 혀끝을 살짝 내밀며 애교를 부렸다.
“엘레나?”
데네브에게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왜?”
엘레나가 데네브의 살기에 뒷걸음질 쳤다.
“설명을 해 주면 안 잡아먹지!”
“꺄악! 왜 그래? 내가 뭘 잘못했다구!”
순간적으로 증폭된 데네브의 살기에 엘레나는 도망갔고 데네브가 쫓아가면서 둘은 좁은 집 안에서 레오나르도가 말릴 때까지 추격전을 벌였다.



9장 엘프가 되다(1)


“……해서 이렇게 된 것이랍니다.”
데네브는 레오나르도의 설명에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얼굴에 핏기가 가신 채 입을 딱 벌리고 굳어 버렸다.
그런 데네브의 마음을 몰라주고 엘레나는 팔을 꼭 붙잡아 기대면서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수명을 걸고 날 엘프로 만드는 약을 먹였다? 그런……. 그건 자신의 목숨을 거는 것과 똑같잖아. 사랑의 힘이란……. 너무 무섭군. 설마, 그때 그냥 해 본 말 때문에?’
말이 씨가 된다는 교훈을 느낀 데네브였다.
“데네브 님께 먹인 약은 과거에 제가 사랑하던 인간 여자인 잔을 위해 개발한 약이랍니다. 하지만 잔은 엘프가 되는 걸 포기했죠. 집에 노모가 계셨거든요. 덕분에 제 수명만 날아가 버렸어요. 에휴……. 엘레나와 데네브 님 둘은 이제 제대로 산다면,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죽을 겁니다. 수명을 똑같이 나눴으니까요.”
“그럼 엘레나가 내 옆에서 잔 것은?”
“아, 그거요? 몸은 엘프가 되지만 귀는 그대로거든요. 그래서 약에다 수명을 넣은 엘프가 약을 먹은 자에게 ‘엘프가 되라’라고 한 시간 동안 속삭여야 귀가 자라나거든요.”
“…….”
‘그렇게 고생하면서 날 가지고 싶었던 거야, 엘레나? 하지만 나에게는…….’
[퀘스트 ‘엘프의 부탁’을 완료하셨습니다.
보상:엘프의 영원한 사랑]
[경험치를 얻으셨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엘프화로 인해 민첩이 200 올라갑니다.]
[스킬 ‘요정의 눈’을 습득하셨습니다.]
[정령 친화력이 30 올라갑니다.]
[정령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이게 퀘스트 보상이었어? 어라? 엘프가 되는 건 보상에 없네? 어떻게 된 거지?’
사실은 카오스 사의 직원 중 한 명이 노총각이라는 아픔 때문에 위안으로 만든 퀘스트였다. 유저를 사랑하는 엘프는 그 유저에게 사랑을 받기 위해 무엇이든지 하게 설정했다. 때문에 엘레나는 ‘엘프가 되면 달라지겠지만’이라고 말한 데네브에게 사랑 받기 위해서 자신의 수명을 걸고 데네브를 엘프로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데네브는 모르고 있었다.
‘엘프가 된 건 재미있겠는데……. 그럼 아영이는? 엘레나도 그렇고……. 어떻게 하지?’
“저기요.”
“예, 말씀하세요. 데네브 님.”
“전, 애인이 있습니다만?”
그러나 레오나르도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고, 엘레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도로 웃으면서 말했다.
“뭐, 괜찮아. 내가 첩으로 들어갈게. 한 7, 80년만 지나면, 그때 날 정부인으로 해 줘. 그때 즈음이면 그 애인은 늙어 죽어 있을 테니까.”
“하아…… 그게 그렇게 간단한 겁니까?”
‘우찌! 화가 나네.’
“네, 괜찮아요. 우리 엘프들은 일부다처제를 인정하거든요.”
‘뭐, 이런……. 아영이한테 뭐라고 말하지?’

“그렇게 해서 나 엘프가 돼 버렸어…….”
현이는 게임을 끝낸 후 아영에게 전화해서 오늘 있었던 일을 말했다.
―…….
‘역시 화났구나.’
―엘프가 됐다고?
아영의 약간 흥분한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들렸다.
“어……. 응.”
―굉장해! 보고 싶어! 언제 한번 게임에서 만나자. 아니지, 내일 만나자.